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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한국사

김남수 외 지음 | 휴머니스트
100년 전의 한국사

김남수, 윤종배, 이제은, 최병택, 홍동현 공편

휴머니스트 / 2010년 8월 / 408쪽 / 18,000원



1부 19세기 개항 전 조선과 동아시아



흥선대원군은 과연 ‘쇄국정책’을 폈을까?


Q.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근대화가 늦어진 것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과연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을 ‘쇄국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흥선대원군을 상징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쇄국정책’이다. 이른바 ‘세계화’와 경제 개방을 주장할 때 과거의 잘못된 역사적 사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거론되곤 한다.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친 탓에 조선의 근대화가 늦어졌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쇄국(鎖國)’이란 말의 연원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흥선대원군 당시에는 쇄국이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쇄국이란 도쿠가와 바쿠후 때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지하고 외교와 무역을 제한한 정책 또는 외교 관계의 고립 상태를 일컫는다.

조선에서 쇄국이 처음 거론된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이헌영의 보고서에서였다. 여기서는 ‘쇄국’을 과거 일본에서 행한 대외정책의 특징으로 소개하고 있다. 쇄국이란 용어가 국내에 적용된 첫 사례는 1895년 단발령을 반포하는 조칙 가운데 “오늘날 쇄국을 고집하여 구습에 젖어 살 수 없다”는 문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조칙이 내려질 무렵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피동적인 개회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렇게 쇄국이란 말은 개항 이후 일본에서 수입되어 조선의 대외정책을 소급해서 설명하는 데 쓰였다. 즉, 이 말에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강요하던 일본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었던 것으로, 처음 사용할 때부터 부정적 이미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문호 개방 요구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한 적이 없었다. 그는 서양 제국주의의 압력에 중화체제라는 전통적인 동북아시아 지역의 국제질서와 외교 관계의 원칙을 따랐을 뿐이며, 단지 보다 원칙적이고 단호한 자세를 취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은 왜 군사적 충돌을 무릅쓰면서까지 문호 개방을 거부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성 때문이었다. 당시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른바 함포외교로 무력을 동원하여 동북아시아의 문호 개방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1,2차 아편 전쟁을 치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문제의 불씨를 키우지 않으려면 서양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문호 개방 요구를 해올 때 조선은 청의 속국이므로 독자적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둘러대며 거절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민생문제였다.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지는 않았으나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서양의 상품이 중계무역을 통해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 대표적 상품이 면직물이다. 당시 면직물은 서양에서 들어온 무명이라고 하여 서양목으로 불렸다. 서양목은 산업혁명이후 기계로 만들어져 가격도 싸고 품질도 뛰어났다. 베틀로 짠 국산 옷감으로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았다. 백성들은 넘쳐나는 서양목 때문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으며, 수입을 반대하는 여론 또한 높았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제국주의의 도발에 군사적 대결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통해 알 수 있다. 1866년 7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평양에서 불타버린 사건이 있었다. 제너럴셔먼호는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고 이를 제지하는 조선의 군사 책임자를 감금하는 한편 상륙까지 하여 사람을 해치고 물건을 약탈하는 등 해적 행위를 벌였다.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의 공격으로 사흘에 걸친 전투 끝에 선원 모두가 죽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1871년에 무력 침략한 미국 함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 이에 조선 정부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1866년 평안도 철산부 연안에서 난파된 서프라이즈호 사건을 예로 들며 조선이 이유 없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서프라이즈호의 선원들을 정성껏 치료한 후 중국 베이징을 통해 본국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 정부는 ‘저들이 호의로 행동하면 우리도 호의로 대접하지만 저들이 악의로 나오면 우리도 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제국주의의 도전 앞에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내심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양 제국주의와 군사적으로 대결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했고, 강한 군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돈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백전(재정 위기를 해결하고 군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화폐)발행이나 원납전(경복궁 증건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제로 거둔 기부금) 징수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재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당시의 농업국가 체제로서는 국가 재정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는 데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추구한 대외강경책은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장기적 안목에서 이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2부 조선의 개항에서 대한제국의 탄생까지



강화도 조약은 왜 불평등 조약인가?


Q.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강화도조약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이라 한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기에 불평등 조약이라고 하는 것일까?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조선과 적극적으로 외교 협상을 시작했으나 쉽게 진척되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대일본’, ‘황상’이라는 말이 들어 있었는데 이는 조선보다 일본을 높여 부르는 말로, 조선은 이를 수정해 줄 것을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요구해왔다. 그러나 일본은 계속 주장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선도 임진왜란 이래 300년이나 계속된 외교 격식을 폐기할 수 없다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1875년 2월 일본이 보내온 외교문서의 접수를 또다시 거부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해군 군함을 조선에 파견해 무력으로 문호를 개방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4월 20일 운요호의 부산 입항을 시작으로 5월 9일에는 군함 제2 데이묘호가 부산항에 들어와 운요호와 합류했고 두 군함은 연습을 핑계로 함포사격을 감행하여 위기감을 조성했다. 약 3개월 뒤 운요호는 ‘조선 동남 서해안에서 청의 우장에 이르는 항로를 연구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21일 한강 하구 강화도 해안에 정박했다. 다음 날 몇 명의 선원이 작은 배로 사전 허가 없이 ‘먹을 물을 구한다’고 한강 하구를 항해하자 우리 초지진에서 대포를 쏴 일단 그들의 상륙을 막았다. 그러자 운요호는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파괴했고, 다음 날 영종도에 상륙해 다수의 민간인을 죽이고 관아와 민가를 약탈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운요호사건이다. 운요호사건은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개항하려고 계획적으로 도발한 사건이다. 일본은 미국의 군함외교에 의해 문호를 개방했던 역사적 경험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운요호사건 처리와 수교 교섭을 위해 구로다 기요타카를 대표로 하는 4명의 전권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 일본 대표단은 12월 말 인천․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군함을 앞세우고 무력으로 위협 했다. 일본 대표가 군함을 앞세워 경기도 연안에서 시위를 계속하자 1876년 1월 5일 접견대신으로 신헌이 임명되어 일본의 대표를 만났다. 회담은 공식적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운요호사건의 해결책으로 조약 체결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답변이 늦어질 경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통고했다. 2월 14일 조선 정부는 논의 끝에 조약 체결이라는 입장은 결정했지만 조약안의 내용에 대해서는 상의를 못한 채 전권대신 신헌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조선 측이 국제법에 무지한 것을 이용해 일본은 강제로 2월 3일 조약을 확정하도록 강요했고, 2월 26일 조인식을 가졌다. 일본의 강요에 의해 아무런 준비 없이 회담에 임했던 조선 정부와 치밀한 계획 아래 준비를 해온 일본이 맺은 조약안은 조선에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맺은 조약이 ‘조일수호조규’이다. 이어서 이 해 8월에 맺은 ‘조일수호조규부록’(전문12관)과 ‘통상장정’(전문 11칙)을 합쳐서 강화도조약이라고 부른다. 강화도조약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발을 들여놓는 근대적인 조약이자,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영사재판권에 의해 일본인의 범죄를 일본 영사가 재판하는 치외법권, 조계지의 설정, 세 항구의 개항이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은 국제법상의 조약 관례를 무시하고 조약 유효기간과 폐기 조항을 빠뜨려 불평등 조약의 무기한 존속을 꾀하려 했다. 더구나 국내 시장의 보호와 국가의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불가결한 관세권마저 박탈했다. 또한 일본 화폐를 조선에서 자유로이 유통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의 은행이 조선에 진출하여 자국 상인의 금융을 지원하고 자본력에서 조선 상인을 압도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일본이 명성왕후를 무참히 살해한 까닭은 무엇일까?

Q. 1895년 일본 낭인들이 명성왕후를 시해했다. 그 배후에는 일본제국이 있다고 하는데, 일본은 무엇 때문에 명성왕후를 살해한 것일까? 이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

1895년 3월, 일본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1894년 6월 중순부터 시작된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전되었기 때문이다. 1895년 3월 23일(양력 4월 17일)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고 청의 랴오둥반도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했다. 대다수의 일본 언론은 마침내 일본이 노쇠한 아시아의 대열에서 벗어나 서양 강대국과 대등하게 교류할 자격을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일본의 자축은 한 달도 채 못 갔다. 한반도에서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1895년 4월 23일 프랑스, 독일과 협력하여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3국간섭’이다. 아직 러시아와 정면으로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일본은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를 향한 일본의 적대감은 더욱 커졌다.

한편, 이 사태를 지켜본 조선 정부는 노골화된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친일관료들을 몰아냈다. 당시 러시아와의 막후교섭은 여흥 민씨 일파가 맡았는데 그 중심에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있었다. 특히 조선의 러시아와의 외교는 명성왕후가 주도했다. 결국 일본은 조선 정부의 반일친러 외교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명성왕후를 시해하기로 결정한다.

일본은 1895년 7월 13일 미우라 고로를 주한 일본공사로 임명했다. 외교관 경험이 전혀 없는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를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성왕후 시해에 일본 정부가 처음부터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미우라는 일본에 대한 국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사관에 주둔해 있던 수비대 외에 조선에 와 있던 일본 낭인들을 동원했으며, 8월 20일 새벽에 명성왕후는 이들에 의해 경복궁 안에서 잔인하게 시해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조선인들의 폭동으로 규정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친일 내각을 조종해 명성왕후의 왕후 직위를 박탈하고 장례를 추진했다. 당시 서울은 일본군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이러한 만행에 반발조차 할 수 없었지만 지방에서는 대대적인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에 대한 서양 국가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사태 해결을 촉구하자, 일본은 미우라 고로를 해임하고 그를 포함해 시해에 가담한 48명을 체포해 취조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매우 형식적이었고 이들은 모두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왕후의 죽음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일본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해진 고종은 친일파 관료들을 모두 숙청했으며, 이들은 처벌을 받거나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왕비를 잃고 분노한 민중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조선의 정부나 민간 모두에서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으며, 국제사회의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때문에 일본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조선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명성왕후 시해는 몇몇 일본 낭인들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기획한 만행이었다. 당시 국제사회도 이 사건이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임을 명백히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일본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압력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당시 일본 정부는 동북아시아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러시아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결의한 상태였다. 이미 청을 이긴 상황에서 러시아까지 굴복시킨다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더라도 일본의 조선 지배는 기정사실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명성왕후 시해는 러시아와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 작업인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도발이었다.

3부 1905~191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러일전쟁, 을사조약, 1905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Q.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러일전쟁은 왜, 어떻게 일어났으며, 을사조약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러일전쟁이 대한제국과 만주에서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동북아시아 정세를 주목해야 한다. 19세기 말 러시아와 일본은 대한제국과 만주를 둘러싸고 대립과 협상을 반복했다. 1896년 6월 ‘모스크바의 정서’를 통해서 대한제국의 현상 유지에 합의한 러시아와 일본은 그동안 3국간섭과 아관파천 등 상호 대립하는 상황에서 갈등 관계를 해소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1897년 11월 독일이 중국 산둥반도 연안의 자오저우만을 점령하자 러시아는 서양 강대국의 적극적인 동북아시아 정책에 대응하여 그해 12월 뤼순을 점령했다. 이에 일본을 러시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던 일본은 1898년 4월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한 ‘도쿄의정서’를 체결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900년 6월 청국의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만주를 점령하자, 일본은 1902년 1월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 주요 내용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동북아시아의 이권을 양국이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1902~1903년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정치․군사적 특권을 협상했지만 결렬되었고, 1904년 러일전쟁으로 치달았다.

1900년대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1901년 12월 러일협상의 결렬, 1902년 1월 영일동맹의 체결 등은 대외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실패를 의미한다. 이렇듯 급변하는 국제질서의 변화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동북아시아에 대해서 새로운 외교정책 수립을 추진했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1903년 4~5월에 특별회의와 1903년 7월 뤼순회의 등을 개최하여 자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을 조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이미 개전 결의를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교섭 제의를 통해 개전의 책임을 러시아에 전가해 국제 여론의 지지를 얻고 러시아를 고립화하려는 외교적 의도가 있었다. 그 후 1904년 2월 4일 러시아 정부는 주러 일본공사 구리노에게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정치와 경제적 특권을 인정한다’는 최종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일본은 같은 날 원로회의에서 개전을 결정했다. 1904년 2월 8일 밤 마침내 일본군이 뤼순을 기습공격하며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유렵의 발틱 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구성하여 동북아시아의 전장에 투입했다. 그런데 전투를 개시한 지 불과 이틀 만에 대부분의 러시아 함대가 격침되어 해상에서 사라졌다. 뤼순 봉쇄에 성공한 일본 함대는 랴오둥반도에 상륙했고, 한반도를 거쳐 북진한 일본군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했다. 1905년 1월 뤼순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이어 3월 만주 펑텐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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