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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의 역사

존 포츠 지음 | 더숲
카리스마의 역사

존 포츠 지음

더숲 / 2010년 2월 / 543쪽 / 25,000원



카리스마의 기원


'카리스마(charisma)'라는 단어는 1세기 중반(기원후 50~62년 사이),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처음 나타났다. 당시 그 말은 라는 고대 그리스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2세기에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이 로마자로 옮기면서 '카리스마'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정의한 카리스마의 개념은 그 어원인 그리스어 카리스(charis)에 의존했는데, 이 단어는 유대 문화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은혜, 아름다움, 매력, 호의, 친절, 선물, 감사'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카리스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신화나 철학 담론, 정치 분야 등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면서 특이할 정도로 폭넓고 다양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단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카리스에 포함된 모든 의미들은 무언가를 주고받는 '상호관계의 윤리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카리스는 호의를 의미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마움을 의미했다. 그리고 고마움을 인정하는 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적 행동이었고 답례로 선물을 표시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말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교 집단의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종교적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카리스'라는 모호한 말에 종교적 의미를 불어넣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그 중요성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신의 은총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에서 사용된 어근인 'hnn'에 의해 유대 문화에 전달되었다. hnn 언어군은 하나님이든 정의로운 인간이든 '은혜를 주는 행위'를 의미했다. 이 어근이 기원전 3세기경 유대교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charis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고대문화에서 카리스는 그리스 문화에서 발견되는 여러 의미들과 유대교 성서에서 표현된 정신적인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사도 바울을 포함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영적 능력(성령)을 고대 유대교와 당시 그리스도교 사이의 고리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서 히브리의 경정과 구약성서의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 사도, 그리고 교회제도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힘은 성령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은 예언자들이 무아지경에 빠지거나 열광적인 상태에서 방언을 하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등의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통해 확신을 받았다. 사도 바울이 서신에서 규정하고 다듬은 '카리스마' 개념은 이와 같은 당대의 관념, 즉 모두가 공유하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사도 바울이 종교 용어로 만들어낸 카리스마

사도행전에는 개종 전의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박해했는지 생생한 설명이 담겨 있다. 하지만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영감을 받아 개종을 하게 되고, 이 사건은 신뢰와 은총을 강조하는 그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대변해주게 된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교리보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선교했다. 이러한 바울의 선교 활동에는 교회 설립의 목표가 들어있었다. 당시 새로 생겨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귀족부터 노예까지 또한 이교도의 배경까지 지닌 다양한 사회계층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공동체를 선교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면서 처음에 코이네(Koine, 보통의)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코이네는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문자였지만 헬레니즘 시대의 지식인들이 선호하는 교양 있는 문자 형태는 아니었다. 즉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집단에게는 이해와 해석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통합된 의사전달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창작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카리스'가 바로 그런 말이었다. 바울은 널리 사용되고 있던 이 말에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로마 시대에 카리스는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울은 이 말에 '행위' 혹은 '결과'를 가리키는 그리스어의 접미사 'ma'를 붙여 '카리스마'로 표현했다. 즉 카리스의 추상적 개념을 제거하고 '은총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는 객관적 실재성을 갖게 했다. 바울은 은혜를 베푸는 선행을 인간의 상호주의가 아니라 신에게 부여함으로써 공동체의 연대감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사회적 차원에서 은총의 복음을 매력적으로 전달했던 바울의 카리스마 개념이 가장 상세하게 설명된 것이 고린도전서이다. 고린도전서는 기원후 50~62년경, 코린트(고린도)의 신자들이 사도 바울에게 보낸 질문들에 답한 내용으로, 신자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불화와 관련이 있었다. 이 불화는 집단 내의 사회적 계급과 교육 수준의 커다란 격차로 인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이 처리해야 할 가장 긴급한 어려움은 코린트에 정신적 엘리트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이 동포들보다 우위에 있으며 초자연적인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은 코린트의 영적 엘리트 계층에게 먼저 자만심을 버리라고 했다. 그리고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이용하여 코린트 교회에 내려진 카리스마타(카리스마의 복수형)를 일일이 열거했다. 즉, 치료와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방언, 영적 지혜와 지식을 말하는 능력, 방언을 해석하는 능력 등이 코린트 교회에 부여되어 있음을 축복하고, 이러한 재능이 성령의 구체적인 표현임을 설명했다. 바울은 '카리스마'에 '신의 은총으로 얻게 되는 영적, 초자연적 능력'이라는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은사를 '예수께서 재림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용될 능력'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카리스마를 미래의 성스러운 사건과 연관 지어 규정함으로써 일부 코린트인들이 자신의 초자연적인 재능에 품고 있던 자부심과 열정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은사(카리스마)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다"라고 표현했는데, 이 말은 몇몇 코린트인들에게 특권으로 간주되었던 능력을 성령의 영역, 즉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 엄격히 자리매김시킨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코린트인들에게 은사의 계층구조도 세웠다. 그것은 사도, 선지자, 교사, 그리고 병을 고치거나 방언의 능력을 행하는 순서였다. 이 계층구조에서 주목할 점은 방언 능력을 맨 밑으로 격하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방언을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 통역자의 도움 없이는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방언 능력에 대한 제한은 주로 그러한 능력을 내세우는 영적 엘리트들의 자만심을 누르기 위함이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공동체였던 것이다. 바울의 비전에는 카리스마의 다양성을 향유하는 하나의 교회가 들어 있었다.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며 이 특수한 선물은 개인의 명성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바울은 카리스마를 인용하여 귄위의 중심을 소수에서 전체로 옮겨 놓았고, 그 결과 영적 지도력은 그 공동체의 모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씩 맡겨지는 공동의 업무가 되었다.

카리스마가 잠시 사라지다

사도 바울은 당대의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전도사였고, 그의 글은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의 사상과 설교의 유산은 뒤죽박죽되고 만다. 바울이 제시한 카리스마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 즉 구원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총'은 받아들여졌지만, 카리스마와 관련된 영적인 능력은 교회 당국에 의해 권장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에서 드러나듯이 바울은 '카리스마'를 인용하여 교회의 공동체적 은사를 강조했다. 바울의 관점에서 교회 기구나 성직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준사도시대'(70~140년)에 돌입하면서, 교회 안에서는 성직자 계급과 관직 체계가 정식으로 자리를 잡는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10년경 안티오크 주교, 이그나티우스가 교회 성직의 순서를 주교, 장로, 부제(副祭)로 설명하면서 바울이 명시했던 영적 능력의 순서, 즉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성직 목록에서 사라졌다. 교회는 어떤 그리스도교 교인에게든 특별한 재능을 부여할 수 있는 성령보다는 교회 조직으로부터 발생하는 힘을 성직자들에게 부여하려 했다.

초기 교회의 권력구조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자료가 1세기 후반에 작성된 『디다케』(Didache, 12사도의 가르침)이다. 이 문헌은 다수의 저자들이 구전(口傳)에 의존하여 쓴 것으로 그 내용이 다소 모순되고 일부 내용도 누락된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유용한 점은 카리스마적 능력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디다케』는 '예언자'의 지위와 권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가짜 예언자나 사기꾼에 대한 경고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아마도 사도를 빙자하며 돌아다닌 사기꾼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디다케』는 교회를 방문한 사도를 단 하루만 머물게 하고, 그들을 보낼 때는 빵만 주라고 지시하는데, 이런 짧은 방문에서 사도의 기능은 단순히 순회 대사로 축소되어 있다. 2세기경부터는 『디다케』에서 점차 사도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대신 교회 성직자들의 얘기가 등장하는데, 이러한 변화에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역사적 사건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울과 같은 초기의 선교사들이 선교를 공인한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 의해 무너지자(70년경) 권위의 원천이 무너졌던 것이다.

교회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구전(口傳)에서 문서의 형태로 바뀌는 과정과 함께 일어났다. 이제까지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구전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바울의 선교도 그의 편지를 전하는 여러 예언가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졌다. 사실 이러한 구전 방식은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달리 해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바울의 은사와 이단의 운동들이 관련됨으로써 카리스마는 이전 시대의 당황스런 잔재로 간주되었다. 결국 교회는 방어책을 마련했는데, 180년경 리용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5권에 걸쳐 완성한 라틴어서 『이단에 반대함』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학의 방대하고 체계적인 최초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핵심적인 논거는 교회가 영적인 은총과 힘의 유일한 저장소이며 이 조직 밖에서 예언을 하거나 설교를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교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신학적 저술을 둘러싼 논쟁을 야기했고, 그 해석에 따라 여러 종파를 양산하는 문제를 낳았다. 그러자 정통 신학자들은 신의 율법을 기록한 공식적인 성서를 기초로 그리스도교 교리를 규정하는 한편 반란자들을 파문했다. 투옥과 순교가 흔히 일어났고 처형을 포함한 박해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제국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인들이 관련된 시민소요를, 공공안전을 파괴하는 행위로 악용할 수 있었다. 바울도 그렇게 처형되었고, 그리스도교 신도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통제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카리스마는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카리스마는 어디로 갔는가

4세기경 교회는 여러 가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면서 확고하게 그 권위를 세우게 된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곳저곳에 교회를 세우도록 하고, 황제의 지위에 오른 325년 200명이 넘는 주교들을 니케아(Nicea)에 소집하여 신학적인 논쟁거리들을 없애도록 교리상의 문제에 손을 대었다. 이렇게 니케아 공의회에서 단일한 교리가 만들어지고 그리스도교의 영역이 주교 관구로 분할되고 암묵적으로 로마가 제1의 관구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전체 교회의 교리상의 방침을 결정하는 주요 공의회가 모두 황제 권력의 중심지에서 가까운 곳에서 열리게 되면서 교회는 정치권력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4세기경부터 주교들이 행정 장관과 유사한 지위를 지닌 종교지도자로 인정되면서 교회는 세속적, 정신적 권위를 모두 갖춘 중요한 지주가 되었다.

교회가 안정되고 세련된 종교권위체로 발전하게 되면서, 바울의 카리스마와 연관된 그 힘과 신비는 교회의 정통 교리로 포함되게 된다. 이러한 현상에 관한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명확해졌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체계적인 장치에서 카리스마를 '무상의 은총'으로 정의했다. 즉 치료와 기적, 예언, 영혼식별과 방언 등의 능력을 신이 내려준 은총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무상 은총 위에 보다 성스러운 '성화의 은총'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은총'의 개념을 두 가지로 구분한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계에서 카리스마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무상 은총의 역할에 대해 '그 능력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을 수 있는 곳까지 인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이 부여한 무상 은총을 통해 탁월한 신앙의 확신을 나누어 주어야 비로소 성화의 은총으로 승화되는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은총을 받는 제도적인 기능도 고려했는데, 신성한 조직과 교회의 재판, 교황의 무과실성 등은 무상 은총이 더욱 영구적으로 나타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빈틈없이 체계화된 교의상의 조직에 카리스마를 자리매김하는 가운데서도 정통 교회의 영역 밖에서는 성령과 관련된 카리스마에 대한 생각이 개별 신비주의자나 이단자들과 관련되어 주기적으로 불거져 나왔다. 예컨대 왕이 손을 대어 치료하는 능력은 11세기부터 공공연히 집행되었고, 이러한 의식이 640년 이상 치러져오면서 왕의 카리스마가 언급되었다. 그것은 존엄한 폐하가 태어날 때부터 소유한 '초자연적인 치료수단'으로 설명되었으며, 교회는 왕의 이러한 마술 집행이 이루어지는 동안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으면 모두 나을 것이다"라는 마가복음의 구절을 읽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영적 능력을 부여하겠다고 주장한 운동들은 모두 이단으로 저지했다. 1183년 교황 루시우스 3세가 교령에서 몇몇 종파를 이단 명부에 올린 것을 시작으로 종교재판소가 세워지고 고문과 사형이 일상적인 처벌이 되었다. 1557년 종교재판소는 금서 목록을 작성했는데, 사상이나 관습이 이단의 입장과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모든 혼란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교회의 주도적인 개혁가들은 교회의 부패행위와 비난받을 만한 관습(면죄부와 교회 성직의 매매), 성직자 계급제도 등의 문제에 대해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제도화되고 계층적인 일면을 거부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개신교들은 종종 교의의 근거를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찾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신학교육보다는 영감을 선호하는 개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신비주의나 무아경의 성향을 지닌 수많은 종파가 양산되었는데, 루터는 애초에 신과의 직접적인 계시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에게 영감이 되어주었으나, 이제 이러한 급진주의자들을 '몽상가' 또는 '통제가 안 되는 벌 떼'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성서의 절대 권위를 주장했다. 이후 바울의 카리스마는 공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다양한 종교운동에 적용되면서 그 명맥만은 유지하고 있었다.

베버가 카리스마를 재창조하다

20세기 초 '카리스마'라는 단어는 막스 베버(1864~1920)에 의해 재탄생하게 된다. 베버는 1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경제와 사회』에서 카리스마를 권력과 관련된 그의 사회학 이론에 적용했다. 베버가 설명하고자 했던 '타고난 권력'에 가장 근접한 의미를 가진 당대의 표현은 '프레스티지(prestige: 위신, 위세, 지위 등의 뜻)'였다. 그런데 베버는 이 단어 대신 고대의 단어, '카리스마'를 사용했다. 이 과정은 '프레스티지'란 단어가 베버가 말하려던 내재된 권력의 힘을 의미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베버가 굳이 '카리스마'라는 종교적 단어로 대체한 것은 20세기 초의 사회에서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존재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이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면서도 쉽게 그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단어를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것은 당시의 지적ㆍ사회적 환경과 관련되어 있었다. 베버는 전성기에 달한 유럽의 민족주의와 그 민족주의가 제국주의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도시화, 대중화, 산업화 과정이 전개되고,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모두에서 대규모의 관료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이러한 시대에 베버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법률, 정치경제, 중세사, 철학사, 신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더욱이 정치가였던 아버지로 인해 당대의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자주 접하게 됨으로써 그에게 중요했던 정치사상과 행동 간의 연결 장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렇듯 폭넓은 지적 배경으로 인해 그는 여러 분야에서 합리주의적 검토를 다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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