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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척 코어, 마빈 클로스 지음 | 생각의나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임

척 코어, 마빈 클로스 지음

생각의나무 / 2010년 1월 / 387쪽 / 13,000원



아파르트헤이트 국가




1964년 남아공 케이프타운, 세딕 아이잭스는 시내 거리 한 모퉁이에서 신문을 읽으며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온화한 인상에 안경을 쓴 이 젊은 고등학교 교사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의 1면 기사는 넬슨 만델라가 구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몇 분 뒤 그는 종이로 싼 큰 짐 꾸러미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길 건너편에 경찰 밴이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그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그는 한 건물 안으로 몸을 숨기고 밴에서 내린 경찰들이 지나가던 흑인들에게 통행권 제시를 요구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켜보았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저항하는 '무슬림 청년 행동' 회원인 세딕은 폭발물 제조 방법을 연구하여 다른 회원들에게 그 방법을 전수하고 있다. 만약 경찰이 그를 검문하면 그는 단 하나의 폭탄도 폭발시키지 못한 채 체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이 따랐다. 경찰들은 통행권을 확인한 후 흑인들에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고, 경찰 밴도 길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세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폭발물 재료를 들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기 시작하였다.

1948년 남아공 인종주의 정당이 채택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백인의 우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완전한 인종차별 시스템을 구축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는 흑인들을 자신의 조국에서 외국인으로 살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고, 이에 근거하여 3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 비좁고 생필품마저 부족한 보호구역으로 보내졌다. 비밀경찰이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감시했고, 흑인과 유색인들에게는 저항적인 성격을 띤 친구와 이웃을 밀고하라는 협박이 가해졌다.

며칠 후 저녁 세딕은 동지들과 함께 새로 만든 폭발물을 실험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세딕을 심문한 사람들은 유색인 정치운동가라면 무조건 경멸했고, 잔인하고 가학적으로 그를 고문했다. 세딕은 남아공 치안당국의 반테러리스트 프로젝트에 따라 구속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가능한 한 많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저항 투사들을 끌어모아 그들을 죽이거나 가두려는 내용의 계획이었다. 세딕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도, 이후 교도소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될 여러 사람들이 남아공 치안당국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남아공 프리토리아 지역에서는 토니 수즈라는 어린 학생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남아공의 흑인 축구 선수 중 최고가 될 희망을 품고 있을 정도로 축구를 잘했다. 토니의 학교는 남아공 전체의 다른 모든 흑인 교육기관처럼, 재정 및 책이나 필기도구 같은 기본적인 교육 기자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가 흑인 어린이 교육에 백인 어린이에게 들어가는 비용의 1/6만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흑인들을 교육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불평등을 직접 체험하며 자란 토니는 자연스럽게 PAC(범아프리카 회의, 급진 흑인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남아공의 정치조직) 청년 활동가의 일원이 되었다가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세딕이나 토니 같은 정치범들에게 재판은 형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변호사가 얼마나 훌륭한지, 정부 측 논거가 얼마나 빈약한지에 관계없이, 사실상 유죄 판결은 확정되어 있었다. 결국 아파르트헤이트 논리 안에서는 국가에 반대하지 않아야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은 몇 년 형이 선고될지와 어느 교도소에 수감될지에 대한 것이었다. 세딕은 불법 행위 모의 죄목으로 12년 형을 선고받았다. 토니 수즈는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반역, 파괴, 국가에 대한 범죄가 죄목이었다. 세딕과 토니는 폴스무어 교도소로 이송되었다.

케이프타운 해변에서 약 10km 떨어진 바위섬 로벤섬은 남아공의 앨커트래즈로 알려져 있다. 1795년까지 네덜란드인들은 이 섬을 탈영병과 범죄자를 위한 감옥으로 이용했다. 다음 세기에는 나병 환자, 정신병자, 매독을 앓는 매춘부들이 강제로 섬에 격리되어 불행하게 살아야 했다. 영국인들은 이 섬을 정치적인 반대 세력을 가두는 감옥으로 이용했다. 위대한 아프리카 장군 마카나가 투옥된 곳도 이 섬이다. 그의 부족인 코사족은 식민 세력인 영국인들과 전쟁을 벌였다. 150년이 지난 1964년 또 다른 코사 부족 출신의 걸출한 인물이 로벤셈에 수감되었다. 바로 넬슨 만델라였다. 1960년대 남아공 치안 당국은 이 섬에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수용소를 지었다.

저항의 대가



12월 중순 폴스무어 교도소의 수감자들은 손목과 발목에 쇠고랑을 찬 채 로벤섬으로 끌려갔다. 섬에 도착하여 수감자들이 배에서 내리자 무장한 간수들이 일렬로 서서 야유하며 욕설을 내 뱉었다. "이곳은 섬이다. 너희들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 경고도 없이 달려가서 경봉으로 수감자들의 머리와 어깻죽지를 구타했다.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은 수감번호로 구별되었다. 세딕의 번호는 883/64였다. 1964년에 유죄판결을 받은 883번째 수감자라는 뜻이었다. 세딕은 로벤섬에 자신과 같은 정치범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악명 높은 살인자, 갱단 두목, 폭력범들도 같이 갇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섬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오전 5시 30분 종소리에 잠에서 깨면, 바닷물로 씻고 면도할 시간을 얻었다. 매를 맞아가며 알몸으로 수용소 밖으로 나와 굴욕적인 신체검사를 당해야 했다. 죽으로 아침 식사를 한 뒤, 수감자들은 거친 자갈길을 따라 일터로 향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해변가 채석장에서 일을 하였다. 매일 고된 작업이 이어졌고, 수감자들은 부상을 입든 지치든 상관없이 모든 힘을 다해 계속해서 일을 해야 했다. 뒤처지는 사람은 구타를 당하거나 식사 배급량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작업장에서 교도관들이 조직적으로 휘두르는 폭력행위는 육체적인 부담을 가중시켰다. 아프거나 다친 수감자들은 게으른 흑인이라는 죄명으로 학대와 구타를 당했다. 정치범 대다수가 비좁은 본관 감방에 갇혀 있는 동안 넬슨 만델라와 ANC 지도자 월터 시슬루를 비롯한 20여 명의 흑인 유색인 단체 지도자들은 수백 미터 건너편에 있는 독방 구역에 갇혔다. 독방 구역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일반범들이 지도자와 회원들 사이에 소식과 정보를 전했다.

지도자들이 보내 온 메시지는 로벤섬을 '투쟁의 대학'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메시지는 학습을 시작하려고 생각했던 수감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세딕 같은 훈련된 교사들은 수감자들과 함께하는 학습시간을 조직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수감자들은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을 찾는 법을 배웠다. 훔친 비누조각으로 주사위를 만들었고, 종잇조각으로 카드를 만들어 게임을 했다. 하지만 감옥 안의 지겨운 일상을 바꿔보려는 시도는 철저하게 짓밟혔다. 교도관들은 정기 검사 때마다 감방을 철저하게 뒤져 놀이거리를 파괴하는 데 가학적인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교도관들이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놀이가 하나 있었다. 축구에 미친 토니 수즈와 동료 수감자들이 자신들의 셔츠를 뭉친 후 묶어 임시 축구공을 만들어 경기를 했던 것이다. 간수가 감방을 검사하러 오면 재빨리 원래 상태로 풀어놓았다. 이후 길고 지루했던 저녁 시간은 열광적인 감방 경기로 활기를 띠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높은 수준의 축구 선수들이 대거 섬으로 오자, 이러한 경기들은 점점 더 흥미를 더해갔다. 1964년 그 경기는 이미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



남아공의 비백인들 사이에서 축구는 가장 대중적인 국민 스포츠였다. 1920~30년대 전국 도처에서 흑인 및 유색인 리그가 생겨났고, 1930~40년대 올랜도 파이러리츠, 모코네 스왈로스 등 전설적인 클럽들이 탄생했다. 선수들은 지역사회의 슈퍼스타였고 청소년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 그러니 1964~65년 사이에 세딕, 토니와 함께했던 약 2천 명의 수감자 중에 축구를 열망하는 많은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감방 안에서 셔츠를 말아 만든 공을 차면 찰수록, 진짜 축구에 대한 재소자들의 열정은 커져갔다. 하지만 감방을 벗어나 야외에서 축구를 하거나 팀을 꾸려 경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규정을 바꾸고 교도소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허가를 받기 위해 교도소의 규정을 낱낱이 뒤졌고 결국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적절한 부분을 찾는 데 성공했다.

규정에 따르면 수감자들은 72시간 이상 감방을 벗어나지 못할 경우 반드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허가받을 수 있었다. 1964년 12월부터 재소자들은 매주 토요일 오전 번갈아가며 똑같은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축구하는 것을 허가해 주십시오." 교도관들은 이런 요구를 외치는 재소자의 식권을 빼앗았다. 식권을 빼앗기면 주말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처벌에도 불구하고, 수감자들은 계속 단결해서 결의를 보여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축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으며, 사람들을 단합하게 만들었다. 토요일 오전의 요구와 간수들의 보복은 196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가 국제적십자사의 로벤섬 방문을 허가한 것이었다. 적십자 대표단과의 면담에서 재소자들이 섬에서의 생활을 고발함으로써 실제 상황이 교도소 당국이 꾸며낸 모습과 다르다는 것이 알려졌다. 적십자사 이후 여러 국제기구의 방문이 이어졌고 수감자들의 생활에 대한 비판도 늘어갔다.

마침내 1967년 12월 수석 교도관은 매주 토요일 30분 동안 축구하는 것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1967년 어느 토요일 오후 교도관들은 축구를 하길 원하는 수감자들 중 무작위로 사람을 뽑아 두 팀을 만들었다. 한 팀은 레인저스, 다른 팀은 벅스를 팀 이름으로 선택했다. 사람들은 자유인인 듯 경기를 펼쳤고, 경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격렬했다. 이날 30분 동안 벌어진 경기의 최종 결과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참가했던 모두가 승자였다. 섬에서의 축구가 시작된 것이었다.

경기는 매주 토요일에 벌어졌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이 경기의 수준을 높이는 책임을 맡으면서 사람들의 체력과 경기수준이 점차 나아졌다. 선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팀을 선택할 수 있기를 원했고, 축구 리그를 설립하려는 야망을 보였다. 나아가서 그들은 축구협회를 만들어 피파(국제축구연맹)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운영하려고 했다. 그 결과 7개의 클럽(레인저스, 벅스, 핫스퍼스, 다이나모스, 디취취디, 블랙 이글스, 거너스)이 정치진영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에 토니 수즈가 이끄는 8번째 클럽(마농 FC)이 추가되었다. 마농 FC는 정치진영에 관계없이 선수들을 선발한 클럽이었다.

축구협회의 이름은 마티에니 축구협회로 정해졌다. 마티에니는 돌을 의미했다. 그들의 삶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채석장이라는 단어에 대한 동의어였다. 축구협회는 가능한 한 많은 정치범들의 참여를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협회의 공식 방침은 로벤섬에서의 축구는 모두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축구를 체계화하기 위한 요구



1969년 수감자 위원회는 마티니에에서 마카나 축구협회(MFA)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카나는 1819년 식민 세력에 맞서 영국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가 그곳에 감금되었던 코사족 지도자 이름이다. 섬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카나는 전설 같은 존재였고, 그 이름은 새로운 축구협회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MFA를 이끌어가는 임원인 딕강 모세케네와 안드레스 나이두오는 훌륭한 축구 선수들과 함께 수개월의 작업 끝에 MFA의 정관을 작성했다. 정관에는 새로운 축구협회의 진정한 목표가 드러나 있었다. 핵심 내용은 MFA에 소속된 모든 선수, 임원들이 피파의 규정과 수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관은 또한 축구를 잘하는 선수들이 축구의 기본을 설명해 주는 대화, 강의, 비공식 경기 등을 준비하여 로벤섬에서 축구를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정관에는 규정과 수칙에 대한 긴 목록도 나열되어 있었다. 그 목록에는 항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대표 팀은 어떤 과정을 통해 선발되는지, 리그 경기와 토너먼트 경기는 어떻게 조직되는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수감자들은 자신들이 스포츠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체계를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그 체계는 공정, 공평했으며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 이상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아파르트헤이트를 완전히 뒤집은 체제였다.

총 9개 클럽이 MFA의 첫 시즌을 시작했는데, 각 클럽은 1부, 2부, 3부 등 세 개 리그에 한 팀씩 출전시켰다. 축구는 시작과 함께 대단한 성황을 거두었다. 많은 재소자들이 경기를 하기 위해 등록하고 서명했다. 9개 클럽은 각각 행정 업무를 맡을 위원회를 구성했고, 코치를 고용하고, 선수들을 추렸다. 모든 축구선수들에게 적절한 복장과 장비를 마련해 주기 위해 교도소 당국의 협조를 얻어냈다. 국제적십자사와 수감자의 가족도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수감자들은 교도소 건물 근처에 있는 거친 경기장을 푸르른 녹색의 운동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1969년 12월 MFA의 첫 번째 시즌이 시작되었다. MFA는 매주 토요일 세 개 리그에 걸쳐 여섯 경기를 치렀다. 가능한 한 많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경기 시간은 30분으로 제한하였다. 리그가 시작된 후 로벤섬에 위치한 회색빛의 잔인한 수용소는 축구에 대한 이야기로 활기가 넘쳤다. 1부 리그 경기는 매주 수백명의 재소자 관중을 동원했다. 그들은 어떤 관중보다도 더 열광적으로 응원했다. 사람들은 매주 월, 화, 수요일은 지난 토요일 경기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보냈고, 목, 금요일은 다가올 주말 경기를 예상하면서 보냈다. 마치 바깥 세상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축구가 자리를 잡다



축구는 인간적 차원에서 많은 간수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에게 덜 적대적이었던 교도관들은 축구선수들에게 더욱 관대해졌다. 심지어 은근히 특정 팀을 응원하기까지 했다. 토요일 오전마다 일부 교도관들은 감방을 돌아다니며 경기 일정을 확인했다. 많은 교도관들에게 교도소 업무는 그다지 즐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축구를 보는 것은 그들에게 오락을 제공했고,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수년에 걸쳐 재소자들의 협상력이 점점 더 늘어가면서 수감자와 간수 사이의 관계는 최악의 갈등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학대와 구타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간수들은 점점 더 수감자들의 활동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간수들은 대부분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감자들이 오랫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 학습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정치범들을 함께 학습을 하자고 그들을 부추겼다. 간수들은 어색함을 무릅쓰고 사람들 사이에 앉기 시작했다.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시험을 치르면서 투쟁의 대학의 영광스러운 학생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간수들이 수감자들을 인간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영리하고 참을성 있게 간수들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로벤섬에서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킬 기회를 잡았다.

마카나 축구협회가 자리를 잡아가던 1969년과 1971년 사이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스포츠계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로 큰 타격을 입었다.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은 남아공 출신 크리켓 선수 바질 디올리베이라와 관련이 있었다. 놀라운 재능에도 불구하고 유색인이어서 모국에서 경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던 그는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국 대표 자격을 얻었다. 1968년 영국이 남아공에 투어 경기를 하러 오게 되었는데 문제는 그가 선발될 경우 영국 팀의 남아공 입국이 불허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영국 크리켓 협회는 디올리베이라를 대표 명단에서 제외했고, 스포츠 팬들과 반아파르트헤이트 지지자들은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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