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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김열규 지음 | 비아북
공부

김열규 지음

비아북 / 2010년 7월 / 235쪽 / 13,000원



I 호모스투디오수스의 탄생 - 공부하는 인간



대한민국은 공부 공화국

"열심히 공부해라." 귀가 따갑고 아프도록 듣게 되는 그 얄미운 말, 그 성가신 말. 것공부겄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야단이고 아우성일까? 온 사회며 온 세상이 아예 공부방이 되고 말았다. 집 안의 개인 공부방과 학교 교실만이 공부자리가 아니다. 각종 모바일 기기 덕분에 손 안이 교실이고 거리가 교실이고 차 안이 교실이다. 스마트폰 따위가 흑판이 되고 책이 되고 공책이 되고 교사가 된 지 이미 오래이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와 중앦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과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학생에게는 따로 밤낮이 없다시피 하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정규 대학원을 이수하는 햇수를 더하면 줄잡아서 17~18년, 넉넉히 잡아서 근 20년은 공부에 매여 있어야 한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까지 끝내고 일자리를 얻어서 사회인이 되기까지 1~2년 또는 2~3년간 전문 직종의 학원에서 또다시 공부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니 젊음도, 청춘도 온데간데없다. 오직 공부가 있을 뿐이다. 오늘의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것호모 스투디오수스겄, 이를테면 것공부하는 인간겄이다. 공부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제대로 쉬고 마음껏 잘 겨를도 없이 공부에 목을 매고 있다.

이를 확인시켜주는 통계가 있다. 바로 학원에 관한 통계이다. 입시학원, 검정고시학원, 보습학원 등을 통틀어서 현재 우리나라에는 모두 몇 개의 학원이 있을까? 지금 한국은 것학원공화국겄이라고 해도 크게 허풍은 아닐 것 같다. 2010년 1월 12일 교육과학기술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학원 수와 학생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1970년 1,421개이던 전국의 학원은 그 수가 1990년에 2만 9,000개, 2000년에 5만 8,000개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다가 마침내 2008년에는 무려 7만 213개에까지 이르렀다. 학원 수가 38년 만에 자그마치 50.7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 같은 학원의 성장이 지닌 의미에다가 학교 재학생 및 대졸자의 공부 열풍이 의미하는 바를 보태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것공부 공화국겄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공부는 온갖 사회 현상과 문화 현상을 선도하고 있고 지금 우리 사회는 공부의 아수라장이다.

공부의 1원칙, 공짜는 없다.

그렇다. 공부는 머리 싸매기이고 머리 쥐어짜기이다. 공부는 용을 써야 하고 기를 써야 한다. 용을 써야하는 공부는 노동, 그것도 중노동이다. 그리고 때로 공부라는 중노동은 이해타산이 잘 안 맞을 때가 있다. 모처럼 고생, 고생, 그것도 생고생을 하지만 결과는 늘 보람찬 것이 아닐 수도 있다. 100퍼센트 헛고생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헛고생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모처럼 늦은 밤까지 잠도 자지 않고 힘들게 시험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도리어 고개를 돌리는 꼴을 누구나 한두 번은 당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 삼아서 머리 쓰기의 중노동을 그만둔다면 머리가 텅텅 비고 만다. 성적은 아예 낙제점으로 바닥을 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이 머리 쓰기의 중노동을 피해갈수는 없다.

공부

공부에는 공짜가 없다. 불로소득, 힘들이지 않고도 소득을 올리는 따위의 일은 없는 것이다. 돈을 벌거나 사랑을 얻는 일에는 더러 그런 행운이 따를지 몰라도 공부에는 어림도 없다. 공부에는 공짜가 있을 수 없다. 공부는 것놀고먹기겄에 질색하고 등을 돌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일한 만큼만 번다. 정의롭고 밝은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통할 법한 이 말은 공부에도 안성맞춤으로 들어맞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머리 노동한 것만큼만 얻는다.

이것이 공부의 으뜸 원칙이다. 결국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공부이다. 공부는 공든 탑이다. 그나마 예사로운 공든 탑이 아닐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당당히 솟아서 누구나 우러러볼 수 있도록 소슬하게 우뚝 서 있는 탑이다. 그것도 단단한 돌, 굳은 돌로 쌓아올린 석탑일 것이다. 아니면 철탑일지도 모른다. 그 탑은 공부에 공짜가 없음을 말없이 웅변해줄 것이다. 그 탑은 머리 싸매기이고 머리 짜기이고 그래서 머리 쓰기이기도 한 글 공부나 책 공부에 대한 응분의 보상일 것이다. 그렇다. 불로소득이 없고 공짜가 없는 머리의 중노동이 공부라면 필경 공부는 노력이고 또 땀일 것이다. 억척 부리기이고 악바리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공부는 노력이고 땀이다. 땀으로 공부는 보석 알처럼 아름답게 결정을 이룰 것이다.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마에 줄줄이 어리는 땀방울! 그것은 마음과 정신이 이룩해낸 보석 알이다.

공부의 2원칙, 배신은 없다

공부의 1원칙에 따르면 공부는 인플레이션도 없고 디플레이션도 없이 꼭 노력한 만큼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공부의 2원칙은 무엇일까? 당연히 것공부에는 배신이 없다겄는 것이다. 공부해서 얻은 것은 꼬박꼬박 그리고 차곡차곡 공부한 사람의 머릿속에 챙겨지기 마련이다. 돈은 더러 벌어서 다른 사람들 손에 넘어가고 권력 역시 아무리 움켜쥐어도 10년을 가지 못한다. 심지어 힘들게 쌓아올린 명성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수 있고 정보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공부에는 절대 배신이 없다.

일단 공부를 해서 머리에 챙겨 넣으면 언제까지나 그 배움은 머릿속 창고에 보관된다. 그렇게 머릿속 창고에 보관된 배움은 영원한 밑천이자 재산이 된다. 그렇기에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해서 남주랴?"라는 한마디 금언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렇다고 공부가 인색한 구두쇠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남달리 공부를 더 많이 해서 머릿속 창고가 넘쳐날수록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더 자주 나누어 누게 된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머릿속 창고에 재어놓은 지식의 재고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느라 머리를 쓰면 쓸수록 이미 챙겨져 있는 지식이 새로운 생기를 얻기도 한다. 공부란 그런 것이다. 공부에서 얻는 수확은 그런 법이다.

공부하느라 머리를 짜고 싸매고 쓰는 일은 밭갈이에 견주어질 수 있다. 공부는 책이나 컴퓨터에서, 아니면 아이폰에서 그냥 피동적으로 지식을 얻어내고 삼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머리를 쓴다는 것은 기억해서 보관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머리를 쓴다는 것은 머리를 경작하는 것, 다시 말해 밭을 갈 듯이 머리를 갈고 다듬는 일까지도 해내야 한다. 머리에도 고랑을 파고 이랑을 내야 한다. 그러고는 김을 매야 한다. 그것이 머리 쓰기이다.

그렇게 해서 머리 쓰기는 것짓기겄가 되기도 한다, 머리를 써서 창작도 하고 창조도 하는 것이다. 밭을 갈아서 농사를 짓듯이. 밖에서 주어지는 지식을 간직만 하는 것은 피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머리를 쓰는 것이다. 농사일에 견줄 때 그런 머리 쓰기는 이삭줍기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미 다 익어 있공부

는 것, 그나마 누가 주워가도 그만으로 논밭에 흩어져 있는 것이 바로 이삭이다. 밖에서 들여오는 것을 알뜰하게 손질하고 넉넉하게 거름을 주어서 갈고 길러서 마침내 제몫으로 거두어들이고 관리하고 경영하는 것이야말로 머리 쓰기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능이다. 공부는 이 경지에서 비로소 제 보람을 누리게 된다. 공부는 창조이다. 창조이기에 공부는 참답게 에누리 없이 나의 것이 된다.

그래서 "공부해서 남 주랴?"라는 말은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갖게 된다. 공부는 바로 영원한 지적 자산, 그것도 나 혼자만이 창조하고 나 혼자만이 활용하는 것이라 봐도 좋다. 갈고 맨 만큼, 싸매고 짜낸 만큼 알뜰하게 내 것이 되는 공부이기에 그것은 다른 누구에게도 넘어갈 수 없는, 영원한 나만의 것이다. 영원한 나의 창조이다.

II. 머리에서 발까지, 책상에서 책가방까지! - 공부의 다양한 풍경



책, 그 맛나는 음식

온 세상,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책이 없는 곳은 없다. 그렇기에 집이 서재이듯이 세상이 아예 서고이다. 온 세계가 아예 도서관이고 책의 창고이다. 그런데 책은 그 한 권 한 권이 지식의 창고이다. 우리가 필요해서 읽는 책에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줄 지식이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책은 그 한 권 한 권이 지식의 보고가 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으로 자라게 된다. 아니,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책을 통해서 자라게 된다. 부모나 형이나 누나가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을 들려주면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호기심을 채우고 교양도 쌓아간다.

하지만 책은 사람들의 머리, 교양 그리고 지식만을 자라게 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감성도, 정서도, 감정도 자라게 한다. 책은 사람들 가슴에도 영양분을 공급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머리와 가슴으로 책을 먹으면서 자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은 그것을 읽은 한 사람의 이력서에서 일부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즐겨서 읽고 또 읽은 책은 한 인간의 이력 속에, 그 개인의 역사 속에 깊이 사무치고 있을 테니까.

책표지가 낡고 구겨진 만큼, 책등이 헌 만큼, 그 페이지가 쭈글쭈글한 만큼 그 책을 읽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은 풍요해져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람됨도 익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먹으면서 자라고 살아간다. 그런데 머리와 가슴으로만 책을 먹는 것은 아니다. 입으로 먹을 수도 있다, 영국의 유명한 에세이스트(수필가)인 찰스 램은 "멋진 시의 한 구절을 잘 익은 신선한 과일을 먹듯이 맛나게 맛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말을 읽으면서 우리는 누구나 그를 부러워하는 한편으로 우리 각자도 비슷한 경험으로 즐거움에 젖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비유적으로만 책을 먹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도 책을 먹고 맛보곤 한다. 열정적인 독서가가 아니라도 좋다. 대부분의 독서가들이 책을 정성들여서 읽고 있을 때 책 페이지를 어떻게 넘기는가를 생각해보면 알 일이다. 침이 묻은 검지 끝으로 책장 귀퉁이를 핥듯이 휘어 짚고는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고는 무심코 그 손가락 끝을 입 안으로 들이민다. "냠냠!" 이것이야말로 책 맛을 음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그래서 책을 음미(吟味)한다. 것음吟겄은 것음겄이라고 읽는데 시나 노래를 소리 내서 읊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음미라고 하면 시나 노래를 읊으면서 그 소리며 내용을 입으로, 귀로 흠씬 맛본다는 의공부

미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시를 맛보고 글을 맛보게 된다. 손가락 끝에 침을 묻혀서 책장을 넘기고 그 손가락을 입으로 물 때 우리는 진짜로 책을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산해진미처럼, 또 진수성찬처럼 먹고 싶은 은근한 욕망을 그렇게 구체화해서 표현하고 또 채우고 있는 것이다. 책벌레라는 낱말은 누군가가 벌레가 되어서 책을 풀잎 뜯듯이 맛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III. 읽고 자라고 살다 - 글 읽기의 참맛



소설을 소설답게 읽는 법

소설은 재미있다. 수많은 읽을거리 중에도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실제의 멋진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듯이, 아니면 신명나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하듯이 읽을 수 있는 것이 곧 소설이다. 소설은 인물이 엮어가는 사건을 사실인 듯이, 실제인 듯이 그려나간다. 소설은 허구, 이를테면 짐짓 거짓으로 꾸민 이야기이고 사건인데도 현실감이 넘쳐흐른다. 그래서 소설 읽기는 사건을 직접 경험하듯이 실감하게 도와준다.

하지만 소설에도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또 원리가 있고 짜임새가 있고 분위기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요소들 중 인물, 사건, 배경을 일컬어 소설 구성의 3대 요소라고 부른다. 우선 인물은 말 그대로 소설에 나오는 사람을 일컬으며 영어로는 것캐릭터겄라고 한다. 캐릭터라는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각자가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사건이 전개되는 데 각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다음 사건은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벌이는 사건을 뜻한다. 주로 등장인물들의 행동으로 사건이 전개되므로 사건은 행동이라고도 불린다. 마지막으로 배경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공간적, 자연적, 사회적 배경)와 시간(시간적, 역사적 배경)을 일컫는다.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이런 세 가지 구성요소를 염두에 두고 다음 질문을 풀어나가야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저질렀는가? 다시 말해 주제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건의 줄거리, 다시 말해 플롯과 스토리를 잘 따라가야 한다. 시간순서에 따른 사건의 전개가 스토리라면 플롯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건을 재배치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을 때는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를 의식하면서 작품의 구성을 엮어내야 한다(독자에 의한 사건의 재구성). 플롯은 시간의 전후, 공간의 원근 이외에 인물의 상호관계와 사건의 인과관계 등을 따르면서 진행되는 것이 보통인데 대개는 사건의 진행에 따라 단계별로 나뉜다. 그중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단계로 나뉘는 것이 가장 흔하다.

발단에서는 등장인물과 배경이 소개되고 기본적인 상황이 설정된다. 전개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고착되면서 사건이 펼쳐진다. 위기에서는 갈등이 싶어지면서 사건이 폭발 직전으로 치닫는다. 절정에서는 사건이 폭발한다. 결말에서는 고조되었던 갈등이 해결되면서 새로운 균형 상태로 접어든다. 요즘에는 이런 단계를 파괴한, 참신한 기법의 소설이 많이 발표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설을 읽는 데는 플롯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을 지배하는 사건과 갈등에 특히 유의하면서 어떻게 사건과 갈등이 마무리되는지를 보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요점을 잡아내되 그 안에서 주제가 살아나도록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을 때는 플롯 외에 소설의 시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소설에는 사건을 관찰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 또는 서술자가 등장한다. 화자가 말하는 태도나 등장인물과의 관계 등에 의해 공부

소설의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소설 속의 것나겄가 주인공이 되어 것나겄의 이야기를 한다). 1인칭 관찰자 시점(소설 속의 것나겄가 주인공, 즉 피서술자의 이야기를 한다.), 3인칭 관찰자 시점(3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며 서술자가 모든 사실을 알지는 못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작가가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이야기한다)으로 나뉜다. 대개는 1인칭 시점보다는 3인칭 시점이 많이 쓰이는 편이다. 소설의 시점이 어떻든 서술자가 사건과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나 시각에 유념해서 작품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소설 읽기에 도움이 되도록 짤막한 이야기로 연습을 해보자. 어린 시절 동화책이나 만화영화로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만한 그림형제의 <빨간 모자와 늑대>이다.

빨간 모자의 소녀는 집을 나섰다. 소녀는 이웃 마을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 댁에 가기 위해 숲속을 지나갔다. 그런데 어둑한 숲에서 그만 늑대를 만나게 되었다. 늑대는 소녀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그러나 약아빠진 늑대는 소녀에게 냉큼 덤비지 않았다. 숲속에는 나무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는 나무꾼들이 신경 쓰여서 자꾸만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늑대는 빨간 모자를 쓴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귀여운 소녀야, 어딜 가는 거지?" 순진한 소녀는 이 괴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소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할머니 댁에 간다!" 하얗게 빛나는, 날카로운 이빨을 애써 감추면서 늑대가 다시 물었다. "그랬구나. 그런데 뭐 하러?" 그러면서 늑대는 억지웃음을 띠었다. "응! 딴 게 아니고 할머니를 뵈러 가는 거야. 엄마가 직접 만든 과자와 포도주를 갖다 드리려고.겂 소녀는 이렇게 다정하게 대답하면서 예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늑대는 웃으면서 소녀를 꽃밭으로 안내했다. 소녀가 꽃에 홀려 있는 사이에 할머니에게로 달려간 늑대는 잠자는 할머니를 통째로 꿀꺽 삼켜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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