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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생태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예술과 생태

박이문 지음

미다스북스 / 2010년 12월 / 363쪽 / 18,000원


1부. 예술



미학과 예술철학

미학과 예술학 : 학문적 범주로서 예술학(Studies on Art)은 미학(Aesthetics)의 일부일 수 있지만 미학은 예술학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것이 반드시 미적 존재가 아니며, 미적 존재가 반드시 예술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 ‘미美’는 감각적 경험의 한 속성이지만, 그 자체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예술’은 자연적 혹은 문화적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각적 대상, 사건, 내면적 경험 등을 지칭하는 일종의 기호언어라는 것이 그 의미 해석 및 가치평가이다.

미학의 문제 : ‘미’는 객관적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상태에 대해서 갖는 경험 내용을 서술하는 하나의 범주다. 즉 지적 발견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감각 대상을 대할 때 경험하는 주관적인 심리 내용의 한 양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때, 그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즉 어떤 대상이 어떤 경우에 ‘아름답다’고 서술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일종의 심리학이다. 예술이 미학의 일부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술만이 미학의 대상은 아니다. 즉 ‘예술’이라는 개념은 ‘미’, 혹은 ‘아름다움’이라는 개념과 동일하지 않다. 예술사가 미학사가 될 수 있지만 예술사가 곧 미학사는 아니며, 미학사가 곧 예술사는 아니다.

‘아름다움’이 그 자체를 보편적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인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특정한 심리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이 지칭하는 구체적인 경험 대상이나 경험 내용은 개인이나 집단, 연령이나 시대에 따라 가변적이다. 미학 또한 인간의 자연, 사회, 시대, 문화, 역사 등 구체적 조건들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탐구로서 미학은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문화과학, 역사학 탐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와 같은 탐구가 곧 미학은 아니다.

예술의 문제 : ‘미’의 범주가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으로‘미’의 범주에 속하는 것과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 동일시되어 왔고 따라서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들의 문제가 동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러한 혼동은 일반 대중뿐 아니라 전문 예술가, 예술철학을 한다는 이들에게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미학의 문제와 예술의 문제는 사뭇 다르며 그것들의 경험· 과학적 즉 실증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에서도 각기 그 차원이 다르다.



예술작품을 둘러싸고 이와 같은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은 그러한 문제에 관한 대답이 궁극적으로 애매모호하거나 모두가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비가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예술가나 예술작품의 대중적 관람자들 간은 물론 예술비평가, 예술사가 그리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단토와 같은 예술철학자들 간에도 다같이 공감할 수 있는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둘러싼 위와 같은 문제는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보편적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든 것의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대상의 존재를 전제하고, 존재의 전제가 그러한 대상의 개념을 전제한다면 예술에 관한 문제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 중에서 가장 인과적이며 근원적이고 논리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술’이란 개념 규정이다. 개념 규정은 곧 철학적 활동의 핵심 기능이다. 예술의 철학적 규정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전제하지 않고는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겉돌 뿐이다. 다른 종류의 인식 대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예술의 경우도 의미 있는 담론은 개념 규정에서 시작해야 하고 개념 규정에서 끝나야 한다.



예술의 종말 이후 미술사

존재론적 정지· 소멸· 죽음으로서의 종말 : ‘종말’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론적, 인식론적 의미로 사용된다. ‘종말’이라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관념은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생물학적,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의 의식 속에 깊이 존재해 왔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힌두· 불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무無와 공空의 형이상학적 사상,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깔려 있는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나타난 이래 아직도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성으로서의 종말 : 벨팅과 단토(예술철학자이자 예술평론가) 이전에는 ‘종말’이라는 개념이 한결같이 존재론적 정지· 죽음· 소멸을 지칭했다. 이에 반해서 벨팅과 단토의 경우 그것은 예술일반,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술창작 활동의 정지, 예술작품의 소멸, 예술에 관한 역사적 및 그 밖의 담론의 죽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종말’이라는 개념은 어떤 사물들의 의미, 평가 및 역사를 설명하는 데 암묵적으로 전제된 예술에 대한 개념 규정의 인식론적 부적절성, 오류, 무효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예술 개념의 문제점 : 단토는 예술시대(Era of Art)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계의 예술을 통시적으로 ① 가령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으로 대표되는 원시시대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중반에 해당되는 13세기까지의 작품을 ‘예술시대 이전의 예술’로 ② 20세기 초 마네의 그림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 1964년 워홀의 작품이 뉴욕의 한 화랑에서 전시될 때까지 지속된 모더니즘운동 기간의 작품을 ‘예술시대의 예술’로, ③ 그리고 워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폭발적으로 생산된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예술시대 이후의 예술’로 각기 3등분 한다.



이 세 시기의 특징은 예술의 개념에 대한 존재 여부와 관련해서 첫 번째 시기는 예술이 자신을 다른 사물과 구별하는 근거로서의 예술의 개념· 본질에 대한 의식이 부재하였던 역사 이전에 존재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 시기는 바로 그러한 의식이 깨어나서 예술이 자신의 본질· 정체성을 찾는 데 쏟은 노력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 번째 시기는 예술이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찾아내어 그것에 맞추어 작품을 생산하고자 했던 규범으로서의 본질· 정체성의 역사적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이른바 다원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각각 다르다.



이와 같이 볼 때 예술시대의 담론 분석과 비판을 통해서 단토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예술 역사상 처음으로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만이 앞으로 존재하게 될 모든 예술작품에 일관적으로 적용되어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예술 본질의 발견, 예술 개념의 정의를 제안한 데 있었다.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단토의 예술에 관한 모든 담론은 철학적 차원에서 예술의 본질을 찾아내고 그것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예술 시대에서 지오르지오 바자리(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평론가)와 클레멘트 그린버그(모더니즘을 대변했던 평론가)가 했던 작업이 결국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올바르고 분명한 개념 규정에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본질의 발견과 개념 규정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사는 물론 예술에 대한 어떤 담론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지금까지의 모든 예술 담론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본질· 개념· 정체성의 규정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렇다. 예술의 명확하고도 보편적인 개념 규정이 없이 어떻게 예술작품을 비· 예술작품으로부터 구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구별이 전제되지 않고는 예술작품의 해석, 감상, 평가 그리고 역사에 대한 담론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가능하겠는가?



예술의 원형으로서의 공예

해체시대의 문명· 문화와 공예의 개념 : 공예라는 제품과 예술작품을 비롯한 그 밖의 제품과의 구체적 경계는 무엇이며, ‘공예’라는 개념과 ‘예술’이라는 개념 간의 논리적 차이는 어디서 어떻게 투명하고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가? 도대체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분석철학자나 현상학자가 추구했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공예의 정체성이 존재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최근의 시대정신에 비추어 볼 때 부정적이다. 절대적 인식, 따라서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보편적이고 무질서한 상대주의의 쓰나미가 닥쳐와, 과학적 이론과 기술이 잡아준 대로 각자 제자리를 질서정연하게 지키고 살아가던 과학기술 문명이라는 마을은 순식간에 쑥밭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 문화의 마을이 근본적으로 해체Deconstruct되고 그곳은 혼돈과 혼동의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모든 것이 자명하다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모든 존재들 간의 경계가 분명치 않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이 보여준 ‘시간과 공간의 경계’, 양자역학이 입증한 ‘존재의 근원적 불확정성’, 괴델의 수학적 명증성의 ‘불충성 원리’, 데리다Derrida의 철학적 ‘해체’ 등으로 알 수 있듯이,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철학이 정밀한 논리에 천착하면 할수록 그러한 사실이 더욱 드러나고 있다. 동물과 인간, 식물과 동물, 생명과 물질, 마음과 몸, 노란색과 회색, 파란색과 붉은색, 이성과 감성, 종교와 철학, 과학과 철학, 철학과 문학, 예술과 비예술, 존재와 무, 인식과 존재의 구별과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이와 같은 개별적 존재들 간의 근원적이며 보편적인 경계선의 부재와 그로 인한 혼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개별적인 존재의 ‘정체성’, 존재들 간의 ‘경계선’ 등의 개념들을 재규정함으로써 세계를 재해석하는 데 있다. 문화의 한 산물인 ‘공예’의 존재론적 정체성, 개념적 재규정 및 다른 존재와의 경계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공예와 예술의 정체성 : ‘공예’는 어떻게 정의되어 왔으며 그것의 존재론적 정체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답하기에 앞서 ‘공예’와 가장 유사한 개념인 ‘예술’의 개념을 살펴보자. 존재론적 혼동과 개념적 혼돈이 가장 뚜렷하게 도출된 문화적 산물은 ‘미술품’으로 분류된 제품이다. 그래서 이 ‘미술품’에서 드러난 혼동을 분석하면 ‘공예’의 개념을 재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예의 정의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콜링우드Collingwood는 예술의 개념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예술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아트Art’와 공예품을 지칭하는 낱말인 ‘크라프트Craft’라는 두 낱말의 어원적 의미에 주목한다. 크라프트와 아트는 어원적으로 다같이 어떤 물건을 만드는 ‘기술Technique, 솜씨Skill’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런 것을 만드는 과정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콜링우드에 의하면 그 기술· 솜씨는 어떤 경우 이미 머릿속에 정해진 목적 달성 수단과 도구로서 제품제작에 적용될 수 있고, 어떤 경우 머릿속에 정해질 수 없는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인 ‘오브제Object’의 창조일 수 있다. 그는 공예와 예술의 경계선도 바로 위와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구별된다고 주장한다.



공예의 존재론적 특이성은 그것이 ‘하이브리드Hybrid’ 즉 잡혼성이라는 점이다. 공예는 가시적인 도구의 기능적 속성과 심미(Aesthetic Experience)라는 비가시적인 내재적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제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상의 실용적 도구라는 기능적 용도가 배제되고 오로지 심미적 가치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제된 순수예술의 정의와 달리, 제품의 순수성을 고집하지 않고 순수성과 유용성, 심미성과 도구성을 동시에 포섭하는 공예의 정의는 예술의 정의보다 훨씬 선명하고 쉽다.



자기해체적 예술창조 과정

가능한 세계의 언어적 구성으로서의 예술작품 : 근대적 의미로 사용될 때, ‘예술’이라는 개념은 ‘미학’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지적 영역인데 그것은 과학이라는 지적 탐구영역과 구별되는 동시에 실천적 영역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윤리학’과도 차별화된다. 이 같은 미학적 탐구영역으로서 ‘예술’은 과학의 일차적 관심이 진리 발견에 있고, 윤리학이 선한 행위를 하는 데 반해서, 아름다움의 감상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문화적 생산품을 지칭한다. 하지만 예술은 일반적으로 ‘재현의 양식’ 혹은 ‘표현 양식’으로 규정되고 예술의 가치는 재현의 정확성과 우아함 또는 거기에 표현된 생각이나 감동의 깊이에 비례해서 감상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언어로서의 예술이 재현 혹은 어떤 감동의 표현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재현’, ‘표현’, ‘아름다움’의 개념들은 그 외연外延이 너무 크다. 예술이 필연적으로 재현하거나 표현한다는 사실은, 문자언어이든 비문자 언어이든 예술작품이 일차적으로 일종의 ‘언어’로서 인정되어야 하고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의 정의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이런 정의는 앞서 말한 예술의 존재론적 독립성 즉 자율성을 입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적 및 과학적 텍스트, 신호등,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의 제스처가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혹은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한 명제를 예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개연적 양상으로 봄을 의미하며, 똑같은 명제를 비예술작품으로 대한다는 것은 단언적 혹은 필연적 양상으로 대함을 의미한다. 한편으로 언어적 담론으로서의 예술작품과 철학, 과학, 종교 등과의 구별은 오로지 그것들 각각의 존재 양상 간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후자의 명제가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의 사실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서 전자 즉 예술적 명제는 그러한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그러한 가능성만을 제안한다. 진리라는 개념은 제안이 아니라 주장에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니 만큼 예술작품 즉 예술적 명제의 진위를 따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술의 이카루스적 운명 : 예술적 충동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물의 궁극적 진리 즉 각기 사물들의 가장 구체적 상황 그대로의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인지적 소망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언어의 재현 없이는 어떤 진리의 포착도 가능하지 않는 만큼, 언어 이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 사물을 포착하려는 ‘예술적’ 소망은 태양의 빛을 가지려는 이카루스의 소망처럼 말이 되지 않으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새롭고 독창적인 언어를 창조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루스의 시도처럼 부질없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날개가 녹아서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술가가 자신의 표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표상 활동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언어적 명제로서 예술작품은 그것이 자신의 것을 포함한 기존의 언어에 대한 비평의 표시이며, 끝없는 언어적 개성을 위한 창조적 활동에서만 비로소 예술작품으로 취급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예술은 본성상 자체 해체적 즉 파괴적이며, 영원한 자체 해체적 과정을 통해서만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뜻으로 ‘아방가르드’라고 불리는 특정한 예술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은 필연적으로 아방가르드이다. 예술은 영원한 혁명의 양식 말고는 달리 존재할 수 없다. 혁명적이 아닌 예술작품이란 개념은 근본적으로 자가당착적이다.



결론 : 새로운 문명의 구조적 모델로서의 예술 : 서양에서 발전하여 오늘날까지 세계를 지배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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