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과 체찰
신창호 지음 | 미다스북스
함양과 체찰
신창호 지음
미다스북스 / 2010년 1월 / 296쪽 / 17,000원
제1부 함양과 체찰의 삶, 이황 - 마음공부에 혼을 불사른 선비 퇴계의 생애와 학문
어린 퇴계 - 사람으로서 떳떳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다1501년 11월 25일(음력) 조선시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재의 경북 안동 마을)에서 한국 유학계의 거두 퇴계 이황이 태어났다. 퇴계는 두 살 때 아버지 찬성공을 잃었고, 남편을 잃은 어머니 박씨는 혼자서 많은 자식을 키우느라 이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박씨 부인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난한 살림을 쪼개어 학비를 만들었고, 멀거나 가깝거나 따지지 않고 서당에 보냈다. 또한 자식들에게 지식 공부만이 아니라 사람다운 몸가짐과 행실을 하도록 타이른 어머니의 가르침은 훗날 퇴계가 한국 최고의 유교적 지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했던 퇴계는 꾸준히 실력을 높여갔고, 열두 살이 되면서 삼촌인 송재공에게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계는 삼촌에게 "모든 일에서 옳은 것이 리(理)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삼촌은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라고 감탄하며 "이 아이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지킬 것이다"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퇴계는 성장하면서 더욱 글 읽기를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에게 뽐내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청장년기의 퇴계 - 학문과 벼슬 사이에서 고민하다어른으로 성장한 퇴계는 21세가 되어 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고 그해, 처음으로 태학(太學, 조선 최고의 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퇴계는 시골 출신이긴 했지만 조용히 공부하며 예의와 도리를 익혔는데, 그런 퇴계의 법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고지식하다고 수근대곤 했지만, 퇴계는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학문과 행동거지를 살피며 공부에 매진했고, 27세 때 과거 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퇴계는 애초부터 과거에는 뜻이 없었지만, 기울어진 가세에 가난한 어머니를 봉양해야 했기 때문에 과거 시험에 응시했는데, 소과(지방에서 치르는 과거의 1차 시험)에 이어 대과(서울에서 치르는 2차 과거 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퇴계는 서울에 특별한 연고가 없는 탓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 후 퇴계가 진정한 의미의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34세라는 늦은 나이였고, 관직에 나간 지 4년째, 퇴계의 나이가 37세가 되던 해 어머니 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으로 달려간 퇴계는 크나큰 슬픔으로 초상을 치르는 동안 몸이 꼬챙이처럼 말랐고 거의 생명이 위독할 지경까지 되었다고 한다. 간신히 몸을 추스린 퇴계는 유교의 예에 따라 39세 12월에 이르러 어머니의 삼년상(三年喪)을 마쳤다.
중년기의 퇴계 - 벼슬을 사양하며 참 학문을 추구하는 시소게임을 하다40세가 된 퇴계는 학문도 점차 무르익어 조정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승진을 거듭하여 벼슬이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고 계속 사헌부와 홍문관, 성균관 등을 드나들며 관리 생활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퇴계의 취향은 높고 깨끗하여, 언제든 거리낌없이 관직에서 선뜻 물러나겠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한편 46세 7월, 퇴계는 둘째 부인 권 씨와 사별하게 되었다. 27세에 첫째부인과 사별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죽음에 대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 탓인지 큰 슬픔도 없었다. 그리고 퇴계에게 일어난 더 큰 변화라면 조정에서 벼슬할 마음이 거의 없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양하고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와 조용한 퇴계(退溪) 근처에 집을 빌려 살았다. 퇴계가 살았던 고향 마을의 시내는 원래 토계(兎溪)라고 불렀는데, 퇴계는 토(兎)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퇴(退)자로 고쳤고, 그 시내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이것이 이황의 호인 '퇴계(退溪)'의 유래다. 사십대 후반에 들어선 퇴계는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으나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퇴계를 관직에 임명했고, 퇴계는 그것을 사양하기에 바빴다.
퇴계는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에 해당되는 소수서원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소수서원은 원래 백운동서원이었다. 백운동은 경상도 풍기군에 있는, 고려 때의 문성공 안유가 살던 곳이었는데, 주세붕이 풍기군수가 되었을 때, 그곳에 서원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하고, 또한 여러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퇴계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처음으로 생겼으니, 위에서 시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혹시 그대로 없어져 버릴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 감사에게 글을 올려 임금께 보고하고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송나라의 고사에 의거해서 책을 내려 줄 것, 편액을 왕명으로 내려 줄 것, 토지와 노비를 주어서 배우는 사람이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줄 것" 등이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하고 대제학 신광한을 시켜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으며,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보냈다. 우리나라 서원의 흥성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퇴계는 조선 사회의 학문을 부흥하고 교육을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퇴계는 53세에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그의 학문 활동도 점점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퇴계의 몸은 더욱 쇠약해졌고, 그가 관직을 사양하자, 조정에서는 퇴계의 건강을 걱정하여 좋은 음식을 내리기도 하고 의원을 보내어 몸을 보살피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퇴계의 학문적 몰입은 대단했다. 56세에는 제자들과 함께 주자학의 핵심이 될 『주자서절요』를 완성하였다. 『주자대전』에는 많은 편지가 들어 있는데 주자가 공경대부와 제자ㆍ친구들과 서로 묻고 답한 글로, 배우는 사람에게 유익한 내용이 많으나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 내용과 뜻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퇴계는 그중에서 주로 학문과 관계되고 실용적인 것들을 골라 새롭게 묶어서 『주자서절요』를 펴낸 것이다.
만년의 퇴계 - 학문과 연구에 몰입하다퇴계의 말년 10여 년은 학문의 원숙기였는데, 제자들과 공부에 몰입함은 물론, 전국 각지의 선비들과 편지로 교유하며 학문을 논의한 것은 조선 지성인들의 열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한편 환갑이 다 된 나이, 5년에 걸친 공사 끝에 도산서당(陶山書堂, 현재 안동의 도산서원의 시초)이 완성되었다. 도산서당을 완성한 후부터 퇴계는 자신의 호를 '도산(陶山)의 늙은이'라는 의미로 '도옹(陶翁)'이라 하였다. 서당은 3칸짜리 건물로 규모 자체는 아담했고, 서당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 짓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고 이름 붙였는데, 퇴계는 도산서당에 이르면 늘 완락재에서 책읽기에 몰두했다. 그는 스스로 학문을 즐겼고 세상의 부귀영화나 호사스런 삶의 물정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퇴계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관직명을 받은 경우가 많았는데, 조정에서 직책만을 부여하며 그를 기다렸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와 존경이 높았다는 증거이다. 그래도 이름과 실제가 부합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퇴계는 65세 4월에 글을 올려 당시 내려졌던 동지중추부사의 직명을 해임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명종도 할 수 없었던지 퇴계의 직명을 거두고 원로인 퇴계에 대한 최상의 배려의 뜻으로, 기본적으로 먹고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주었다. 이후에도 임금의 부름과 퇴계의 사양은 거의 퇴계가 운명을 달리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중국에 새 황제가 즉위하여 사절단이 오게 되자 명종은 불안한 마음에 67세가 된 퇴계를 다시 조정으로 불렀다. 퇴계는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갔는데, 그때 뜻밖에도 명종이 승하하는 일이 생겼다. 그 뒤 명종에서 선조로 임금이 바뀌었으나 퇴계는 여전히 임금의 호출 대상 0순위였고, 퇴계는 어린 선조에게 임금으로서 갖춰야할 여러 가지 정사의 이치를 가르쳤다. 특히 퇴계의 대표적 저술로 알려져 있는 『성학십도』는 왕이 익혀야 할 학문으로서 그 하이라이트에 속한다. 69세가 되어서도 선조는 퇴계를 놓아주지 않았다. 퇴계는 관직을 맡기지 말아 달라고 선조에게 청하고 또 청하였다. 할 수 없이 퇴계를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한 선조는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불편함이 없도록 말을 지급하고 배를 끄는 군인을 보내 그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퇴계가 관직에서 물러나니 세상 사람들이 섭섭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인생의 최후 순간까지도 퇴계는 제자들과 『계몽(啓蒙)』을 비롯하여 『심경(心經)』을 강론하고, 다시 학문으로 나아가는 도전 정신으로 가득 찬 생활을 계속했다.
퇴계의 최후 - 자신이 거두는 삶에 최선을 다하다퇴계는 생의 마지막도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다. 형의 아들 영에게 유언을 적게 하였는데, 자신의 일생만큼이나 검소하고 소박했던 유언은 크게 두 가지 - 첫째,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 장례는 사양하라. 둘째, 비석을 세우지 말라. 조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간략하게 향리와 조상의 내력, 지행(志行) 출처(出處)를 쓰되, 『가례(家禮)』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라 - 였다. 퇴계의 이런 생각은 지금도 가문의 전통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호사스럽고 떠들썩하고 알맹이 없는 인생보다는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겨보는 거룩함의 실체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세상을 하직하는 날 아침, 퇴계는 곁에 있던 사람에게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앉았다. 그러곤 평소 좋아하던 매화를 바라보며, 지긋이 웃으며 편안한 얼굴로 운명하였다. 퇴계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만큼, 선조는 깊이 애통해 하며 다음과 같이 애도의 명을 내렸다. "이황이 죽었다 하니 매우 아깝고도 슬프다.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부의(賻儀)를 보내는 일 등을 예의에 맞게 속히 진행하라." 이에 아들 준이 아버지의 유언이라 하며 두 번이나 글을 올려 과도하게 예를 갖춘 장례를 극구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퇴계의 장례식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평소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슬퍼하였다. 퇴계의 혼은 현재의 도산서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퇴계 사상의 영향 - 조선의 학파의 거두에서 세계적인 사상가로 거듭나다퇴계는 생전에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특히 김성일, 유성룡 등 훗날 퇴계학파 형성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퇴계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이들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이후 조선 사회를 주도해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퇴계학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더욱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퇴계와 같은 시기에 살지 않았으므로 퇴계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정시한, 이익, 정약용과 같은 이들도 퇴계의 학문에 매료되어 개인적으로 존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학문의 형태를 사숙(私淑)이라고 한다. 조선 사회에서 퇴계는 많은 사람들이 사숙하게 되는 조선시대 최고의 지성이었는데, 이들은 퇴계학파는 아니었지만 퇴계의 사숙학파(私淑學派)라 일컬어질 정도로 하나의 뚜렷한 학문적 흐름을 형성하였다.
퇴계의 학문은 일본과 중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로 일본은 퇴계 사후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조선의 문물을 약탈하는 동시에 조선의 학문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서 일본인들은 퇴계의 학문을 스스로 감명하여 수용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퇴계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이미 제자 유성룡에 의해 성학십도가 전파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퇴계의 명성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고 퇴계의 학문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점차 국제성을 띠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저명한 동양학자들이 '퇴계학 국제학술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특히 퇴계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1970년에 개최된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일본, 대만, 홍콩, 독일 등 세계 각국에서 퇴계학회 지부가 설립되어 퇴계는 바야흐로 국제적 사상가로 거듭나고 있다.
제2부 자성록 - 몸과 마음의 공부법
제1절 벼 싹을 잡아 당긴다고 벼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
제1강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공부에 대한 조급증'이 마음의 병을 부른다 - 남시보(한국 양명학의 시조로 불리는 조선 명종ㆍ선조 때의 학자)에게 답함마음의 병은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살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질없이 꼬치꼬치 캐어서 억지로 이치를 찾으려 하거나, 어리석은 마음으로 "싹을 억지로 잡아당겨 성장을 도우려"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고 기운을 소진하게 됩니다. 이는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병통이기도 합니다. 내 평생의 병줄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도 알겠지만, 병을 치료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괴로움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곤궁함, 출세, 이득, 상실, 명예, 치욕, 이익, 손해 등 모든 것을 너무 깊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고, 정서적으로 조화롭고 편안한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하세요.
그리고 책을 읽되 마음을 괴롭힐 정도로 심하게 읽지는 마세요. 무조건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고, 마음 가는 대로 공부의 맛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치의 깨달음도 날마다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분명히 간파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거기에 숙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급하게 공부의 효과를 보려고 마음을 얽매어서는 안 됩니다. 보내 준 편지에서 말한 함양(涵養,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며 아직 펼쳐지지 않는 마음을 수렴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공부. 마음공부라고 볼 수 있으며, 존양(存養)이라고도 함.)과 체찰(體察, 몸으로 직접 살피는 일로 마음이 이미 펼쳐져 욕심에 빠지거나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사람의 욕심을 제거하는 공부. 성찰(省察)이라고도 함.)은 유교의 근본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와 세상의 일이 본래 다르지 않다고 한 것 역시 옳은 말입니다.
제2강 '마음공부의 적' 출세ㆍ명예욕에 대해 충고하다
무르익지 않은 공부로 높은 관직을 바라지 말라 - 기명언(이름은 대승이고 호는 고봉. 퇴계 문하에 왕래하며 퇴계와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辨)을 통해 학문 체계를 완성함)에게 답함보내 온 그대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아직 공부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섣불리 정치에 나섰다가 벼슬 때문에 뜻을 빼앗길까 두렵고, 돌아가서 끝까지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람이야말로 옛사람들도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내가 그대에게 옷깃을 여미고 깊은 경의를 표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고, 그대를 위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 또한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선비는 정치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법도를 잊어버렸고, 벼슬을 그만두는 예를 잊어 버렸습니다. 서로를 비방하는 소리도 태산처럼 높아가니 참으로 걱정스럽고 두려운 심정 그지없습니다. 이런 문제로 내게 상의를 하였으니 할 수 없이 내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적도록 하겠습니다.
관직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대의 뜻을 결정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래야 공부에 전념하여 도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하지 못하고 과거 시험을 보았고 관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 관직을 그만 두고 본래 바라던 공부를 다시 하고 싶다고 하면서 남에게 상의를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너무 늦은 깨달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선비는 세상에 나가 관직을 하든지 집안에 가만히 은거하든지, 때를 만나든지 아니면 만나지 못하든지, 다만 자신의 마음을 닦고 올바른 의리(義理)를 행할 따름입니다.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선비 가운데 뜻이 있고 도의를 구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화를 면치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은 나라의 땅이 좁고 인심이 각박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행함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어 그렇다 할 것입니다. 즉, 아직 공부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처했다거나 시대를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다스려보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