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사는 나라
이광훈 지음 | 따뜻한손
죽어야 사는 나라
이광훈 지음
따뜻한손 / 2010년 05월 / 356쪽 / 15,000원
스쳐간 순간이 역사가 되고태평의 잠을 깨운 조키센
1600년 세키가하라 대회전을 전기로 일본 전국을 평정한 도쿠가와막부는 250여 년간 외부세계와 문을 닫고 태평세월을 구가했다. 전통적으로 무사정권이 집권해 온 일본에서 전쟁이 없는 세월을 이렇게 오래 누리기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태평세월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은 불과 4척의 조키센, 즉 증기선이었다.
1953년 6월 3일 오후,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 앞바다 우라가만에 선체를 온통 까만색으로 칠한 거대한 군함 4척이 나타났다. '구로후네(흑선)'로 불린 4척의 미국함대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수도의 코앞까지 진출해 공포를 쏘면서 무력시범을 보여 일본의 기선을 제압했다. 페리제독이 끌고 온 흑선함대는 기함 서스케해나 호(2,450톤)를 필두로 61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967명의 해병대가 승선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전선이라고 해야 고작 100톤 규모에 불과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이 함대를 목격한 일본 조야의 충격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불과 4척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일본 전체의 해군력을 총동원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막강한 화력을 가진 함대였다.
특히 일본의 기를 질리게 한 군함은 기함 서스케해나호와 순양함 미시시피호였다. 이 2척은 우선 크기 자체가 압도적이었고 증기기관으로 선체 바깥의 수차를 돌려 배를 움직이는 외륜선이었는데, 그렇게 큰 함선이 거대한 외륜 2개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일본은 경악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엄청난 크기의 함선이 돛을 올리지 않고도 에도의 내해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 그 자체였다. 사람이 젓는 노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그렇게 큰 배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에게는 충격이었다. '조키센'의 등장은 일본의 심장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조키센'에 대한 처리를 놓고 당시 막부는 밤잠을 설치며 고민을 했고, 일전을 불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무라이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상항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새벽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사무라이와 선비의 전쟁관
일반적으로 무사집단이 전쟁에 과감하고 선비정권이 전쟁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 정반대로 전개된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으로 혹독한 전란을 치른 조선이 겁도 없이 청나라에 반기를 들어 병자호란을 자초한 전례를 봐도 그렇다. 선비는 전투의 승리 그 자체보다 명분이 목숨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버리고 오랑캐와 손을 잡은 광해군의 결정을 반정의 명분으로 삼은 인조 조정이 청나라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이념에 중독이 되면 죽음을 초월하여 만용에 가까운 객기가 발동하게 된다. 그렇게 목숨을 던져서라도 명분을 지키게 되면 정신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자위할 수 있다. 반면에 무사집단은 일단 전쟁을 벌어지게 되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수많은 전투를 통해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면 섣불리 칼을 빼들지 않는다. 전쟁으로 승산이 없으면 타협밖에는 없다.
13세기말 여몽연합군의 내침이후 단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일본은 수도의 코앞에서 벌어진 흑선함대의 내항을 외적의 침입으로 단정하였고, 에도 시내는 전쟁 일보 직전의 대혼란이 일어났다. 전쟁이 임박하면 제일 먼저 생필품의 가격이 폭등하기 마련인데, 당시 에도에서는 생필품보다 칼과 창, 갑옷과 무구류(武具類)의 가격이 먼저 폭등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전쟁에 나갈 때 자신이 사용할 무기는 스스로 조달해야 했다. 250여 년간 태평세월에 젖어 평소 무구를 제대로 갖춰 놓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갑자기 무기와 장비를 사들이면서 값이 서너 배로 폭등한 것이다. 전쟁은 어디까지나 사무라이들의 몫이었고 장사꾼들은 그 틈에도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뒤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일억옥쇄'를 부르짖던 광기에 비하면 낯선 모습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사무라이들의 나라였고 일반 평민들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 몸을 던져 동참하려는 의식이 없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이 전쟁 임박을 상정하고 싸울 준비를 했다는 점은 당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갖지 못한 일본만의 저력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은 사농공상의 신분적 위계질서를 공통적으로 유지해 왔으나, 일본만 유일하게 선비가 아닌 무사가 士(사)의 자리를 차지했다. 지배계급이 무사집단이었기 때문에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강렬한 전투의지를 갖고 주권 방어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들이 바로 전투력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위기상황에 똑같이 처했던 조선 및 중국과는 대응 태세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국방예산의 재원이었던 군포의 징수가 부패의 온상이었고 그나마도 지배계급인 양반들은 의무가 면제되어 있었다. 나라를 지키는 군사적 부담의 주체가 지배계급이 아니었다는 점은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특히 군사적 도발을 통해서 외부세력이 접근할 때 지배계급이 상무적 집단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국가의 운명자체를 좌우하게 된다. 상무집단은 전투의 관점에서 어떻게든 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적 수단을 찾게 되고, 그것이 근대화라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근대화에 매진하게 된다. 초기 산업사회 기술적 발전의 성과는 대부분 군사력을 근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군사력의 근대화에 주력한 나라들이 제국주의 시대 중심국가로 부상했다. 사무라이 사회였던 일본은 군사적 도발에 대해 항상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군사적 수단에 특히 강한 호기심을 보였고 신문물의 도입에 주저하지 않았다. 19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 조선, 일본의 동아시아 3국 중 전통적인 상무집단인 일본만이 근대화의 우등생으로 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바로 이 대목이다.
무사정권이었던 일본은 외세의 압력에 대해 전투의 개념으로 대응하려는 의식이 강했고, 일단 전투에 임하면 승리가 지상과제이기 때문에 승부의 관점에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승산이 없으면 일단 납작 엎드리고 후일의 승리를 도모하기 위한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적의 앞선 군사기술과 장비를 모방하려는 의욕이 넘쳤다. 특히 서구제국주의 세력이 아시아에 접근하는 방식이 군사력을 앞세운 무력도발을 통해 주도권을 장악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가장 절실한 서양문물이 신식무기와 군사편제, 그리고 군대의 운용방식이었다. 무사정권인 일본은 생존을 위한 군비 확충의 측면에서 이들 신식무기와 새로운 군사기술을 집중적으로 흡수했고, 군사적인 부문에서 먼저 시작된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이 단연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구로후네의 내항은 바로 그 결정적 전기를 제공하게 된다.
요시다 쇼인, 구로후네 현장에 서다
구로후네가 우라가 만을 휘젓고 다닌 열흘 동안 에도 시민들은 우라가 만으로 몰려나와 구로후네를 구경하느라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수많은 인파 속에 후일 일본의 근대사를 바꾼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요시다 쇼인이라는 23살의 청년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불같은 인생을 살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 목숨을 던졌고, 후일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한 주역들을 제자로 길러 기라성 같이 남겨놓았다. 그 불같은 인생의 출발점이 바로 구로후네를 직접 목격한 충격이었다.
1830년 일본 260여 번 중의 하나인 죠수번에서 태어난 요시다 쇼인은 일찍이 병학사범으로 천재성을 인정받은 수재였다. 그리고 쇼인은 자신의 일생을 바꿀 스승, 사꾸마 쇼잔을 만나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고 양이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개국의 불가피성 등을 배웠다. 무조건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소양이'를 하지 말고 그들의 실력을 배워 서양의 기술로 서양을 제압하는 '대양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사꾸마 쇼잔의 지론이었다.
대문 빗장을 걸어도 창문은 열다
[해국도지]가 일으킨 파장사실 일본 역시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처럼 확고하게 유지돼 온 쇄국정책이 뿌리째 흔들리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1840년 중국에서 발생한 아편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의 패권국가로 인식하고 있던 중국이 서양의 침략에 그렇게 무기력하게 굴복한 사건은 일본에게 큰 충격이었다. 더구나 1842년 난징조약에 따라 홍콩을 내주고 영토주권을 사실상 상실하는 대이변이 벌어지게 되자 일본 조야는 바짝 긴장한다. 이는 일본이 아편전쟁의 전개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아편전쟁 뒤 중국의 웨이위안이 중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해 방대한 자료를 집대성하여 [해국도지]를 출간하였는데 1844년 이 책이 중국에서 출간되자마자 나가사키로 들어와, 막부를 비롯한 지도층이 제일 먼저 열람했다. 특히 [해국도지]의 입수는 일본 조야의 외세에 대한 대응 전략의 수립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책을 펴낸 웨이위안은 아편전쟁 후 중국이 다시 일어설 방책은 서양 세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대비를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국도지]는 아시아권 최초로 세계 각국의 역사 지리, 정치, 경제, 문화, 군사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으로 최신정보의 보고였다. 무엇보다 [해국도지]는 단순한 백과사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3국이 근대화 과정에서 빈발하는 외세와의 충돌에서 자주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교범으로 삼았던 이론무장의 교과서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으로 실추된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낙후된 <나:중국>로 하여금 <타자:서양>의 우수한 기술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적인 높은 도덕정신을 가진 <나>의 약한 곳을 보충해야 한다'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해국도지]는 그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자양분이었다. 웨이위안이 이 책에서 강조한 중체서용의 방법론이 바로 '해방론(海防論; 해안 방어론)'과 '척사론(斥邪論; 가톨릭교를 사교로 몰아 배척하려는 논리)'이었다.
이 '중체서용론'이 일본에서는 '화혼양재(和魂洋才; 일본의 정신 위에 서양의 유용한 것들만 가져와 사용)', 조선에서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변용되어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중체서용론'이나 조선의 '동도서기론'이 일부 개화파 지식인 그룹에 의해 자력자강운동의 방법론으로 제기된 비주류의 소수의견 수준이었던 데 비해, 일본의 '화혼양재'는 조야의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공론화되었다는 데 있다. 결국 일본은 [해국도지]의 자양분을 대부분 흡수했다는 얘기다. [해국도지]를 통해 일본은 서구제국의 군사력에 대한 실체를 알게 되었고 이후 외국선에 대한 대응태도를 규율한 기존의 '이국선타불령(외국선 추방령)'을 수정하여 포격을 금지하고 물과 식량을 주어 내보내도록 완화했다. 일본은 어떤 경우에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이때부터 방침으로 정하고 대응태도를 수정해 나갔다. 페리제독이 에도 앞바다까지 들어와 공포탄을 쏘아댔는데도 막부가 대응을 자제한 이유는 이 같은 학습효과 때문이었다.
사무라이와 선비, 세상을 보는 방식의 차이
조선도 [해국도지]를 일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입수했다. 1844년 말 연행사로 파견된 사신단이 1845년 3월말 귀국하면서 [해국도지] 초판본 50책을 구입하여 돌아왔고, 1847년에 60책, 1852년에는 완간본 100책이 들어왔다. 적어도 [해국도지]의 유입 시점은 조선과 일본이 차이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이 책의 활용이다. 일본이 사꾸마 쇼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론'의 관점에서 서구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와 만국공법에 근거한 대외교섭의 방법론을 중점적으로 학습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에서는 위정척사의 관점에서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론적인 바탕으로 [해국도지]를 활용했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시급했던 '해방론' 대신 내부 단속을 위한 '척사론'만 취했던 것이다.
요시다 쇼인의 밀항, 그리고 운명의 회항
개항시기만큼 벌어진 한일 근대화의 격차1854년 3월 3일 일본의 막부는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했고, 1854년 8월 영국, 같은 해 12월 러시아, 1855년 12월 네덜란드와 연속적으로 화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주요국과의 수교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1858년 6월 미국, 7월 러시아, 영국, 네덜란드, 9월 프랑스와 각각 통상조약을 맺어 당시 서구 열강 5개국과의 수교 통상조약 체결을 완료했다.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 서구 열강과 본격적인 수교에 나섰고 1882년 5월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시작으로 1883년 11월 영국과 독일, 1884년 6월 이탈리아, 1995년 10월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주목할 점은 일본이 수교를 위한 화친조약을 선행하고 3~4년의 시간이 흐른 뒤 통상조약을 체결한 데 비해, 조선은 수교와 통상조약을 동시에 체결했다는 사실이다. 일찍 문을 연 일본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했지만, 출발이 늦었던 조선은 갈 길이 급했다. 조선과 일본의 개국시점 자체도 22년의 격차가 있지만, 서구열강을 대상으로 한 실질적인 개항을 따지면 그 격차는 28년으로 벌어진다. 이 기간에 일본은 근대화를 위한 국체변경과 국가제도의 개혁을 거의 마무리했고, 조선은 이 28년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에 병합했다.
군국주의 맹아를 키운 운명의 회항
다시 내항한 페리함대는 조약 체결 후에도 약 3개월 정도 일본에 더 머물다가 떠났는데, 페리함대가 시모다항에 정박 중이던 1854년 3월 28일 새벽 작은 나룻배를 타고 페리함대의 함선 포헤탄호로 접근하는 두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바로 요시다 쇼인과 쇼인의 고향친구였다. 포헤탄호에 탑승한 이들은 미국으로 도항하려고 하니 태워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제 막 수교 교섭이 타결된 시점에 밀항자를 데리고 갔다가 막부를 자극할 것을 우려한 페리제독은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해군 보트에 태워서 다시 해안으로 돌려보냈다.
꼭두새벽에 일어난 일이라 페리의 거절로 다시 해안으로 돌아온 요시다 쇼인 일행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쇼인은 우직하게도 시모다 봉행소(奉行所; 막부의 집무소)에 출두하여 자수했다. 만약 이때 요시다 쇼인이 밀항에 성공했더라면, 그의 국수주의적 성향은 상당부분 개화되고 좀 더 국제적인 감각을 가진 지사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그에게 사사했던 기라성 같은 제자들도 면모가 달라졌을 것이고, 특히 일본 근대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토 히로부미는 존재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토 히로부미는 사무라이의 시중을 드는 최하층계급 출신으로, 쇼인이 신분을 떠나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두각을 나타낼 기회 자체가 없었을 처지였기 때문이다. 쇼인의 밀항과 운명적인 회항은 자신의 인생행로를 되돌린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일본의 근대사를 군국주의로 치닫게 하는 전기가 되었다. 그가 낳은 수많은 알이 부화하여 일본제국과 군국주의의 기틀을 닦았기 때문이다.
4월 15일 요시다 쇼인은 에도의 텐마쵸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0월 24일 관할인 죠슈번 하기의 노야마옥으로 이감되었다. 요시다 쇼인이 노야마옥에 갇혀 있었던 약 14개월로 이 기간 동안 쇼인은 무려 600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수감 전 일본 전국을 주유하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교유를 통해 세계를 보는 안목을 길렀다면, 수감 후에는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치열한 이론무장을 했던 것이다. 감옥에서 출옥한 쇼인은 개인 학숙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숙생들을 받아들여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 쇼인은 숙생을 받아들이면서 당시 신분제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을 보였다. 본래 번 내 사무라이들의 교육기관인 명륜관의 교수자격을 갖고 있었고 병학사범이기도 했던 쇼인의 신분을 감안하면 숙생도 당연히 사무라이의 자제들이어야 했다. 그런데 쇼인은 배우고자 하는 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