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 에코리브르
냉전의 역사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에코리브르 / 2010년 2월 / 448쪽 / 25,000원
되살아나는 공포전쟁은 이렇게 끝나야 한다. 환호, 악수, 춤, 축배, 그리고 희망과 함께. 때는 1945년 4월 25일, 장소는 독일 동부의 도시 엘베 강변에 있는 토르가우. 이 지구 반대편 끝으로부터 모여들어 나치 독일을 두 쪽으로 분단시켰던 군대가 첫 만남을 가진 사건이었다. 5일 뒤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베를린의 잔해殘骸 밑에서 머리통을 쏘아 자살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자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했다. 승전한 대동맹(The Grand Alliance)의 지도자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은 두 차례의 전시 정상 회담(1943. 11 테헤란, 1945. 2 얄타)에서 이미 악수와 축배, 그리고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희망을 주고받았다. 적이 사라진 지금 전쟁터의 전선에서 이들이 지휘한 군대가 실제로 승전 축하 잔치를 벌일 수 없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왜 토르가우에서 만난 양국 군대는 마치 외계인을 보듯 서로 조심스럽게 접근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전쟁은 연합국이 이겼지만, 그 주요 멤버들은 이미 서로 전쟁 - 비록 군사적으로는 아니었지만, 사상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 상태에 있었다. 아무리 대동맹 측이 1945년 봄에 승전했다 해도 그 성공 여부는 양립이 불가능한 체제들이 양립 가능한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느냐에 늘 좌우되었다. 비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승리는 과거의 지위를 버리거나, 전쟁을 통해 획득하기를 바라던 것들을 상당 부분 포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제1, 제3의 대국이었던 이들 두 나라는 기습 공격의 결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독일은 1941년 6월 22일에 소련 침공을 개시했고,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을 습격했다. 이 진주만 공격은 나흘 후에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구실이 된다. 그렇지만 비슷한 점은 거기까지였다. 지구상 어느 관측자라도 재빨리 지적할 수 있었듯이, 두 나라는 차이점이 훨씬 더 컸다.
그보다 한 세기 반 전에 일어났던 미국독립전쟁은 권력 집중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반영했다. 미국 개척자들은 자유와 정의가 오직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보다 겨우 25년 먼저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은 이와 대조적으로 계급의 적을 전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세계로 전파할 기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수용했다. 스탈린은 자유라는 전통이 별로 없었던 거대한 농업국을 강제로 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중공업 국가로 만들었다. 그 결과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재 사회가 되어 있었다.
전후 문제 해결을 구체화할 때가 다가오자 승전국은 이 부조화한 현실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팽팽하게 겨루게 되었다. 미국은 유럽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유지하던 불간섭의 전통을 뒤집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테헤란에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전쟁이 끝나면 2년 안에 미군들은 귀국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한편 소련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자산이 있었다. 소련은 유럽의 일부분이었기에 유럽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것이었다. 계획 경제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이 전전戰前 기간 중에 이루지 못한 완전 고용을 유지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면 전후戰後 스탈린이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스탈린은 그 자신과 정권, 조국, 이데올로기를 위한 안전보장을 전후 목표로 삼았고, 이 순서대로 우선순위를 두었다. 그가 확실히 다짐하고자 한 것은, 내부에서 그의 통치를 다시 위태롭게 하는 도전을 받거나 외부에서 나라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위협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탈린을 고통스럽게 하는 딜레마가 놓여 있다. 전쟁 기간에 입은 손실은 전쟁 이후 이득을 볼 자격을 소련에게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홀로 그 이득을 지키는 데 필요한 힘까지 빼앗아갔다. 소련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 경제원조, 그리고 과거 동맹의 외교적인 묵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을 좌우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자들과는 오랫동안 서로 협력할 수 없다는 신념이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스탈린은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파가 동맹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히틀러의 지배를 저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 자본주의 민주주의파와는 다시 등지게 될 것이다."
스탈린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목적 달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그다지 정해놓은 것이 없었다. 그 이유는 2차 세계대전이 그들에게 가져다준 딜레마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은 미국이 아닌 다른 세계와 떨어져 있어서 그 세계에 본보기로 기능할 수 없었다. 단지 루스벨트에게는 4가지의 거대한 전시 우선 목표가 있었다. 그 첫째는 동맹국 - 주로 영국과 소련과 중화민국 - 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승전을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둘째는 전후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데 동맹국의 협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셋째는 전후 문제 해결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루스벨트는 앞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잠재 원인을 제거하는 동맹국들이 지지해주기를 기대했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경제체제를 되살리고, 침략 행위를 저지할뿐더러 필요하면 응징도 할 수 있는 권능을 갖춘 새로운 집단 안전보장 기구를 의미한다.
영국의 목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 목표는 처칠이 정의한 바처럼 대단히 단순했다. 즉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생존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대영제국의 약화를 의미하더라도, 또한 젊은 시절 처칠이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로 붕괴되기를 바라던 소련과 협력한다는 의미라 해도 그렇다. 영국은 미국에 가능한 한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려 했다. 그들은 새 로마인을 지도한 그리스인의 역할을 열망한 것이다.
세력권: 유럽을 세력권으로 분할하면 유럽인들은 스스로 앞날을 결정할 여지가 별로 남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루스벨트가 우려하던 이유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스탈린에게 발트제국, 폴란드, 동유럽의 기타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허용하도록 거듭해서 압력을 넣었다.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그렇게 하기로 합의는 했지만 그 약속을 지킬 뜻은 조금도 없었다. 이리하여 스탈린은 그가 원하던 영토와 세력권을 확보했다. 소련의 국경은 유럽의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붉은 군대는 나머지 동유럽 지역 곳곳에 위성 정권을 세웠다. 그때까지는 이들 전부가 공산정권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중부 유럽으로 세력권을 형성한 데는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다.
패배한 적: 동유럽이 일방적으로 소련의 손에 놓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이 공동 점령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독일 중 3분의 2를 통치하기로 결정지었다. 이는 전쟁 중에 흘린 피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침공한 군대와 가깝기에 생겨난 결과다. 소련의 점령지인 수도 베를린은 독일 인구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데다 산업 시설은 그보다 더 훨씬 빈약했다. 그렇다면 왜 스탈린은 이런 배치를 수락했을까? 아마도 그는 독일 동부에 설치하려고 기획한 마르크스-레닌 정부가 서방 점령지에서 사는 독일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자석Magnetic'이 되어 독일인들이 전 국토를 소련의 지배 아래 통일할 통치자를 선택하게 되리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일로 유럽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굳이 일본을 점령하는 데 소련을 참여시킬 만한 동기가 별로 없었다. 진주만 습격 후에도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소련의 동맹국들 역시 독일 군대가 모스크바 교외까지 진주했을 때조차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리라는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지 3개월 만에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기로 약속했고, 그 대가로 루스벨트와 처칠은 일본의 쿠릴열도(Kurile Islands)를 소련의 통치로 이관하고, 아울러 사할린 섬 남쪽 절반을 만주滿洲의 영토와 해군기지와 함께 소련에 복귀시켜주기로 합의했다.
냉전의 확대는 동시에 동아시아에서도 일어났는바, 트루먼이 소련의 원자폭탄을 발표하고 1주일 뒤인 1949년 10월 1일에 승리를 거둔 마오쩌둥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선포했다. 베이징에 위치한 텐안민天安門 광장에서 거행된 기념식은 거의 사반세기에 걸쳐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서 계속되던 내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오쩌둥의 성공은 트루먼과 스탈린 두 사람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들은 오랫동안 장제스蔣介石가 통치자로 있던 중국국민당이 2차 세계대전 뒤에도 당연히 중국을 다스리리라고 생각했다. 일본이 항복한 지 4년 안에 중국국민당이 타이완 섬으로 패주하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공산당이 통치할 태세를 갖추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은 독일처럼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소련과 미국 군대에 공동으로 점령되어 있었다. 이 나라는 1910년 이래로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여름, 일본의 항전이 급격히 무너질 때 만주를 침공하려고 계획 중이던 붉은 군대는 그와 함께 북한으로 진주할 길이 열려 있음을 알게 된다. 일본 본토를 침공하는 임무를 띠고 있던 일부 미군도 한반도 남부에서 같은 길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한반도는 계획적이라기보다는 우연히 점령되었다. 이는 한반도에 단일 정부가 탄생하고 그 후에 점령군이 철수할 때까지 모스크바와 워싱턴이 별 어려움 없이 한반도를 가르는 위도 38도선을 분계선(Line of Demarcation)으로 만드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2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승전국에 안전보장을 받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 1950년 말에는 미국도, 영국도, 소련도 독일과 일본을 패망시키는 데 인명과 재산을 소모했지만 안전해졌다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대동맹 국가들은 이제 냉전의 적수가 되었다. 이해관계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데올로기는 전쟁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양극화된 채로 남아 있었다. 기습 공격에 대한 공포심이 워싱턴, 런던, 모스크바의 군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전후 유럽의 운명을 놓고 시작된 싸움은 이제 아시아로 퍼져나갔다. 스탈린의 독재정치는 쭉 그래왔듯이 무자비했고, 숙청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매카시즘McCarthyism이 떠오르고 대서양 양안兩岸(미국과 영국)에서 간첩 행위가 일어났다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나왔으니, 서방 진영의 민주주의가 과연 독재자와 -그것이 파시스트든, 공산당의 변종이든 - 구별되어 그것에 반대되는 관용과 시민 자유권에 대한 존중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명확한 부분이 전혀 없었다.
죽음의 배와 삶의 배1945년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체주의는 더 이상 이 세계가 두려워할 유일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을 항복시킨 바로 그 무기(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실제로 투하한 원자폭탄)는 승전국의 원기를 돋구었듯이 그만큼 공포의 원인도 되었다. 폭탄 단 한 개가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 수 있다면, 미래의 전쟁은 어떻겠는가? 원자폭탄은 미국의 군사전략가 버나드 브로디Bernard Brodie가 1946년에 지적했듯이 "똑같은 조건에서 이전에 알려진 어느 최강의 폭약보다도 수백만 배나 더 강력했다." 핵무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널리 퍼지면, 문자 그대로 일선뿐 아니라 보급선, 그리고 도시와 도시를 지탱하는 공업단지 또한 전쟁 위험에 처하게 되므로 전쟁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전쟁터가 되어버린다.
이제 냉전 전략에서 감정, 마찰, 공포의 영향을 두려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소련은 1955년 11월에 처음으로 공중 투하 열핵 폭탄을 실험했는데, 그때 소련은 이미 미국의 표적물에 도달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소련은 1957년 8월에 세계의 첫 대륙간탄도미사일(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을 성공적으로 발사했으며 10월 4일에는 이 미사일을 하나 더 사용함으로써 세계 첫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Sputnik를 궤도에 올려놓았다. 로켓 연구가라면 누구나 그 다음 단계, 즉 비슷한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면, 불과 반시간 안에 미국에 있는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렘린의 새 지도자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측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쿠바 미사일 위기는 10년 전에 진행된 수소폭탄 실험으로 불에 탄 새들이 미국과 소련의 관측자들에게 미쳤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했다. 이는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냉전 중에 미국과 소련이 개발한 무기가 서로에게 주었던 위협보다 더 커다란 위협을 양측에게 주었음을 확신시켰다. 지금은 보편적으로 20세기 후반기에 3차 세계대전에 가장 근접했던 일로 여겨지는, 이 있을 법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미래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억제, 이성, 그리고 생존 가망성을 넘어 '투영된 갈등'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장 흥미로운 합의는 소련과 미국이 1972년에 체결한 '탄도탄 요격 미사일 조약(Anti-Ballistic Missile Treaty)인 바, 이 조약은 장거리 미사일에 대한 방어 시설을 금지했다. 이는 한순간에 절멸될 수 있다는 전망이 이끄는 취약성이 안정적이고, 장기적이며, 미 소 관계에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처칠(그리고 아이젠하워)의 생각이 양측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된 첫 사례였다. 이는 또한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상호 확실 파괴를 모스크바가 수용했음을 반영했다. 그 노력이 빛을 본 것은 - 미국 관리들이 국가 안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소련 관리들을 교육하게 되었다 - 냉전 첫해에 각각 핵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상대를 공포에 떨게 한 이래 그들이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를 보여준다.
냉전은 이 지구상에 인류라는 생명체를 멸종시킬 만한 열전熱戰을 유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심이 미국과 소련, 그들의 각 동맹국들을 갈라놓은 모든 차이점보다 더 컸기 때문에 전쟁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이유가 있었다. 핵무기는 각 국가들이 공통의 언어, 사상,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서로 상대방의 생존을 위해 그 이익을 공유하게 했다. 그들은 호랑이를 탄생시켰지만,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통제 VS 자발성
이 유일무이한 행성, 지구에서는 초강대국들이 서로 상대 진영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생존에 대한 관심도 나누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렇지만 어떤 생존을 말하는 것인가? 각 체제 아래 어떤 삶이 있는가? 경제적인 복지는 얼마나 여지가 있을까? 사회정의를 위한 여지는?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을 손수 선택할 자유는? 냉전은 단순히 지정학적인 대결이나 핵무기 경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질문에 답해주는 경쟁이기도 했다. 이 문제는 인류 생존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했다. 즉 인간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는 것이 최선일까에 대한 문제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레닌은 성공적인 현실론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계승자인 스탈린은 위로부터의 혁명을 소련에서 실행했다. 그 첫 사업은 농업의 집단화였고, 그 다음은 급속한 공업화 계획의 추진, 그리고 마지막은 실제이든 상상이든 잠재적 경쟁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한 것이다. 레닌이 기대했던 국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소련의 이데올로기는 - 권위주의 체제가 성취할 수 있었던 다른 예를 고려하면 - 훨씬 더 멀리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에 유럽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지지자가 수백만 명이나 되었다. 심지어는 미국인들도 스스로 회의懷疑를 품었다. 루스벨트의 뉴딜(New Deal)정책으로 미국 경제의 문제점을 임시변통으로 개선하긴 했지만 치유하지는 못했다. 다만 전시 소비(Wartime Spending)가 유일하게 그 일을 했을 뿐이고, 종전 후에는 연방 예산이 정상으로 감축됨에 따라 불황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