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우주 클럽
아파나시예브 이고르, 라브료노브 알렉산드르 지음 | 바다출판사
세계 우주 클럽
아파나시예브 이고르, 라브료노브 알렉산드르 지음
바다출판사 / 2010년 6월 / 406쪽 / 14,800원
러시아 - 우주시대의 서막러시아에서는 모든 위대한 시작은 위로부터 실행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무대에서 군사용 로켓의 성공적인 첫 발사가 있은 후 대규모 로켓 개발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일의 로켓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은 소련에서 이와 유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45년 11월 30일 국방장관 D.F.우스티노브의 명령에 따라 제88군수공장을 토대로 특수건설국이 만들어졌다. 특수건설국 제3부서(책임자 S.P.코룔료프)는 '대형 탄도로켓' 개발에 착수했다.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방대하기만 했다. 항공학에서의 라이트 형제처럼 쉽게 우주발사체를 만들기란 불가능했다. 당연하다. 국가 차원의(어쩌면 지구적 차원일 수도 있다.) 프로젝트를 실제 물리적 생산품(로켓, 시험장, 운영센터 등)으로 현실화시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전략적 군수장비 개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사수하는 필수조건으로 국가 차원의 보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소련은 바늘 가는 데 실 따라 가는 것처럼 구성된 국방정책으로 필요한 재원을 동원할 수 있었다.
코룔노프는 M.K.티혼라보프와 M.V.캘드쉬에게 다단식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기술 모형에 관한 연구를 주문했다. 1951년 연구 완료 후 도출된 기본 결과가 비행 주 연료를 전달하는 다단식로켓(티혼라보프의 기본가설)에 비해 캘드쉬 팀의 다양한 무게의 블록으로 구성한 다단식 기기의 수치를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도면으로 향후 제1 특수건설국에서 R-7 로켓을 개발했다.
세묘르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로켓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개발 동기는 가장 중요한 잠재적 경쟁자인 미국 땅에 핵탄두를 운송시키는 확실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목적이었다. 그리고 R-7의 제작 조립 바탕은 1947~1948년 국방부 제4 포병학아카데미에서 티혼라보프 팀이 진행한 다단식 로켓 도면이었다.
전설적인 로켓 '세묘르카'의 개발 역사는 다음과 같다. 1953년 12월 소련 각료회의 명령으로 제1 특수건설국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7R(향후 R-7) 개발 프로젝트 준비가 시작됐다. 개발 명령서에는 R-7 로켓으로 위성과 우주구조물을 타 행성으로 발사해 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1954년 5월 20일 중요한 순간에 소련 공산당중앙위원회와 각료회의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 R-7의 개발 제작 실험에 대한 제956 결정문이 내려졌다.
최초의 로켓은 포들리프키(현재 모스크바주 코롤료프시)의 제88실험공장에서 제작되었다. 미리 언급하자면 R-7의 제작조립도면을 토대로 한 추진체와 우주로켓복합체는 의외로 성공적이었고, 장시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성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수십 번 검증돼 최고의 안전성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계속 사용될 것으로 예측된다.
1956년 봄 제88공장에서 측면블록이 장착된 중앙블록형의 조립이 진행되었다. 그저 거대해 보이기만 했던 로켓은 시각적으로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57년 5월 15일 현지시각 19시 정각에 R-7 로켓의 첫 발사가 이뤄졌다. '발사'버튼은 육군 중령인 엔지니어 E.I.오스타쉐프가 눌렀다. 로켓은 발사대에서 이상 없이 출발했다. 조종비행은 98초까지 이어졌다. 그 뒤 엔진 구조물의 견인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마지막은 명령 없이 로켓에서 분리됐다. 103초대에 프로그래밍 된 정사각도를 벗어나 엔진을 중지하라는 긴급신호가 울렸다. 로켓은 약 300km를 비행한 후 추락하였다. 1957년 9월 7일에 두 번째 발사가 성공했지만 이번에도 탄두는 대기권에서 소멸되었다. 9월 22일, 실험장에는 스푸트니크가 도착해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준비가 시작됐다.
모스크바 시간으로 10월 4일 22시 28분 34초에 최초 우주추진로켓 R-7으로 지구의 세계 최초 인공위성이 발사되었다. 발사 295.4초 후 위성과 추진로켓의 중앙 블록은 궤도에 진입했다. 이것은 R-7 로켓의 세 번째(총 7번째) 성공적인 발사였다. 발사 314.5초 후, 명령 19.9초 후 분리됐다. 약 20초 동안의 일시정지 후 소위 엔지니어 비지보리소프가 담당하는 핀란드식 하우스 오른쪽에 있는 제1측정 포인트의 수신기 R-250에는 비콘 신호가 수신됐다. '삐삐'신호음으로 최초 위성은 인류의 새로운 우주시대를 열었다. 이런 과학과 엔지니어의 성과는 문명적 의미에서 역사상 동일한 사건이 없었다. 이것을 러시아인들이 획득했다.
그날이 왔다
역사적으로 대다수 신기술의 탄생은 발전된 서구 국가에서 있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증기선, 자동차, 전화기, 비행기, 텔레비전, 핵폭탄 모두 그렇다. 그러나 인공위성은 유사품조차 없는 완벽히 독창적인 창조물이었다. 추진로켓도 마찬가지지만 위성은 복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이 하늘을 뚫을 때 가장 중요한 두 단어'러시아 스푸트니크'는 전 세계 모든 언어로 퍼져나갔다.
초기위성이란 개념은 무선 비콘 신호기와 동일했다. 구면형태는 대기권 상층부의 밀도지수를 확인하기 위해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또한 독특한 반구형 열교류장치(전면은 단열처리가 되어 있고 후면은 방열 장치가 있다. 측정 가능한 대기권 밀도가 있을 경우 위성의 방송방향은 뒤로 뻗은 안테나 덕분에 조정될 수 있었다)는 제동속도가 강해지면 주변 환경과 온도를 조절하여 위성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미리 언급하자면 밀폐용기 아래 지구압력, 온도, 최저습기 그리고 표준블록으로 제작된 각종 장치들로 제작 조립된 초기 위성은 향후 1990년대까지 수십 년 동안 러시아 무인 우주장비의 전형이었다.
1957년 9월 17일 K.E.치올콥스키의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연방 콜론홀에서 열린 회의 때 당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소련 과학아카데미 객원회원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가 발표를 맡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조만간 소련과 미국에서 과학 목적의 지구 최초 위성 실험발사가 실행될 것입니다." 코롤료프는 이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9월 20일, 우주기지에서 특별위원회의 회의가 열렸고 추진로켓과 위성의 발사준비가 확인됐다. 회의 때 위성 발사에 대한 공식발표는 지구를 한 바퀴 돈 후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첫 위성 발사가 전 세계 정치 사회에 가한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소련 정부 특히 국가지도자 N.S.흐루쇼프는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서구의 호기심은 점점 부러움 섞인 탄성으로 변했다. "사회주의 체제는 소련이 우주선을 발사시킬 수 있게 한 안전한 발사대이다"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구호는 국제무대와 소련 내에서도 굳어졌다. 미국은 위성발사를 자신의 힘과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미국은 더 이상 소련과의 전쟁이나 경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얻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소련의 두 번째 위성은 어떠한 기술계획도 없이 말 그대로 즉흥적으로 겨우 22일 만에 제작 발사됐다. 세계 첫 번째, 두 번째 위성발사로 인류는 무엇을 얻었는가? "…… 두 위성의 비행 관찰과 수신된 각종 관측정보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위성이 제작될 때 사용했던 모든 명제들은 완벽하게 확인됐다.…… 수신된 비행 방향의 변화에 관한 정보는 위성의 궤도비행 과정과 대기권 상층부의 실제 밀도 변화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 위성비행으로 우주방사선 연구에 있어서 가치 있는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생명체의 생물학적 현상에 대한 연구도 매우 흥미로웠다.…… 지구에서 우주로 건너갈 수 있는 안전한 다리는 소련 위성으로 건설됐고, 별을 향하는 길은 개방됐다." -S.P.코롤료프 1957년 12월-
《타임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러시아인, 만세! 그들은 15세기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들처럼 상상력을 일깨웠다. 우주비행 후 분명히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구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중요한 사실은 세계의 정치 군사적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1957년 10월 4일까지만 해도 강대국 리더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공상과학 소설에나 어울릴 테마를 현실과 마주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위성시대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관심사와 인류문명의 규모를 달라지게 했다. "핵심은 지구에서 탈출해 우주에 정착하는 것이다."(K.치올콥스키). 정말로 이러한 예언은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
미국 - 최고의 자리를 노리다
핵무기와 수소폭탄 개발에 성공한 미국은 기술 분야에 있어서 전 세계 선두주자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나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쏘아 올린 지구 최초의 위성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과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해, 상대방에게 사회주의라고 으름장 놓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정치인들이나 언론인들까지 어떻게 이런 것을 놓칠 수 있었을까? 별과 줄무늬가 새겨진 로켓과 위성은 어디로 갔을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미국의 티혼라보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페이퍼클립Paperclip 작전 과정 중(패전한 독일에서의 두뇌 사냥) 레히흐 3세 로켓 수석 개발자 베르네르 폰 브라운을 비롯해 약 120명의 핵심적인 연구자들을 데리고 왔다. 얼마 동안 미군은 레드스톤 병기고(앨러배머주 한스빌)에 그들을 배치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V-2를 연구하도록 하여 새로운 군사용 로켓을 개발하도록 했다. 이때부터 미국 국방부 과학연구부서들은 우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52년 2월 맨해튼 핵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 핵심 인물이었던 템플대학교의 물리학자 어리스티드 V.그로스는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얻어 위성을 연구하기로 했다. 그로스는 베르나르 폰 브라운의 우주에 대한 욕망을 잘 알고 있었고, 레드스톤의 동료들과 함께 인공위성의 비전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1954년 6월 25일 워싱턴에서 해군연구청의 연구원들의 주도로 지휘관 조지 W.후버와 '우주전문가'알렉산더 새이튼의 만남이 성사됐다. 1954년 9월 폰 브라운 팀은 당시 있었던 부품으로 소형위성추진체 개발안을 발표했다. 몇 개월 후 이 제안은 '프로젝트 오비터Orbiter'라고 명명됐다.
1955년 5월 26일 국방회의 때 중거리탄도미사일과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하에 미국 과학위성발사 프로그램이 1408 결정문에서 승인됐다. 비밀문서에는 미국이 "국제지리물리학의 해와 같은 해에 엄중한 보호 아래 과학위성을 발사하여 평화적 목적을 강조하도록……"이라고 강조되어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정책을 승인했고, 미국 위성이 국제지리물리학의 해에 발사될 것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오늘날 미국의 이 결정은 숙명적이었다고 받아들여진다. 만약 미군의 오비터가 승리했더라면 세계 최초의 위성은 아마도 미국 위성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뱅가드의 실패와 성공
1957년 10월 혁명 40주년과 첫째, 둘째 위성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1957년 12월 6일 소련 지도자 N.S.흐루쇼프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 자기 위성이 세계 최초가 될 줄로 믿고 뱅가드라는 이름을 지은 것 같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 위성이 최초였고 뱅가드가 된 셈이다……."
미국 국방부에서 유도로켓 개발을 담당했던 월리엄 헐리데이와 프로그램 매니저였던 존 하겐은 뱅가드 프로젝트 상황과 함께 TV-3 발사 계획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러시아 쫒아가기'라는 히스테리적인 분위기 속에서 백악관과 미국의 언론은 뱅가드 TV-3의 발사를 스푸트니크에 대한 미국의 화답으로 보도했다. 1957년 12월 4일로 계획했던 발사는 기상상황으로 6일로 미뤄졌다. 6일 11시 44분 34초에 추진체는 발사대를 떠났다. 갑자기 로켓은 멈춰 섰고, 발사대로 다시 내려앉았다. 폭발로 인해 추진로켓의 1, 2단은 완전히 붕괴됐고 3단은 파손되었다. 놀랍게도 위성은 살아남았다.
첫 발사 실패는 미국의 국민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조롱과 야유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런던의 《데일리 헤럴드》 전면에 사진 2장이 실렸다. 추진로켓 뱅가드 발사 직전 사진과 폭발 후 잔해, 그리고 큼직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완전 망했다."뱅가드가 실패한 뒤 베르나르 폰 브라운이 우주진출 승인을 얻었다. 그는 이 기회를 1958년이 지나서야 잡았다. 1958년 1월 23일에 새로 수리한 발사대에 뱅가드 TV-3BU 로켓이 준비되었으나 마지막 발사 14초 전 2단 산화제인 초산이 통에서 새어 나가 엔진을 망가뜨렸다. 다음은 TV-4 차례였다. 1958년 3월 17일 오전 7시 15분에 발사가 진행되었다. 비행 150초에 1단이 분리됐고, 2단은 정상 작동되어 양호하게 임무를 완수했다. 드디어 뱅가드를 쫒아 다녔던 불행의 그림자가 떠났다.
미국의 최초 위성
역사적으로 최초의 미국 위성은 1958년 1월 31일 추진로켓 주피터 C로 궤도에 진입한 익스플로러가 되었다. 주피터 C의 기반은 레히흐 3세의 V-2의 후손인 레드스톤이었다. 레드스톤은 탄도미사일로서 소위 '벌판'설치용 전략로켓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이 무기에 전혀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로켓을 운송 설치 확인 연료공급 발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연결 차량, 트레일러, 트럭 등이 필요하다. 군사용으로 활용되기 시작할 때에는 이 시스템은 너무 무거웠다.
세계 최초 위성 발사 후 베르네르 폰 브라운과 ABMA의 수장 존 B.메더리스 장군은 새로운 국방부 장관 닐 맥켈로이에게 주피터 C를 기반으로 한 추진로켓을 개발하자고 설득했다. 1957년 11월 8일, 맥켈로이는 육군에게 뱅가드를 대신할 수 있는 우주추진체 2기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메더리스 장군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추진로켓으로서 주피터 C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57년 12월 주피터 C 로켓은 C-124 글로브마스터로 카나베랄에 도착했다. ABMA는 1월의 마지막 3일 동안 조망대를 예약했다. 1958년 1월 31일 22시 40분에 엔진이 작동됐고 '주노Ⅰ'로 부르게 된 주피터 C 로켓은 하늘로 향했다. 바싹 긴장한 117분의 기다림 끝에 캘리포니아 스테이션에서 위성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는 신호를 확인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의 첫 위성발사는 미국을 들뜨게 만들었다. 워싱턴에서 기쁨으로 가득 찬 V.브라운은 "우리는 우주에 작전 근거지를 만들었다. 이제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위성은 1970년 3월 31일까지 궤도에 남아 있었다.
"미국 대통령이 말한다."
"미국 대통령이 말한다. 기술의 기적으로 여러분은 우주를 비행하는 위성에서 나오는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여러분과 전 인류에게 미국이 전 세계인들의 평화를 기원한다는 것을 전한다." 이것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목소리였다. 프로젝트 SCORE(Signal Communications by Orbiting Relay Equipment, 궤도를 돌면서 계전기로 이루어지는 신호통신)는 삼엄한 보안 아래 준비됐다.
이러한 배경 속에 미국의 우주 성과는 매우 빈약해 보였다. 미 해군이 추진했던 불쌍한 뱅가드는 그 당시 7번이나 발사를 시도했으나 그중 한 번만 3파운드의 위성 '자몽'을 궤도에 진입시켰다. 육군이 개발한 주노Ⅰ(주피터 C)는 6번의 시도 중 3개의 위성만 성공했다. 아틀라스 10B는 미국인들에게 그나마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를 제공했다. 최초로 미국은 궤도에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는 밝은 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아틀라스 10B의 궤도비행은 계획에 없었던 사건은 아니다. 이는 뱅가드, 주노Ⅰ, 주노Ⅱ, 파일럿, Thor-Able 프로젝트에서처럼 국제지리물리학의 해 프로그램 안에서 미국 대통령이 지정한 비밀로켓과 위성 발사로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백악관에서 자기녹음기에 대통령이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성탄 메시지를 녹음하기로 결정했다. 발사는 1958년 12월 18일 현지시각 18시 02분에 이뤄졌다. 국제지리물리학의 해가 막이 내리기 직전 아틀라스 10B는 다음 파라미터로 궤도에 진입했다. 기존의 1.5단식 아틀라스는 1,300~1,400kg을 궤도에 쏘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첫 궤도 발사 전에도 이러한 상승력은 우주 경쟁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단을 추가함으로써 추진체 동력을 강화시키는 작업이 시작됐다. 결과적으로 추진로켓 아틀라스는 미국의 안정적인 우주경주마가 되었고 SCORE는 역사상 최초의 통신위성이라는 왕좌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