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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이야기

박근형 지음 | 명진출판
후진타오 이야기

박근형 지음

명진출판 / 2010년 3월 / 328쪽 / 12,000원



1장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




1947년, 후진타오는 다른 아이들보다 두 살이나 어린 다섯 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마 교사 생활을 했던 아버지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이 빨리 커서 몰락한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찍 입학시켰을 것이다. 그 후 일곱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다 치르고 난 어느 날, 아버지는 후진타오를 불러 "진타오, 이제 어머니는 이곳에 없단다. 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평소엔 집에 없을 거야. 네가 두 여동생을 보살펴라"라고 말했다. 이런 어린 시기를 보내면서 후진타오는 또래의 아이들보다 한층 더 성숙해졌다. 그래서일까? 후진타오는 학업에 전념했고 성적도 좋았다.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생각이 깊었다. 선생님과 학우들은 후진타오의 그런 성품을 아끼고 좋아했다.

그 뒤 후진타오는 1953년 7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가을에 타이저우 제2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생이 된 후진타오는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열심히 책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았다. 그리고 1956년 가을, 후진타오는 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타이저우 중학에 합격했다. 타이저우 중학은 장쑤 성의 4대 명문 학교 중의 하나였는데, 학우들은 똑똑하고 배려심이 많은 후진타오를 모두 좋아하고 귀여워했다. 한편 후진타오는 반에서 수학 대표를 할 만큼 수학을 잘했다. 그렇다고 이런 점을 내세워 나대거나 잘난 척하지 않았다. 후진타오의 성적은 대부분 90점 이상이었지만, 체육 점수는 안 좋았다. 다른 학우들보다 두 살 어렸기 때문에 체력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탁구는 잘했다. 아울러 후진타오는 문화제 때 합창단 지휘자로 활약할 만큼 문화ㆍ예술에도 관심과 재능이 많았다. 한편 후진타오는 고등학교 2학년이던 열다섯 살 때 중국 공산주의청년단에 들어갔고, 이때부터 조금씩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장 수리학 엔지니어를 꿈꾼 대학생



1959년 9월, 베이징의 명문 칭화 대학 수리학과(물을 다스리고 댐을 만드는 일을 배우는 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후진타오는 아버지와 두 여동생을 떠나 베이징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칭화 대학은 최고의 대학답게 면학 분위기가 잘 조성되어 있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후진타오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며 열정과 낭만을 키우며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우수했다. 한편 어릴 때부터 다정다감한 후진타오의 성격은 변함이 없었다. 고등학교에서 그랬듯이 대학에서도 절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학우들과 결코 싸우는 법이 없었다. 쟁쟁한 실력을 가진 학우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려면 때로는 자신을 과시하거나 투쟁심이 필요할 때가 있었을 텐데, 후진타오는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려고 애썼다. 그래서인지 학우와 교수들 모두 후진타오를 좋아했다.

게다가 후진타오는 공부만 하는 책벌레도 아니었다. 운동을 좋아했고 교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춤도 좋아했는데, 춤은 예술분야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운동이 되었다. 낭만도 있었다. 연애를 했던 것이다. 상대는 후진타오보다 한 살 많은 류용칭이었는데, 그녀는 첫눈에 봤을 때 결코 미녀는 아니었다. 반면 후진타오는 잘생긴데다 성격까지 좋아서 학교 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 후진타오가 왜 류용칭에게 '필'이 꽂혔을까? 1983년,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샤따오치우가 베이징에서 후진타오를 만났을 때 부인 류용칭과 지금도 사이가 좋으냐고 묻자, 후진타오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물론 내 아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고 예쁘지도 않아. 하지만 의리가 있는 여자야. 나는 이런 아내가 최고라고 생각해. 나이 어리고 예쁜 여자들은 고생을 못 참아서 문화대혁명 때 많이 이혼했잖아. 내 아내는 내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결같이 의리를 지켜줬어."

칭화 대학의 쟝난샹 총장은 1953년부터 대학 내의 정치보도원 제도(성적이 우수하고 언행이 모범적인 공산당원 학생을 뽑아 '재학 도우미'라는 임무를 주고, 이 사람이 한 학년 아래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며 생활상담도 하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후진타오는 칭화 대학 당위원회로부터 자신이 정치보도원으로 임명되었다는 공식 통보를 받고 무척 기뻤다. 왜냐하면 정치보도원은 졸업 후에 당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고, 또한 일정한 급여를 받으며 생활할 수 있는 안정된 자리를 보장받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칭화 대학 수리학과는 4년제가 아니라 6년제였기 때문에 후진타오는 1965년에 졸업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기들과 같이 졸업하지 않고 바로 밑의 학년들과 졸업하기로 했다. 후진타오가 학교에 남아 예술단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중국 역사에는 엄청난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쳤다. 문화대혁명이 터진 것이다.

3장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고 하면 누구나 마오쩌둥과 홍위병을 제일 먼저 떠올릴 것인데,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이 정적 제거와 기득권 세력의 대대적인 숙청을 위해 일으킨 것으로, 홍위병은 이 혁명의 선봉에 선 행동대장들이었다. 칭화 대학은 정치적 분위기가 강한 곳으로, 문화대혁명 당시에 홍위병이 처음 나온 학교이기도 하다. 후진타오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반대파'와 달리 기존 학교의 당위원회를 지지하는 '보황파'였는데, 보황파는 반대파들의 날이 선 공격을 받아야 했다.

당시 칭화 대학 홍위병들은 쟝난샹 총장이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팽진(彭眞) 노선을 따르는 인물이라고 몰아붙였고, 심지어 총장을 운동장으로 끌어내 '반동분자'라고 쓰인 푯말을 그의 목에 걸고는 무릎을 꿇리고 자아비판을 하게 했다. 모진 폭력에 시달린 총장은 결국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자아비판을 했다. 후진타오도 억울했지만 이 광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반대파들에게 자아비판서를 제출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중국은 미치광이 세상이 되어, 마오쩌둥이 타도 대상으로 지목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어 비판과 함께 폭력과 굴욕을 당해야 했다. 후진타오는 이 기간에 주로 기숙사에 틀어박혀 책을 읽었는데, 이것이 훗날 후진타오에게 큰 자산이 되어 주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해 늦추었던 후진타오는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때 졸업을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동기들과 함께 졸업했다면, 후진타오는 직장 분배를 받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절한 때를 맞추지 못한데다 칭화 대학이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가장 크게 받았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직장 분배도 받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4장 간쑤 성에서 겪은 고생이 지도자의 기초가 되다



1968년 늦가을 초, 후진타오는 간쑤 성 용칭 현에 있는 류지아샤 댐으로 직장 분배를 받았다. 공식 직함은 '수리부(水利部) 제4공정국 인원(人員)'이었는데, 그의 일은 댐을 짓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살 아파트를 짓는 것이었다. 명문 대학의 우수한 졸업생이 황량한 시골에서 매일 육체노동을 하며 사는 것은 엄청난 고생이었다. 하지만 후진타오는 불평이나 불만을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는 듯 긍정적인 태도로 일했고, 노동자들과도 지식인이라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법이 없이 허심탄회하게 어울렸다. 그러자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해 칭찬하는 노동자들이 늘어갔다. 후진타오가 졸업 후 시골 노동자로 배치를 받으면서 류용칭과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류용칭은 원래 베이징 출신이었고, 후진타오보다 일 년 빠른 1965년에 졸업하면서 수리부 설계소로 배치되어 베이징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 그 시절의 중국은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고, 직장도 공산당의 분배에 따라야 했다. 그런데 류용칭이 후진타오와의 사랑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는 과감한 결정을 했다. 후진타오가 있는 간쑤 성으로 전근을 보내달라고 상부에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간쑤 성에 가면 후진타오를 자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류용칭이 새로 배치받은 직장은 류지아샤 댐이 아니라 빠판샤 댐이었다. 하지만 후진타오가 류지아샤에서 일한 지 반 년 만에 행운이 찾아왔다. 수건대군 간부가 후진타오에 대한 좋은 평가서를 상부에 제출했고, 이 평가서를 근거로 상부에서는 후진타오를 빠판샤 댐 831분국 기술원으로 배치시켰다. 후진타오와 류용칭은 그때 비로소 만났고, 마침내 후진타오는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버리고 와준 류용칭과 결혼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진타오는 빠판샤 분국의 기관당 총지부 부서기로 승진했다.

후진타오가 처음 간쑤 성에 갈 때만 해도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이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긍정적이고 겸손한 삶의 태도가 차례로 행운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의 세월이 흐른 1974년, 간쑤 성 건설위원회는 후진타오에게 성도인 란저우 시의 양계장과 유제품 제조공장, 청소년문화센터 건설공사의 계획과 심사, 기초공사의 현장 총감독까지 모든 일을 맡겼고, 세 가지의 건설 프로젝트는 시작한 지 2년 만에 각 시설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후진타오는 일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평판이 좋았다. 일머리가 타고 난데다가 무엇보다 성격이 좋았기에 대인관계가 원만했고, 특히 막힌 일을 조정하고 풀어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행정직과 기술직 모두의 지지를 받으니 조직 관리에서도 좋은 점수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런 모든 역량이 종합적으로 평가되어 그는 1980년 간쑤 성 건설위원회 부주임 자리로 승진했다. 승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후진타오는 중앙당교로 파견을 나가 교육받는 기회를 얻었는데, 이것은 굉장한 영광이었고 미래가 보장되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중앙당교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앞으로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 갈 우수한 인재로 인정받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중앙당교에서 교육을 마친 뒤 후진타오는 다시 한 단계 도약했다. 간쑤 성 공산주의청년단 서기로 승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완전히 파탄이 나버린 공산주의 청년단 조직을 재건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고, 공산당 중앙에서는 공산주의청년단을 재건할 인재를 뽑고 있었는데, 선발 조건은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마흔 살 이하의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후진타오는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적임자였다.

5장 중앙 정치 무대에서



1978년 중국은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三中全會)에서 중국 경제의 개혁ㆍ개방 노선을 확정해 이제 가장 중요한 국가적 사업은 '경제건설'이 되었는데, 새로운 국가정책을 시행하려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고, 새로운 인재상이 요구되고 있었다. 지난날 마오쩌둥 시대엔 오직 당에 대한 충성심이 인재 발탁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충성심보다는 능력을 더 중요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후야오방과 덩샤오핑은 인재 선발에 대한 의견을 다음처럼 자주 주고받았다. "리펑은 저우언라이의 양자이고, 모스크바에서 전력을 공부했습니다. 리뤠이환과 후치리도 40대의 젊고 유능한 인재입니다." "그래, 이 세 사람은 우리 당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지. 나도 주목하고 있었네. 그런데 이번에 선발한 인재들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누구인가?" "후진타오입니다. 칭화 대학 수리학과 출신으로 간쑤 성에서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상부와 인정을 받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모두에게 인정을 받더군요. 그래서 저는 후진타오를 기용하고 싶습니다." "그럼 나중에 한번 보도록 하지. 나도 제2자동차공장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네. 자네도 한번 가서 잘 살펴보게." 덩샤오핑과 독대를 마친 후야오방은 즉시 비서에게 쓰옌시의 제2자동차공장에 있는 인재가 누구인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했는데, 그 사람은 바로 하얼빈 공업대학 출신의 왕자오궈였다. 그 후 1982년 후진타오는 공산주의청년단 중앙 제2서기로 임명되어 간쑤 성의 생활을 정리하고 베이징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 무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1서기로는 왕자오궈가 임명되었다.

후진타오는 왕자오궈를 도와 공산주의청년단의 중앙 일상사업과 선전 업무를 책임졌는데, 후진타오는 부하들을 대할 때도 겸손할 뿐 아니라 예의를 갖추었기 때문에 부하들도 그를 좋아하고 잘 따랐다. 하지만 왕자오궈는 부하들을 고압적인 태도로 대했으며, 실수를 범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따라서 먼저 주목을 받는 쪽은 왕자오궈였지만, 그에 대한 평판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후진타오는 왕자오궈와 경쟁하거나 왕자오궈보다 주목을 받으려고 나대지 않았다.

그 뒤 1983년 11월, 후야오방은 일본을 방문했고, NHK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청년들이 중국을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후야오방은 1984년 5월에 왕자오궈에게 '중일우호21세기위원회'의 중국측 수석대표를 맡기면서 그해 9월에 오기로 한 일본 청년들을 잘 접대하라고 했다. 왕자오궈는 동시에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승진했다. 이제 구체적인 접대 업무는 후진타오가 지휘해야 했다.

마침내 1984년 9월, 일본에서 3천 명의 청년 방문단이 중국에 도착했다. 그들의 접대 업무를 맡은 후진타오는 그들 사이에 어떤 불만이 생기거나 만일의 불미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긴급 상황이 벌어졌다. 방문단 중 한 명인 스이세키 이치세이가 난징을 방문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후진타오의 신속한 조치로 목숨을 건졌고, 후진타오는 이 일로 공산당 중앙 지도자들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1984년 11월에 공산주의청년단 중앙 제1서기로 승진했다. 드디어 후진타오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력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정계에 입문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고위 공직자의 비서로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아 정계로 진출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공산주의청년단에서 실력을 키워 진출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개국공신의 자손이란 특혜로 진출하는 것인데, 이들을 속칭 태자당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후야오방이 이끄는 공산당 중앙서기처는 1985년 봄에 공산주의청년단 출신 챠오쓰를 공산당 중앙 정법위원회 서기(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로 임명했다. 이와 함께 덩샤오핑, 천윈 등 원로들의 동의를 구해 챠오쓰의 부하였던 중앙조직부 부부장 웨이지엔싱을 부장으로 임명하고, 중앙조직부 부부장 자리는 후진타오에게 주었다. 이 일로 태자당의 반발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후야오방은 할 수 없이 한 발 물러나 후진타오의 승진을 없던 일로 해야 했고, 구이저우 성의 서기인 주오후저를 중앙선거부로 끌어올리고, 그 자리에 후진타오를 임명했다.

6장 구이저우 성에서 평판 좋은 행정가가 되다



중국 서남부에 있는 구이저우 성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의 하나였다. 또한 구이저우는 묘족ㆍ수족ㆍ동족ㆍ이족ㆍ요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구이저우 성의 성도는 구이양으로, 후진타오는 이곳에 도착한 후 짐을 풀자마자 즉시 당위원회 지도부로부터 구이저우 성에 대해 상황보고를 받았고, 1차적인 보고가 끝나자 후진타오가 짧게 한마디 했다. "삐지에로 갑시다." 간부들에겐 충격이었다. 부임해 오자마자 현지 시찰을 나가겠다는 서기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부임하자마자 현지 시찰을 떠난 후 후진타오는 구이저우 성의 서쪽 오지를 열하루 동안 돌아보았고,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86개 현과 시를 다 돌아봤다. 후진타오는 책상에 앉아 있지 않고 발로 현장을 뛰는 서기였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것은 실무자들에게 묻고 또 물어서 결국 다 알아내는 끈기를 보여주었고, 늘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 주위 간부들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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