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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서미경 지음 | 북스토리
홍어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서미경 지음

북스토리 / 2010년 12월 / 280쪽 / 13,800원



동방의 마르코 폴로를 찾아서


문순득은 우이(牛耳)도의 홍어장수였는데, 그를 세계의 바다로 이끈 것은 표류였다. 문순득은 1801년 12월 흑산 홍어를 싣고 영산포로 가던 중 돌풍을 만나 우리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긴 거리의 표류를 하게 된다. 흑산 홍어는 당시에도 식탁의 명물이었는데, 흑산도 사람들은 직접 홍어를 잡아서 팔기도 했지만, 상고선을 부리면서 시장에 실어다 팔아주는 중개상인에게 홍어를 맡기기도 했다. 우이도에 살던 문순득은 그런 중개상인 중 하나였다.

현재 120여 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작은 섬 우이도는 서남해의 다도해에서 먼 바다로 나가는 첫 번째 섬이다. 그래서 옛날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동아시아 해상 교통이 활발할 때 우이도나 흑산도 같은 섬들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 이르러 흑산도는 유배의 땅으로 변했는데, 문순득의 표류 여정을 담은 「표해시말」은 문순득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당시 흑산도로 유배 와 있던 실학자 손암 정약전의 기록이다.

정약전은 어떻게 흑산도로 왔으며, 어떻게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을까? 영조 말년 이후 정계는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시파(時派)와 반대하는 벽파(僻派)로 양분되었다. 시파는 정조의 정책을 따라 천주교와 남인에 비교적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1800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벽파가 정권을 잡았고, 1801년 신유사옥으로 시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벌어져 천주교와 남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801년 2월, 손암의 형제 중 셋째인 약종과 매형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됐고, 약전과 약용도 각각 전라도 신지도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약전 형제의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형제는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다행히 극형은 면했지만, 돌아올 기약 없는 더 멀고 험한 유배지(형은 흑산도, 동생은 강진)로 다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1801년 11월, 아우와 헤어진 정약전은 나주 나경포에서 흑산도로 가는 배를 탔다. 정약전이 맨 처음 닿은 곳은 소흑산도, 즉 우이도다. 당시 본도인 흑산도는 대흑산이라 했고, 문순득이 살던 우이도는 소흑산이라 했는데, 약전은 곧바로 흑산도까지 가지 못하고 우선 우이도에 거처를 정했다. 한승원은 소설 『흑산도 하늘길』에서 정약전을 마중 나온 작은 어선의 선주를 문순득으로 추정했다. 흔히 외딴섬에 유배를 간 사람들은 그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고단한 유배 생활을 버텨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우이도에서는 문 씨 집안이 바로 그런 도움을 준 것 같다.

어느 날 문순득은 정약전을 집 근처에 모시고 태사도로 홍어를 사러 갔고, 홍어를 사서 태사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난다. 그리고 오랜 표류 끝에 고향에 돌아와 그 놀랍고 신기한 표류 경험담을 정약전에게 들려줌으로서 역사상 최장 기간, 최장 거리의 표류기를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탄생시킨 다. 문순득이 아무리 특별한 표류를 하고 돌아왔다 해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아준 정약전 같은 실학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문순득의 표류는 한낱 어상의 모험담 정도로 잊혀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200여 년 전 우이도로 여행을 떠나, 조선시대 최대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정약전 곁에 앉아 문순득의 모험담을 들어보자.

최장 기간, 최장 거리의 표류가 시작되다 / 살았다, 뭍이 보인다! / 조선을 닮은 나라 류큐<1801년 12월> 우이도에서 배에 짐을 싣고 태사도로 들어갔다. 홍어를 사기 위해서다. 우리 뱃사람들은 홍어를 무럼이라고도 부른다. 배는 상고선으로 쌀 100섬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내가 이 배의 선주다. 태사도는 대흑산도 남쪽으로 수백 리에 있는 섬인데, 이 부근 바다에서 홍어가 많이 잡힌다. 배에는 나의 작은아버지 문호겸과 마을 사람인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그리고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은 사내아이인 김옥문, 이렇게 6명이 함께 탔다.

<1802년 1월 18일> 해가 바뀌었다. 홍어를 사서 닻줄을 풀고 다시 소흑산을 향하는데, 변도쯤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서북쪽에서 일어난 큰바람이 몰아쳐 왔다. 배가 바람에 몰리면서 남쪽으로 떠밀렸다. 진도의 서쪽에 있는 조도를 바라보고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런데 배가 계속 떠밀려서 갈 수가 없었다. 앞을 보니 망망대해. 수평선에는 점 하나 없었다. 그렇게 날은 캄캄해지는데 큰 바람은 여전히 줄지 않고 거세게 불었다. 오경(새벽 3~5시)쯤이었을까, 바람을 못 이긴 채 키 자루가 꺾였다. 돛은 펼 수가 없어서 돛대를 고물에 묶어서 키로 쓰고, 배가 가는 대로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1802년 1월 19일> 날이 밝았다. 동남쪽에 큰 산이 보였다. 제주라고 했다. 눈앞에 섬은 보이는데,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바람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다시 망망대해로 떠밀렸다.

<1802년 1월 29일 유구국 도착> 날이 밝아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동남쪽으로 큰 섬이 보였다.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쯤이었다. 배를 멈추고 닻을 내리니 갑자기 사내 예닐곱 명이 배를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곧 우리를 보더니 먼저 물을 대접하고 이어서 죽을 주었다. 사흘을 먹지 못했으니 그 기쁨을 알 만하리라. 이곳이 어디쯤인지 물으니 유구국 대도(大島)라 했다.

문순득이 표류 열하루 만에 도착한 땅 류큐는 지금의 일본 오키나와 현이다. 류큐국은 한때는 지금처럼 일본에 속한 지역이 아니라, 동아시아 바다를 누비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하던 독립 왕국이었다. 그런데 1588년 일본의 패권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쓰마 번주 시마즈를 통해 류큐에 복속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8년에 죽었고, 류큐에는 평화가 찾아오는가 싶었다. 그러나 사쓰마 번주 시마즈가 가만있지 않았다. 도쿠가와막부는 류큐를 시마즈의 영토로 허용했다. 그러나 류큐국 쇼씨 왕조는 그대로 두었다. 이는 류큐국 왕실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왕조까지 없애버린다면 일본이 류큐를 침략했다는 사실이 명에 알려지고, 그러면 중국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류큐를 점령한 시마즈는 중국의 책봉사가 오면, 류큐국 수도 나하에 파견한 사쓰마 번의 모든 관리를 촌락으로 보내고, 나하 시가지에서 일체의 일본적인 색채와 자취를 감추게 했다.

류큐 사람들은 늘 조선에 친절했다. 문순득 일행처럼 류큐국에 표류해서 죽을 대접받은 조선 사람들의 기록이 또 있다. 1477년, 제주 사람 김비의 등 3명은 진상할 귤을 싣고 가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동풍에 떠밀렸고, 열나흘 만에 류큐제도의 맨 서쪽에 떠 있는 섬인 요나구니에 표착했다. 요나구니 사람들을 쌀죽과 마늘 뿌리를 가져와 먹이더니, 그날 저녁부터 흰쌀밥, 탁주, 말린 생선을 상에 올렸다. 문순득 일행도 섬 사람들이 쑤어다 준 죽을 먹고 나니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고향에 다시 돌아갈 방도는 있는지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

<1802년 2월 2일> 배로 50여 리를 가서 육지에 닿았다. 어디냐 물으니 양관촌(지금의 요로섬)이라 했다. 우리 일행이 배에서 내리니 움막 한 채를 엮어서는 앞으로 이곳에서 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움막 밖으로 또 움막이 있어서 8명이 지켰다. / <1802년 3월 20일> 배를 타고 섬을 따라 100여 리를 가서 우금촌(우케시마 섬) 앞에 닿았다. / <1802년 3월 29일> 배로 도쿠노 섬을 지나고 다음 날 양영부(오키노에라부 섬)를 지나 요론 섬에 이르러, 바람에 막혀 4일을 머물렀다.

표류민을 류큐에서 조선으로 송환하는 데는 무려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만큼 경비도 많이 들었다. 류큐는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표류민을 송환해왔고, 그러면 조선은 그에 상응하는 답례품을 주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조선 표류민을 송환해주고 돌아가는 류큐의 배는 왜구들의 노략질 대상이었다. 이후 조선 류큐 간 표류민의 직접 송환은 중국을 경유하는 간접 송환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609년, 류큐가 사쓰마 번에 복속된 이후 류큐에 표류한 사람은 모두 막부의 직할 도시인 규슈의 나가사키로 보내졌다. 조선인도 나가사키로 보내진 다음 쓰시마 번에 넘겨져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런 송환 경로는 1697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698년부터는 송환 절차가 다시 중국을 경유하는 것으로 달라진다.

<1802년 4월 4일> 백촌에 이르니 역인(驛人)이 와서 사정을 묻는데 우리나라 말을 대략 할 줄 알았다. 움막 한 채를 엮어 거처하는데, 사람마다 매일 쌀 한 되 다섯 홉과 채소 여러 그릇을 주고 하루걸러 돼지고기가 제공되었다. 또 여름옷을 내려주고 병이 들면 의원이 와서 진찰하고 약을 주었다.

문순득 일행은 그렇게 백촌(白村, 현재 나하 시의 토마리)에서 6개월을 머물렀고, 그 후에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 표류민 신분으로 언제 고향에 돌아갈지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문순득은 남다른 적응력으로 류큐 주민들과 친구가 되었다. 류큐 왕명은 표류민을 따로 격리하라 하고 주민들과 접촉할 수 없게 감시하라 했지만, 이방인들과 낯가림 없이 지내온 것이 류큐인들의 오랜 습성이라 조선에서 온 표류민들에 대한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나 보다. 그래서 류큐인들은 문순득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부터 「표해시말」의 내용을 토대로 정약전과 문순득의 대화를 상상해보자.

정약전이 물었다. "그 유구국 사람들의 풍속은 어떻던가?" "유구 사람들은 어른이나 가끔은 나이가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도 일어나지 않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복(俯伏)하며, 앉을 때는 반드시 꿇어앉습니다." "음, 우리 조선과는 풍습이 많이 다르군. 그 사람들의 용모는 어떻던가?" "남정네는 코밑수염을 자르고 턱수염은 놔둡니다. 두발을 살펴봤더니, 정수리는 깎고 바깥쪽은 놔뒀습니다. 밀기름으로 붙여서 상투를 만들고 위에는 굽은 고리를 만들며, 아래로는 남은 머리카락을 감아놓았습니다. 용모나 풍습은 많이 달랐지만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나가는 것은 우리 조선과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묘 쓰는 풍습은 우리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사람들은 족장이라는 걸 했습니다." "음, 족장이라, 그러니까 가족묘를 쓴다는 얘기인가?" "예, 그렇습니다. 시신마다 각기 돌 상자를 땅속에 만들고 위를 석회로 봉합니다. 그리고 옆에 석문이 있어 장사 지낼 때 관을 상자에 넣고 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류큐 사람들의 독특한 문신 얘기가 이어진다. "천인은 어깨에 반드시 문신이 있으며 직업에 따라 다릅니다. 어부는 세 줄의 철사 모양이고, 부인은 손등에 있습니다." 문순득은 류큐인의 옷과 장신구 등도 상세하게 관찰했다. "유구에는 바지는 없고 긴 저고리만 입는 것 같습니다. 길이는 발까지 이르고 소매는 팔꿈치를 움직일 수 있을 정도며, 다닐 때는 옷자락을 걷습니다. 남녀의 옷은 서로 다르게 만들지 않습니다. 베로 하체를 싸고 버선은 귀인이라야 신을 수 있는데, 홑베로 만들어 코를 두 갈레로 하여 한쪽은 엄지발가락을 감추고 다른 한쪽은 네 발가락을 감춥니다. 신은 모두 짚신인데 다닐 때는 엄지발가락을 신 들메 사이에 끼웁니다." 류큐는 남쪽 지방이라 모기가 극성인데, 문순득은 이 점도 놓치지 않았다. "유구인들은 종이로 궤짝 같은 장막을 만들어 잠잘 때 몸을 덮곤 하는데, 이렇게 하면 모기를 막을 수 있고 바깥의 습기도 피할 수 있습니다."

「표해시말」을 일본어로 옮긴 히로시마대 다와타 교수는 문순득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굉장히 재미있다고 할까요, 매력적인 사람이죠. 글도 모르는 사람이 표류해서 본 여러 가지를 기억해서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만큼 기억력이나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민들과 격리된 표류민 신분으로 류큐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그렇게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이야기한 류큐 사람들의 생활이나 의복, 음식에 대한 기록들은 민속학적으로도 의미가 큽니다. 그리고 류큐의 장례식은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끼리만 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무덤도 보고, 그 속까지도 봤다는 것은 실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오키나와의 전통 장례식 기록으로는 문순득의「표해시말」이 가장 오래된 자료일 것입니다."

또다시 표류하다 - 아무도 모르는 나라 / 고달픈, 그러나 신기한 여송살이

<1802년 10월 7일> 배를 띄워 대국을 향해 배 세 척이 동시에 출발했다. 두 척에는 유구에서 대국으로 가는 관원을 태우고, 한 척에는 우리나라 사람 6인과 복건성 천진부(텐진) 동안현 출신으로 바람을 만나 조난한 32인, 유구인 60인을 태웠다. 배는 벽촌(나하)에서 400리 거리인 섬에 이르러 10일을 머물렀다. 유구인은 이곳에 오면 산에 기도하며 오래 머물기 때문에 배가 떠나지 못했다.

류큐는 조선인 표류민을 대개 조공선 편에 태워서 송환했다. '류큐국 중산왕 조공선'이라고 쓴 깃발을 내걸고 호송선의 호위를 받으면서 푸젠 성을 향해 나아가는 웅장한 류큐 배. 아마 조선의 표류민들은 그렇게 큰 배는 처음 타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큰 배를 탔으니 이것저것 두루 살피면서 실컷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을 텐데, 류큐인들은 그들을 창고에 가두어버렸다. 문순득은 그런 와중에도 류큐 조공선의 구조와 형태를 꼼꼼하게 관찰했다. 섬에서 나서 뱃사람으로 잔뼈가 굵었고, 평생 배를 타고 바닷길을 누비면서 장사를 생업으로 삼아야 하는 처지에서 늘 안타까운 것이 조선의 낡고 불편한 배였다. 문순득은 감시의 눈길 속에서도 돛과 닻과 가롱(배의 양쪽 외판을 지탱하기 위해 가로로 끼우는 널빤지)을 놓는 법과 취사실 위치 등을 다음처럼 소홀함 없이 관찰했다.

유구의 작은 배는 뱃머리는 극히 좁고 고물은 허리와 같은 넓이다. 그리고 선체의 위와 좌우의 바깥에 각판을 붙여 물에 뜨기 쉽게 했다. 또 각판 위에 뱃전을 붙이고 허리에 돛대 하나를 세워, 돛이 무명베로 활터에 세운 과녁판처럼 처진다. 키는 고물에 뱃바닥을 향해 넣고 가로로 큰 나무를 키의 기둥에 꽂는다. 키의 길이는 배의 허리에 이르고 키잡이는 배의 중간에 뒤를 향하고 앉아 키를 잡는데, 가는 것이 매우 경쾌하다. 가롱은 모두 두꺼운 널빤지로 벽을 만들고 뱃전 바깥에서 쇠못으로 고정한다. 가운데는 뜸집을 만든다. 옥상에도 뜸집을 만들고 뱃머리에 큰 다리를 만들어 다리 위에 깃발을 꽂아 지휘하면 키잡이가 그것을 보고 키를 잡는다. 키를 잡는 망루는 2층으로 지어 아래는 6명이 키를 잡고 있고, 위에는 2명이 앉아 나침반을 확인한다. 돛대 2개를 세우는데 가롱에 설치하여 돛대가 배 밑바닥에 붙지 않게 한다. 돛의 좌우에 또 베돛이 있어 이를 돕는다.

그런데 문순득은 푸젠 성에 가지 못했다. 나하에서 출발한 것이 10월 7일이고, 그 열흘 뒤 한 섬에 잠깐 정박했다가 다시 배를 움직인 것이 10월 17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쪽에서 일어난 바람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배는 그렇게 꼬박 10여 일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흘러 다녔다. 이후 「표해시말」에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02년 11월 1일> 여송 서남마의 지방에 도착해 닻을 내렸다. 유구인, 중국인 15명이 물을 길으러 육지에 올라가서 다음 날 아침 돌아왔는데, 6명이 없어져서 물으니 본국인에게 잡혀갔다고 했다. 여송의 동북에는 다섯 섬이 있어 배로 13일을 가니 보였는데, 풍속을 알지 못해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 <1802년 11월 12일> 배를 타고 남쪽으로 하루를 가서 한 곳에 닿았는데, 그 지명은 알지 못한다. 5일을 머무르고 물을 긷고 옷을 빨았다. 하루를 가서 일로미(지금 필리핀 루손 섬의 북쪽 지역)에 닿았다. 일로미에는 복건 사람 수십 호가 살고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간 복건성 출신 표류민들은 유구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왔다. 그런데 일로미에 도착하자 그들은 일로미에 사는 복건인들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집을 빌려 따로 살기도 하고 돈을 빌려서 먹을 것을 마음대로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불러다 같이 살았다. 이것은 모두 유구인에게 빚을 떠넘기려는 계책인 듯싶었다. 복건인들은 유구인들에게 여송이 난민을 후대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여송의 복건인들에게 빌려다 쓰는 비용을 나중에 여송이 다 갚아줄 거라 했다. 유구인들은 복건인들의 말을 처음에는 믿는 듯했으나 나중에 그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복건인들을 막으려 했지만 복건인들이 여송의 도움을 받고 있어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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