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유언
허무평 지음 | 비아북
황제의 유언
허무평 지음
비아북 / 2010년 5월 / 328쪽 / 14,000원
2세 황제가 뒤바뀐 사연은? - 진나라 시황"공자 부소는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장례를 치르라!" -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
후계자 문제, 수렁에 빠지다 진시황에게는 2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사서史書에 자주 언급되는 이는 장자 '부소'와 막내아들 '호해'였다. 이 두 사람이 진시황의 여러 자식 가운데 황위를 이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부소는 장자였으니 이치 상 당연했고, 호해는 진시황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으므로 인정 상 가능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 두 아들이 전혀 눈에 차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부소는 천하에 영락없는 불효자였다. 호해는 진시황이 가장 아끼는 아들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바로 호해가 결코 황제감이 아니라는 것을 진시황이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진시황은 호해를 교육하는 '조고'가 자기 아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그것은 죄다 사람을 괴롭히는 형벌과 음탕한 기교였다.
후계자에게 실망했다면 다른 후계자를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진시황은 포기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방법을 찾아 이런 난국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 방법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불로장생약을 찾고 자신의 휘황찬란한 업적을 빛내는 데만 온 힘을 기울였다.
등 돌린 '삼인행'진시황은 자신의 몸이 점점 나빠질 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으며, 위대한 사람이건 미천한 사람이건 죽음의 관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시황 37년 7월 그는 옥새를 관장하고 기밀 사무를 담당하던 조고에게 명하여 장자 부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함양에 모여 나의 장례를 거행하라." 이것이 곧 진시황의 정치적 유언이 되었다. 사마천의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 간단한 유언 속에 담긴 중요한 정보를 누구든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사기》〈이사열전〉에는 또 "병권은 몽염에게 넘겨라"라는 기록이 있다. 물론 고쳐진 진시황의 유언이 어떤 내용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 후 진나라에는 아주 유명한 '삼인행三人行'이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세 사람은 바로 조고, 이사, 호해이다. 조고는 본래 조趙나라 귀족의 먼 자손이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한 후 그는 거세를 당해 진나라 궁궐의 종으로 충원되었다. 조고는 진시황이 호해를 매우 아끼는 것을 보고 전심전력으로 호해를 모셨다. 조고는 진시황 사후 유조를 들고 호해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황상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오직 부소에게만 편지를 주셨습니다. 그가 일단 함양에 도착해서 황제에 오르게 되면 공자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에 호해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부왕께서 막 세상을 떠나 아직 발상도 하지 않았고 상례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승상의 동조를 구할 수 있겠소?" 조고는 말했다. "시간은 금입니다. 공자께서 이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호해가 마침내 동의하자 조고는 황급히 승상인 이사에게 달려가 말했다. "내가 이렇게 대담한 말을 꺼내는 것은 사실 당신을 위해서요. 부소가 황위를 이으면 그와 사이가 막역한 몽염(북방대장군)이 분명 승상이 될 것 아니요? 한 번 잘 생각해보시오. 당신의 재능이 몽염과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사는 화가 났지만 그 말이 사실이었으므로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고는 이사, 호해와 입을 맞춘 후 부소에게 줄 조서를 위조하고 그 위에 황제의 옥새를 찍어 봉했다. 조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현재 부소와 장군 몽염은 수십만 군대를 거느렸지만 국경 밖으로 진군하지도 못한 채 다치는 병사들만 속출해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했다. 부소는 자식 된 자로서 불효를 범했으니, 검을 내려 자살을 명하노라! 장군 몽염은 그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고 신하된 자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함께 자살을 명한다." 호해의 신하가 이 조서를 들고 부소에게 전했다. 부소는 이것저것 생각도 해보지 않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살을 명하셨는데, 그 말씀을 따라야지." 그러더니 바로 목숨을 끊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고 치를 떨었다. 이런 어리석은 사람에게 제국을 맡겼다면 진나라의 미래 역시 불을 보듯 뻔했을 것이다.
사신이 돌아와 이 상황을 호해, 이사, 조고에게 보고하자 세 사람은 크게 기뻐했다. 함양으로 돌아와 장례를 발표한 후 태자 호해가 이세二世 황제에 올랐다. 그리고 조고를 낭중령에 임명하여 항시 궁중에서 황제를 모시도록 했다. 이로써 조고는 조정 대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조작된 유언, 어떻게 가능했을까?진시황이 남긴 유언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진나라는 법으로 나라를 세우고,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진시황의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이미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진시황은 최후의 순간에 어쩌면 이 점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설사 이를 깨닫지 못했다 해도 나라를 장자인 부소에게 맡기려고 했던 것은 당시가 됐든 후대가 됐든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다. 관건은 이 유언이 그의 생각대로 실천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 그는 조고가 유조를 고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조고가 감히 유조를 고친 데는 탐욕스런 마음도 한몫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소에 대한 진시황의 태도였다. 특히 관건이 되는 것은 조고가 진시황과 부소에 대해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조고가 비록 부소, 몽염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했다고 해도, 이것이 유조를 고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국의 밀실 정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정치 형태는 중국 군주제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다. 진시황의 서거 소식이 즉시 공포됐다면 부소가 과연 자살했을까?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 제국은 필연적으로 밀실 정치의 숙명을 띠고 있었다. 군주 중심의 전제 정치는 군주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었으므로 어떤 일도 백성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공자가 "백성이 이치에 맞게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일일이 알게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 것도 대강 이런 뜻일 것이다.
제왕의 과업을 가능한 한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은 어떤 면에서 잠시 동안의 형세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폐단이 너무 두드러진다. 진시황의 유언은 하나의 게임을 연상시킨다. 최초로 게임에 참가한 사람이 귓속말로 두 번째 사람에게 어떤 말을 전달하고, 두 번째 사람이 다시 세 번째 사람에게 이 말을 전달하는 게임 말이다. 마지막 사람에게 이 말이 전달됐을 때 그 말은 분명 처음에 했던 말과 다를 것이다. 이는 정보의 단방향 전달로 설사 악의가 없다 해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전달하는 사람이 나쁜 마음을 품었다면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영원한 유씨 천하를 만들어라! - 한나라 유방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 한다면 천하가 함께 그를 공격하라."- <사기,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
유씨 천하를 위한 첫 번째 유언 - 백마의 맹세
유방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한고조 12년 3월 중순에 중병을 핑계로 조정 대신들과 부인인 여후를 한 데 부른 다음 백마 한 마리를 죽이고 하늘에 맹세했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백마의 맹세'이다. 백마의 맹세에는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는 대신들에게 나라를 길이 보존하겠다는 맹세를 받은 것이다. 그래야만 대신들과 그 자손들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둘째는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 한다면 천하가 함께 그를 공격하고, 공적이 없는 자가 제후가 되려 한다면 천하가 함께 그를 토벌하라는 것이다.
한나라가 공신들을 후대한 것은 그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이자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려 한다면 천하가 함께 그를 공격하라"는 유언을 실현하는 기초가 되었다. 후자가 물론 백마의 맹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로써 백마의 맹세는 한나라의 상방보검(尙方寶劍, 황제가 사용하는 검으로 최고의 권위를 상징한다)이 되어 한나라에 다른 뜻을 품은 자는 이 보검 아래에서 심사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검이 효과를 발휘했다. 여후가 자신의 친척을 왕에 봉하려 하자 승상 왕릉이 펄쩍 뛰며 큰소리로 진평과 주발을 꾸짖었다. "당신들은 설마 그때 선제와 피를 나누며 했던 맹세를 잊은 것이오? 지금 선제가 돌아가시고 여후가 선제의 맹세를 어기려 하는데도 이를 제지하지 않으니, 훗날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제를 뵐 수 있겠소?" 여후의 제안은 끝내 강행 처리됐지만 이러한 왕릉의 태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여씨 일가에게 분봉하는 행위가 영원히 불법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는 나중에 여씨 일가를 궤멸하는 데 현실적인 명분이 되었다.
유방은 결코 신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었다. 유방이 백마를 죽여 대신들과 맹세한 가장 큰 이유는 진나라 멸망의 역사를 거울로 삼아 이성 왕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공적이 탁월한 공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유방이 유씨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채택한, 매우 영향력 있는 최후의 전략적 조치였다.
절망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택 - 촉나라 유비
"그대의 재주는 조비보다 열 배나 뛰어나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유선이 보좌할 만하다면 그를 보좌하고, 그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다면 그대가 황제 자리를 취하시오." - <삼국지三國志, 촉서 書, 제갈량전> -
뼈 있는 유언유비에게 황제의 길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공적이었다. 그는 두꺼운 낯짝에 의지해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데 꽤나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동오 토벌에 나섰다가 된통 패하고 말았다. 거느리고 간 장수와 병사 태반이 죽거나 다쳤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마저 경각에 달리고 말았다. 그가 패잔병을 이끌고 백제성으로 퇴각했을 때는 이미 죽음이 임박해 있었다. 그해가 바로 223년(촉한 장무章武 3년)이었다. 그는 제갈량을 불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2,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대의 재주는 조비曹丕보다 열 배나 뛰어나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대사를 이룰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유선劉禪이 보좌할 만하다면 그를 보좌하고, 그의 재주가 미치지 못하다면 그대가 황제 자리를 취하시오."
훗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다. 첫 번째 견해는 유비가 제갈량을 크게 신임하여 대범하게 이 말을 꺼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정반대로 유비가 제갈량을 완전히 믿지 못해서 제갈량이 무거운 짐을 진 채 오직 유씨 천하를 위해 죽을 때까지 몸을 바치게 하려고 이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유비가 제갈량의 속내를 떠보았다는 설이다. 만약 제갈량이 그 자리에서 얼굴에 희색을 띠면 당장 목을 베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신빙성이 거의 없다. 그가 정말 유비의 나라를 빼앗을 마음이 있었다면 그리 급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네 번째 견해는 이렇다. 제갈량에게 유비의 아들 중 하나를 골라 황제로 삼으라는 말이지, 결코 제갈량이 황제가 되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견해든 유비는 절대 자신의 나라를 제갈량에게 물려줄 마음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는 유비가 설사 동오에 바보같이 패했다 해도 신하들은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그는 말끝마다 유방의 한실漢室 천하를 부흥하고자 부르짖으며, 유방이 대신들과 약속했던 말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바로 "유씨 아닌 자가 왕이라고 칭하면 천하가 모두 그를 공격하라"였다. 왕을 칭하는데도 공격을 당하는데 하물며 황제는 말해 무엇하랴!
제갈량이 권력을 넘겨주지 않은 이유는?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에 몸 둘 바를 몰라 나라를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한편, 죽을 때까지 대권을 독점하고 손에서 권력을 놓지 않았다. 유선은 명목상으로 국가원수였을 뿐, 실질적인 집권자는 제갈량이었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유선이 조정 일에 서툴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유선은 정식으로 태자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다년간 유비를 따라다니며 곁에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정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왜 죽을 때까지 정권을 유선에게 돌려주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제갈량이 맡은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이 매우 멀었다. 유비가 전쟁에서 패한 대가는 형주를 잃는 데 그치지 않았다. 유비가 죽은 후 촉나라는 민심이 불안해지고 사병의 수 또한 급격히 감소했다. 이는 국가에 잠재된 불안정한 요소들이었다. 제갈량은 <출사표出師表>에서 이렇게 밝혔다. "선제께서는 신이 신중한 사람임을 아셨기 때문에 붕어崩御를 앞두고 신에게 대사를 맡기셨습니다.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선제의 영명함에 누가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최선의 선택, 그러나 제갈량의 한계유비의 유언 첫 구절은 "그대의 재주는 조비보다 열 배는 뛰어나다"였다. 유비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그는 제갈량이 북상하여 조위를 공격하길 바란 것 같다. 실제로 제갈량도 그렇게 했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제갈량의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삼국지』의 저자는 제갈량을 "제갈량은 다스림이 무엇인지 아는 걸출한 인물로서 관중管仲, 소하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음에도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임기응변이나 장수로서의 지략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라고 평했다.
당시나 후대를 막론하고 제갈량은 재상의 재주는 지녔지만 장수의 재주는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제갈량 본인은 평생토록 이를 모두 겸비했다고 여겼다. 그래서 정무는 물론 군대 업무까지 자신이 직접 관여했다. 남중南中에서 맹획孟獲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그는 친정을 결심했다.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간곡히 애원했지만 그는 이 임무를 맡길 사람이 없다며 기어코 출정에 나섰다. 그야말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유비가 줄곧 제갈량을 신처럼 받들었기 때문에 우리도 여기에 동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과대 포장된 인물일 뿐이다. 저자가 보기에 유비는 결코 제갈량을 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제갈량이 한실을 중흥할 수 있으리라고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발언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비의 유언은 "절망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실현될 가능성은 없었지만 각자가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한다면 차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신앙과 단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힘! - 몽골 제국 칭기즈칸
"아마도 내 목숨이 곧 다할 것이다. 다행히 하늘의 도움을 입어 너희들을 위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으니, 나라 안에서 변방까지 말을 타도 일 년은 너끈히 걸린다. 너희들이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고 잘 보존하려면 반드시 한마음이 되어 적을 물리치고, 오로지 너희들의 친구를 위해 부귀를 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중 한사람이 제위를 이어야만 한다. 내가 죽으면 오고타이가 칸에 오르도록 하라. 절대 내 유명을 어기지 마라." - <몽골비사蒙古泌史> -
형제들이 결정한 후계자'가장'의 입장에서 그가 오고타이에게 칸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은 '말자 상속' 전통에 위배되었다. 몽골 가정에서는 보통 아들들이 장성해서 새로운 부족을 일구고, 막내아들이 남아서 아버지의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다. 다음으로 '군주'의 입장에서 오고타이를 왕으로 세우려는 것은 몽골의 '후리러타이' 제도와 배치되었다. 대칸에 선출되려면 각 부락과 부락 연맹의 의사회인 후리러타이의 추천을 받아야만 한다. 후리러타이는 간단히 말해 몽골 귀족이 한데 모여 수장을 추천하는 회의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군대를 포함한 칭기즈칸의 재산은 반드시 툴루이(네 번째)가 물려받아야 하고, 그가 선택한 오고타이가 대칸에 오르려면 반드시 후리러타이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