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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평전

강미현 지음 | 에코리브르
비스마르크 평전

강미현 지음

에코리브르 / 2010년 12월 / 768쪽 / 38,000원




가문의 후손으로서, 프로이센의 후예로서



그는 누구인가?

비스마르크, 그는 타고난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만큼 19세기 독일과 유럽을 움직인 탁월한 정치가이자 외교의 대가였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따라 다니는 국가나 가문에 대한 그러한 남다른 인식이 자리하기까지는 숱한 혼란과 시련이 뒤따라야만 했다. 우선 비스마르크는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일방적이고도 냉정한 교육방식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유별났다. 게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귀족 신분인 아버지와 평민 출신인 어머니라는 이중적인 출신성분에 대한 신분상의 콤플렉스까지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프로이센 국적의 귀족 출신 자제라면 누구나 지니는 신분의식이나 당연한 귀속감과 같은 반응들이 그에게는 따라주지 못했다.

비스마르크는 젊은 시절의 오랜 방황을 끝내고 32세 때인 1847년에 평생 자신이 몸담을 정치세계의 길에 들어섰다. 그 선택이 가문의 후손으로서, 그리고 프로이센의 후예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영광으로 칭송될 것인가 하는 점은 그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862년 프로이센 수상에 올라 1890년 퇴임하기 직전까지, 30년에 가까운 오랜 집권 시기 동안 프로이센과 독일 제2제국을 통치한 그의 업적은 프로이센과 독일 국가의 운명, 더 나아가 유럽의 국제정세에 직결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업적은 시대를 막론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역사 발전의 교훈과 쟁점을 안겨주고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다

가문의 역사 : 프로이센이 독일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는 동방을 향해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척 운동을 표방하던 12세기 무렵이다. 그 무렵 독일 황제들은 오토 대제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고대 로마제국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정책 노선에 기반을 둔 보편주의적 제국 이념에 빠져 있었다. 그 결과 한 국가의 국왕으로서가 아닌 광범위한 영토를 가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써, 독일의 왕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정치에도 개입함은 물론 교황 임명권까지 관리하는 동시에, 동부 지역의 폴란드나 헝가리의 내정마저 간섭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했다.

한편 가문의 역사가 프로이센 초기의 발전과 함께했다는 점에서 비스마르크 조상들의 활동 역시 국가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흥기하던 당시는 종교개혁 이전 시기로서 비스마르크 가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시발점이었다. 비스마르크 가문의 초기 역사는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하벨베르크 지역의 주교 관료로서 그 주교관구인 비스코페스마르크의 하급관리직을 맡아온 선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4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모직물 공업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함으로써 재단사 길드 조직과 스텐달 지방의회의 핵심 의원으로서 정치· 경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혼란스런 두 세계를 오가며



격동 속의 ‘약체’ 독일

나폴레옹 체제의 붕괴로 불안했던 유럽의 정국이 완전히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연합전쟁에서 승리한 유럽 열강은 전쟁의 재발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를 주축으로 열린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 자유주의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수립된 빈 체제는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19세기 전반의 유럽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강대국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보수· 반동주의의 정통성을 원칙으로 하여 자국의 기존 세력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어머니에게서 영영 멀어지다

비스마르크는 1815년 독일연방과 함께 태어났다. 당대의 복잡 미묘한 대내외 상황 못지않게 그의 개인적인 출생 배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독일의 형국이 고스란히 그대로 물려받아야 할 숙명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출생 문제, 특히 부모님의 원만하지 못한 배경이나 어머니의 독선적인 교육방식 또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따라서 그는 국가는 물론 가족의 혼란스런 전환기적 ‘증세’나 이중적인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였다.

너무나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 : 비스마르크의 아버지 페르디난트는 특출한 재능이나 실력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가문 대대로 조상들이나 형제들이 보여주었던 정치적· 군사적 공적이나 왕성한 활동 등도 기대할 수 없었고, 국왕으로부터 어떤 신뢰나 특혜를 받는 처지도 못 되었다. 심지어는 포츠담의 친위대 의무병으로 군복무를 하던 중 도중하차한 전력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못했다. 그런데 비스마르크의 어머니 빌헬르미네 루이제의 경우 남편과는 여러모로 상황이 달랐다. 귀족의 칭호도 없었고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관계로 재정적으로도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개혁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가정환경 탓이었는지 그녀는 교양시민계급의 전형적인 여성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지적 성향을 갖추었다. 빌헬르미네와 페르디난트 두 사람의 상반된 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출신성분이나 신분 차이보다 오히려 거기서 비롯된,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방식이나 사고력에서부터 인간관계는 물론 개인적인 자질과 인간적인 호의 등에 이르기까지 서로 너무나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차이점들은 부부 사이에 불협화음이 되어 원만한 결혼생활에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늘 어머니의 뜻대로 : 어린 비스마르크는 1821년 일곱 살을 3개월 앞두고 다섯 살 위인 형 베른하르트가 한 해 전에 그랬듯이 베를린의 한 학교로 보내져 기숙사 생활을 했다.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고 고집하던 어머니 밑에서 그들 형제에게 피할 수 없는 의례적인 ‘답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섯 살에 시작한 기숙사 생활은 비스마르크와 어머니의 관계에 평생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말았다. 프라만 학교는 수업과 학습, 공동산책과 공식적인 놀이 시간 등 하루 12시간으로 빡빡하게 채워진 교육 프로그램을 매일같이 엄격하게 진행시켰다. 비스마르크는 마치 소년원과도 같은 프라만 학교의 체제에서 반항심만 한껏 키웠고, 평생을 두고 불평하면서 쓰디쓴 악몽을 지우지 못했다.



방탕과 허상의 한가운데에서

괴팅겐 대학의 싸움꾼 : 17세가 채 되기 전인 1832년 비스마르크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도 여전히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유럽중부에서 명문으로 알려진 괴팅겐 대학을 선택해버렸다. 비스마르크의 어머니는 학과 선택의 문제에서도 자신의 소신대로 법학을 고집했다. 법학은 비스마르크가 특별히 관심을 갖던 분야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군인으로 종사하거나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아 농장이나 경영했으면 하던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자유주의 시민계급 출신답게 어머니는 공직으로 나아가는 발판이자 돈을 버는 학문으로 통용되던 법학을 고집했다.

5월 10일에야 겨우 등록을 마친 비스마르크는 대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마치 가두어놓았던 둑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 순식간에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그동안의 모든 간섭과 감시의 틀을 미련 없이 벗어버린 채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에 정신없이 도취되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괴팅겐에서 보내는 3학기 동안 25차례의 격투를 벌이며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후 비스마르크는 학내 소요 사태에 정부당국이 “휘몰렸다”고 언급했는데, 이때 이미 그의 사고에는 하노베라(귀족 자제들의 향우회적 성향의 서클) 회원답게 자유주의 운동에 대한 심한 거부감이 있었다.

베를린에서 개과천선하다 : 1834년 신학기를 맞이해서 비스마르크는 괴팅겐을 떠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야만 했다. 방탕한 생활로 진 빚 때문에 지난 9월에 이미 괴팅겐 대학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등록을 마치고 베를린 생활을 시작한 이후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삶에서 처음으로 행운과 맞닥뜨렸다. 괴팅겐 시절에는 서로 몰랐던 두 친구를 베를린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 주인공들은 바로 미국인 모트리와 발트 해 출신의 카이저링이었다.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서 탐구적이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소양까지 두루 갖춘 그들과의 만남은 방탕한 일개 대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비스마르크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면서 정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장해갔다.

험난한 정치세계에 뛰어들다



혁명의 불길을 거스르다

반혁명 투사를 자처하다 : 당시 33세의 비스마르크는 혈기왕성한 보수주의자로서 통합의회의 보결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첫사랑인 요한나와의 결혼을 2개월 남짓 앞둔 1847년 5월, 철도 부설 문제로 정부와 시민계급 의원들이 대립하는 상황에 개입하면서 그는 정치 신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초반부터 의회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장본인이 되었다.

혁명 사태에 직면한 비스마르크의 태도는 매우 단호했다. 1848년 3월, 형 베른하르트에게서 프랑스 2월 혁명의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프랑스의 혁명 기운이 독일 남서부 지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8일 베를린에도 일시적이지만 혁명세력의 승리를 알리는 환호성이 울려 퍼지자, 비스마르크는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과 함께 군사적 동원의 불가피함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곧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는 통일의 의지와 자유주의의 물결에 대항하여 전력을 다하는 길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골수 프로이센주의자로 되살아났다 : 유럽에서 확산되었던 혁명의 불길은 어느새 새로운 흐름을 타고 있었다. 1848년 말, 오스트리아에서는 18세의 프란츠 요세프(Franz Joseph, 1830~1916)가 황제에 즉위했고, 프랑스에서는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eon, 1808~1873)이 공화국 대통령에 등극했다. 프로이센 또한 혁명의 기운이 사그라지고 예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12월, 프로이센의 국민회의가 해산됨으로써 헌법 문제도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일정한 소득에 기초한 보통· 간접 선거권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고자 했다.

좌절된 혁명의 교훈 : 독일의 시민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자유와 국가 통일을 주장했던 혁명세력의 다수가 독자적으로 지배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채 ‘선先 통일과 후後 자유’라는 판단 하에 실세인 보수 세력과 결탁했고, 또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주창한 국가의 통일문제조차 방법상의 차이로 허사로 끝나버렸다. 그 결과 기존의 보수 세력이 재집권하는 가운데 시민혁명을 통해 하나로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룩할 기회를 놓쳐버린 채 연방의회 의장국인 오스트리아가 계속해서 지배권을 장악했다. 혁명의 실패로 독일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통일된 민족국가의 희망마저 접어야 했다.

주사위는 던져지다



이원주의를 고집하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립으로 드레스덴 연방회의는 아무런 소득 없이 연일 공전되었다. 양국 간의 신경전만 펼쳐지면서 3월 혁명 이전 시기로 되돌아가는 길밖에 다른 해결책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운명의 신이 비스마르크의 편에 서 있기라도 했건 것일까. 그 소식을 앞서 접한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는 사실에 매우 놀라워했지만, 직분에 따른 경륜 부족으로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앞섰다. 5월 8일, 비스마르크는 마침내 빌헬름 4세의 명령에 따라 비밀 참사관이란 직책과 함께 연방의회의 대사직을 맡아 일찍부터 품었던 외교관의 꿈을 이루었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다

연방의회 대사에 임명된 이후 비스마르크의 뇌리에는 이원주의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독일의 삼각관계가 떠나지 않았다. 그런 속에서도 전체 독일의 통일이라든지 독일 정치의 향방과 관련된 그 어떤 문제도 프로이센의 권력과 독자성이 제한받지 않는 한에서만 해결 가능하다는 기존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차원에서라면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그것도 분명한 목표를 지닌 정치인으로서 역시 최선책은 이원주의였다.

거친 들판에 홀로 서다 : 마침내 그러한 안목은 두 가지 국제적 위기상황이라는 제3의 길을 통해 입증되었다. 즉 국제적인 정세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면서도 당면한 정치 목표를 달성하려는, 우회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 첫 번째 상황은 크림 전쟁의 위기였다.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노쇠한 오스만투르크를 압박하여 지중해로 통하는 해협과 발칸 반도를 노리던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프랑스가 1855년 1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러시아와 대립함으로써 크림 전쟁(1854~1856)이 발발했다.

마침내 비스마르크는 크림 전쟁이라는 국제적인 위기상황을 중유럽에서 프로이센이 패권을 차지하는 기회로 활용하고자 적극적이면서도 과감한 외교정책을 주장했다. 1854년 2월, 그는 오스트리아의 군대 지원 요청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보고서를 제출했으나,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국내의 원칙주의 정치가 외교노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굳이 보수 세력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려 하지도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열리다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수상?

1862년 가을, 프로이센은 그야말로 일대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국왕은 이틀간의 고심 끝에 비스마르크를 프로이센 수상 겸 내각의 임시의장으로 마음을 굳혔다. 국왕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맞서야 하는 국왕의 강력한 조치에 뜻을 같이할 것을 분명히 밝히면서 절대적인 충성을 서약했다. 2주 뒤인 10월 8일, 최종적으로 국왕의 임명장이 떨어졌다. 난국의 상황 못지않게 그 두 사람 모두에게 힘든 선출 과정이었다. 머지않아 독일제국의 창건자로서 비스마르크의 정치를 극찬하게 되는 역사학자 트라이치케도 당시에는 “권력을 장악한 완전 무례한”이라며 그를 비난했다.

비스마르크의 임명에는 난국을 타개할 최적임자로서 그를 국왕에 직접 천거한 론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론은 빌헬름이 집권한 후 1859년 국방장관에 임명되었고, 곧바로 군제개혁을 주장함으로써 어떻게 보면 현재의 정치적 위기상황을 촉발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론은 주변의 다른 정치 지도자들은 믿지 않으면서 비스마르크를 매우 신임했다. 론은 1879년 죽음 직전까지 비스마르크 수상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독일의 통일을 비롯한 정치적 행보 전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만만찮은 정치무대의 첫선 : 비스마르크는 이제 국가라는 커다란 배의 새로운 항해사가 되었다. 활동영역을 넓혀나갈 조종키를 거머쥔 그에게는 사실 군제개혁 외에도 주변국들과의 관계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현안은 없었다. 대외적으로 폴란드 민족의 봉기, 그리고 이를 진압하려는 러시아를 지원하는 문제와 그로 인한 독일 내 반프로이센 분위기를 비롯하여 홀슈타인을 둘러싼 덴마크와의 갈등 등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사안들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최고 정치 목표인 오스트리아와의 동등한 이원주의도 놓칠 수 없었다.

바로 이 때가 오늘날까지 수도 없이 인용되는 ‘철혈 정책’이 그의 입에서 발설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의회 내 다수를 차지한 자유주의자들과의 대립정국에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의원들은 화친의 제스처를 보이면서 강력한 프로이센을 촉구했던 비스마르크의 의도와는 달리 호전적인 도전의 의미로 받아들였고, 나아가 독일 전역에서도 즉각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스스로 언급했듯이 “합법적인 각료이기보다는 국왕의 개인적인 신하로서 입장을 내세운 것”뿐이었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일개 정치가나 대사가 아닌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지도자가 된 지금, 사태의 심각성은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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