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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 놀라운 치유의 역사

로이 포터 지음 | 네모북스
로이 포터 지음

네모북스 / 2010년 1월 / 488쪽 / 35,000원



CHPTER 1 의학의 역사 - 의학의 기원에서 현대의학까지



고대의학과 외과수술의 증거


의학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흔히 쓰이는 '경험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시사회로부터 시행된 질병에 대한 치료는 민간요법의 경험에 의해 발전되어왔고, 이러한 경험적 요법의 힘은 입증된 방법의 효과에 대한 광범위한 믿음으로 확산되었다. 인간의 행동과 믿음에는 철학으로부터 배운 지식보다는 먼 옛날부터 유전되어온 감정이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한다. 이는 20세기 후반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학적 의학보다 대체의학을 선호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치료법에 놀랄 만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원시의학은 의학과 치료, 질병의 역사에서 정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원시 시대의 의술은 정령이나 신에게 의존하는 주술적 치료와 더불어 외과적 수술도 병행되었다. 선사시대의 유물은 인류가 처음에 손을 이용하여 골절과 탈구를 치료하다가 조개껍데기나 돌을 날카롭게 연마하여 사지 절단이나 대박힌 화살촉을 제거했음을 추정하게 한다. 구석기 유물 중에는 귀가 있는 뼈바늘이 종종 발굴되는데, 당시에 봉합이 가능했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유물을 관찰해보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극적인 수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두개골을 동그란 형태로 제거하는 수술이 그것으로, 두개골 구멍 가장자리에 가골(假骨)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 환자가 수술 후에도 생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심지어 구멍이 여러 개인 두개골도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일부 사람들은 여러 번 수술을 받고도 생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의학은 문자기록을 통해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수백 가지 약물 처방과 뼈가 골절되었을 때의 처방을 적고 있다. 그리고 고대 힌두의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차라카 상히타』와 『수슈루타 상히타』는 브라만시대(B.C. 800~A.D. 1000)의 인도 외과수술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저서는 당시에 유명했던 두 의사 차라카와 수슈루타의 의료기술을 기록한 책들로 치루수술, 백내장수술, 결석제거술, 제왕절제술, 그리고 형벌로 코가 잘린 사람의 코를 재건한 성형수술까지 시행되었음을 적고 있다. 중국의학의 전통은 황제(黃帝, B.C. 2698~2598) 시대의 가르침을 대표하는 고전적 저작 『황제내경』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모든 존재와 물리적인 현상을 음양으로 정의했으며, 질병은 바로 이러한 음과 양의 불균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 치료는 음양의 조화를 회복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침술은 이러한 신체의 불균형을 개선시키는 대표적인 치료요법이었다.

오늘날 서양의학의 발전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기원한다. 그리스의 의학은 4체액설(humoral theory)이 기반이 되었는데, 이는 인체가 흑담즙, 황담즙, 혈액, 점액 등의 4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4체액의 균형이 신체의 건강상태를 결정한다고 보는 개념이었다. 기원전 460년부터 377년까지 활동했던 히포크라테스는 4체액설에 기반하여 '피지스(physis)'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가르쳤다. 이는 인간을 총체적으로 관찰되고 치료받는 유기체적 단위로 그리고 환경에 영향을 받는 존재로 본 개념이다. 자연치유력을 주장했던 그는 환경과 운동 그리고 섭생에 의해 신체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만일 질병이 심한 경우에는 사혈이나 하제 등으로 체액을 배출한다거나 발한제를 복용하여 땀을 흘리게 하거나, 또는 이뇨제를 복용하여 소변량을 증가시켜 회복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 시대의 갈레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훗날 중세의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세시대의 의학과 과학의 발전

갈레노스는 해부학과 생리학, 임상의학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겨 중세의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은 수세기 동안 의학적 사고의 경직을 가져왔다. 그러나 대학이 설립되고 과학적 사고가 태동하면서부터 기존 의학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11세기 이탈리아 남부의 살레르노에 유럽 최초의 의과대학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볼로냐와 파도바 대학이 설립되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12세기 말부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같은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각 대학 간의 의학 교류가 이루어졌고 기존의 의학 정설들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자에 대한 직접적인 신체 관찰 등의 과학적인 탐구를 추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브뤼셀 출신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는 파도바 대학에서 해부공개시연회 등을 통해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오류를 지적하고 이러한 이론을 《인체구조에 대하여》(1543)의 출간을 통해 강조했다.

『인체구조에 대하여』와 더불어 기존의 관념에 도전이 된 또 하나의 저작은 같은 해에 출간된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다.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이론을 밝힌 이 책은 중세시대를 지배해온 우주론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윌리엄 하비 같은 위대한 지성도 이러한 사고의 전환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동물의 동맥계와 정맥계에서 얻은 증거들로 혈류의 방향을 간결하게 입증했다. 그러나 혈액이 어떻게 동맥에서 정맥으로 이동하여 순환하는지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 점은 현미경의 발명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피에르 피델 브르토노(1771~1862)는 특정 질환이 특정 세균번식자와 관련이 있다는 학설을 제기했는데, 이 견해는 제자인 아르망 트루소의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로버트 후크나 레이우엔 훅 등에 의해 현미경 발명과 개량으로 이어지면서 혈액순환의 원리와 더불어 세균이 전염병의 원인임을 밝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8세기는 여러 곳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군진 외과학이 발전한 시기다. 당시 전장에서는 상처의 세균 감염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사지를 절단해야 했다. 하지만 감염의 원인이 세균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를 밝히는데 공헌을 한 인물이 프랑스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1822~1895)이다. 그는 발효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스트와 같은 미생물의 기능을 발견했고, 누에 질병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전염병의 감염성과 그 예방법을 밝혀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광견병 백신이었는데 백신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인물은 에드워드 제너(1749~1823) 이다. 제너는 젖소로부터 우두에 전염된 하녀들이 죽거나 외모의 손상을 입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면역이론을 이용하여 우두에 걸린 소의 고름에서 채취한 물질로 천연두를 치료했고 그 물질은 소를 뜻하는 라틴어 'vacca'에서 유래한 백신(vaccination)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로베르트 코흐의 결핵균 발견으로 임상세균학의 근간을 형성하게 되며 이러한 세균학의 발전은 항생제의 발견과 엑스레이의 발견, 악성종양의 치료를 본질적으로 바꾼 화학요법, 그리고 내시경을 이용한 새로운 기술로 이어지면서 19세기에는 급성감염 질환을 거의 정복하게 되었다.

2장 서양의학의 발전 - 치유에 대한 서구의 공헌



16~19세기의 의학


서구 의과학은 편의상 과학혁명(1550~1700)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과학혁명은 자연, 혹은 물리적 세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었고, 계획적인 실험에 근거한 수학적 분석과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과학혁명이 의학에 적용된 것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와 관련이 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는 의학의 개념을 낳았다. 따라서 치료자들은 질병의 진단에서 정신적 요소보다는 각 신체부분에 집중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보다도 변화와 발명의 시기였던 산업혁명의 결과로 간주된다. 도시의 성장이 특유의 질병과 건강관리에 대한 다른 기준을 요구하게 되면서 병원의 발달이 가능해졌다. 18세기에 파리에 최초의 종합병원이 설립되었는데, 의사들이 환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관찰, 이학적 검사, 병리해부학, 통계, 그리고 병소(lesion)의 개념에 근거한 체계를 발달시키게 되면서 병원은 질병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병원의 단점은 감염이었다. 산부인과 의사 제멜바이스는 산모에게 치명적인 산욕열이 의사나 간호사로부터 감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렇듯 '병원 질병'은 치명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자 의사들의 관심은 질병을 앓는 환자에서 질병 그 자체로 옮겨가게 되었고, 현미경이나 검사 슬라이드를 위한 특수염색, 임상기구와 같은 기술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또한 살아있는 환자뿐만 아니라 시체의 부검과 해부를 통해 환자의 이전 질병에 대한 병소를 찾아냄으로써 진단과 예후 모두에서 의학적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의학적 하드웨어

의사의 '시선'이 환자의 내부로 향하기 시작하면서 최초로 개발된 임상적 방법은 환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이용하여 병소를 찾아내는 청진기였다. 빈의 의사였던 레오폴트 아우엔부르거는 부모님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술통을 두드려 통에 술이 얼마나 차 있는지 능숙하게 알아내곤 했다. 그는 이를 신체에 적용하여 내부 장기의 활력을 알 수 있는 '타진(percussion)'이라는 검사방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청진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의사 라에네크는 종이를 원통으로 말아서 환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고 이어 나무로 된 청진기를 개발하여 사후 검사를 통한 가슴의 병리 소견을 기술했다. '시선'의 확장은 검안경(광원과 렌즈를 이용해 눈 안쪽을 들여다보는 기구), 후두의 질환을 광원과 거울이 달린 튜브를 이용한 후두경을 통해 더욱 발전했다. 또한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1845~1923)이 엑스레이를 발견하면서 환자의 신체 내부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제공하게 되었다. 형광투시경이나 엑스레이로 장을 검사하기 위한 방사선 액체 비스무트의 이용과 같은 기술의 개량도 곧 뒤따랐다. 특히 현미경이 의학의 도구로 채택되고, 루이 파스퇴르의 미생물 발견과 조지프 리스터의 무균소독법으로 인해 세균학이 발전하면서 탄저병, 결핵, 장티푸스, 콜레라, 등의 각종 전염병이 예방 되었다.

20세기의 과학적 의학

20세기 초에 발달하기 시작한 의학지식의 가장 중요한 성과 두 가지는 바이러스와 비타민에 관한 것이다. 모든 필터를 통과하는 유기체인 바이러스들은 각종 전염병 등의 질병을 발견하게 했고, 비타민은 건강한 식생활의 필수성분임을 알리게 되었다. 항해 중에 레몬을 먹는 선원들이 건강하다는 사실은 200년 넘게 알려져 왔지만 괴혈병의 원인이 비타민 C의 결핍 때문이라는 것은 20세기 초에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인슐린이 발견됨으로써 당뇨병은 치명적인 질병에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조절 가능한 질병으로 바뀌었다. 20세기의 의과학은 백신과 면역 프로그램 그리고 항생제의 개발로 홍역, 디프테리아, 소아마비, 결핵과 같이 과거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많은 질병들을 대부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항생제의 남용으로 미생물들은 항생제에 면역성을 갖게 되었다. 20세기의 반세기 동안 제약 산업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해왔으며 수많은 신종 항생제를 잇달아 개발하여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CHAPTER 03. 약초학 - 가장 오래된 전통



건강과 웰빙을 모토로 내세운 향신료, 자연 향수, 아로마 치료약 등의 마케팅은 약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약초 르네상스가 도래하게 된 것은 현대의 처방약물의 부작용을 논외로 하더라도, 약초에 관한 민간전승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약초의 위약 작용은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에서부터 투약에 대한 환자의 믿음에 이르는 많은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식물의 약제로서의 용도를 발견한 것은 이론에 얽매이지 않은 관찰과 경험주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개념과 추론 또한 일정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이 원산지인 여러해살이풀 렁워트라는 식물은 잎사귀의 생김새가 폐를 닮았는데 가슴이 답답한 증상에 쓰인다. 고대 그리스 의학문헌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비를 찾을 수 있는데, 돌의 갈라진 틈에 서식하는 식물은 돌을 깨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방광결석을 제거하는 데 처방되었다. 동양의 경우 중국은 약초에 관에서도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약 3세경에 발표된 신농(神農)의 저작 『신농본초경』은 현존하는 최초의 약물학 저작으로 365가지의 약초와 약물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중세시대의 삽화는 약제사들이 약을 조제하는 전문기술의 근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제사의 발전은 잉글랜드에서 향신료를 다루던 사람들이 '식료잡화상 조합'으로 알려진 런던 길드와의 연합에서 시작되었다. 노르만족은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향료를 가져왔는데, 매년 겨울이면 가축이 먹을 건초가 부족했으므로 도살해야 했다. 하지만 고기를 오래 두다보면 상하기 때문에 향료를 뿌려 고기의 나쁜 냄새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약초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네덜란드 약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품하는 무어인의 그림은 과거에 무어인이 향신료 무역에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해준다. 이와 같이 중세에는 법령, 약제상 길드, 특정 상품들에 대한 독점이 약학의 전문화를 지원했다.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말의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쇄기 발명으로 인해 약초서들이 많이 출간되었다. 특히 레온하르트 푹스의 저서 『식물사』(1542)와 『새로운 약초』(1543), 그리고 존 제라드의 『약초서』(1597)는 약초학의 전파에 큰 기여를 했다. 사실 16세기 약초학의 발전은 신대륙 탐험으로 인한 식물에 대한 관심의 폭발적 증가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신세계로부터 코파이바, 유창목, 담배 등의 식물이 들어왔는데, 1517년 매독에 걸린 3,000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유창목으로 치료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다른 어떤 의사들보다 약초치료제 개발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파라셀수스였다. 그는 이전까지 수많은 약초를 섞어 쓰던 복합처방을 비판하고 약초의 화학적 본질(소위 활성요소라고 부르는 화합물)을 탐구하여 화학적 요법을 대중화했다. 이러한 방법이 19세기에 이르러 과학적 지식에 적용되자 수천 가지의 약초가 조사되었고, 특별한 식물 구성성분인 알칼로이드들이 추출되었다. 그 결과 알약, 주입액, 팅크제, 추출물 등의 조제에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더욱이 현미경을 이용해 가루 약초들을 검증하는 기준을 개발하고 화학적 검사 등의 생약학의 발전으로 아스피린을 비롯한 화학적 치료약이 시장에서 증가하고 약초제의 사용은 쇠퇴하게 되었다.

CHAPTER 4 균형 있는 신체 - 의학과 동적 균형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의 치료자들은 질병이 개인과 환경 사이의 불균형이나 상호작용, 또는 부조화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의학은 몸과 마음, 몸과 환경 간의 상호작용이 4체액(혈액, 검은 담즙, 노란 담즙, 점액)에 의해 매개된다고 보았다. 서로 다른 장기에서 생성되는 이러한 체액들이 전신을 순환하며, 기후나 계절, 나이, 직업, 성격에 비추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인도의학에서도 『차라카 상히타』와 『수슈루타 상히타』는 기본적으로 절제와 균형을 건강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로 제시했다. 또한 인도의 지식의 책 『베다, (Veda, 바라문교 사상의 근본 성전』와 아유르베다의 고전의학서들은 몸을 7가지의 신체조직, 즉 라사(rasa, 혈장 혹은 체액), 혈액, 살, 지방, 뼈, 골수, 수크라( ukra, 생식액) 그리고 에너지 혹은 기(氣)라고 할 수 있는 오자스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하며, 이러한 물리적인 특성과 영혼과 마음과 같은 비물리적 특성이 결합, 강화 지원하는 조합으로 건강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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