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개념어 사전
채석용 지음 | 소울메이트
채석용 지음
소울메이트 / 2010년 06월 / 443쪽 / 15,000원
공리주의 : 국민들의 행복 총량이 클수록 좋은 사회라는 사회철학상, 중, 하 계층이 고르게 이득을 보장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입장에 따르면 사회제도가 가장 좋다. 이게 바로 공산주의적 입장이다. 비록 사회 전체의 총 이득은 가장 적지만 균등하게 이득이 분배되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 전체의 총 이득을 기준으로 본다면 사회제도가 가장 좋다. 비록 하류층이 얻는 이득이 지나치게 적지만 그래도 사회전체로 보면 이득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공리주의적 입장이다. 공리주의는 사회구성원들이 얻게 되는 이익, 즉 행복의 총량이 가장 큰 사회가 가장 좋은 사회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그런데 이런 공리주의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공리주의는 모든 인간이 행복을 추구한다고 믿는다. 행복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쾌락이다. 공리주의는 쾌락주의이다. 그렇다고 마약 하고 도박 하면서 느끼는 쾌락을 옹호하는 건 아니다.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은 일생을 통해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총 행복을 말한다.
둘째, 앞 도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공리주의는 인간이 느끼는 행복을 수치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벤담은 강도, 계속성, 확실성, 원근성, 생산성, 순수성, 연장성 등 7가지 기준을 가지고 행복의 총량을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개인이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는 개인주의이며 자유주의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무작정 허용할 수는 없다. 정부는 개인들이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행복을 추구하도록 질서 잡는 역할을 한다.
이런 공리주의는 여러 가지로 비판받는다. 첫째, 위 방식의 공리주의는 행복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다. 밀은 벤담과 달리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질적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밀은 국가의 역할을 벤담보다 더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단순히 자유를 보장해주는 규칙을 제공해주는 선에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분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밀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사회 전체 행복이 양으로 그 사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공리주의적이다. 이에 따라 벤담의 공리주의를 양적 공리주의, 밀의 공리주의를 질적 공리주의라 한다.
둘째, 공리주의적 주장은 지나치게 개인의 행복에만 초점을 두어 개인을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만 묘사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개인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는 존재이다. 즉 개인의 시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사회제도는 다른 사회제도에 비해 최고의 최대행복을 보장해주지만 하류층의 행복이라는 점에서는 지나치게 야박하게 군다. 이럴 경우 중류층 이상의 국민들이 하류층의 열악한 상황을 보고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다. 행복의 총량은 클지 모르지만 그 행복의 내용에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느끼는 갈등과 시기심, 배려와 연민이 빠져 있다.
따라서 다른 사회구성원에 대한 시각을 고려하여 새로운 사회제도가 요청된다. 이런 새로운 사회제도는 비록 중상류층의 이득에 손해를 줄지언정 하류층에게 최소한의 행복을 보장해주고자 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보다 '최하층의 행복 보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려도 최하층이 비참한 생활을 한다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롤즈가 제가한 바 있으며 앞 도표에서 사회제도에 해당한다.
과연 이 세 가지 사회 가운데 어떤 사회가 가장 좋을까? 공산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은 도표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평등한 사회가 보장된다면 하, 중, 상류층의 행복이 15, 16, 17 정도는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리주의자들 또한 마찬가지로 반박할 것이다. 중, 상류층의 행복이 보장된다면 중, 상류층이 마냥 이기적으로 자기 이득만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것이다. 자유주의란 개인의 이득이 보장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공리주의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10, 20, 30 정도의 행복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노마디즘: 지식마을을 떠돌아다니는 창조적 지식유목민의 이념'노마드'란 '유목민' 혹은 '유랑자'를 뜻하는 프랑스어이다. 노마디즘이란 유목주의이다. 하나의 농경지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처럼 하나의 절대적 지식이나 제도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풀을 뜯고 새로운 땅과 진실을 개척하자고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유명해진 말이다. 헌데 노마디즘이라는 개념은 또렷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노마디즘에 관해 많은 오해가 생기고 있고, 그에 관해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맥락을 더듬어 보자.
노마디즘은 두 가지 방면에서 전쟁을 치러야 한다. 하나는 기존의 영역으로부터 탈피하면서 발생하며,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기존의 영역에 둘러쳐진 울타리를 걷어내야 하며, 새로운 영역에 둘러쳐진 울타리도 물리쳐야 한다. 그래서 노마디즘은 전쟁기계를 옹호한다. 이것이 노마디즘에 대한 첫 번째 오해의 요소이다. 허나 노마디즘이 전쟁기계를 옹호한다고 해서 전쟁 자체를 옹호한다고 간주하면 곤란하다. 노마디즘은 전쟁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여길 뿐 전쟁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가로막는 폭력적인 쇠사슬을 끊었다고 해서 쇠사슬 파괴범이라 욕할 수 없다. 상대가 가로막는 폐쇄적 담벼락을 무너뜨렸다고 재물손괴죄를 묻는 것은 어리석다. 중요한 것은 폭력과 규제, 아집과 편견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또 다른 오해는 신자유주의적 시선과 연관된다. "삼성의 힘은 디지털 노마드에서 나왔다"는 광고카피가 있다. 세계적 신자유주의 기업인 삼성이 디지털 기술을 앞세워 세계시장을 석권해가는 현상을 노마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삼성의 성장과 성공은 노마디즘이라는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노마디즘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공고한 사회적 틀을 늘 비판적으로 보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회적 틀을 개척하고자 한다. 단순히 삼성이 세계시장에서 자기들 상품을 널리 판다고 해서 그것을 노마디즘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노마디즘에 대한 완벽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오해는 노마드가 단순히 외형적 움직임을 뜻하는 것, 즉 '단순한 이주'라고 착각한 데서 비롯된다. 노마드는 외형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정신적 ? 문화적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주를 추구한다. 삼성이 자기네 제품을 국경 넘어 파는 행위나 몽골의 전사들이 말발굽을 달려 적지를 손아귀에 넣는 것은 진정한 노마디즘이 아니다. 몽골의 전사들은 단순한 영토 확장에 몰두했을 뿐이며, 삼성의 행태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공고히 하는 농경적 행태일 뿐이다. 노마디즘은 자본주의라는 틀 자체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몽골의 기마병과 삼성의 경영자들은 진정한 유목민이 아니라 단순한 이주민에 불과하다.
그러나 노마디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완전히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노마디즘이 주장하는 불가피한 전쟁이라는 것이 늘 좋은 결과만을 보장한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노마디즘은 우리를 둘러싼 폐쇄적 족쇄와 남들이 둘러치고 있는 담벼락을 허물어뜨리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전쟁을 통해 모든 족쇄와 담벼락이 무너져 모든 사람들이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들락날락할 수 있게 되는 사회가 반드시 좋은 사회인가? 국가와 정치체제,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경계를 무너뜨리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세상이 오는 것일까? 노마디즘은 경계로부터 벗어나 끝없는 실험과 도전을 주장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것을 탐색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것이 아닐까?
물론 둘뢰즈는 노마디즘이 결코 무책임한 무정부주의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기계로서의 국가와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한다. 허나 국가와 협력하는 것이 진정한 유목주의일 수 있는가? 또한 노마디즘이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노마디즘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자본만 외형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진정한 유목이 아니라 단순한 이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허나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19세기 자본주의와 다르고 20세기 자본주의와도 다르다. 자본주의는 고전주의, 수정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변모해 왔다. 이런 변화와 도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도 유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적 틀 자체까지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유목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국가라는 틀 자체까지 부정하지는 않는 들뢰즈식 노마디즘도 진정한 유목주의가 아닌 셈이 되지 않나?
만물일체설: 인간을 우주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라 보는 겸손의 철학동아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우주 만물이 각기 벌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사지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하나의 인간을 이루는 것처럼 만물은 우주라는 하나의 통일적 전체를 이루는 유기적 구성요소라고 보았다. 이를 만물일체설이라 한다. 그러나 만물일체설의 내용은 취하는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예컨대 노장사상에서는 만물들의 지위를 동일하게 파악한다.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사물이나 동물들보다 나을 게 없다. 다른 사물이나 동식물들도 모두 인간과 같은 존재론적 지위를 가짐으로써 우주라는 통일체를 구성하게 된다. 사람이 나비 꿈을 꾸는지, 나비가 사람 꿈을 꾸는지 분간할 수 없다는 장자의 아이디어는 노장 사상의 만물일체설을 문학적으로 설명한다. 노장사상에는 인간중심적 윤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반면 유교사상, 특히 성리학은 만물이 일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만물들 사이에 위계가 엄존한다고 주장한다. 노장사상과 달리 '윤리'라는 척도를 도입함으로써 이런 위계적 사유를 합리화한다. 세상은 노장사상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작정 일체인 것만은 아니다. 이런 만물 위계설에 의하면 가장 윤리적인 존재는 인간이다. 그 다음으로 동물이 부분적으로 윤리적 존재로 대접받는다. 식물에게서 윤리성을 찾기란 매우 힘들며, 무생물에게는 윤리성이 거의 없다. 호랑이를 의로운 존재라고 파악한다든가 수달을 예절 바른 존재로 파악하는 것 등은 이런 입장에서 비롯된다.
이렇듯 만물이 원칙적으로는 일체를 이루되 실제로는 위계적일 수밖에 없는 근거는 기의 차이에 있다. 성리학자들은 기를 윤리적으로 파악한다. 기가 깨끗하면 품성도 깨끗하고, 기가 더러우면 품성도 좋지 않다고 보았다. 인간이 타고난 기는 동식물의 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유전학적으로 넘을 수 없는 종의 장벽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계설은 사회적 차별을 긍정하게 만든다. 윤리적 위계설은 엄격한 유교적 신분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의 노릇을 해왔다. 만물일체설은 유교적 입장에서 볼 경우 원론적 이상에 그칠 뿐 현실은 아니었다.
이와 달리 양명학은 성리학의 위계설을 강하게 부정하며 진짜 만물일체설을 설파한다. 이러한 만물일체설에 도달하기 위해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속에 우주의 근본적 원리, 즉 이가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성리학은 우주의 근본적 원리인 이를 우선 인간의 밖에 둔다. 인간은 원칙적으로 그러한 이를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원칙적 차원에서만 그럴 뿐이다. 현실적으로는 기의 제약에 의해 이의 원칙을 인간의 본성이 완벽히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본연지성과 기질기성이라는 이분법이 발생한다. 기의 제약은 곧 윤리적 위계설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양명학은 성리학과 달리 인간의 마음에 완벽히 우주의 이치가 구현되어 있다고 본다. 심즉리는 성즉리보다 더 래디칼한 성선설을 주장한다. 온 우주의 원리가 인간의 마음에 선험적으로 이미 완벽히 갖춰져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마음만 제대로 드러내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면 곧 온 우주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작업은 온 우주를 관통하는 일관된 원리를 발견하는 작업인 셈이다. 이를 통해 만물이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이를 통해 만물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양명학은 신분사회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물론 사회적 ? 시대적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신분철폐운동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사농공상의 위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지만, 사의 권위만을 강조하는 편협함에서 벗어나 농공상의 조화를 중시하는 정도의 입장에는 도달할 수 있었다. 양명학의 만물일체설은 청나라 말기 강유의 와 담사동 등이 주장한 대동사회론에 영향을 줌으로써 근대화에 이바지하기도 한다.
변증법: 대립과 모순은 긍정하고 그것을 지양하는 변화무쌍한 논리변증법은 형식논리와 달리 모순과 대립을 긍정하는 논리, 혹은 오히려 모순과 대립을 통해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를 말한다. 광의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이나 제논의 역설 및 칸트의 가상논리학 등을 포괄하지만 협의의 변증법은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이라 하면 헤겔의 변증법을 가리킨다.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해선 일단 형식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형식논리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엄격히 지키는 논리를 말한다. 모순율은 '갑은 갑이 아닌 그 어떤 것과도 같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만약 갑이 갑 아닌 다른 것과 같은 것이 되면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안 된다. 배중률은 '중간영역을 배제한다'는 의미다. 즉 '갑과 갑 아닌 것 사이에는 중간에 그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말한다.
수학은 모든 것이 형식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삼각형'은 오로지 삼각형이어야만 하며, 삼각형이 아닌 것과 같을 수 없다. 또한 삼각형과 삼각형 아닌 것 사이에는 중간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삼각형과 사각형 사이에 4.6각형이 있을 수 없다. 허나 현실은 다르다. 현실은 이렇게 수학적으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채석용은 훈남이면서 추남일 수도 있고 섹시남일 수도 있다. 때로는 훈남이기도 하고, 술에 쩔어 지낼 때엔 훈남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현실을 수학적으로 형식논리만 가지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헤겔은 이렇게 현실을 설명하는 데에는 형식논리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고 보고 변증법을 창안했다. 변증법은 형식논리와 달리 모순과 대립을 오히려 변화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긍정한다.
가령 '채석용은 선배이다'는 말과 '채석용은 후배이다'는 말이 있다고 하자. 여기서 '선배'와 '후배'는 형식논리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진술 모두 참이다. 일반적으로 보아 채석용은 선배이면서 후배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석용이 만약 후배들만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위의 두 가지 진술 가운데 '채석용은 선배이다'는 진술만 참이 되고 '채석용은 후배이다'는 진술은 거짓이 된다. 이처럼 변증법은 현실의 다양한 맥락을 고려해 판단할 것을 주문한다.
헤겔 이후 학자들은 헤겔의 변증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정, 반, 합이라는 도식을 도입했다. '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