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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이태호 지음 | 생각의나무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이태호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5월 / 552쪽 / 30,000원



Ⅰ. 진경산수화론




진경산수화의 시방식과 화각 - 보고 그리기와 기억으로 그리기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는 한국문화사를 대표할 만한 주요 예술사조다. 그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와 업적은 조선의 대지와 조선의 현실을 사랑한 데서 출발해, 그에 어울리는 조선적 예술형식을 창출하였다는 데 있다. 따라서 실경의 이름을 밝힌 진경화에 대하여 문화사적 가치를 비교적 높게 친다. 정선의 영향 아래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던 18세기에는 어느 시대보다 좋은 작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진경산수화가 이룬 이념과 형식은 사실정신이나 열린 감성의 분방한 표출, 그리고 조선풍과 개성미 추구 같은 당대 실학사상이나 시문학, 음악, 연희 등 문예사조의 ‘새로운’ 기운과도 함께하는 것이다.

실경을 닮게, 혹은 닮지 않게: 18~19세기의 진경산수화를 실제 풍경과 대조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보았다. 첫째는 실경을 그렸다고 지명을 쓴 산수도가 실경을 닮지 않은 부류이다. 실경을 다녀간 직후나 한참 뒤에 기억에 의존해 그린 탓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현장에서 직접 사생하거나 사생한 초본을 토대로 실경을 닮게 그리는 경우다. 이런 두 가지 유형은 20세기 우리 금강산 그림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흥미롭다.

일반적으로 대상을 두고 그림을 그릴 때 나타나는 두 가지 방식은 먼저 대상의 외모를 재현하는 일이다. 동양회화론으로는 ‘형사形似’에 해당되겠다. 다음으로 그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 드러내기, 곧 표현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대상에서 받은 감정표출을 중시하는, 동양회화론의 ‘사의寫意’ 개념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면 기억으로 그리는 일은 사의성寫意性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실경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형상을 닮게 그리는 형사形似 기량이 중요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예술성이나 작품량으로 볼 때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사람은 단연 겸재 정선이다. 어림짐작으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절반 이상 혹은 90% 정도가 정선의 몫일 게다. 그만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서 정선의 진경 작품은 절대적인 존재다. 우리 땅을 그리는 회화 형식과 예술성은 물론이거니와 풍경 선택부터 그러하다. 정선은 조선의 아름다운 곳을 거의 전부 섭렵했다. 정선은 대부분 ‘닮음’을 무시한 채 진경화를 그렸다. 정선 일파와 문인화가들의 구분은 ‘현장을 닮게 그리는 작가’와 ‘정선처럼 그린 작가’로 양분할 수 있다. 그러나 뛰어난 실경 사생력은 단연 김홍도의 진경 작품에서 빛난다. 세대 변화로 보면 18세기 전반 영조 시절에는 실경을 과감히 변형한 정선이 주도하였고, 18세기 후반 정조 시절에는 현장을 충실히 사생한 김홍도가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정선의 진경 작품은 카메라 초점거리 28~50mm 렌즈에 그 현장이 포착되지 않는다. 28mm 이하 광각 렌즈나 파노라마 카메라이어야 겨우 소화할 정도다. 반면 김홍도의 진경 작품은 35~50mm 렌즈의 카메라 뷰파인더에 그림과 같은 실경이 잡힌다. 17~19세기 유럽 풍경화의 시각과 거의 동일하다. 이처럼 풍경을 바라보는 부감시(俯瞰視), 다시점(多視點), 시점 이동 등의 시방식(視方式, View Point)과 풍경을 포착하여 화폭에 담는 화각(畵角, Angle of View)은 사생이나 변형의 원리를 분별해준다.

풍경화를 그리는 일 못지않게 사람이 ‘풍경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창조적인 일이다. 그만큼 인간에게 삶의 공간으로서 풍경이 중요하기에 어느 곳을 선택했는가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이 어디에 있고 그 풍경을 어떻게 포착했는가는 풍경화를 판단하는 핵심요소다.

한국산수화의 모태 - 금강산과 금강산 그림

우리나라 자연의 백미로 일컫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은 ‘개골산皆骨山’이란 이름처럼 빼곡하게 솟은 다양한 형상의 바위와 험준한 절벽으로 천봉만학千峰萬壑을 이룬 곳이다. 금강산은 태백산 줄기 북쪽에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내륙의 산악지대와 인접하고 동해에 닿아 있다. 토산이 암산을 감싸는 형국인 내금강은 바위산곡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토산 위에 암산이 솟은 외금강과 신금강, 북쪽의 별금강, 동해안의 해금강으로 구분한다. 외금강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평야를 이루다가 다시 솟은 해금산은 거암 절벽과 파도에 침식당한 해암海岩의 기관奇觀을 자랑한다. 해금강의 아름다움은 남쪽으로 울진 평해까지 동해를 끼고 형성된 ‘관동팔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화가나 시인묵객, 여행자들은 금강산을 유람할 때면 동시에 관동팔경까지 답사일정을 잡는 게 통례다.

이처럼 금강산은 지역 전체가 절경을 이루어 한반도에서 가장 빼어난 명산이고, 더불어 금수강산을 대변하는 민족의 긍지로 여겨졌다. 인근 고인돌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미루어볼 때, 최소한 2천5백 년 이상 우리 조상들과 삶의 고락을 함께해온 곳이다. 그러하기에 금강산은 설화문학, 기행시문, 민요 등 민족예술을 발전시킨 진원지이고, 특히 ‘한국 산수화의 모태’라 내세울 수 있다.

금강산 형상 표현은 문학보다 그림이 낫다: 시인묵객이나 문사들의 기행문학과 가사문학뿐만 아니라 옛 화가들에게도 금강산은 예술세계를 형성하는 주요 대상이었다. 조선 후기 화단에 겸재 정선이 등장하고 진경산수화가 유행했듯이 어쩌면 금강산은 문학역량보다 회화역량이 진보하는 데 더욱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금강산은 자연의 형상미가 빼어나고 조선시대 문인들이 추구하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금강산 예술의 양대 예맥藝脈은 문학사에서는 단연 정철의 『관동별곡』을, 회화사에서는 정선의 금강산 그림을 꼽을 수 있다.

18세기 서화가이며 서화이론가로, 영· 정조 시기 예림 총수격이자 진경산수화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강세황이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적절히 표현했다. “과연 이 산을 보지 못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하며, 산수를 표현하는 데는 “시보다 기행문이 낫고, 기행문보다는 그림이 낫다”고 피력하였다. 나아가 강세황은 정선이 그린 한 화첩의 발문에서 ‘정선이 우리나라에서 실경을 제일 잘 그리는 화가’라고 꼽은 적이 있다.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 정선의 금강산 그림: 겸재 정선의 출현과 진경산수화는 한국회화사의 흐름에서 일대 변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자연을 재해석하고 독창적인 진경산수화를 창출함으로써 한국 회화의 신기원을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금강산을 중심으로 실경을 그린 경우는 고려나 조선 초· 중기에도 나타나지만,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회화 장르로 발전한 것은 정선이 출현한 이후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대상 선택부터 한국 경관에 어울리는 개성적인 화법 구축까지 사실상 진경신수화의 전모를 대변하기에 충분하다.

정선의 금강산 전경도는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내금강 전체를 원형구도에 담으면서 왼쪽에 미점의 토산을, 오른쪽에 수직준의 암산을 배치하는 〈금강전도〉식이 있는가 하면, 정양사, 표훈사, 장안사가 있는 토산을 아래쪽에 깔고 암산을 위쪽에 구성하는 방식으로 변모시킨 경우도 눈에 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부채그림 〈금강전도〉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금강전도〉등이 그 좋은 예다. 특히 두 그림은 수묵 강약과 자유분방한 붓놀림으로 ‘양필난시준’을 거침없이 구사하여 마치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바람이 이는 듯 그려놓았다.

그동안 한국회화사의 꽃이라 할 정선의 금강산 그림과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연구는 금강산 현지 확인이 불가능하여 문헌과 그림, 그리고 화질이 떨어지는 한정된 사진에 의지해왔기 때문에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대 문인들이 “금강산을 다녀온 뒤에야 정선이 그린 금강산도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라고 전했던 화평에 비하여 우리 금강산 그림에 대한 감명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금강산 개방으로 제한적이나마 금강산 탐승의 길이 열림으로써 책상 위 연구를 벗어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제야 우리는 직접 현장을 확인함으로써 정선의 금강산 그림과 옛 금강산예술의 참맛을 재음미하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그린 사생화와 기억으로 담은 추상화(追想畵) - 20세기의 금강산 그림

20세기 금강산 그림은 크게 두 시기와 두 유형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먼저 전반기에 해당하는 일제강점에는 겸재 정선이 이룩해놓은 진경산수화풍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현장사생으로 이룬 금강산 그림이 등장했다. 여기에 서양화법이나 일본의 당대 산수화풍이 가미되어 새로운 시대의 근대풍경화라고 할 수 있는 ‘사생화’형식이 자리를 잡았다. 20세기 후반에는 사뭇 양상이 달라진다. 분단시대였던 만큼 남쪽 사람들에게는 금강산이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금강산을 다녀온 일부 화가들이 옛 그림이나 스케치, 사진자료 등을 참고로 금강산을 추억하거나 회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린 그림이니 ‘추상화追想畵’라 일컬을 만하다.

20세기 전반의 금강산 사생화: 서화협회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서화가들로 구성된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단체로 평가받는다. 협회는 1918년 5월 19일 발기인 모임을 갖고 6월 16일에 창립되었는데, 설립목적에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서화협회의 위상과 역할을 짐작해볼 수 있다. ‘조선의 서화를 다시 일으키고 서화에 대한 일반의 취미를 보급하기 위한’ 서화 대중화 운동의 첫 시도라 할 수 있겠다. 7월 21일 이문동 태화정에서 성공적으로 휘호揮毫대회를 치렀다고 한다. 뒤이은 서화협회의 두 번째 행사가 바로 금강산 스케치 여행이었다.

금강산 관광이 대중화되면서 화가들도 빈번하게 사생여행을 하게 되었다. 20세기 전반기의 금강산 작가라 이를 만한 해강 김규진을 비롯하여, 안중식, 조석진, 지운영, 지성채, 고희동, 이상범, 변관식, 박승무, 노수현, 김은호, 이응노, 허건, 임신 등이 사생여행을 다녀온 화적을 남기고 있다. 이들은 분명 조선시대 작가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금강산의 절경을 대하였다. 또한 일만이천 산봉우리와 계곡을 누비며 새로운 회화 대상을 찾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유학을 통해 습득한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들이 많이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화 금강산 그림은 지극히 미미했다. 금강산을 유화를 한두 점이나마 시도한 작가로는 〈만물상만상정〉(조선미술전에 출품)을 그린 나혜석,〈총석정도〉(개인소장)를 그린 김인승,〈온정리 풍경〉(삼성미술관 리움)을 그린 이대원,〈해금강〉(개인소장)을 남긴 김용준, 금강산을 연상시키는 유화〈산〉(개인소장)의 구본웅 등을 들 수 있다. 또 해방과 전쟁 시기에 월북한 임용련과 배운성의 유화 금강산 그림이 알려져 있다.

몇 점 안 되지만 이들을 포함하여 20세기 유화 금강산 그림들은 전통적인 산수화풍과 다른 새로운 형식의 근대 풍경화로 정착했다는 데 미술사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다. 아무튼 당시 신지식인으로 서양화를 배운 우리 작가들이 금강산에 눈을 돌리지 않은 이유는 일차적으로 전통회화를 낡은 것으로, 곧 금강산은 전통수묵화에나 어울리는 대상으로 치부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때 금강산에서 살았던 박수근이나 금강산 가까이 원산에서 지냈던 이중섭이 금강산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20세기 회화사를 가름하는 두 거장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20세기 후반 금강산 추상화: 일제의 식민지배를 벗어나 남북분단이라는 민족사적 비극이 이어지면서, 남한의 화가들에게 금강산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1950~1960년대 혹은 1970년대까지 여러 작가들이 간간이 금강산 그림을 그렸다. 우리 문화사에 살아남은 금강산의 끈질긴 생명력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들 금강산도에서는 예술성에 대한 기대보다 금강산을 회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을 그렸다는 게 다행이면서도 망각 속에서 왜곡되어버린 실상이 안타깝다. 이나마도 또 밖에서 새로이 밀려드는 현대미술의 홍수에 맥을 못 추고 가라앉아버렸기 때문이다.

분단 현실에서도 시대를 거슬러 금강산 그림에 예술혼을 투영시킨 작가가 있었다.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埴, 1899~1976)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금강산 작가가 겸재 정선이라면, 20세기에는 소정 변관식이 존재한다고 내세울 만하다. “어떤 사람은 나의 산수화는 금강산뿐이라고 하지만 사실 금강산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내가 평생 그려도 다 못 그릴 그런 장엄미를 갖춘 것이다.…… 내 머리와 가슴속엔 금강산에 대한 기억과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라고 생전에 피력했듯이, 변관식은 가슴속에 묻어놓은 ‘기억과 감격’을 토대로 금강산의 장엄미를 형상화하는 데 후년의 반생을 바쳤다.

20세기 금강산 그림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화가로 눈여겨봐야 할 인물도 없지 않다.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가 그런 작가이다. 1942년 봄,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린 〈집선봉도集仙峯圖〉는 스케치풍이라 집선봉 자체의 입체감은 적지만, 전통적인 준법이 아닌 반복적으로 짧게 터치한 붓질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같은 해 그린 스케치풍의 〈해금강총석정도〉(개인소장)도 서양식 풍경화에 가까운 구도를 보여준다. 이러한 1940년대 사생화는 1950년대 접어들어 나름대로 전통적 산수화의 형태와 결합되는데, 이런 변용이 바로 이응노식 풍경화의 현대감각이다.

조선 후기와 근· 현대 금강산 그림을 비교하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20세기의 것이 18세기에 미치지 못한다. 겸재를 비롯한 18세기 작가들의 금강산도가 대체로 대상에 대한 사의寫意의 ‘마음 그림’을 강조한 데 비하여, 20세기 전반기의 금강산도는 형식화하거나 사생寫生의 ‘눈 그림’에 머문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이는 금강산 같은 절경 탐승이 산업사회 문명인의 자연 친화나 회귀, 혹은 머리를 식히는 휴식이나 구경거리와 같이 가벼운 여행으로 변모한 근· 현대 관광문화 성향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대지를 그리는 또 하나의 시각 - 고지도(古地圖)의 회화성

‘우리나라의 옛 지도’하면 누구나 곧바로 김정호의〈대동여지도〉를 떠올린다. 1861년에 완성된 김정호의〈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지도의 꽃이자 한국 고지도사의 위대한 결실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대동여지도〉의 원본 전체를 상설· 전시하는 한 곳은 경상남도의 거창박물관밖에 없다. 거창박물관 진열실 중앙에 1864년 수정 재간한〈대동여지도〉목판본 채색지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75호)가 펼쳐져 있다. 7m나 되는 길이에 폭이 3m가량 이르는 전도 앞에 서면 주름진 산과 그 사이로 흐르는 강이 반복된 도상들의 리듬은 축소판〈대동여지전도〉나 마찬가지로 현대의 추상미술과 유사하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그만큼 커다란 예술적 감명을 준다.

지도와 회화: 지도와 회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이다. 지도가 선, 형, 색 등 회화의 기본요소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지세의 형태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를 선묘로 그려내야 하고, 지형지물의 성격이나 행정구역 구분에 색채를 사용하게 된다. 또 지도는 말 그대로 ‘땅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인간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정보, 즉 자연지형과 인문지리적 내용을 일정 공간이나 화면에 축소해서 표현한 것이 지도다. 거리와 고도를 실측해 기호로 도형화한 축적지도든, 설명식으로 기술한 약도식 그림지도든, 지도는 처음부터 ‘그린다’라는 묘사행위를 통해 제작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조선시대에도 지도를 제작하는 데는 초기부터 도화서 화원뿐만 아니라 선비화가도 참여했다. 1454년 세조가 경성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지도학자 정척과 양성지, 선비화가 강희안과 화원 안귀생, 지관 안효례, 수학자算士 박수미를 대동하고 삼각산 보현봉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가 산천의 형세를 잘 아는 정척과 지도에 밝았던 양성지와 더불어 강희안을 참여시킨 이유가 바로 그림을 잘 그리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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