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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이 말해주는 죽음

문국진 지음 | 오픈하우스
주검이 말해주는 죽음

문국진 지음

오픈하우스 / 2009년 12월 / 263쪽 / 15,000원



1. 죽음의 본질과 옛사람들의 생각



의식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


생물에게 있어 죽음은 끝을 의미하며 그대로 사라지고 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과 글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개념화할 수 있다. 죽었다는 것은 삶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삶이란 자기가 살아 있으며 그 속에 마음(의식)이 있어 외부에서 감지한 것을 자기의 몸 안에 반영하고 또 이렇게 해서 느낀 것을 말과 글로써 자유로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죽음이 다가오면 그동안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지위, 명예, 돈 등이 사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동안 돌보지 않았던 자신의 마음에 처음으로 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게 된다.

사실 마음은 항상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지냈을 뿐이다. 죽음을 앞두고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동안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면, 마음은 명확한 해답을 준다. 삶과 죽음은 둘 다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죽음도 삶의 일부이고 탄생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어느 한 부분 없이 인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의 죽음과 자기의 죽음을 같은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죽음은 '의식의 죽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다른 이가 죽었다고 해석하려면 의식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죽음, 즉 모든 생리현상 특히 심장과 폐의 기능이 불가역적으로 소실되는 것이 기준이 된다. 모든 죽음의 과정에는 주관적인 의식의 죽음과 객관적인 육체의 죽음이라는 두 과정이 있다. 대개의 경우는 의식의 죽음이 앞서고 육체의 죽음이 뒤따른다. 따라서 자기의 죽음이 먼저 오고 다른 이가 인정하는 죽음이 뒤따르게 된다.

종말이 있기에 욕망도 생긴다

라틴어의 finis라는 용어는 종말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목적을 의미한다. 만일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어떤 목적에 대해서도 욕망이 생기지 않고 생명은 내용과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결국 종말을 의식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만약 사람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면, 무한한 인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실패해도 몇 번이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어, 이를 악물고 뭔가를 해낸다거나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원의 세계에서는 시간에 대한 구속이나 노력 따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든 일에 전력투구하게 되는 것은 시간이 유한해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귀중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지고 만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인생이 정말로 좋을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깊이 새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존재하는 한, 죽음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관심과 죽음의 현재와 미래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에 의해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되기 때문에 죽을 만큼 불안하고 슬프고 절망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옛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감히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기를 꺼리고 가능하면 불로장생의 살 길을 추구했다. 또 죽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죽음이 삶에 부여하는 의미보다는 사후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후에도 혼은 불멸한다고 믿었고 또 이런 생각으로 고난에 찬 삶을 참고 견디면서 사후세계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살았다. 예컨대 삶이 괴롭고 힘겨워도 이 세상을 깨끗하고 바르게 살면 사후세계에서는 지금까지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알찬 새 삶을 만끽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이렇듯 옛사람들은 죽음 자체보다는 사후세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옛사람들의 생각은 고대 문화가 남긴 유물과 예술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혼불멸사상과 사후세계를 향한 염원

고대 이집트인은 상류 계급에 있던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사람의 인생을 누구보다도 사랑했기 때문이며, 사후세계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는 현세의 연장으로 그곳에 가서도 현세의 품위와 생의 즐거움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일정한 시일이 지나면 반드시 환생해 돌아온다고 굳게 믿었다. 미라를 만들 때는 시체 옆구리를 가르고 내장을 전부 꺼낸 후에 예리한 갈고리로 뇌를 끄집어낸 다음 붕대나 아마포로 시체를 감싸서 관에 넣고, 환생할 때 자신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죽은 사람의 얼굴을 채색했다. 그리고 갖가지 음식과 옷가지 등을 같이 매장했으며 저승에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사자의 서, 아누비스 석상 등을 넣었다. 그래서 미라는 건축, 변화 장식과 더불어 고대 이집트인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으로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한다. 기원전 1200년에 쓰여진 장송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남아 있는데, 사후세계의 집인 무덤을 중요시하여 탄생된 것이 피라미드라는 것을 알려준다.

'아! 무덤이여! 너는 축제를 위해 만들어지고, 너는 아름다운 이를 위해 만들어졌구나.' 이집트의 미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투탕카멘(기원전 1370? ~ 기원전 1352?)의 황금 인형관에 들어 있던 미라인데, 황금관은 아직도 찬란한 빛을 발하며 당시의 문화적인 상황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이 황금 인형관 안에는 10대 후반의 어린 왕의 미라가 들어 있었는데 생전의 모습을 순금의 관으로 만들고 어린 왕의 미라를 그 속에 넣어 영구히 보전했다. 그들은 사후세계도 중요시했지만 언젠가는 환생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불로장생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

중국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대제국 진을 세운 시황제는 조를 위시하여 위, 한, 초, 연 등을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마침내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신을 뜻하는 '제' 문자를 자신의 칭호로 삼으며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죽음조차 자신의 힘으로 컨트롤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수상한 주술을 쓰는 방사나 도사로 불리는 사람들을 중용하게 된다. 불로불사를 설명하는 '신선사상'은 여기서 시작된다. 특히 시황제는 서복이라는 방사의 감언이설에 흥미를 보였다. 바다 가운데 있는 봉래, 방장, 영주라는 삼신산에 선인이 살고 있어서, 그곳에 가면 불로장생의 약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시황제는 서복의 말을 믿고 수천 명의 소년소녀를 데리고 삼신산을 탐색하러 가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막대한 금액의 재산을 낭비해봐도 삼신산이 발견될 기색이 없는 데 애가 탄 시황제는 서복을 엄하게 문책하려고 했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서복은 수천 명의 소년소녀를 거느리고 바다 저편에 있는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기록을 보더라도 시황제가 불로불사약을 손에 넣었다거나, 그것을 먹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사마천의 『사기』에는 흥미 있는 글이 적혀 있다. 시황제의 무덤인 진시황릉 지하에 궁전 같은 특별한 방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은으로 백천, 강하, 대해를 만들고 기계를 작동시켜 물을 흐르게 했다는 것이다. 수은은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와 일본, 그리고 유럽의 연금술에 있어서도 불로불사의 묘약을 조제하기 위한 중요한 광물로 취급되고 있었다. 수은에는 몸속의 악령을 죽이는 효과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시황제는 이 지하궁전 안에 들어가면 설령 육체는 죽더라도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황제의 죽음은 여행 도중에 찾아왔다. 게다가 그가 죽은 시기는 한여름의 찌는 듯이 더울 때라 수도로 돌아왔을 때는 부패해서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황제의 의도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진시황제뿐만 아니라 불로불사의 유혹에 사로잡힌 권력자는 수없이 많다. 고대 이집트 왕은 자기 육체를 미라로 만들어 부활할 날을 믿었고, 나치의 히틀러는 초자연 현상에 열을 올려 불사의 생명을 찾길 원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연금술에 돈을 쏟아부었다고한다.

그리고 현대과학도 불로장생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운명을 거스르듯이 인간은 불로불사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계속하고 있다. 암 치료나 장기이식, 인공장기 개발도 크게 생각하면 그런 시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로불사가 과연 좋은 일일까? 만일 사람이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영원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면 시간의 절약이나 일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은 없어질 것이다. 즉 시간은 유한해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전력투구하게 되며,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게 된다. 슬픔에 상심하고 목표를 달성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것도 유한한 시간 때문이다. 만일 시간이 무한하다면 귀중한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어지고 만다. 과연 그런 인생이 정말로 좋을까?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을 깊이 새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의 종말인 죽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2. 그림과 문신에 나타난 삶과 죽음의 위상



문신으로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


해골 그림 바니타스 속에는 중세 메멘토 모리의 여운이 남아 있다. 메멘토 모리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바니타스의 종교적 요소이다. 이러한 종교적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마카브르와 바니타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렇게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를 나타낸 문신이 옆에 그림이다. 왼쪽은 생과 사가 하나로 맞붙어 있다는 것을 표현한 문신으로서 해가 뜨는 아침에 한 젊은 중이 할복을 시도하는 모습을 그려 죽음의 순간에 삶과 죽음이 하나로 맞붙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마치 열반에 들면 무아지경에 도달하여 연꽃 옥좌 위에 앉아 있는 것과 같고, 그 눈앞에 '영원'이 떠오름을 표현했다. 연꽃이 더러운 물에서 자라면서도 그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과 같이 깨달음을 얻은 인간은 그 순간부터 보다 좋은 인생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연꽃 옥좌에서 흘러내린 피는 흐르고 흘러 호수처럼 고이고 그 위에 생겨나는 파문은 마치 거칠고 불확실한 현세의 삶과 같음을 상징한다. 그림 윗부분은 벚꽃으로 덮여 있는데 활짝 피었던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은 우리 인생살이의 근본과도 같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담은 문신이라 할 것이다. 오른쪽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들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문신이다.

바니타스는 반드시 정물로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대개 두 가지 요소로 표현된다. 즉 정물, 초상, 풍경 등과 함께 표현되기도 하지만 촛불, 모래시계와 같은 무상함의 상징과 함께 그 의미를 한층 더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 것을 표현한 문신이 왼쪽 그림①이다. 즉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든다는 의미로 두개골, 모래시계, 낫 등 메멘토 모리를 강조하는 상징들을 새긴 문신이다. 고전에서는 현세의 쾌락을 즐기다가 죽은 죽음의 상징을 해골로 표현했다. 그래서 해골이 등장하는 술자리는 향락의 자리이며 이 세상의 고통을 씻어버리는 자리로 여겼다. 해골은 죽음을 보증하는 삶의 덧없는 기쁨이다. 무겁고 어두우며 비참한 의미가 아닌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폼페이의 모자이크 작품에 술집 간판의 표시로 해골을 그린 것이 남아 있는데 오른쪽 그림②는 폼페이의 술집 간판 그림을 본떠서 만든 문신이다. 해골은 양손에 술병을 들고 있으며 죽음의 공포와는 거리가 먼 매우 코믹한 표정이다. 사람들을 술집으로 유인하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또 이러한 죽음의 상징인 바니타스에다 영혼불멸의 상징인 십자가를 꽂거나, 칼을 꽂아서 죽음을 죽임으로써 영원히 죽지 않음을 표현한 문신을 몸에 새기기도 했다. 이제 죽음을 무서워하던 사람들은 반드시 죽는다는 원리에 순응하는 쪽으로 변화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니타스에 힘을 실음으로써 용맹스러움 또는 경고의 뜻을 나타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여러 의미를 가진 바니타스는 지금도 문신으로 많은 사람들이 몸에 새기고 있다.

3. 의학에서 다루어지는 죽음



육체의 죽음은 인생의 과정


ㆍ인생에는 부분사라는 죽음도 있다: 우리가 살다보면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어려움과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중에서 무엇인가를 잃는 것, 무엇인가가 끝나는 것과의 만남은 필연적이다. 죽음을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며 종료라고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상실 또는 종료도 일종의 죽음에 비유해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실직, 실연, 파산 등과 같은 상실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또한 죽음과 같은 현상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새 직업, 새 애인이 생기고 또 한 번 도전하고 노력해서 잃었던 재산을 다시 모으면 과거의 상실은 대상을 돌려받는 새 출발의 전환점이 된다.

그러나 팔이나 다리를 잃거나 배우자나 자식과의 사별과 같이 그 대상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인생에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며 그것으로 그 부분과 관계되었던 자기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다. 이것을 슈나이더맨 같은 심리학자는 인생의 부분사라고 했다. 이러한 부분사와 같은 현상과 과정은 우리 육체의 죽음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인간 육체의 죽음을 보다 완전하게 정의하려면 그것은 생물학적인 세포사일 것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세포가 소멸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세포사는 일시에 모든 세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우리의 사회적 통념이나 의학적인 관점에서는 인간의 심장 박동이 멎고 호흡이 멎어 돌이킬 수 없게 되면 그 인간은 죽었다고 인정한다. 심장, 폐와 같은 장기의 죽음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장기사라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할지라도 장은 당분간 계속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정자는 살아 있어 그것을 채취하여 난자와 만나게 하면 수정이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죽은 사람의 정자에 의해 수정이 된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긴다. 비록 죽음의 과정에 들어섰다 할지라도 각 장기의 세포는 이미 그 기능이 소실된 것과 아직 그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혼재된 속에서 점차 모든 세포의 기능이 소실되면서 세포사에 이른다. 세포사의 시점에서 보면 장기사는 완전한 것이 못 되며 세포사에 이르는 과정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육체적인 부분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팔, 다리의 절단수술을 받은 환자가 눈에 보이는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다는 것은 그 신체 부분을 사용하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발달된 현대의학으로, 즉 의수와 의족으로 그 기능을 대신한다 해도 원래의 손이나 발의 기능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을 비탄에 잠기게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팔, 다리를 잃은 것과 배우자를 잃은 것은 흡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팔, 다리의 기능이 상실된 경우를 예를 들어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절단 수술을 받은 직후에는 마비 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정신적, 신체적 감각은 둔마된 상태이다. 그 후에 비탄에 빠지게 되는데 상실된 팔이나 다리 그리고 대상할 수 없는 그 기능을 생각하면 절망과 더불어 불안이 시작된다. 또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은 일할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고 사람과 만나는 것을 피하며 주위 사람에게 불안을 토로하고 표시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사와 같은 현상은 우리 신체나 정신의 상실, 주위 사람과의 사별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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