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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김과장

태기석 지음 | 두리미디어
태기석 지음

두리미디어 / 2010년 06월 / 312쪽 / 15,000원

1부 철학,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다



오늘을 사는 나의 하루


나는 21세기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수정자본주의를 경과하여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매일 아침 8시까지 출근하여 오후 7시경에 퇴근하니까 하루 열한 시간씩 노동하고 있다. 출퇴근 왕복 두 시간을 감안하면 하루 중 내가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이 노동에 할애되고 있다. 또한 나는 대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자급자족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와 가족의 생계는 전적으로 나의 임금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일자리를 잃는 것은 곧 가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기에 나에게 직업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절박한 현실이다. 이처럼 자본은 나와 가족의 생존을 쥐고 있는 막강한 권력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본에 순응하여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한 현실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생존경쟁과 자아의 고립: 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는 다국적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날로 첨예화되는 경쟁 아래 인간의 삶이 어떻게 황폐해지는가를 체험할 수 있었다. 산업현장에서 목표를 부여하고, 관리자들을 동원해 목표 달성을 독려하고, 줄 세우고, 평가하고, 목표에 미달한 순서로 도태시키는 자본주의의 경쟁체제는 생존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삶을 날로 황폐하게 만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다.



나는 이런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해왔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관리자들의 실적 독려가 험악해질수록 직장은 갈수록 메마르고 재미가 없다. 실적을 맞추기 위해서 전전긍긍하는 삶, 거기에는 오로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하는 '기계'만 있을 뿐 '인간'은 없다. 그러한 일상 속에서 사람과의 관계는 형식적이고 언제나 뒷전이며, 그 결과 자아는 쉽게 고립된다. 어떻게든 남을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차가운 적자생존의 원리가 작동되는 각박한 경쟁의 현실은, 이웃과 동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와의 관계와는 구조적으로 공존하기 어려운 모순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직장에서 인간의 삶이란 자본의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에 맞춰서 정형화되고 대상화된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주체성이라는 '자아의 본래성'이 사라지고 '자본이 원하는 자아', 즉 '정형화된 타자'로 변하게 된다. 정형화된 타자에서 주체성으로서의 양심과 소신은 농담거리로 전락하고, 오로지 실적만이 최우선적인 관심사일뿐이다. 이처럼 현실은 자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본이 원하는 자아'로서 상시적인 감시를 받으며 실적을 독려당하는 강제 노동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싫으면 관둬라.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라는 자본가의 해고권과 노동시장의 상시적인 공급과잉은 강제노동을 자발적 노동으로 둔갑시킨다.



하루에 내가 깨어 있는 열여섯 시간 중 열한 시간이 노동을 위해 바쳐지기 때문에 직장생활에서의 삶의 질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나의 행복을 위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자본이 원하는 자아로 살아가는 비본래적인 삶은 아무리 많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가 아닌 현실: 내가 일하면서 살아온 지난 23년을 되돌아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죽지 못해 산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실적에 쫓겨 죽어라 일만 하다가 때가 되면 월급을 받은 기억밖에 남은 게 없다. 심지어는 내가 십 년 전에 어느 지점에서 근무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할 정도이다. 그나마 직장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이따금 동료들과 업무 외에 인간적으로 교류한 관계의 흔적뿐이다. 자신의 삶에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자본이 원하는 모습으로 대상화되어 생활에 쫓겨 여유 없이 살아온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삶은 삶에 대한 최대한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현실이 아니라 거의 모든 현대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사람이 주체성을 가진 자아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호흡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경쟁과 실적에 쫓기는 순간부터 삶의 여유는 사라지고 주체성을 가진 자아로 살아갈 기회는 사라진다. 항상 자기 생활에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일단 회사에 출근하면 종일 경쟁과 실적에 치여 정신이 쏙 빠진 채로 지쳐 퇴근하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주체적인 나'는 없고 '숨 참기'를 통해 현실에 겨우 대응하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대상으로서의 나'만 있을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진행될수록 경쟁의 압력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의 모든 현장에서 자아의 비본래성은 그들의 현실이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정신적 실체로서 의식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하나의 생산요소로 대상화되는 삶은 마치 암에 잠식당한 조직처럼 내 삶이지만 내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서 정신이 마비될 때 남는 것은 물질과 동물적 본능뿐이다.



자본주의사회의 대상성과 경쟁구조에 따른 인간소외

인간소외가 자본주의의 핵심 모순으로 대두된 근본원인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자본주의가 상대가 있는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자신을 고용한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인간은 언제나 '대상성'으로서 존재한다. 그에 따라 인간이 기계의 부속물과 같이 대상화되어 생산해낸 생산물들이 고스란히 자본가의 차지가 되므로 생산물로부터의 소외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생산과정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소외의 근원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후기 자본주의로 갈수록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의 요소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초기 자본주의에서는 주로 기업 내에서 이뤄지는 자본의 착취와 억압이 문제였지만, 후기 자본주의로 갈수록 경쟁은 전 세계적인 자본 간의 경쟁으로 확대된다. 따라서 현대자본주의의 인간소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계적으로 경쟁이 확대됨으로써 상시적인 도태위기에 처한 자본과 그것을 이용한 자본의 위기 이데올로기 및 동원체제를 파악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대상성은 극대화된다. 현대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억압과 착취도 '저들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자본을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며 문제의식과 대결을 아예 포기하기 때문에 소외는 그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그런데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대목은 경쟁과 삶의 관계이다. 경쟁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치달으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호흡과 자기의식이 사라지고 삶이 아예 사라진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끌려가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삶은 마치 기계처럼 메마르고 황폐해진다.



자본주의사회에 순응하는 현대인: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고용주가 기계 돌아가는 속도를 빨리할수록 처음에는 인간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만 나중에는 결국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경쟁이 강화되고, 목표가 계속 상향 조정되고, 노동시간이 늘어나고, 노동인력이 줄어들고, 기계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일에는 장사가 없다. 생산목표를 겨우겨우 맞추고 노동시간을 때우며 해고되지 않기 위해 헉헉대는 곳에는 일하는 기계만 존재할 뿐 정신적 실체로서의 본래적인 삶이 남아 있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고도의 생산성을 위해 살인적인 경쟁이 추구되고, 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경쟁이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극심한 인간소외와 삶의 황폐화를 유발한다. 이것이 21세기 현대자본주의에 처한 현재 우리 삶의 모습이다. 경쟁과 인간의 본래적인 삶은 물리적인 반비례 법칙이 성립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인 법칙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으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한 경쟁의 상황에 처한 누구도 극심한 소외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음악을 듣고 가다가 위험구간을 통과할 때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한동안 음악이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의식을 못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다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때 '내 시간이 어디로 갔는가? 내 삶인데 왜 그 순간의 음악이 기억나지 않는가?'를 반문해본다. 내가 정신적 실체로서 음악과 교류하다가 갑작스레 운전에 몰두해야 하는 순간, 내가 듣던 음악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운전에 몰두하느라 그 순간 음악에 대한 나의 자기의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고도생산성을 위하여 나의 호흡과 템포에서 벗어나 긴장 속에 진행되는 반복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주체성으로서의 자기의식이 마비된 상태로 자신의 호흡과 템포를 벗어난 생산과정에서 겪는 소외는 삶을 좀먹는다. 자기의식이 끊긴 삶은 몸만 따라갈 뿐 주체성으로서의 자기의식이 그 위에 실리지 않기 때문에 기억의 상실을 초래한다. 따라서 그렇게 보내는 시간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 잘 남지 않는 상실의 세월이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는 이렇게 상실의 시간, 좀먹는 세월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불행한 자본주의의 비밀: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경험하는 인간소외는 자본가의 이윤 동기에 의해 일방적으로 설계된 노동과정에 편입된 산업현장의 모든 노동에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경쟁체제를 도입한 현대사회의 분업화와 전문화를 수반하는 모든 형태의 노동에서 발생한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이 진행되는 어디에서도 정신적 실체로서의 자기 자신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존철학은 인간소외와 그에 따른 주체성 상실을 현대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실제로 심각한 소외를 겪으며 숨 참기와 현실 외면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심지어 자신들이 소외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 거기에 21세기 현대 자본주의의 불행과 비밀이 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모든 선택은 내가 한다'라는 자유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완벽하게 작동하는 것과 더불어, 현재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점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점이 없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고 있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주체적?정신적 실체를 중심으로 하는 '본래적 자아'라는 기준점을 갖고 평가할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본질' 혹은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이해하고 있을 때 인간은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할 수 있게 되고, 인간을 대상화하여 동원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시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안정적인 기준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본질 또는 인간 인간의 본래적 자아를 이해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다.



2부 철학, 자본주의사회의 오늘을 말하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필자는 수정자본주의의 개량화 시기를 지나 신자유주의를 맞이한 1990년 초반 산업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그 후 직장에서 국제통화기금 체제를 비롯한 현대자본주의의 진화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혼란을 겪었다. 복지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포섭하려는 성격을 지녔다면 신자유주의는 노동계급을 배제하려는 성격을 지닌다. 신자유주의의 노동현장에서는 공장자동화와 사무자동화, 정리해고,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사회적으로는 '중산층론'이 위기에 처하고 '빈곤층론'이 담론의 전면에 부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자본의 공격과 이로 인해 초래된 '20:80의 사회'가 과연 노동자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는 일방적 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시대의 고용위기는 분명 노동자들을 더욱 보수화시키고 있다. 자본이 망하면 노동자들도 일자리를 잃는 자명한 현실 앞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인 '노사공동체주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사공동체주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남은 노동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이 개량화를 포기하고 노동자들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시대에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전략을 포기한 이유는 그들이 세계화를 앞세우며 국경을 개방하는 과정에서 이윤의 착취자로서 집단적으로 혜택을 보고 있고, 이들 국가의 노동자들조차 복지와 연금정책의 수혜자로 혜택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 국가들은 개도국들에게 시장 개방을 강요함으로써 압도적으로 유리한 교역조건과 절대적 경쟁우위로 엄청난 이윤을 자국으로 환수해 갔다. 다국적 기업들은 전 세계에 진출하여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여 벌어들인 이윤으로 자국에 50퍼센트에 가까운 세금을 내고 있고, 그 세금은 사회간접자본과 복지비용으로 자국에 투입되고 있다. 이로 인해 불과 20~30년 사이에 선진국들의 풍경이 크게 바뀌고 있다.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중상주의적인 착취를 가능케 하기 위한 그들의 생존전략인 것이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고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로 인해 더 이상 체제 변혁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도 고도산업사회에 도달하여 정보기술혁명을 이룬 결과 생산자동화와 사무자동화로 인한 높은 실업률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는 있지만, 연금과 복지정책으로 실업문제를 해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지유주의 시대의 고통은 주로 개도국에서 발생하고 있다.



또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비교우위에 입각한 생산방식으로 쌍방이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비교우위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의 모든 업종에서 절대 우위의 경쟁력을 가진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자본들이 제3국에 직접 진출하여 이윤을 독식하는 형국이다. 이로 인해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의 전통산업은 순식간에 기반이 무너진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진척될수록 후발자본주의 국가들의 자본은 생존경쟁에 쫓긴 나머지 자국의 노동자들을 포섭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들은 세계화를 철회하고 싶지만 세계화에 뿌리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선진국 정부들과 국제금융기구들, 투기자본들과 산업자본들이 이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존재조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대상화사회의 존재양식에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소외의 고통을 경험한다. 물론 후발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으로 인해 더 각박하게 대상화사회의 모순에 내몰리지만, 선발자본주의 국가들 또한 그들 나름의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내해야 할 소외가 만만치 않다. 결국 존재조건의 차이보다도 대상화사회라는 존재양식이 더 근원적인 고통의 원인이 된다. 게다가 자본의 전방위적인 이데올로기 조작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화를 끝까지 방해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척될수록 그리고 자본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대량실업과 고용의 파편화가 심화될수록 변혁의 동력은 강해질 것이다. 그것은 단지 대립하는 계급의 투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고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로 인해 잠시 허위의식에 빠졌던 현대인들이 대상화사회의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정신적 실체로 살아가기 위해 자각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도산업사회의 대량실업과 인간소외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가 현대사회의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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