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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지음 | 푸른숲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 지음

푸른숲 / 2010년 10월 / 267쪽 / 13,000원


들어가는 글_ 너흰 괜찮아

이 책은 덕성여대와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학생들과 함께 쓰고 토론하고 강의한 내용이다. 이 작업을 위해 나는 지난 2년간 학생들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판단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와 경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은 물론, 사랑과 연애, 가족과 소피와 같은 일상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생들은 매주 이러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경험하는지에 대한 글을 썼고,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학생들과 함께 그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경험하는지에 대한 글을 썼고, 분석하고 토론하였다. 이 책은 그 리포트 더미에서 추려내고 정리한 학생들의 이야기이자 그들과 나의 대화이고 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나에게 던진 질문들의 덩어리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담긴 이야기가 그저 몇몇 학생들의 사례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sample’과 ‘example’은 아주 다른 것이다. ‘sample’이 무작위로 뽑아내는 어떤 사례라고 한다면 ‘example’은 그 자체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례로 사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구체적 보편성, 즉 구체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이라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학문이란 ‘sample’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인 ‘example’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 보편성이 있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이야기, 즉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발설하였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언어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돌아봄으로써 세계와 자신이 어떻게 매개되어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회에서 학습된 언어, 주어진 언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언어에 대해 긴장하고 거리를 두게 된다. 이 거리만큼 주어지는 ‘빈’ 공간, 그것이 바로 자유의 공간이며, 주체란 이 거리 사이에서 탄생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리고 여기에 반전이 있다. ‘성장’이 도덕적 비난이 되어 이들을 언어 밖으로 내칠 때에 이들은 그 ‘성장’이 말하는 ‘성장’을 경험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없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다르게 ‘성장’해왔는지를 언어화함으로써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성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1부 어쨌거나 고군분투



대학1_ 우리를 위한 자리는 없다

대학 서열이라는 체제 : 인터넷 공간에서 대학생들이 벌이는 가장 뜨거운 논쟁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가 어떤 범주에 묶여야 하는가를 두고 싸우는 대학 서열 ‘배틀’이다. 매년 수능 결과를 놓고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로 시작하는 서열 논쟁이 시작된다. 대학생들은 훌리건 천국과 같은 인터넷 카페를 필두로 하여 다른 대학을 ‘까’고 전략적으로 ‘적의 적’을 옹호하는 ‘배틀’을 수행한다. 특히 비슷비슷한 성적대의 학교생들끼리 어느 학교가 더 나은지를 놓고 다투는 배틀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유치한 논쟁이야말로 학생들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가늠하고, 그 위치로 인해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를 적나라하게 확인하는 일이기에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다. 학생들이 서열에 목매고 분류에 나서는 것은 사회 전체가 대학을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는 곧 그 사람 인생 전체의 운명이 된다. 따라서 자신을 분류표에서 한 단계라도 더 위로 올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불황이 계속될수록 대학들도 자신들의 업적을 크게 선전해야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친’시장적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여기에는 명문대고 뭐고 예외가 없다. 그러려면 돈이 엄청 필요하다. 대학마다 기업의 돈을 유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대학이 기업을 인수하기도 한다. 분규에 휩싸여 있는 중앙대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은 중앙대를 ‘두산대’라고 부른다. 두산이 중앙대를 인수하고 박용성 전 회장이 이사장이 되자마자 기업식 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뽑기 위해서 단과대와 학과를 대폭 줄이고 경영학과를 수천 명까지 뽑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전교생 교양필수 과목에 회계학이 등장하였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이 모든 것이 대학의 서열을 높이기 위해서다. 박용성 이사장은 중앙대를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대보다 더 나은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공약하였다. 학생부터 대학, 기업까지 우리 사회는 모두가 대학 서열 놀이에 빠져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 대학에 입학하는가가 평생을 두고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 붙기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해도 서울대 출신이냐, 아니면 지방대 출신이냐에 따라 상당 부분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한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줄 동문들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생들은 과거처럼 자신들이 대학생이라는 이름만으로 동류의식을 갖게 되지 않는다. 얼마 전 있었던 고려대 학생 김예슬 씨의 <대학 거부 선언>에 386세대의 뜨거운 지지와는 달리 현재 대학생들은 그리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들이 ‘명문대생’ 김예슬에게 ‘대학생’이라는 동류의식을 가지기에는 명문대와 지방대 사이의 간극은 지나치게 크다.



대학2_ 우린 아직 인간이 아니다

잉여가 된 ‘지성인’ : 대학생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더 이상 사람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제구조의 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대학생 인플레이션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1990년도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대학 진학률은 30%대였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서 이 비율은 80%대를 넘나들고 있다. 그러니 학생들 말마따나 길바닥에 채이는 것이 대학생이다. 고뇌하는 엘리트나 지성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아졌다. 스스로를 자학적으로 잉여라고 부르는 대학생들은 듣기 좋은 말로라도 자신을 지성인이라고 부르는 데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대학생들이 ‘젊음과 패기와 열정으로 뭉친 꿈꾸는 존재’라는 말은 흘러간 옛말이다. 이들 스스로 자신들을 ‘마치 대학 1학년은 고등학교 4학년처럼’ 되어 ‘성인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어리기 그지없는 미숙한 존재’라고 인정한다. 이들이 경험하는 대학생이란 미성년으로서의 청소년기와 단절한 성숙한 성인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대학생들은 자기 의지와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에게 의존해서 살아간다.



- 대학생은 청소년에게는 수능이라는 통과의례를 마친 해방인들이자 과거를 깨끗이 잊어버린 배신자들이다. 또래 대학생들에게는 군대, 연애, 취업, 어학공부, 동아리, 야구 등을 안주 삼아 같이 술 마실 수 있는 답이 안 나오는 친구들이다. 그들에게 형이자 누나이며 부모이기도 한 중년인 당신들이 보기엔 철이 없고, 공부에 관심이 없으며, 놀기 좋아하는 망나니 혹은 천덕꾸러기이다. (혈연관계에 있는) 장년에게는 손자·손녀로 노인정이나 종교 활동 등에서 다른 동년배의 손자·손녀보다 학벌이 좋거나 내세울 만한 사회적 성과(해외봉사 활동 따위)가 있을 때만 예쁘고 자랑스러운, 데리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싶은 존재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경우에는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그냥 착한 손자·손녀가 된다. 대학생이 아닌 또래(직장인)에게는 전화해서 술 사달라고 조르는 밥버러지들이나, 그치들이 졸업하고 취업하고 나면 부러워질 것 같아 생각하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놈들이다. 동시에 대학생이 되고 싶으나 아직도 수능을 보는 장수생에게는 대학 생활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을 동시에 품게 한다. 졸업 후 백수, 백조들(청년 구직희망자들)에게는 한창 좋을 때를 살고 있는 돌아가고 싶은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현역)군인에게는 천국에 사는 주민들이며, 왜 장학금을 못 받는지 이해가 안 되는 불가사의한 존재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대학생 중 남자의 경우 군복무 전후 복학을 기준으로 처우와 호칭이 달라짐을 느꼈다. 오빠나 형에서 아저씨와 형님으로 호칭이 변한다. 그리고 복학 후 학교에서 혼자 다니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즉, 대학생은 무척 다양한 층위를 가진 존재이다. - 현택



현택이 위트 넘치게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대학생들이 보는 대학생이란 과거처럼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만 사적으로 맺어진 수많은 관계에서 상대방의 사적인 욕망과 이해에 따라 ‘배신자’에서 ‘밥버러지’까지 다양하게 불리는 타율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 모든 호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성장이 정체된 ‘잉여’이다. 대학생에 대한 호칭은 ‘지성인’에서 ‘잉여’로 넘어갔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잉여라는 말만 나와도 까르르 넘어간다. 그 웃음에는 자신들이 이 사회에서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에 대한 서글픈 인식이 들어 있다. 남아도는 인생이기에 이 사회에 필요한 그 무엇도 아니다.



2부 뒷문으로 성장하다



교육_ 학교라는 이름의 정글

는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다. 졸업을 앞둔 6학년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우리의 먹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는 뜻에서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돼지를 같이 키워보자고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학교, 불편해하는 학부모를 앞에 두고 아이들은 일단 시작해보기로 결정한다. 아이들은 돼지에게 P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P짱은 곧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가장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아이들이 P짱에게 지나치게 밀착되자 학부모들의 항의가 시작된다. 어느새 졸업이 다가와 더 이상 P짱을 보살필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은 P짱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격론을 벌인다. 어떤 아이들은 애초에 데리고 온 이유가 먹기 위해서였고 우리가 먹는 것도 P짱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P짱에게 정이 든 아이들은 P짱은 이미 돼지고기가 아니라며 절대 먹을 수 없다고 반대한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학급회의가 소집되고 식육센터로 보내자는 의견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 사이에 격론이 벌어져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지만 결과는 딱 반으로 갈린다. 결정의 캐스팅보트를 쥔 담임교사는 결국 P짱을 식육센터로 보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영화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함께 막을 내린다.



상실, 성장의 조건 : 너무 당연한 말이겠지만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장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일곱 살부터 서른 살이 다 되도록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과거에는 성장을 위한 교육이 삶의 곳곳에서 이루어졌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성장을 독점한 곳은 학교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지식부터 교양, 사람을 사귀는 법, 권력관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학습한다. 때로 이 공간에서 실패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학교가 교육의 공간이고 이 교육을 통해 우리 대다수가 사회의 구성원이자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교실에서 돼지를 키운다는 재밌는 발상에 근거한 영화 는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성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중요한 키워드가 영화의 중심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상실과 자기 세계의 붕괴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낯선 존재와 부딪치면서 나의 존재와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경험한다. 익숙한 것, 관계를 맺고 있던 것과 이별하고 새로운 것, 낯선 것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관계의 단절은 세계의 붕괴이며, 이 붕괴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인간은 성장해나간다. 상실이 없다면 성장도 없다. 상실과 만남 사이, 붕괴와 창조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 용기를 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엉뚱하게도 한국 교육의 폭력, 혹은 교육이라는 폭력에 대해 격렬한 감정을 표출하였다.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 : 학생들에 따르면 동등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생명, 이 생명의 상징이 바로 P짱이다. 학생들은 묘하게도 P짱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어떤 학생은 P짱은 동료라고 불리지만 그 운명이 그를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친구이자 학생이자 자식인 ‘인격적’인 존재로 대접받지만 정작 그 관계 어디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또 아이들이 돼지를 P짱이라고 부르는 순간 생명은 위계화 된다. 학생들이 간파해낸 것은 이런 ‘특별한’인격적 관계의 형성은 반드시 생명의 위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한 학생은 “똑같은 생명이라도 자신과의 추억이 있는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은 다르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환기시켰다. 이 학생은 “그렇다면 인간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덜 소중하단 말”도 가능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돼지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이러한 말에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의 대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P짱이 분류되고 배치되는 방식을 보면서 몇몇 학생들은 자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분류되고 어디에 배치되는지를 다시 상기하였다. 한 학생은 P짱이나 자신이나 똑같이 경계에 선 존재라고 말한다. P짱이 식용동물에서 애완동물로 옮겨가면서 교실에 일대 혼란을 가져온 존재라면, 자신은 연세대와 원주캠퍼스라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라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존재이고 경계를 흩트리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자신의 위계를 결정하는 분류표는 이미 정해져 있으며, 이 분류표에서 어디에 배치되는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P짱과 자기들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P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학생들에 따르면 그는 결국 식용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닌 교육용 실험동물이었던 셈이다.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백해야 하는 것은 P짱이 아니라 오히려 P짱을 둘러싼 모든 사람이 생명을 다루는 자신의 윤리를 고백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백해야 하는 것은 소속 변경과 편입을 시도해야 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경계를 넘게 하는 이 사회의 작동 방식이 가진 윤리이다.



사실 학생들의 글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학생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폭력을 경험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불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한국의 낙후한 교육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이다. 교육 자체의 정당성이 흔들리고 있다. 이들은 교육이 과연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어찌 보면 학생들은 교육의 실체가 폭력이라고 교실에서 몸으로 깨달아버렸는지도 모른다. 교육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초월한 척하지만 권력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 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기 때문이다. 훈육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은가? 만약 훈육이 아닌 교육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세상에 폭력적인 교육과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 그 자체가 폭력임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사랑_ 이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요즘 젊은이들이 사랑하고 실연하는 방식은 어른들에게는 몹시 당혹스럽다. 청소년 성교육과 관련된 토론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 어머니가 7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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