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추억
정운찬 외 지음 | 따뜻한손
아버지의 추억
정운찬 외 지음
따뜻한손 / 2010년 12월 / 248쪽 / 11,000원
1장 아버지 - 내 삶의 디딤돌'너희 애비라는 사람은' _ 김채원
며칠 전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로 <남촌>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이제껏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많이 들어왔건만, 그 순간 밀려든 감정은 어떻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지금 뒤돌아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아버지를 마음껏 그리워하자, 이런 마음이 저 속에서부터 솟구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평소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못했던가. 그보다는, 내 안에 있던 아버지를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를 빌려 밖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형체라기보다 어슴푸레한 어떤 기운으로 공기처럼 늘 내 안에서 감돈다. 완두콩 밭에서 완두를 따서 콩을 꺼낸 뒤, 연한 완두콩 껍질을 언니와 내 입에 넣어주던 그런 정경은 막연한 어떤 기운으로 감돌 뿐이다. 완두콩 껍질의 그 풀 향내와 맛. 세상은 온통 연두빛 천지이고 아버지는 흰 한복을 입고 있었다.
흰 하복에 어리던 연두빛이 선명히 기억되는 것 같으면서도 역시 형체는 없다. 그러나 아버지 작사의 노래를 들을 적에는 그 구절들이 가슴에 와 박히면서 내 안에 있는 아버지를 내 밖에서 어떤 형체로 만난다. 그럴 때 아버지의 형체는 더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손기정 선생이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낸 엽서에 쓴, "여관에서 울 수가 없어 바닷가에 나가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지요" 같은 구절에서, 멀리 수평선 바라보며 한없이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린다.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였고, 그래서 현실과의 괴리가 유독 큰 분이었다고 어머니는 늘 말했다. 이런 분이었다, 라는 식으로가 아니라 "너희 애비라는 사람은…" 하고 말하였는데, 이제 보면 그것은 북방여자 특유의 어법이었던 것 같다. 무엇에 대한 자랑이 낯간지러운… "공부를 잘할 필요 없다. 꼴찌에서 둘째쯤만 하면 된다." "아이들은 돈이라는 것을 모르게 하고 싶다." "한강변에 포도나무를 심어 지나가는 선남선녀들이 모두 따먹게 하자." 이런 말들에서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를 감지한다.
"아꾸, 아꾸!" 이런 말은 아버지 특유의 표현이다. 별로 잘나지도 못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만은 너무 귀하고 예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바로 그처럼 부모는 우리를 너무 가슴 아프게 한다. 마음껏 그리워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버지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과오를 씻고 그가 꿈꾸던 세계로 가기 위한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 꿈이 파묻힌 채 납북된 아버지. 아버지와 찍은 사진은 단 한 장뿐이다. 해방 이후 경기도 덕소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 어느 하루 아이들에게 창경원을 구경시켜주려 했던 것 같다. 몹시 말라 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보면 그 당시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그 시절이 낙원으로 기억되니 오묘한 조화다.
소년 시절 아버지는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방랑길에 오른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한일합방을 비관하여 토지를 도청에 헌납하고 러시아로 떠나버렸는데, 그 당시 어렸던 아버지가 소년이 되자 아버지를 찾아 러시아 전역을 방랑하였다고 들었다. 그날 볼쇼이 합창단의 노래가 내게 특이한 순간으로 다가왔던 것은 러시아를 떠돌고 있던 그 소년을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소년이 커서 지은 시를 먼 훗날 그 나라 사람들이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한 감회.
산 넘어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 하늘 저 빛깔이 저리 고울까.
결국 닮고만 아버지의 단점 _ 고승덕
아버지는 평생 모범생이다. 시골 의사로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았다. 매사에 철저하고, 무리하거나 정도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아는 분들은 다들 아버지가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일흔다섯에 은퇴할 때까지 집과 병원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했다. 나는 학창시절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여러 차례 결심했다. 변화가 없이 사는 삶이 답답하고 재미없다고 느꼈다. 내가 법대를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통해 본 의사라는 직업에 실망한 탓도 컸다. 온 가족이 절약하면서 살았지만, 집 한 채 이외에는 별다른 재산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러나 아버지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저축하더라도 부동산 투기 없이는 부자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까다로운 점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의사답게 위생에 민감했다. 익히지 않은 음식은 회는 물론, 냉면까지도 먹지 못하게 했다. 가리는 음식도 많다. 수학여행 외에는 자식들이 집밖에서 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성격이 너무 신중해서 내가 새로 뭔가 하려고 아버지를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한국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아버지에 대해 반발심이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때가 있더라도, 아버지는 당신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인생의 최우선 순위를 자식교육에 두었다. 내가 경기고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했다. 내가 고시 공부할 때 아버지는 안방에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말없이 나를 격려했다.
아버지는 쉰 살이 넘어서 지방 병원에서 월급받는 생활을 선택했다. 주말에만 서울로 올라오는 주말부부가 된 것이다. 그렇게 사는 모습이 자식들 보기에 불편했다. 일흔이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은퇴하라고 간청했다. 아직 더 일할 힘이 있다고 우기던 아버지가 은퇴를 결심한 것은 그 후로도 5년이 더 지나서였다. 은퇴 뒤 아버지는 집 안팎을 직접 수리하고 마당을 가꾸면서 항상 몸을 움직인다. 나무의 가지치기도 직접 한다. 가만히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은 지 40년 정도 되는 집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자 직접 사다리를 타고 지붕과 외벽에 방수 페인트를 칠해 완벽하게 공사를 마무리하기도 했다. 내가 사는 빌라 주차장 천장에서 물이 심하게 떨어졌을 때도 아버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공사업체가 여러 차례 방수작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뒤였다. 아버지가 며칠간 빌라에 와서 철사줄을 사용해 도면을 그려 연구하더니 주차장 위로 지나가는 배관이 깨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배관을 고치자 물이 더 이상 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여행 한번 가지 않고 살았었다. 어릴 때 여름방학이 지나면 다른 아이들은 바캉스 자랑을 했지만, 여행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부러울 뿐이었다. 아버지는 여행을 가면 음식 잘못 먹고 탈나기 쉽다고 하면서, 건강을 생각해서 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결혼해서 분가를 한 뒤 나는 가끔씩 여행을 가면서, 여행이 정신건강에 좋고 생활에 활력을 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한 차례도 응하지 않았다. 아버지야 쉽게 생각과 습관을 바꿀 수 없겠지만, 어머니까지 여행 한번 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던 아버지가 지지난해 난생 처음 1박 2일로 제주도 여행을 갔다. 성묘를 핑계로 아버지를 설득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좋은 호텔을 예약하고 택시를 대절해서 모시고 다니면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고등어조림 같은 음식도 대접했다.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대만족이었다. 아버지가 변했다. 어머니에게 일본 여행 가지고 해서 온 가족이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놀렸다. 그 뒤 우리 부부는 작년 가을 몇 번 부모님을 모시고 단기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집이 가장 편하고 어머니 음식이 최고라고 했다. 힘든 분은 어머니였다. 아버지고 어머니는 서로 "하이"라고 부른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달려가야 했다. 항상 집에서 먹고 자는 아버지를 수발하느라 어머니는 마음 편하게 외출 한번 하지 못했다.
그렇게 건강하던 어머니가 지난해 2월 말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어머니가 생사를 오가던 고비를 겪을 때 아버지는 수술실 밖에서 기도를 했다. 귓가에 "하이"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구사일생으로 회생했지만 어머니는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가사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간병인을 두자고 해도 아버지는 남이 하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으니 당신이 직접 간병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빨래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부려먹기만 하던 아버지가 180도 달라졌다.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 발까지 씻겨드리면서 정성스럽게 24시간 간병했다.
그런 간병이 벌써 6개월이 넘었다. 어머니는 정말 조금씩 차도를 보이고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나아진다고 즐거워하면서 아직도 지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두 분은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 걷는 연습을 겸해서 함께 집 부근을 산책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어머니를 부러워한다. 그 나이에 신혼부부처럼 다정히 산책하니 정말 보기 좋다는 것이다.
평생 자식 생각만 하면서 살아온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나는 항상 감사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나이가 어릴 적에는 아버지가 내 생각과 다르게 답답한 말씀을 한다고 대든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참고 들어드린다. 아버지가 일생동안 고집해온 생각이 내 말 한마디에 쉽게 바뀔 수는 없을 것이다. 거북한 말씀이라도 참고 듣는 것이 내 나름의 효도의 실천이다. 내가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매번 녹화하면서, 아직도 마음은 20대 같다는 어머니가 빨리 회복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우리 부부가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제주도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의 친구 _ 베르나르 베르베르
독일군이 독일 점령지와 자유프랑스의 경계선을 통과했을 때, 아버지는 열여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에스파냐로 탈주했다지요. 세 분은 프랑코 치하의 에스파냐 경찰에 체포되어 바르셀로나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도망쳤고, 거기에서 대학을 다니셨지요. 그러다가 미군에 입대해서, 기갑연대의 일원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습니다. 국내의 다른 프랑스인들이 숨어 지내거나, 부역자가 되거나, 또는 오불관언할 때, 아버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가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재우기 전에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늘 환상적인 이야기를 지어내서 나에게 들려주셨지요. 그러면 나는 밤에 그 이야기를 주제로 꿈을 꾸곤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기발하고 황당무개한 이야기들을 쓰고자 하는 욕구가 어디에서 오느냐는 질문이지요. 나에게 그런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마련해준 그 짤막한 마법의 순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체스를 가르쳐주신 것도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체스를 배웠다고 하셨습니다. 바르셀로나 감옥에 갇혀 지내던 시절, 할아버지가 판지로 판을 만들고 빵 조각으로 말을 만들어 체스를 가르쳐주셨다지요. 아버지에게 배운 체스는 나중에 내 소설의 장면들을 전략적으로 배치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흑과 백, 장소의 통일성, 전쟁 또는 사랑의 드라마, 서스펜스, 이 모든 것 역시 아버지에게서 유래된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가운데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쉬운 길은 아니지만, 단연코 가장 흥미로운 길입니다. 남의 영향을 받지 않고 생각하는 자유, 윗사람들에게 보고하지 않고 사는 자유, 삶 속에서 얻은 경험과 세상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여행을 바탕으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을 형성하는 자유. 그런 자유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아버지는 나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제 나는 분명히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아버지는 단지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오래된 친구들처럼 규칙적으로 장시간에 걸쳐 전화 통화를 합니다. 사실 아버지는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입니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거나 배신한 적이 없는 진실한 친구지요.
우리는 언제나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버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훈계를 늘어놓거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고 단정하는 부류의 어른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늘 "난 널 믿는다. 넌 잘 해낼 거야"라고 말씀하시지요. 만일 우리가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다 해도, 나는 아버지를 자주 만나고 싶은 분으로 여겼을 겁니다. 만일 내생에서 나에게 선택의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내 선택을 아버지가 받아들이신다면, 나는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2장 아버지 - 내 삶의 버팀목'그 아버지에 그 딸' 그 황송한 말을 위해 _ 김혜자
아버지는 어느 여름날 낮잠을 주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연세가 일흔아홉 되셨으니까 조금씩 몸이 안 좋으셨지만, 막상 돌아가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김 박사는 죽음 복도 타고났다"고 했지만, 나는 식구들과 이별의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가시는 게 무슨 복이란 말인가, 그냥 서럽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나도 이제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가고 싶습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면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우리 집에 놀러오셨다가 소파에 누우신 채 소변을 보신 적이 있습니다. 헝겊으로 된 소파가 흥건히 젖었습니다. 별로 편찮으시지도 않았는데 아기처럼. 나는 그때 "아버지 창피하게… 아줌마가 뭐라 그러겠어요? 빨리 일어나세요"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또 아기처럼 웃으셨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멋있는 우리 아버지가 왜 이런 실수를 하셨을까? 어디가 안 좋으신가? 걱정보다는 싫고 창피했던 기억이 갑자기 나는군요. 아버지를 목욕시켜드리면서 울었던 생각도 납니다. 양복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버지의 몸은 너무 말라 있었습니다. 살갗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노인이셨습니다. 몸쓸 년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끔찍이도 예뻐하셨는데. 서른일곱에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양념딸, 내 양념딸" 하시며 나를 꼬옥, 꼬오옥 안아주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열일곱 살에 결혼하시고, 두 살 위인 어머니 사이에 두 딸을 낳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일본으로 해서 미국으로, 그 세월이 15년입니다. 그래서 언니와 내 나이 차가 15년입니다. 아버지가 유학 떠나시던 날, 층층시하 어른들 계신데 눈 한번 못 맞추고 어머니는 부엌문 앞에 서 계셨답니다. 아버지는 어른들께 전부 인사를 드리고 부엌 쪽으로 와서 고개 숙인 어머니에게 이렇게 했다지요. "나 물 한 그릇 주시오." 어머니는 부끄럽고 당황해 냉수 한 그릇을 얼른 떠 아버지께 드렸답니다. 그때 얼핏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셨답니다. 나는 이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이유 모를 슬픔에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는 물을 청하는 것으로 청초한 아내에게 사랑의 표현을 한 것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한 번 올려다보시는 것으로 아버지의 사랑에 답하고. 그 순간의 사랑 표현으로 15년을 사셨겠지요. 대갓집 며느리로 아침상을 열여덟 번씩 차려야 하는 고된 시집살이에, 밤이 되면 두 딸을 껴안고 파김치가 되어 잠드셨겠지요.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가 안타까운 생이별을 하셨지만, 청춘을 아름답고 찬란하게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누구의 참견도 받지 않고 이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 했겠지만, 그 또한 젊음의 특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혜자야, 여름에 미국에서 제일 좋은 잠자리가 어딘지 아니? 공동묘지란다. 거기는 대부분 대리석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치장이 돼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