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죄수
자오쯔양 지음 | 에버리치홀딩스
국가의 죄수
자오쯔양 지음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6월 / 496쪽 / 26,500원
1. 1989년 6 4 사건7년 전(1993년) 나는 어떤 일이 잊힐까 두려워 6 4 사건과 관련된 일들을 써둔 적이 있다. 일부 기록을 남겨두었던 셈이다. 이제 이 기록을 토대로 이야기하려 한다. 학생운동의 시작은 후야오방胡耀邦의 추모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후야오방은 19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는데 4월 18일과 19일 저녁,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4월 22일 추도식이 개최되었을 때, 텐안먼天安門 광장에는 수만 명의 학생들이 모여 애도했다. 후야오방의 서거에 대한 학생들의 애도가 왜 이렇게 강렬했는가? 첫째, 그는 매우 청렴했다. 둘째, 그의 퇴진 방식에 대해 불만과 분노를 갖고 있었다. 셋째, 1988년 이후 개혁개방이 전면 축소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학생들은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 형식을 통해 개혁 진전에 대한 자신들의 희망을 나타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학생들에 대해 불법적 시위가 아니면 느슨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의 이러한 의견을 리펑李鵬과 모든 상무위원들이 받아들였다. 덩샤오핑 역시 동의했다. 그런데 그 뒤로 학생 시위가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 소요사태로 확대되었을까? 문제는 1989년 4월 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4, 26 사설에 있었다. 학생들의 불만은 언젠가는 분출될 것이었다. 설사 당시에 소란을 피우지 않았더라도 이후에 표출되었을 것이다. 사설 발표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만약 당시에 일을 원만하게 처리했다면 사건이 그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4, 26 사설이 전환점이 된 것이다.
4월 19일 나는 북한 방문 일로 덩샤오핑鄧小平을 찾아갔고, 그는 나의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나 일이 아주 이상해졌다. 나의 북한 방문 기간 동안 리펑이 대신 주관한 상무위원회에서 리펑, 리시밍, 천시퉁의 주도하에 학생시위를 조직적이고 계획적이며 사전에 모의한 반당, 반사회주의 정치투쟁으로 규정했다. 회의 결과를 보고받은 덩샤오핑은 즉각 동의했고, 명쾌하게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베이징을 떠나자마자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시위는 일순간에 격해졌다. 4, 26 사설이 발표되자마자 4월 27일 거리행진 인파가 10만을 넘어섰다. 학생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질까 우려하여 중앙에 무력행사를 자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베이징시 위원회 지도자들과 리펑 등이 덩샤오핑에게 전화를 걸어 "수십만 명을 체포할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덩도 동의했다. 리펑은 자오쯔양이 귀국하여 4, 26 사설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5, 4일 학생시위 문제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학생시위 문제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며, 자제와 질서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와 견제의 틀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나의 주장은 국내외로부터 광범위한 지지와 칭송을 받았다. 5월 5일 이후 며칠간 베이징의 각 대학들은 수업을 재개했다. 나는 학생들의 제시한 합리한 의견들을 받아들이고 대화와 소통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펑 등 몇 사람은 극렬히 저지하고 지연시키며 심지어는 망쳐 놓으려고까지 했다. 따라서 5, 4 연설 속에 담긴 대화와 소통의 방침은 실현될 수 없었다. 5월 13일 덩의 집에서 고르바초프의 방문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면서 학생시위에 관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덩은 대화가 필요하며, 청렴과 투명성 문제, 시기를 놓치지 말고 부패 문제를 잘 해결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리펑 같은 이들은 내 주장에 강력히 반대하며 보이콧했다.
학생들과 정부와의 대화에 있어서 학생들은 정부에게 대화의 의지가 없음을 느꼈다. 나는 이와 같은 일을 거듭 비판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이런 연유로 학생들이 학교로 복귀한 뒤 꽤 많은 날이 지났지만 정부에서는 어떠한 특별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대화는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은 더더욱 없었다. 정부에 완전히 실망한 학생들은 고르바초프의 방중 기간(1989년 5월 15~18일)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가두시위와 단식을 감행했다. 학생들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국빈을 접대하기 위해 정부가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생각은 틀렸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과감하게 행동할수록 리펑 일행에게 무력 진압의 구실을 제공한다는 것을 몰랐다.
학생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하지 않기를 희망하는 나의 호소문 발표에도 불구하고, 5월 13일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에 몰려들어 연좌단식에 들어갔다. 이날부터 학생들은 텐안먼 광장을 점거했고, 6월 4일에 이르러 유혈사건이 발생했다. 학생들의 단식투쟁은 폭넓은 사회적 동정과 지지를 얻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호응에 도취되어 더욱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리펑 일행의 방해 때문에 학생들과의 소통과 대화, 그리고 국면 전환을 위한 방침들은 여전히 실현되지 못했다. 단식학생들의 강렬한 요구는 학생시위의 본질에 대해 규정한 4, 26 사설의 수정이었기 때문에 단식을 중단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나는 처음으로 정치국 상무위회의에서 학생시위를 규정한 4, 26 사설의 수정 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리펑은 즉시 반대했다. 사설의 수정은 덩샤오핑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덩샤오핑이 결정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태의 확대는 4, 26 사설이 정확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학생시위가 진정되지 않는 것은 당내 문제 때문이며, 자오쯔양의 5, 4 연설에서 기인한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따라서 군대를 이동시켜 베이징에 배치하고 계엄을 실행한다. 리펑, 양상쿤, 차오스 세 사람이 계엄실시를 책임진다." 당시 나는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군대를 동원해 학생을 진압한 당 총서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총서기 직무의 사직서를 상무위에 보냈다. 양상쿤은 결정을 철회할 것을 재삼 요청했다. 그는 이 결정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사태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나는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직서를 회수했다.
며칠 동안 저명인사들과 당내 원로들이 학생운동의 애국적인 행동을 인정할 것과 학생들에 대한 잘못된 태도를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5월 18일 덩에게 편지를 써서 의견을 전달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아무런 회신도 없었다. 나는 단식학생들을 문안했다. 위로의 말을 전하고 즉석연설을 했다. 몇 명이 죽는다 해도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나의 충고를 이해하지 못했다. 19일 나는 3일간의 휴가를 신청했다. 상무위원회는 리펑이 대신 주재하도록 건의했고 당일 밤 계엄령을 선포하는 회의 참석도 거절했다.
19일 계엄 선포 이후 전국은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고 군중의 힘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계엄과 군대의 베이징 진입은 베이징 시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군대는 도처에서 시민의 항의와 저항에 직면했다. 군대가 진입하지 못해 계엄령도 효과를 잃었고 수많은 학생과 시민, 노동자, 기관 간부들이 거리와 텐안먼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수도 베이징은 마비될 위기에 놓였다. 나는 조기에 전인대(전국인민대회) 상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전인대라는 권력기관에서 민주와 법제의 형식으로 이 국면을 전환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덩의 지시를 받은 리펑의 방해로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마침내 6월 3일 밤거리에서 끊임없이 총성이 들려왔다. 마침내 전 세계를 경악시킨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기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첫째, 학생시위의 주동자는 사전에 모의된 '반당, 반 사회주의적 정치투쟁'이라고 했지만 분명 사전에 모의된 것이 아니었다. 둘째, 이 동란의 목적은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셋째,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학생들이 인민해방군을 보호했다는 증거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지금에 와서 매우 분명해졌다.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정치국 확대회의가 개최되었다. 리펑이 내가 "당을 분열시키고 동란을 지지한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리고 나의 총서기, 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등의 직무를 박탈할 것을 건의했다. 나에 대한 조사도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나를 비판했다. 나는 불법 연금되어 격리 조치되었으며 불법적으로 나의 총서기 직책을 박탈당했다.
2. 연금의 심정
이제부터는 지금까지 진행된 나에 대한 조사와 연금 상황에 대해 얘기하겠다. 나의 모든 직무를 박탈하고 나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진행한다고 결정한 이러한 조치는 역사적으로 선례가 없는 것이었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원래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끝난 후 나에 대한 심사 종결을 선포할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반향이 두렵고, 내가 자유로운 신분을 회복한 후에 밖으로 나가 활동할 것을 두려워하여 지연되면서 장기적으로 표류하게 된다. 그에 따라 지속적인 심사를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나에 대한 연금을 실시했다. 1990년 6월 이후 그 어떤 사람도 심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자료 확인을 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내게 외출할 수 없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으며, 만약 규정이 있다면 보여 달라고 했다. 그들은 문자로 된 규정을 가져오지도 않았고, 또한 외출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도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히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에 대한 심사가 종결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나에 대해 장기간 연금을 실시하고 신체적 자유를 제한했다. 심사 종결 결정을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점차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에 대한 심사 종결을 선포하자마자 나의 행동을 제한하는 6개 규정을 만들었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여론에 노출될까 두려워 드러내지 못하고 집행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에는 어떤 논리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당의 기율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출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연이어 외부인의 출입을 완전히 불허했고 손님을 맞이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조사 기간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3. 개혁 개방의 13가지 문제
이제부터는 개혁개방과 경제 건설 측면에서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이 문제를 놓고 중앙의 주요 지도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었는데, 시종일관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덩샤오핑을 대표로 하는 사람들의 핵심 주장은 속도에 초점을 맞춰 경제 발전 속도를 빠르게 해야 하며, 대외 개방을 강조하고 시장경제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윈을 대표로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1950년대 1차 5개년계획의 방법과 계획경제를 견지해야 하며, 혹은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몇 차례 반복된 우여곡절 끝에 덩의 주장이 점차 우위를 점하면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도 그의 주장이 정확했음을 증명한다.
두 번째 문제는 1981년에 있었던 전국적인 경제 조정 문제이다. 1979년과 1980년 당시 경제적인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천윈 동지의 주관 아래 조정을 진행했다. 당시 중앙에는 재경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덩샤오핑 동지는 천윈이 맡아줄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때 나는 아직 베이징에 올라오지 않았고 그 뒤로 내가 주관하면서 '중앙재경영도소조'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천윈은 태도가 비교적 단호했고 걱정이 많았다. 그는 1961년과 1962년 경제조정의 경험에 근거하여 규모가 커지고 많아질 것을 우려하며 과감하게 축소했다. 당시 우리 역시 어떤 일에 대해서는 잘 몰랐고 경험도 부족했다.
세 번째 문제는 대외개방에 관한 것이다. 개방의 문제에 있어서 천윈은 걱정을 많이 했고, 그와 덩샤오핑 간의 의견 충돌도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났다.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그 당시만 해도 아직 의사일정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기업 자주권의 확대, 기구 간소화와 권한 이양, 농촌의 농가생산책임제 실시 등에 대해 천윈은 명확하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외개방 문제에 있어서 천윈은 비교적 우려가 컸다. 특구 문제였다. 특구는 덩샤오핑이 주장한 것으로 우선 광둥의 선전과 주하이, 푸젠의 샤먼이 승인되었고 그 뒤로 일부 지역이 추가되었다. 특구에 대해 천윈은 줄곧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받은 전체적인 느낌은 그가 특구에 대해 시종일관 의문과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 문제이다. 1981년 11월 나는 전인대에서 <현재 경제 상황과 향후 경제 건설 방침>이라는 제목의 정치공작보고를 했다. 보고에서 나는 향후 경제 건설은 실제 상황에 맞는 속도로, 경제적 성과가 좋고, 인민들이 더 많은 실질적인 혜택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경제 건설의 열 가지 방침을 제기했다. 이는 내가 국무원 총리를 맡은 이후 경제 문제에 대해 가졌던 첫 번째 연설이다. 당시 누군가 이것을 나의 시정강령이라고 말했다.
다섯 번째 문제이다. 베이징으로 올라온 이후 나는 경제효율을 강조했고 과거와 같이 생산량과 속도를 추구하는 방법에는 그리 찬성하지 않았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 나와 후야오방 사이의 의견 차이는 대부분 이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여섯 번째 문제는 계획과 시장의 문제이다. 덩샤오핑 동지는 줄곧 시장의 역할을 강조했고, 사회주의 역시 상품경제임을 지적했다. 덩은 나와 담화를 나누면서, 천윈의 주장을 겨냥하여 "우리의 계획경제는 소련에서 배운 것으로 지금은 남들도 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시기마다 표현은 달랐지만 일관되게 상품경제와 가치법칙, 시장경제의 경향을 보였다. 반면 천윈은 항상 계획경제를 강조했다. '계획위주, 시장보조' 이것은 그가 매번 강조하던 주제였다. 그는 경제를 다룰 때는 새를 키우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너무 세게 쥐면 질식해서 죽고 너무 풀어주면 새가 날아가 버린다고 하면서 반드시 새장 안에 가두고 질식하지도 또 날아가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새장경제(鳥籠經題) 사상이다.
1985년 9월 당의 전국대표대회에서 그는 또 다시 계획경제를 위주로 하고 시장조절을 보조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런 정책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천윈이 이렇게 말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른바 경제체제개혁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계획경제를 개혁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경제체제개혁은 하나는 계획과 시장, 또 다른 하나는 소유제 두 가지 측면을 포함한다. 나는 소상품을 제외하고 간접계획 부분 역시 시장조절에 따르고 이 부분을 점차 확대한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중국 경제에서 시장조절에 의존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다. 1984년과 1985년의 계획체제개혁 과정에서 기업에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제외한 주요 업무는 국가계획위원회에서 직접 계획하는 비중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해 몇 년 동안 국가계획위가 직접 계획하는 제품을 점차 축소했고, 국가계획위가 직접 관리하는 일괄배분 물자를 축소했다.
일곱 번째 문제이다. 해외에서 중국 경제개혁을 논의할 때, 사회주위국가의 경제개혁에는 대체로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급진적인, 다른 하나는 점진적인 방식인데, 대다수가 중국이 채택한 점진적인 이행 방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를 통해 구소련과 동구 국가에서 발생한 동요와 경제 폭락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여덟 번째 문제는 경제 과열과 연착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