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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유진숙 지음 | 파라북스
남아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유진숙 지음

파라북스 / 2010년 10월 / 256쪽 / 14,500원



성북동을 가다 ; 인생의 마무리가 아름다운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심우장 - 독립만을 향한 외골수 인생, 한용운


심우장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길상사 앞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다 성북동성당 앞인 선잠단지길로 들어선 다음, 성북초등학교를 끼고 오른쪽으로 향합니다. 성북초등학교가 끝나는 지점에 간송미술관 이정표가 보이네요. 성북동길이라 이름 붙은 이 길을 따라 올가가면 덕수교회가 있어요. 덕수교회 앞 금왕돈까스를 지나쳐 계속 왼쪽 길만 따라 들어가면 조이빌리지라는 빌라가 있고, 바로 그 옆에 성곽으로 향하는 가파르고 좁다란 골목길이 있습니다. 심우장 표지판이 보입니다.

심우(尋牛), 소를 찾는다니? 집의 택호로는 범상치 않습니다. 불가의 선종에서는 마음을 정진하는 과정을 소를 찾아오는 과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한용운이 승려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골목에는 작고 낮은 집들이 어깨를 붙여 섰고, 더러는 영 주저앉은 것같이 키 낮은 집들이 꼬불탕 꼬불탕 이어지는 골목에 대문을 내고 늘어서 있습니다. 발걸음이 지칠 대목쯤 되면 힘내라는 듯이 '심우장 가는 길', '심우장 '으로 표시해 놓았더군요. 잠깐 발을 멈추고 보니 동네의 일상이 보입니다. 낮은 담 위로 꽃들이 넘실대고, 집 앞 손바닥만 한 공간에도 화분에 흙을 마련해 고추든, 상추든, 과꽃이든 무엇이든 심어 놓았습니다.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평생을 조선을 위해 살면서 몸 하나 누울집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 이들이 돈을 모아 짓게 된 집입니다. 누군가는 이 집을 두고 한용운이 빚을 내고 지었노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남향이 좋은 줄 알면서도 조선총독부 마주보는 꼴이 싫으니 동북향으로 집을 앉힌 만해의 결의가 심우장 마당에 서늘한 기운을 두르는 것 같습니다. 이 심우장에서 만해는 동지들을 만나고 승려들을 만나 민족의 앞날을 내다봤습니다. 짙은 밤색 나무판에 희고 굵게 쓴 尋, 牛, 莊. 세 글자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독립운동의 동지였고 절친한 친우이면서 명필가였던 오세창이 써준 글씨라고 전해집니다.

이런 곳에 오면 늘 느낍니다. 책 속에서 상상만 하던 과거가 눈에 보이는 현재로 존재하고 있음을. 마당을 지키고 있는 향나무 어디쯤에 만해의 손길이 닿았을까요? 나무는 대답도 없이 바람에 한번 가지를 흔들 뿐입니다.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나 혼자만) 어찌 불 땐 방에서 편히 쉴 것인가?" 1944년 입적하기 전까지 만해는 한번도 불을 지핀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춥게 살면서도 자세가 꼿꼿하니 흐트러지지 않아 '저울추'라는 별명이 생겼다지요. 부엌을 들여다봅니다. 평생 불 한번 담은 적이 없었다는 아궁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딱 한번 불을 땐 적이 있기는 있었답니다. 신간회 활동을 하던 시절에 공문을 담는 봉투가 있었는데요, 그 봉투 겉면에 일본 연호인 쇼와가 쓰여 있는 걸 보고 분기탱천, 그 길로 아궁이에 던져 불태워 버렸다더군요.

하루는 변절한 최린이 심우장으로 찾아와 만해의 딸 영숙에게 돈 100원을 쥐어줬지요. 만해는 아내를 뒤쫓아 보내 그 돈을 돌려보냈더랍니다.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말이죠. 유명한 이야기 한 자락 풀고 가지요.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 허리를 꺾고 중추원 참의로 있을 무렵 길에서 서로 만났지요. "오랜만이오, 만해." 하자, "당신이 누구요?" 했고, "나를 몰라보느냐?"고 육당이 답답해하자, "뭐 육당?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랜 고인이오." 했다잖아요.

만해의 굳은 지조는 이런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3 1운동 후 극형을 받을 것을 걱정하던 동지에게 감방 안에서 변기를 집어던졌습니다. "독립선언을 하고 살아남을 생각을 했더냐!"면서. 또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해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일본인이 왜 감히 재판하는가?"며 재판장에게 호령을 하였고, "육신이 다하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며 신념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출옥하는 날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도 독설을 날립니다. "영접을 받을 것이지, 영접을 하느냐"며 더러운 자식들 취급을 했답니다.

평생을 꿈에도 그리던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입적한 곳도 이 심우장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한영숙 씨도 일본대사관 관저에 걸린 일장기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이사했지요. 일본과 수교가 재개된 이후 일본대사관 관저가 이곳 성북동 제일 꼭대기에 자리잡게 되었거든요. 이후 심우장은 만해 사상연구소로 차려지기도 했습니다. 성북동 222-1, 2번지. 이제 한용운을 기리려는 사람들이 철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구분치 않고 이곳 심우장을 찾고 있습니다. 한조각 바람이 지난 후 읊조립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일생을 통틀어 조선의 독립 외에는 생각해본 적도 없던 외골수 인생. 만해는 죽어서 독립을 맞았습니다. 해방 1년 전 세속적인 성공을 거부하고 평생을 대쪽처럼 살았던 거인의 죽음을 지켜본 심우장에서 삶이 가야 할 길을 다시 헤아립니다.

정동을 돌아 경희궁까지 ; 젊음-사랑 그리고 꿈



정동길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운

정동극장을 지납니다. 그 옆으로 신아일보사 별관. 자주색 벽돌의 고풍스런 건물은 방치된 것처럼 보이더군요. 소설가 한승원이 신아일보사 신춘문예로 등단했었는데요. 1980년 10월 언론통폐합 정책으로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흡수돼 이렇게 이름만 남은 신문사가 됐네요. 그 옆으로 골목처럼 보이지도 않는 후미진 곳을 들어가 보니 중명전. 매국노들이 을사조약에 통한의 도장을 찍은 곳, 그리고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는 밀명을 내린 그 전각이었습니다. 곧 새로 단장하고 개방한다니 기대해야겠습니다.

다시 정동길로 나와 100미터쯤 걸어가다 오른쪽 비탈로 꺾습니다. 위쪽으로 러시아공사관의 흰 탑신이 보입니다. 고종이 세자를 데리고 외교국의 대사관에 들어앉았던 '아관파천'의 역사를 간직한 곳. 우리나라 안에 있는 남의 나라 영토, 대사관저에서 고종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아내인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의 손에 죽었고 외세의 세력은 너무나 거셌고 나라는 기울 대로 기울어 있었으니까요.

물 한 모금,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군요. 고종도 여기서 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나중에는 매일 아침 커피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마셨다는 기록도 있고, 하도 커피를 좋아해 커피에 독약을 타서 독살을 기도했다는 풍문도 있지요. 처음엔 황제만이 마셨던 커피, 한때는 기다림의 상징이었고 이젠 보통사람들의 필수적인 기호품이 된 커피, 이 커피를 노래한 유행가가 있어요. 19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 펄시스터즈가 신중현의 곡을 받아 부른 <커피 한 잔>은 공전의 히트가요가 되었지요.

한 세대가 지나버린 21세기의 유행가 속에서 커피는 어떤 모습을 드러낼까요? 장기하는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에서 21세기 루저(ㅣloser)를 대변하는 가사로 일약 스타가 됩니다. 싸구려 커피를 너무나 많이 마셔 적잖이 쓰려오는 속을 붙드는 젊은이. 발바닥이 달라붙는 눅눅한 비닐장판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에서 너무나 괴롭다는 말을 듣게 되지요. 이제 커피는 한국의 대표적 음료입니다만, 이 커피를 조선에 소개한 덕분에 호텔까지 얻게 된 사람이 있어요. 서양식 연회를 주관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뢰를 얻은 러시아 여인, 손탁 여사는 고종에게 가배(커피의 음역어)를 소개한 장본인이죠.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땅에 지은 손탁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자 최초의 커피숍이었습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비탈길을 내려가면 마주보이는 이화여고 동문 근처 주차장 한 모퉁이에 '손탁호텔 터' 표석이 놓여 있습니다.

이화학당은 이화여고로 이름을 바꿔 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화(梨花)라는 이름은 1887년 고종황제가 하사했습니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기대가 컸다는 뜻이겠죠. 국가가 인정한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었던 이화학당. 그런 만큼 개화기 신여성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김일엽, 노천명, 모윤숙, 김활란 등등. 여류문인 1기인 일엽 김원주. 그녀가 시작한 잡지 《신여자》에서 '신여성'이란 말이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그녀의 삶도 다른 신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평탄치 않았습니다. 3 1운동에 참여하여 옥살이를 했고 두 번의 결혼실패와 방만한 사회생활 끝에 외아들과의 인연도 끊은 채 수덕사 만공 스님의 계를 받고 입적, 비구니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목사의 딸이었으나 불교의 수행자로 변모한 것입니다. 노천명도 이화 출신의 시인입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시 한 편을 남기고 떠납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노천명 <사슴>



청계천 거쳐 인사동 한 바퀴 ; 근대 경알이들의 삶



청계천 경알이가 본 청계천 풍경

『삼대』의 작가 염상섭이 정경부 기자로 근무했던 동아일보 앞, 청계광장의 시작점엔 일상적인 물건을 거대한 조각작품으로 만들어 유명한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이 서 있습니다. '스프링'을 감상하고 섰자니 문득 조병화의 시 <소라>가 생각납니다. 소라나 조개의 껍데기를 보면 바다가 떠오릅니다. 바다를 떠나온 소라나 삶의 괴로움에 부대끼는 인간이나 다를 게 없어서일까요? 너무 무식한가 싶어 조각품을 다시 바라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라탑'이라 하더군요. '스프링'의 작가는 바람에 날리는 한복의 옷고름을 형상화한 것이라던데, 다시 봐도 소라만 생각납니다.

이제 이 청계천을 따라 동쪽으로 걷습니다. 청계천은 원래 북악산, 인왕산,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 소라탑 아래쯤에서 모여 동쪽으로 흘러나갔죠. 거대한 한강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면 이 청계천은 물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역수입니다. 이 청계천 주변에 사는 서민들의 삶을 영화처럼 보여주는 소설이 있어요. 경알이 박태원의 대표작이기도 한 소설이죠. 경알이가 뭐냐 하면, 서울 토박이란 뜻입니다. 파리에 살면 파리지엔, 뉴욕에 살면 뉴요커, 서울에 살면 경알이인 거죠. 구보가 태어난 곳은 수중박골로 지금의 수송동. 그러니까 종로구청 근처였어요. 그야말로 서울토박이인 거죠. 중류 이하 순 경알이적 풍속, 행동, 언어를 잘 보여준다고 월탄 박종화가 평가한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정이월에 대독 터진다는 말이 있다. 따는, 간간이 부는 천변바람이 제법 쌀쌀하기도 하다. 그래도 이곳, 빨래터에는, 대낮에 볕도 잘 들어 물속에 잠근 빨래꾼들의 손도 과히들 시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박태원 『천변풍경』



가난한 아낙들이 옹기종기 빨래를 했던 이 냇물의 원래 이름은 개천이었습니다. 총독부에 의해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뀐 거죠. 그러나 이름처럼 깨끗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생활하수로 오염이 심해진데다가 거지 떼들이 몰려와 살면서 몹시 더러워져서 악취가 진동하는 개천이 되어 버렸고, 이미 일제강점 시절에 개천을 덮느냐 마느냐 소문이 있었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걷다 보니 광통교, 이방원이 계모 강비의 정릉 장식석을 뜯어와 만든 다리, 600년 전의 역사가 그대로 있네요. 6 25전쟁이 터진 그해 여름, 교사 출신의 아내와 3남 2녀를 서울에 남겨둔 채 구보 박태원은 월북합니다. 양복바지에 흰 반팔셔츠를 입고 가방을 어깨에 멘 채 남자들 둘과 같이. 그의 친구 조용만이 창경궁 앞에서 마주쳤던 구보의 마지막 모습이 이랬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남한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월북 후엔 일제 강점 시절 1933년에 어울렸던 구인회 활동 등을 소급해 비판당했고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몰립니다. 결국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후 눈물겨운 사상성 고양 끝에 그는 북한문단에서 자랑하는 『갑오농민전쟁』 3부를 완성해 냅니다. 눈물겹다 못해 피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완전 실명했고, 나중에는 전신불수가 되어 누워 살았으니까요. 소설의 완성은 어떻게 했느냐고요? 구술(口述)한 거죠. 박태원이 말을 하고 북녘의 아내인 권영희가 받아 적어서 완성한 거거든요.

박태원의 외손자가 영화 <괴물>, <마더>의 감독인 봉준호예요. 고현학 운운하면서 소위 카메라-아이 기법으로 소설을 쓴 할아버지, 그리고 영화감독이 된 손자. 정말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요? 청계천 가를 따라 걸으며 <천변풍경>을 중얼거리고 말하는 게 이젠 아무렇지도 않습니다만, 한때는 '월북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은 탓에 작가 이름도 작품도 말할 수조차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젠 고등학교 학생들의 필독 작품이 되었더군요. 광교까지 왔네요.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광고 옆 한국관광공사 본사 건물이 보입니다. 바로 이 근처가 옛날 '다옥정 7번지'인데요, 저곳에서 박태원이 자라고 신혼생활을 했답니다.

동숭동을 걷다 ; 대학 없는 대학로에서 만난 지성인의 발자취



마로니에 공원 - 성공과 실패

마로니에 공원 주변을 돌아봅니다. 키 큰 나무들 사이 빈터에 농구대도 보이고, 걸어가고 있거나 앉아 있는 젊은이들의 무리도 보입니다. 뭔가를 쪼아 먹는 비둘기들도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활기 넘치는 공원 한 쪽, 예총회관 앞 공원 입구에 소박한 시비가 있습니다. 고산 윤선도가 태어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오우가>를 새겨 놓았네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로 시작하는 여섯 수의 연시죠. 유교적 가치관이 배어나는 작품. 그러나 누가 뭐래도 윤선도의 명작은 <어부사시사>. 계절별 10수씩 총 40수의 대작. 좀 놀라운 것은 세 줄짜리 시조를 다섯줄로 만든 윤선도의 창조 정신입니다. 한글의 맛을 살린 것으로도 높은 문학성을 지니는 시조입니다.

춘사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 두어 집이 냇속에 날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하사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을랑 장만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청약립은 써 있노라 녹사의 가져오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한 백구는 내 쫓는가 제 쫓는가



추사

수국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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