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 문자
왕예린 지음 | 애플북스
영혼을 훔친 황제의 금지 문자
왕예린 지음
애플북스 / 2010년 11월 / 284쪽 / 14,000원
지식과 문화를 짓밟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_ 시황제 외중국 역사상, 가장 가혹하고 거대한 문자옥을 만든 사람은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일 것이다. 그는 지식인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을 탄압하고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가 저지른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문자옥이다. 사실 분서와 갱유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르다. 분서를 일으킨 사람은 이사(李斯)였고, 갱유를 일으킨 사람은 시황제 자신이었다. 이사는 두 가지 이유로 분서를 일으켰다. 첫째, 시황제에게 흑백을 구분하고 최고의 존엄을 세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둘째, 자신의 기득권을 더욱 확고히 하려면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적대세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이었다.
분서의 배경부터 알아보자. 때는 시황제 34년. 함양궁(咸楊宮)에서 열린 연회에 박사(博士) 70명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주연을 즐겼다. 그러던 중에 주청신(周靑臣)이 분위기를 돋우고자 시황제의 업적을 크게 칭송하기 시작했다. "황제께서 기존의 제후제를 군현제로 바꾸셨으니 앞으로 전쟁 걱정은 사라지고 백성도 모두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로부터 지금껏 그 누구도 못한 것이니 누가 감히 대왕의 위엄에 맞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주청신의 말을 반박했다. "군현제로 수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옵니다. 앞으로 나라에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면 누가 황제를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주청신은 대왕의 과오를 가리고 오히려 이를 더욱 부풀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아부만 떨고 있으니 저런 자가 대역 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시작된 논쟁으로 연회에 참석했던 대신들이 두 파로 나뉘었다. 사실 이 논쟁은 진나라 건국 초기 일어났던 논쟁이 되풀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을 때, 승상(丞相) 왕관을 위시한 일부 관료들이 주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연(燕), 제(齊), 초(楚)나라를 여러 왕자에게 나눠주고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사는 홀로 이에 반대했다. 그런데 다시금 제후제와 군현제 논쟁이 일자 이사는 당연히 주청신의 편에 섰다.
진나라는 법가(法家)통치를 실시했다. 당시 산동육국(山東六國) 가운데 진나라는 왕권에 의한 극단적인 전제 정치, 잔혹한 형벌 제도를 실시하고 있어 '호랑이와 승냥이가 날뛰는 나라'로 불렸다. 천자(天子)는 천한 백성 위에 서는 자라고 생각하는 이사의 전제적인 정치관은 인의(仁義)로 민심을 얻어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자와 맹자(孟子)의 유가(儒家)적 정치관과 대립한다. 왕도정치로 대표되는 유가와 전제 정치로 대표되는 법가는 오랫동안 치열한 이념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이는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언제나 이상보다는 현실이 앞서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이념만으로 채택되었을 뿐이고 현실에서는 항상 법가가 왕실의 '총애'를 받았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정통파인 유가는 비록 조정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사를 위시한 순파(筍派) 유학과 법가 학파에 견주어 항상 열세였다. 계속되는 열세 속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유교학파가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의 끈을 끝내 놓지 않자 자기 방어에 나선 이사는 숙적을 물리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던 중 드디어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시황제와 여러 박사들이 대면하여 군현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이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었으니 흑백을 구분하고 최고의 위엄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각 학파가 황제의 결정을 놓고 걸핏하면 논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황제의 위엄이 흔들리면 나라를 지키는 주된 세력은 힘을 잃고 조정을 지키는 당파의 수준도 떨어져 제국의 무궁한 안녕과 번영이 방해를 받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엄격한 금서(禁書)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사관들의 장서(藏書)는 오직 진나라의 것으로만 한정하고, 다른 나라에 관한 장서는 모두 불태워야 합니다. 세상이 있는 시(詩), 서(書), 백가(百家)에 관한 글은 모두 지방관에게 제출하여 불태워야 할 것입니다. 무엄하게도 나라에서 정한 법을 어기거나 옛것만 들먹이는 자들이 있다면, 지위를 빼앗거나 멸족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30일이 지나도 책을 태우려 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4년 부역형을 내려 만리장성을 쌓고 있는 변방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남겨두어야 할 것은 오로지 의학과 약학, 점술, 농사에 관한 책이어야 합니다."
이사의 주장은 한때의 충동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더욱 견고히 하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남몰래 세운 치밀한 음모였다. 후대에 나온 이사에 관한 평가 중에서는 사마천(司馬遷)의 평이 가장 공정하다. "이사는 군주의 결점을 보완하고 정치를 공명정대하게 펼치는 데 힘쓰지 않았다. 나라에서 주는 많은 국록을 탐하며 군주에게 아부하고 구차하게 영합하고 엄격한 형벌을 실시했다. 세상은 그가 충성을 다하고도 처형을 받았다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다. 그렇지 않다면 이사의 공이 어찌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같지 않겠는가? 이사와 주공, 소공 모두 나라를 세우는 데 큰 힘을 쓴 중신이다. 하지만 주공과 소공은 모두 겸손하고 자신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이사는 국록과 관직을 탐했다.
분서가 개인의 탐욕과 왕권 강화를 위해 오랜 세월 치밀하게 준비된 것과 달리 갱유는 그저 화풀이나 보복, 전제 정치에 대한 비방을 막으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시황제 34년의 분서에 이어 35년에 일어난 갱유는 시황제의 명령으로 진나라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시황제는 애당초 유생이라는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시황제 26년, 봉선(封禪) -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 - 을 하기 위해 시황제가 태산을 찾았을 때 노나라와 제나라에서 온 유생 70명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의례를 들먹이며 앞다투어 상소를 올렸다.
화가 난 시황제는 유생들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명하고 자신만 산에 올랐다. 태산에서 봉선을 올린 후 시황제는 서시(徐市)에게 선산(仙山)을 찾으라고 명했다. 선산을 찾아 진나라를 떠난 서시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7년 동안 시황제는 불로장생을 이루게 해줄 불로초를 찾기 위해 전국을 뒤졌다. 이 일을 알게 된 후생(候生)과 노생(盧生)은 몰래 어리석은 시황제를 비난했다. "시황제는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고 이기적이니 마치 옥리(獄吏)와 같다. ……백성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고 그 위에 위엄을 세우려 하니 천하가 죄를 짓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구나.…… 권세를 이리 탐할지니 어찌 선약(仙藥)을 구할 수 있으리오?"
시황제에게 크게 실망한 두 사람은 조용히 함양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시황제는 노발대발했다. "선산을 찾아 바다를 건너간 서시는 소실도 없이 그저 내 돈만 갉아 먹고 있구나. 후생과 노생도 모두 도망쳤으니 유생이라는 자들은 모두 사기꾼이렸다!"
설상가상 자신의 주요 업적이라 할 만한 군현제에 대해 유생들이 계속해서 케케묵은 옛 경전을 끌어들여 왕명에 대항하자 시황제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시황제는 나라를 어지럽히고 왕권을 약하게 한다며 유생 460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으라고 명했다. 시황제의 장자(長子) 부소(扶蘇)는 이를 극구 말리다가 미움을 사서 몽염(夢恬)장군이 있는 곳으로 좌천당해 만리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되었다.
분서의 목적은 사상의 통제, 갱유의 목적은 왕권 수호였다. 이를 위해 이사는 시황제의 '권위'를, 시황제는 이사의 '계략'을 이용했다. 그들은 조용히 손을 잡고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을 만들어 자신들의 '사냥감'을 제거했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귀중한 사료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분서갱유를 일으킨 자들의 목적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갱유가 일어난 지 2년 후 시황제는 세상을 떴고, 천하를 호령하던 진나라는 그로부터 3년 후 멸망하고 말았다. 평생을 바쳐 세운 제국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줄 시황제는 과연 알았을까? 당나라의 장갈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잔혹한 사태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죽간과 백서를 불태우니 황제의 위업도 재가 되었다.
용의 조상 진시황의 터를 지키던 황하의 합곡관은 텅 비었네.
분서의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산동에서는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났으니,
진나라를 무너뜨린 유방과 항우는 글 읽는 선비 출신이 아니었거늘.
이 시는 절대 불변의 진리를 정확하게 집어냈다. 즉 지식과 문화를 짓밟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봉건 사회에서 일어난 반역의 주인공은 지식인이 아니라 책을 읽지 않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백성을 위해 웅얼거리기라도 해주시오
밀은 아직 푸르고 보리는 말라 비틀어졌네.
어찌하여 아녀자들이 수확을 하고, 장정들은 서쪽에 가서 오랑캐를 부수고 있는가.
그럼에도 관리는 말을 사고, 세도가들은 수레를 타고 다니네.
청컨대 세도가들에게 목소리를 드높여주시오.
이 동요가 탄생한 시기는 후한 환제의 집권 초기였다. 양주지역의 강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폭동을 진압하는 정부군이 반정부군에 연패하면서 전쟁이 길어질 조짐을 보였다. 결국 집집마다 남자들은 징집되었고 각종 무기 등도 민간에서 충당했다. 나라 전체가 전쟁 준비에 돌입하자 보리 수확 등 농사일은 어쩔 수 없이 여인네의 몫이 되었다.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의 가슴에는 조정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쌓였지만,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이렇듯 백성들이 정부에 대한 불만을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은 후한 말엽의 공포정치 때문이었다. 《후한서》<혹리전서(酷吏傳序)>에 따르면 '광무제(光武帝)의 중흥(中興)' 이후 각종 법령이 엄해지면서 중국 역사상 다시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압적인 정치가 행해졌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관리들이 흉포하기 이를 데 없어 제대로 조사도 해보지 않고 무조건 백성을 탄압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꾀를 부려 가문을 멸족하는 일이 허다했다. 하룻밤 사이에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언론의 자유는 일찌감치 자취를 감췄다. 자칫 잘못 걸리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기는 황실의 친척도 예외가 아니었다.
광무제의 사위 양송(梁松)은 경서(經書)에 박식하여 광무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광무제는 세상을 뜰 때 양송을 내각 대신으로 명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광무제 덕분에 벼슬길에 나선 양송은 서신에서 조정의 일을 논하다가 고발되어 결국 파면되었고, 이 일로 조정에 큰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제(明帝) 영평(永平) 5년(63년)에 양송은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함부로 내걸었다는 죄목으로 하옥되었다. 익명으로 걸린 글의 내용은 아쉽게도 알 수 없다. 광무제 사후 등극한 명제는 선제(先帝)가 아꼈던 황실의 부마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감옥에 가두고 죽여 버렸다. 아마도 양송은 익명의 글로 목숨을 잃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인물일 것이다. 양송은 처형을 당했고 그의 동생 양송과 양공도 모두 화를 당했다.
자고로 나랏일은 함부로 논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특히 나랏일을 맡은 사람이라면 마구잡이로 떠들어서는 안 될 것이고, 나랏일을 하는 사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도 안 될 것이다.
역사를 입맛대로 요리한 간신진회(秦檜)는 번방(番房)과 손잡고 악비를 음해한 간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가 문자옥을 더욱 진화시키는 데 일조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먼저 남송 소흥(騷興) 24년(1154년)에 있었던 하태(何兌)와 관련한 사건을 통해 진회가 얼마나 대담하고 교묘하게 문자옥을 일으키고 활용했는지 살펴보자.
하태는 평범한 관리로, 남송 초기에 이름을 널리 알렸던 마신(馬神)의 제자였다. 마신이 죽자 하태는 스승 마신의 생애와 업적을 자세하게 기록한 전기를 썼다. 책이 완성되자 진주통판이 진회에게 이를 보고했는데 책을 읽어본 진회는 크게 노하여 즉각 하태를 옥에 가뒀다. 도대체 책에 어떤 내용이 있었기에 진회가 그토록 분노했을까? 이를 알려면 먼저 남송 왕조의 창립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진회와 그 당인들은 남송 왕조가 세워지기까지 자신들이 가장 큰 공로를 세웠다고 자부했다. 특히 진회는 자신이 금나라와 목숨을 내걸고 싸워 조씨왕조의 명맥을 남겨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남송 왕조가 세워지고 고종이 보좌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태가 쓴 마신의 전기는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금나라는 변량을 포위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삼은 뒤 자신들의 명령을 받들 사람을 찾았다. 금나라로서는 언어와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송나라를 직접 통치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따라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친금(親金)정책을 실시할 수 있는 사람을 대신 세워 황하 이북 땅을 다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할지 고심하고 있을 무렵, 황실에 충성하는 대신들은 당연히 조씨가 황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금나라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 정부는 더 이상 조씨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다른 성(姓)에게 황위를 건네주기로 결심한 터였다. 상반된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즈음, 송나라로 돌아온 상서원외랑(尙書員外郞) 송제유에게 금나라가 그의 의견을 묻자 송제유는 '장방창'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자신의 뜻을 알렸다. 결국 금나라 정부는 장방창을 황제로 삼고 국호를 '대초(大楚)'로 정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신은 문무백관들 앞에 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간관(諫官)인 우리가 어찌하여 이를 가만히 두고 보고만 있단 말이오?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마신은 어사 오태약, 진회와 논의 끝에 조씨의 명맥을 보존하고 장방창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다. 금나라가 변량을 함락하기 전에 금나라와 사투를 주장하기도 했던 진회는 당시 금나라 정부에 대해 상당히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정방창을 보좌에 올려야 한다는 상주문 쓰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장방창이 나라와 백성을 해하려 한 증거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바람에 결국 금나라 정부의 화를 사 붙잡히기도 했다. 한편 마신은 평화로운 투쟁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통제(統制) 오영(吳榮)과 함께 몰래 병사를 몰아 포로로 끌려간 휘종과 흠종을 구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방창이 황제로 등극하자. 마신은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라는 내용을 딱딱한 어조로 눌러 담은 서신 한 통을 써 내려갔다. "하늘을 속일 수 없고 백성의 힘은 무서운 법이오. 그대가 만일 지금이라도 부족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 한다면 화가 복이 될 수 있을 것이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순간에도 마신은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나, 마신은 결코 그대를 도와 송나라의 역적이 되지 않을 것이오. 그 마음을 알리는 뜻에서 먼저 엎드려 죽을 것을 청하는 바요."
서신을 쓴 마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뜻이라면 서명하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 선뜻 이름을 적지 못했다. 진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마신 혼자 황궁으로 가 자신의 서신을 황제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은대사(銀臺司)의 관리는 마신의 서신을 읽어본 후 접수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화가 난 마신은 "내가 지금 신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자로 인해 뜻을 꺾어야 하는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도발적인 마신의 서신을 받고 마음을 한껏 졸인 끝에 장방창은 조정 여야에 조씨 가문의 졸병이 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는 것이 전기의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