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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평전

김영진 지음 | 미다스북스
백석 평전

김영진 지음

미다스북스 / 2011년 1월 / 413쪽 / 16,500원



1부. 백석 평전을 위한 서정적 서설



내 그림과 백석 시詩


백석 시를 처음 본 순간: 내가 백석 시인의 시를 처음 본 것은 2005년 2월이다. 백석 시를 보자마자 마치 자석에 달라붙은 철가루처럼 끌렸다. 문학을 모르던 내가 아름다운 백석 시를 만나면서 시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답고 고아한 시라서 내 지적 수준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석 시는 너무 단단해서 온전히 이해하려면 풍부한 감성과 냉정한 이성이 함께해야 했다. 그래서 나의 이성과 감성을 총동원해서 시 안의 숨겨진 의미를 알고자 했다. 시를 완전히 이해하고 흡수해야만 그림으로 뽑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알던 낭만적인 시들과는 문체와 단어가 확연히 달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백석 시를 보면서 화풍이 변하다: 백석의 시를 보면서 나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가 없어졌다. 백석의 시는 추상과 구상의 장르에 특별히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척박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늘 새로운 감정을 샘솟게 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백석의 시에 빠져들었다. 한국말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를 처음 알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한국말을 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젖먹이가 엄마의 젖을 빨듯이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마셨다. 그때부터 작품세계는 완전히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예술을 통해 한울과 땅과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격이 없는 동물이나 사물에게도 인격을 부여하면서 그 존재들을 친구로까지 생각한 백석 시인의 <모닥불>과 <야우소회>, <선우사>와 같은 시들은 새로운 작품세계로의 길을 열어 주었다.

화가적 감성으로 느껴지는 백석 시

비유와 예藝가 가득한 시: 화가들은 천성적으로 철학이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림 안에 있는 감정과 철학을 설명할 때면 화가들은 너무나 마음이 즐거워진다. 화가적 감성과 상상력으로 백석의 시를 보면 그저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의 감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 금방 말하기 어려운 깊은 철학과 거대한 생각 속으로 점점 더 깊게 파고들어 가게 된다. 백석의 시 가운데 <비>를 보면 아주 짧다. 이 짧은 시는 비유와 예로 가득 차 있다. 왜 그런지를 시의 제목인 '비'에서 알려주는데 비가 와서 아카시아 꽃잎이 떨어져서 두레방석이 된 것이다. 이것은 비온 뒤 풍경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당대 식민지 치하를 상징하는 것으로 흰 두레방석에는 백의민족이 흰옷을 입고 독립을 앞당길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백석의 시 - '이야기'와 '사연'이 있는 시: 백석 시를 보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르는 건 시詩 안에 사연과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시에는 사상의 단면만이 묘사되어 있어서 제각기 다양한 해석을 가할 수 있는데 백석의 시 안에는 사연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결말까지 나와 있다. 백석의 대표적인 시 가운데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보자. 우선 초반 부분에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이야기의 결말로 삼고 있다. 이렇듯 백석의 시는 사람의 마음을 시 안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백석 시가 나에게 미친 영향

소설가家와 시인人의 차이를 알면서: 소설가는 남의 삶을 글로 쓰지만 시인은 자신의 삶을 주로 시에 담는다. 소설가를 소설인小說人으로 부르지 않고 소설가家라고 하는 것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자신과 관련 없는 사실들이나 상황을 각색하기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의 삶의 이야기를 시에 닮기 때문에 시인詩人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백석의 시를 읽으면서 난 화가畵家가 아닌 화인畵人이 되고 싶어졌다. 가家는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인人은 사람 본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시인이 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나를 낮추고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느껴서 그 감동을 그리는 화가, 화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백석의 고귀한 시와 그의 삶을 대하면 더욱 그렇다.

왜 백석 시를 읽으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일까?: 백석의 시 <모닥불>에 보면 모두 모닥불에 모여 불을 쪼이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여우난곬족>을 보면 명절날 아이들과 엄매들은 이야기하고 노는데 온통 정신을 빼놓는 걸 보게 된다. <통영2>에는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이재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라는 표현처럼 음식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외에도 계속 셀 수 없이 삶 속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들을 백석 시 안에서 찾아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행복의 비법이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다. 백석의 시에서 맛있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거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 노는 모습이 나오는 것은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게 있지 말고 같이 뛰어 놀아야 한다는 의미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행복을 보면서 우리는 행복으로 가는 비법을 이해하게 된다.

2부. 화가가 쓴 시인 백석 평전 - 외롭고 높고 쓸쓸한



조선 최고의 지성인, 모던보이 백석


백석: 시인 백석은 1930년대와 40년대를 상징하는 지성인이자 문인, 시인이었고 모던보이로 불릴 정도로 당대의 미남이기도 하였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으로 수원 백씨다. 그는 1912년 7월 1일에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백시박白時璞, 모친은 이봉우李鳳宇여사이다. 백석이 태어난 마을은 여우난곬로 불리기도 했는데, 여우가 캥캥 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백석은 오산소학교와 오산고보를 다니면서 문학과 영어에 빠져들었다. 이때 교장인 고당 조만식의 영향으로 백석은 한국말의 고아한 격을 통해 한민족의 문학과 언어의 위대함을 승화하게 된다.

1930년 열아홉 살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그 母와 아들>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계초 방응모의 장학금으로 일본 동경의 명문대학인 청산학원에 들어가서 학교의 선교사들과 교류를 가지면서 외국어의 깊은 의미를 한국어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고 시집 『사슴』을 통해 민족의 정기와 민족이 가진 슬픔과 애환을 시로 담아낸 후에 만주와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북방 정서와 민족의 정체성을 불어넣는 시들을 창작하여 자신의 시에 다양한 감정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다양한 삶을 통해 삶 속에 들어있는 사랑과 고통, 눈물을 시로서 승화시키면서 시인들의 시인, 화가들의 시인, 민족의 시인이 되었다.

일제 식민지의 통치 아래 있었던 시기에 백석의 시는 한민족의 언어와 정신을 일깨워 주었으며, 우리말의 깊이와 사랑의 의미, 가족과 고향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 삶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감동적으로 보는 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 속에서도 백석 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으며, 김환기, 장욱진의 그림 속에 백석 시가 드리운 격조 높은 한국의 멋스러운 흔적을 볼 수 있다. 백석의 시는 한국 전반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는 한국 정체성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백석 외모에 담긴 상징

당시 사람들이 기억하는 백석의 외모: 일제 치하 식민지 시대 당시 조선인으로서 시인 백석은 당대를 대표하는 미남이었고 멋쟁이였다. 게다가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의 외모에만 집착해서 백석을 바라보기도 하였고, 그의 표면적인 멋스러움에 가려 시인의 깊은 속마음의 뜻이 가려지기도 하였다. 왜 백석은 일반 양복 값보다 서너 배나 비싼 양복을 입으면서 신문사나 교사 월급의 상당 부분을 외모를 꾸미는 데 지출했을까?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백석이 바람 끼와 겉멋에 들린 사람이라고 오해한다. 나아가 1930년대 바람 피는 사람의 대명사의 의미로 백석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백석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백석의 올백 헤어스타일은 보통사람이 하기에는 부담스런 머리스타일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안석영은 1937년 6월 《백광白光》에서 백석의 프로필을 통해 백석이 가진 풍모에 대해 말해 준다. "문단에서 제일 젊은 시인이요, 또한 미남이다. 머리와 체격과 걸음걸이와 용모도 이국풍정을 느끼게 하여 정열이 대단하고 남구적인 정조를 띤 이로 그 외모와는 달리 그의 시는 조선적이며 고전적인 데가 있다."시인 백석은 왜 그렇게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개인적인 멋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의 정체성과 위상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친구들은 이야기하곤 했다.

백석 이름의 변천에 담긴 사연

필명을 백석白石, 백석白奭, 백정白汀으로 사용한 이유: 시인 백석은 백석白石, 백석白奭, 백정白汀으로 필명을 사용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세 개의 필명이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석은 한학과 한글학, 은어에 능숙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 백석의 부친과 계초 방응모 선생, 그리고 고당 조만식 선생의 교습으로 인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이는데, 고당 조만식 선생은 그런 백석의 재능을 높이 보았다. 백석은 청소년기부터 한 단어로 백 개의 의미를 지니게 하는 상징성을 지니는 글을 쓰기도 하였고, 이런 시 창작 방법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백석白石: 이 백석이라는 글자를 직역 그대로 번역하면 흰 돌, 흰 바위가 된다. 이것은 백석이 언어로 된 흰 바위가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데, 백석은 평안북도 언어를 주된 시 창작 언어로 사용함으로써 간도와 만주에 이르는 범위까지 우리 민족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북방으로, 언어적으로 옮겨진다. 백석은 한문의 기초와 한학의 깊이를 모르더라도 알 수 있는 쉬운 한문으로 필명을 써서 민족의 굳건한 기상을 되살리고자 하였다.

백석白奭: 이 필명은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백 명이 되고, 그 수가 백배로 늘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석이 글을 쓰거나 시를 발표할 때 백석白奭으로 필명을 남길 때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클 석奭은 큰 대大와 일백 백百을 합친 글자이다. 이것은 대한을 외치는 이들이 백의 백배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백석은 이 필명을 통해 3 1운동을 암시한다.

백정白汀: 백정白汀이란 이름은 '하얀 모래사장이 깔린 물가'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문의 어원을 나눠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 속에 다른 의도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래와 같이 많아져 강에 우뚝 쌓일 것이라는 것은 바로 3 1운동을 암시한 내용과 동시에 흰 옷을 입은 백의민족이 강을 거슬러 모래를 쌓고, 기둥을 세울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석 시가 한국 가요계에 미친 영향

백석 시와 한국 가요: 시인 백석의 시는 반세기 동안 금지되었다. 북에 있었던 시인이기 때문에, 백석의 시는 남한에서 공공연히 말하거나 그 시의 사상과 유사하게 표현을 하면 반공법에 저촉되어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석의 시가 아름다운 사상이 가득한 한국 문학의 걸작이었기 때문에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여러 해 동안 탄원을 하여 해금이 되었다. 한국 문학의 걸작이자 우리 민족의 정서, 우리네 삶의 회한과 사랑을 노래한 백석 시인의 시는 한동안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멀어졌다가 다시금 다가오게 된 것이다.

이젠 우리가 백석 시를 바라보는 태도도 많이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백석 시는 우리 민족의 정신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을 따사롭게 위안해 준 아름다운 시이다. 여러 가지 정황과 증언으로 미루어보면 수많은 작사가들이 신변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백석 시를 사랑하고 기꺼이 자신의 노래세계에 심지어 열매를 거두었다는 점은 명확하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백석 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삶과 호흡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백석 시에 영향을 받은 여러 가지의 예를 제시할 것이다. 독자들의 판단이 있어야할 것이다.

<바닷가에서>와 <바다> - 박춘석: <바닷가에서> - 박춘석 작사 / 작곡 / 안다성 노래-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 나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중략)… -

<바다> (일부)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동백 아가씨>와 <통영2> - 한산도: <동백 아가씨> - 한산도 작사 / 백영호 작곡 / 이미자 노래-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

<통영2> (일부) - 백석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 피는 계절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고귀한 선물>과 <바다> - 박건호: <고귀한 선물> - 박건호 작사 / 오동식 작곡 / 장은아 노래- 갈매기 나는 바닷가에도 그대가 없으면 쓸쓸하겠네 / 파도가 밀려와 속삭여 줄 때도 그대가 없으면 쓸쓸하겠네 -<바다> (일부)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이 나는구려 /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산까치야>와 <대산동>의 음률 - 이순섭: <산까치야> - 이순섭 작사 / 정주희 작곡 / 최안순 노래- 산까치야 산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내가 울면 우리 님이 오신다는데 -

<대산동> (일부) - 백석

비예고지 비얘고지는 제비야 네 말이다, 저 건너 노루섬에 노루가 없드란 말이지

그 외에도 많은 시가 그들의 노래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백석을 흠모하던 시인들이 가요계로: 백석의 시를 흠모하던 시인들과 문학인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신문사나 잡지사의 일을 하면서 간간이 시와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백석의 시를 읽거나 시를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 되면서, 백석의 시를 흠모했다는 시인들과 문학인들이 대거 가요계로 들어와 가사를 쓰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작곡가 사무실에는 작사가들의 원고가 수백 매가 쌓이고, 이 일로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는 시인들이나 작사가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레코드사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작곡가들에게 힘과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시인들은 작곡가 사무실에 정기적으로 출근하면서 시 대상에 맞는 가사를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3부. 백석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고당 조만식


고당古堂 조만식曺晩埴 선생은 1883년 조선 말기에 태어나 조선의 정신을 일깨우신 민족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분이다. 일제시대 때 교육자, 종교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하여 1919년 3 1 만세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는데, 고당 선생과 시인 백석은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백석은 해방 후 고당 조만식 선생의 러시아어 통역 비서로 일을 했고, 나중에 조만식 선생이 고려호텔에 연금되자 조만식 선생의 일을 적극 도왔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백석은 민족의 큰 횃불이자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과거와는 다른 시와 문학 활동을 하게 된다. 그 정도로 고당 조만식 선생과 시인 백석의 영혼은 서로 이어진 관계였다.

민족의 슬픔으로 일깨우려 한 것은: 시인 백석이 그리는 가족적 사상은 민족이 겪는 분열과 이별의 아픔에서 시작한다. 백석의 시에는 헤어짐 후의 눈물과 그리움을 그린 시가 많으며, 고향을 떠나 유랑을 하면서 느낀 고향과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시들이 많았다. 이것은 시인 백석이 이별과 분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민족적 감정으로 끌어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고당 조만식 선생과 시인백석이 스승과 제자로 만나지 않았다면 백석의 시가 이토록 가족적이고 아름답고, 민족적인 향기가 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상적 힘은 어린 시절 백석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백석 시인이 오늘날까지 시인들의 시인이며, 민족의 시인이며, 슬픈 이들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한 시인으로 남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하였다. 백석의 시 안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의 아름다운 정신과 가족애가 뿌리깊이 담겨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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