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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 생각의나무
절제의 사회

이반 일리히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11월 / 252쪽 / 13,000원




1장. 두 가지 분수령



1913년이라는 해는 현대 의료의 역사에 하나의 분수령이다. 주술가나 약초의사에 기대어 있다가 의과대학 졸업자를 만나는 해이면서, 그 후에 의학이라는 것이 질병과 치료를 정의하게 된 경우니까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이 가능해진 것이 아닐까? 서양화된 대중은 의학을 진보로 유효한 의술을 요구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역사상으로 의사들은 그들이 고안된 치료 효과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진보는 고대부터 천벌로 여겨지던 질병의 원인을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가령 물은 정화될 수 있게 되었고, 유아 사망률은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전염병의 일반적 형태는 예방되거나 치료되었으며, 위독 상태에 대한 개입의 몇몇 형태는 매우 유효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망률과 발병률의 현저한 감소는 공중위생, 농업, 상품 판매 그리고 전반적인 생활방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의학이 발견한 새로운 사실에 기술자가 기울인 관심의 영향을 받았지만, 의사의 개입으로 인한 경우는 드물었다. 의료로 인한 새로운 효율성으로부터 산업주의화는 간접적인 이득을 얻었다. 자동차의 속도, 노동의 긴장도, 환경오염과 같은 산업주의적 폭력의 희생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방법을 새로운 기술이 제공함에 따라, 새로운 기술수단과 파괴성은 공중에게 숨겨졌다.

첫 번째 분수령은 현대의료의 역겨운 부작용으로 2차 세계대전 후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의사들이 약물에 저항력을 가진 세균이나, 임신 중 X선 검사에 의해 생긴 유전자 손상을 새로운 유행병으로 진단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조지 버나드 쇼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0여 년 전에 했던 말, 즉 의사가 치료자이기를 그만두고 환자의 삶 모두를 통제하는 권력을 갖는 자처럼 되었다는 말은 여전히 하나의 캐리커처로 간주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에 와서야 의료가 두 번째 분수령으로 스스로 새로운 종류의 질병을 만들었음이 분명해졌다.

두 번째 분수령의 시기에는 건강하지 못한 환경에서 의료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병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의료전문직의 중심 사업이 되었다. 값비싼 예방과 치료는 점차, 그전에 의료서비스를 이미 더욱 더 많이 소비했다는 이유에 의해 더욱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청구하는 권리를 가진 개개인의 특권이 되었다. 전문가, 유명한 병원, 생명유지 장치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도시 주민이다. 그 대도시는 물의 처리와 오염방지라는 기본적 질병예방의 비용이 이미 엄청나게 높아진 곳이다.

이 두 번째 전환점 이후, 의료의 원치 않은 건강상의 부작용이 단지 개인에 그치지 않고 전체 인구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부유한 나라에서의 의료는, 사람들이 늙어서 더 많은 의사와 더 복잡한 의료도구를 필요로 할 때까지 중년을 유지시켜야만 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현대의료 덕택에 더 많은 아이들이 청소년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시작했고 더 많은 여성들이 출산한 후에도 살아남았다. 그 결과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자연환경의 능력과 그들을 양육하기 위한 문화의 제한성과 효율성을 넘어 인구가 증가했다. 서양의학을 배운 양의들은 원주민과 함께 사는 것으로부터 배운 질병의 치료를 위해 약을 남용했다. 그 결과 현대 의학, 자연 면역, 전통 문화가 대처할 수 없는 새로운 종류의 질병이 생겨났다.

의료의 위기는 그 증후가 드러내는 것보다 더욱 심각한 차원에 있고, 모든 산업주의적 제도가 현재 겪는 위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는 '더욱 좋은' 건강을 더욱 많이 공급하도록 사회로부터 지지되고 권고받는 전문가의 복합체가 발전한 결과다. 또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이 헛된 실험의 대상 재료가 된 결과다. 사람들은 자신이 병들었다고 선언할 권리를 상실해왔다. 지금 사회는 의료 관료가 인정한 것만을 질병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2장. 절제의 재구축



100년 동안 우리는 기계가 인간을 위해 일하게 만들고 기계가 봉사하는 삶을 위해 인간을 학교화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지금 기계는 '일하고' 있지 않고, 인간은 기계가 봉사하는 삶을 위해 학교화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따라서 그 실험을 수립한 가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그 가설이란 기계가 노예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되면 기계가 인간을 노예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 독점하려는 프롤레타리아도, 여가를 갖는 대중도 산업주의적 도구의 지속적 확대라는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산업주의적 생산성과는 반대되는 것을 가리키기 위해 나는 '절제'라는 말을 선택한다. 나는 그 말에 사람들 사이,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교류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나아가 타인과 인공적인 환경에 의해 강요된 수요에 대한 각자의 조건반사와는 반대되는 의미를 부여한다. '절제'란 개인의 자유가 인간적 상호의존 속에 실현되는 것이고, 또 그러한 것으로서 고유한 윤리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떠한 사회에서도 절제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짐에 따라, 산업주의 생산 양식이 아무리 증대되어도 그것이 사회구성원 사이에서 창조하는 필요를 유효하게 만족할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지금 사람들은 미래를 구상하는 작업을 전문적 엘리트에게 양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이러한 미래를 열기 위한 틀을 만든다고 약속하는 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양도하고 있다. 그들은 높은 산출량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평등이 필요하게 되면 사회에서 권력이 미치는 범위를 확대되는 것을 수용하고 있다. 정치제도 자체가 생산고라는 목표와의 공모관계로 사람들을 억누르는 예비기구가 되고 있다. 정의로운 것이 제도에 좋은 것까지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의는 제도화된 상품의 평등한 분배라는 의미로까지 타락하고 있다.

이 책에서 나는 목적이 되어버린 수단을 인식하는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의 주제는 도구이지 의도가 아니다. 이 주제를 골랐기 때문에 몇 가지 연관되는 관심사는 다룰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어떤 가상적인 미래의 공동사회를 서술함은 나의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행동을 위한 지침이지 공상이 아니다. 절제적 삶을 향한 현대사회가 만일 실현된다면 그 누구의 상상이나 희망도 넘어서는 경이로움을 꽃피우게 할 것이다. 나는 유토피아를 제안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각각의 공동사회가 독자적인 사회적 장치를 선택할 수 있는 절차를 제안하는 것이다.

2. 나는 절제적 제도나 도구를 설계하기 위한 공학적 지침을 만드는 데 공헌하고자 원하지 않는다. 또한 실현되기만 하면 명백하게 더 나은 기술이 될 것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판촉활동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목적은, 사람들이 도구를 위해 조작당했음을 즉시 깨닫게 하는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절제적 생활방식을 필연적으로 없애는 인공물과 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불구화된 우리의 상상력은 누구나 갖고 있는 추리력마저 세계를 만드는 다른 사람들의 동등한 힘을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힘에 한계를 부과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고 본다.

3. 나는 도구 사용자의 성격구조가 아니라 도구의 구조에 초점을 맞추겠다. 산업주의적 도구의 사용은 각각 자체의 역사와 문화를 갖는 도시 풍경에 획일화라는 낙인을 찍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조건으로서 새로운 인간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 사회적 성격과 문화의 변화에 대해 아는 척 하지도 않겠다. 도구에 한계를 설정하고 절제의 공공복지를 추구하는 다원주의는 당연히 다양한 생활방식을 촉진하는 것이다.

4. 만일 내가 정치적 전략이나 전술을 다루고자 한다면, 내 논의의 핵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마오쩌둥 치하의 중국을 예외로 하면, 지금 현존하는 어떤 국가도 절제의 사회를 재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국가, 기업, 정당, 조직운동, 전문가라는 우리의 중요 도구의 관리자들이다. 이런 권력은 그들이 조직하는 성장지향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다. 지금 중요한 제도들은 기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향해 거대한 도구의 산출물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그러한 제도의 전복이란, 완전히 깨어 있는 사람들이 의미 있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도구의 사용을 조장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을 뜻한다.

5. 집합적인 도구가 사회 자체에 파괴적으로 되는 시기를 인식하게 하는 위한 방법론은, 분배와 참여의 정의라고 하는 가치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 도구에 부과되어야 할 필수적 억제를 파악하는 데에는 나의 간절한 설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간결한 설명은 또한 내가 이 책에서 어느 정도 수단을 목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6. 반산업주의적이고 절제적인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경제학은 무시될 수 없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모든 유형의 산업주의적 성장에 대해 정치적으로 정의된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기존의 많은 용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도 불평등이 제거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유효한 변화를 낳는 각 개인의 능력은 산업주의 이전의 시대나 산업주의적 시대보다도 더욱 클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 능력이 제한되기는 해도 일반적 도구가 원시적 도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효율적이고, 산업주의적 도구보다도 더욱 널리 분배될 수 있다. 그 도구의 생산물은 어떤 경우에는 다른 도구의 생산물보다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수단이어야 할 도구를 목적으로 삼아버린 공적인 전도를 인식하는 방법론은, 좋은 것을 돈으로 측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플라톤은, 나쁜 정치가란 그러한 측정기술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며 규모의 대소를 목적에 더욱 적합한 것으로 혼동하는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산에 대한 현재 우리들의 태도는 몇 세기에 걸쳐 형성되어 왔다. 제도는 우리의 수요를 더욱 더 많이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우리의 논리나 균형 감각조차 더욱 더 많이 형성시켜 왔다. 제도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수요하게 되자, 곧 우리는 그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고 믿게 되었다.

'도구'라는 말을 드릴, 그릇, 주사기, 모터와 같은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또는 자동차나 발전기와 같은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만도 아니다. 도구라는 것은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즉 나는 '도구'라는 단어에 콘플레이크나 전류와 같이 만져서 알 수 있는 유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생산 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 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체계도 포함시킨다.

내가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인공물이나 규칙이거나, 코드나 연상기호이든 간에, 합리적으로 고안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계획되고 설계된 수단 모두를, 기본적인 식료나 기구와 같이, 기존의 문화 속에서 합리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다른 물건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의 교과과정이나 결혼법은 도로교통망 못지않게 의도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고안물이다.

그래서 도구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개인은 도구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거나, 또는 수동적으로 그것에 의해 사용되는 것을 통해 행동하는 자신을 사회와 관계 맺는다. 그가 도구의 주인이 되는 정도에 따라, 그는 세계에 대해 자신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 그가 자신의 도구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에 따라 도구의 형태가 그의 자기 이미지를 결정한다. '절제적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각자에게, 각자의 상상력의 결과로써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드는 최대의 기회를 부여하는 도구다. 반면 '산업주의적인 도구'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가능성을 거부하고, 도구의 고안자들에게는 그들 이외의 사람들의 목적과 기대를 결정하도록 허용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구는 절제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3장. 다원적 균형



생물학적 퇴화

인간과 생태계 사이의 균형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계속 인정되어왔고, 급격히 사람들을 걱정하도록 만들기 시작했다. 환경의 악화는 극단적이고 너무나 명확하다. 몇 년간 멕시코의 자동차 교통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서서히 증가되었다. 그 후 2년 사이에 스모그가 내리고 곧 로스앤젤레스의 경우보다 더 나빠졌다. 이런 현상은 과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논의하고 이해할 수 있다. 미지의 효능을 가진 독극물이 지구의 생태계에 배출되고 있다. 그중 몇 가지는 회수할 방법이 없고 그중 몇 가지가 갑자기 복합작용을 일으켜 지구 전체가 바이칼호처럼 사멸할 수 있음을 예측할 방법이 없다. 지구는 인간의 집이다. 그 집이 이제 인간의 영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잉 인구, 과도한 풍요, 잘못된 기술의 연합이 환경의 균형을 파괴하는 세 가지 경향이라고 파악되고 있다. 환경 위기에 너무나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인류의 생존에 관한 논의는 도구가 위협하는 하나의 균형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차원에 대한 논의만으로는 무익하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경향 모두 각각 인간과 자연환경의 균형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 것으로 그 정체가 파악되어왔다. 과잉한 인구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한정된 자원에 의존하게 한다. 풍요함은 각자에게 더욱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잘못된 기술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퇴화시킨다.

생태적 균형의 재건은 증대되는 가치의 물질화를 무력화할 수 있는 사회의 능력에 의존한다. 그런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이 만든 출구 없는 인공물에 완전히 갇혀버릴 것이다. 자신이 만든 물질적, 사회적, 심리적 환경 속에 갇힌 인간은 자신이 수십만 년 동안 적응해온 오래된 환경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기술이라는 껍질 속의 죄수가 될 것이다. 인간만이 목적을 가지며, 인간만이 그 목적을 향해 일할 수 있다고 하는 재인식하지 않는 한, 생태적 균형은 재건될 수 없다. 기계는 오로지 인간을, 기계의 파괴적인 진보에서 무능한 협력자라는 역할로 축소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작용할 뿐이다.

근본독점

근본독점이란 말을 나는, 독점이라는 말의 일반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서, 하나의 생산에 의한 지배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독점'이라는 말은 하나의 기업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수단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뜻한다. 가령 코카콜라 사는 현대적인 수단으로 선전되는 탄산음료의 유일한 제조사가 됨으로써 니카라과 탄산음료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 네슬레 사는 코코아 원료를 지배함으로써 자사 제품의 코코아를 강요할 수 있고, 몇몇 자동차 제조회사는 다른 회사가 만드는 수입품을 규제할 수 있으며, 어떤 텔레비전 방송국은 면허를 취득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독점은 1세기 동안 산업 확대의 위험한 부산물로 인정되어왔고, 이를 규제하기 위한 법적 조치가 발전되어왔으나 그 대부분은 무의미한 시도로 끝났다. 이런 종류의 독점은 소비자에게 허용되는 선택을 제한한다. 심지어 그것은 소비자에게 시장에서 하나의 제품을 사도록 강요할 수 있지만, 동시에 다른 영역에서는 소비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 가령 목마른 사람이 차갑고 가스가 가득 찬 단 탄산음료를 마시고 싶을 때 한 가지 상표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그에게는 아직 맥주나 물로 갈증을 달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는 것이다.

학교는 그것을 교육이라고 재정의하여 공부에 대한 근본독점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교사의 재정의를 받아들이는 한, 학교 밖에서 배우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무교육자'라고 낙인찍힌다. 현대 의료는 아픈 사람들이 의사의 처방 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했다.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대형도구에 의해 배제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근본독점이 있다. 근본독점은 강제적 소비를 강요하고 이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 근본독점은 거대한 제도만이 공급할 수 있는 표준적 제품의 강제적 소비라는 수단에 의해 강요되기 때문에 하나의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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