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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청춘

김열규 지음 | 비아북
그대, 청춘

김열규 지음

비아북 / 2010년 1월 / 257쪽 / 14,000원



시간 - 최선을 다하지 않는 자, 유죄!



젊음의 시간은 폭포다. 그래서 청춘은 질풍노도를 벗한다.

하나
청춘에겐 인생이란 시간은 무진장일 것이다. 젊은 시간은 오고, 오고, 가고, 가기를 끝도 없이 되풀이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젊은이들의 시간은 그 빛이 영롱하게 파르랄 것이다. 그 율동은 돌진하는 기관차처럼 역동에 넘쳐 있을 것이다. 파랗게 맥동脈動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공포에 떨거나 엄청난 놀라움을 경험할 바로 그 찰나 우리의 숨결이 멎는 것과 함께 시간이 멎는 것도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나 영의 시간, 제로Zero의 시간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움직임을, 역동을 그때그때 달리한다. 우리에겐 각자 자기 나름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통제하기도 하고 조절하기도 한다. 각자가 어느 정도는 시간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젊음의 시간은 폭포와 같다. 청춘의 시간은 급물살을 탄다. 젊은 시간은 쏜살같다. 청춘의 시간은 폭풍이 되어 불어닥치고, 회오리가 되어 몰아친다. 그래서 젊은 목숨은 질풍노도疾風怒濤를 벗한다. 그러므로 속전속결速戰速決은 젊은 인생의 병법 제1조나 다름없다. 빨리 싸움판을 벌여서 재빨리 결말을 내고는 승리의 깃발을 올려 세우는 것, 그게 젊음다운 동력이다. 머뭇댈 게 없고 우물댈 턱이 없다. 무엇이나 당장에 마음먹기 나름이고, 그 순간에 결심하기 나름이다. 젊은 동안,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시간이다. 한순간, 한순간! 한 찰나, 한 찰나! 그게 바로 젊음을 젊음답게 만드는 시간이다. 젊음에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은 영원과도 같은 것이다. 아니, 시간 그 자체와도 같은 것이다.

시간은 라틴말로 '크로노스Kronos'라고 하는데, 몇몇 이론가들이 제법 이론을 세워서 그것을 '카이로스Kairos'와 구별 짓기도 한다. 크로노스는 시계가 재어주는 바로 그 시간이라서 누구에게나 그 길이가 꼭 같다. 다시 말해 크로노스는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다르다. 우리 각자가 주체가 되어 겪고 치르는 데 따라서 상대적으로 달라지는 시간, 그것이 카이로스이다. 젊음의 카이로스, 그것은 한순간 한순간이 온통 생명력으로 넘쳐야 한다. 한순간, 한 찰나가 인생의 전부인 듯이 집요하게, 질기게 달라붙어야 한다. 그러면 젊음이 누리고 있는, 바로 당장의 순간이 영원이 될 것이다. 지금의 '순간'이 과거를 머금고 미래를 품어 안은 '온전한 전체의 시간'이 될 것이다.

인생은 소비가 아니다. 낭비는 더욱 아니다. 상품이나 돈은 낭비하고 탕진하면 또 구하고 사들이면 된다. 하지만 아차! 젊음의 시간을 한 번 낭비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인생은 소비가 아니라 건설이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젊은 인생은 건설의 또 건설이어야 한다. 온 인생의 밑그림이 젊은 손에 의해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틴에이저Teenager'란 말로 젊음을 나타낸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십대'가 될 테지만 그렇게 표현하고 말 단어는 아니다. 『영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이라는 책을 쓴 박우룡 교수에 따르면 '틴에이저'는 의젓한 내력을 갖추고 있는 말이다. 이 낱말은 1950년대에 비로소 시대적 언어 또는 사회적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그 당시 영국과 북아메리카를 흔들어댄 대중문화, 소비사회와 맞맺어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대목은 '대중문화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 당시 영국의 틴에이저'이다. 그러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이 바로 '대중문화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 틴에이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틴에이저'들은 대중문화에 의해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서 사태가 더 심각하다. '소비 인생'은 그보다 천만 배는 더 무서운 시간의 낭비, 목숨의 낭비, 삶의 낭비, 그것이다.

오늘의 갖가지 위기와 파란 속에서, 그리고 소비와 쾌락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넘어서자면, 온갖 장애와 훼방 속에서 구원을 받자면 누구나 어릿광대가 되어야 한다. 남부끄럽지 않고 스스로 꿀리지 않는 자기만의 최선을 당당히, 힘껏 살려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위기와 환난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되는 길이다. 우리 젊음을 위한 최선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자아 - 조나단은 '나만의 나'를 찾는 비상을 꿈꾸었다



자아는 새이다. 오로지 자기완성을 위해 비상하는!

하나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어진 지금 당장의 어느 상황 속에다 자신을 내맡기기만 한다면 그는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타락한 인간이 될 것이다."

장 자크 루소가 『에밀』에서 한 이 말은 얼핏 읽으면 평범한 것 같다. 하지만 조금만 새겨 읽으면 따가운 교훈이 메아리친다. 주어진 상황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피동적인, 그렇게 사는 소극적인 인간을 루소는 감연히 '타락한 인간'이라고 침 뱉고 있다.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하고, 죄를 짓고, 남에게 못되게 구는 것만이 타락은 아니라고 이 철인은 말한다. 그는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 길을 찾아서 자기답게 창조적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타락이라고 우기고 있다. 어리벙벙하게, 시들시들, 비실비실, 주책없이 살지 말라는 것이다.

판에 박은 듯한 삶, 거기에는 약동하는 생명력이 없다. 사람이라면서도 겨우 달구지 바퀴 굴러가는 꼴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뿐이다. 너무나 가엾다. 측은하다. 불쌍하다. 그러기에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그려진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결코 평범한 새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은 나는 행위를 지극히 간단하게 생각하며 그 이상의 것을 굳이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였다. 그러나 조나단은 나는 일 그 자체를 사랑했다. 다른 갈매기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조나단은 자기가 다른 갈매기들과 잘 어울릴 수 없는 것이 그것 때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별난 갈매기는 특별한 그만의 자유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 자신만의 독특한 자유의 개념을 빚어내기에 이른다. 그건 날개며 다리, 몸통 등 그의 육체가 마침내 정신이며 희망과 하나로 어울리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육체가 조나단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작동하고 움직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몸이 그의 뜻대로 날고 비상飛翔하는 것을 뜻한다. 조나단은 그 자유를 전력을 다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쳐서 실현하려 들었고 마침내 성공하고야 만다. 그래서 그는 고향 바다를 까마득히 떠나서 이상의 세계, 그의 '천국'에 가게 된다. 남들과 절대로 같을 수 없는 자아, '나만의 나'인 자아, 그것도 높디높은 자기다운 이상과 값지고 또 값진 자기다운 이념을 실천하는 주체로서의 자아 그것을 마음먹은 대로 추구하는 것, 그것은 조나단만의 자유일 수 없다. 그런 자아며 자유는 우리들의 청춘, 우리들 젊음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순결무구純潔無垢! 순수하고 결백해서 한 점 얼룩도 없는 마음, 그건 청춘의 몫이다. 그 마음에는 그늘이 지지 않는다. 그 마음까지 음지가 틔지 않는다. 그 속내는 환하고 밝다. 그들의 속마음의 밝고 올곧은 생각에, 기품 높고 정갈한 상념에 열정을 바치고 목숨을 바친다. 그 마음은 영롱한 옥이요, 구슬이다. 그래서 천진난만天眞爛漫하기도 한 것이 청춘이다.

이른 여름의 이른 저녁에 화사하게 피어난 장미꽃 한 송이! 그런 마음가짐이 천진난만이다. 세상의 잡된 인심에 흘리지 않고 푸른 하늘처럼 진솔한 것이 천진이다. 엉큼한 마음 구석 없이 화들짝 또 활짝 피어난 꽃만 같은 심정, 그것이 난만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정화인 휠덜린이 노래하고 찬양한 바로 그 장미가 품었을 마음씨, 그게 난만이다.

"장미의 밤, 장미의 밤 / 많고 많은, 맑고 밝은 장미의 밤이여!"



이렇게 천진난만하다 보면 속된 욕심과 절로 멀어지게 된다. 물욕이나 돈에 대한 욕심은 물론이고 알량한 권력이나 헛된 이름 따위에 대한 욕망과도 손을 끊게 된다. 오직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고, 다만 순수한 열정에 깃든 희망이며 욕구에 몸과 마음을 바치게 된다. 그것이 청춘의 순수함이다.

야망 - 하늘과 태양과 달 온 천지에 그대 이름을 써라!



야망은 불기둥이다. 그것은 청춘을 날아오르게 하는 연료이다.

하나
야망이 빠지면 젊음은 벌거숭이가 되고 만다. 야망, 그것 때문에 청춘은 익어간다. 야망은 청춘의 자양분이고 영양소이다. 그것으로 인해 젊음은 비로소 젊음다워진다.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는 온갖 것에, 별의별 곳에, 이 세상 거의 모든 곳에 그대의 이름을 적어대고 있다.

"아스라한 창공 위에 / 못에 비친 태양 위에

반짝이는 호수의 달 위에 / 그대 이름을 쓴다."



이렇게 하늘 위에, 지상의 온갖 것에 그대 이름을 쓰고 있다. 세상 만물, 온 우주 공간, 그 모든 곳에 그대 이름이 적혀 있다. 사랑에 한창 불타고 있는 젊음에게 이건 과장도 아니고 허풍도 아니다. 진실이고 현실이다. 그런데 젊음은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 야망을 노래한다. 사무치게 그리운 그대 이름의 빛나는 그 자리에 야망이라는 두 글자를 알알이 아로새긴다.

"한 손에 사랑, 다른 한 손에 야망 / 그래서 나아가는 길.

까마득히 드높은 앞날. / 그걸 청춘이라고 한다."



야망은 야심과 이웃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야野는 길들이지 않은 들짐승의 거친 성질을 의미한다. 그러던 것이 분수에 넘치고 가능성을 무시한 절박한 소망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라려야 바랄 수도 없는 소망, 예사로는 생각지도 못할 꿈같은 희망, 분수에 넘치고 능력을 벗어나는 바람을 '비망非望'이라고 하는데, 야망은 이 비망과 뜻을 같이 한다. 야망은 이룰 가망이 없어 보일 만큼 멀고도 높은 소망, 크고도 큰 꿈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야망은 냉혹한 마음이라야 한다"는 경구를 남겼다. 이 말이 야망의 커다란 날갯짓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달아오르고 타오르는 불길이기 마련인 게 야망이란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비로소 그게 냉혹해야 한다고, 냉담해야 한다고 말한 것뿐이다. 냉혹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써 오히려 야망의 뜨거움이 불길처럼 날아오르는 기세를 강조한 셈이다.

"창공을 가르는 날갯짓인 야망!

활활 타오르는 마음의 불기둥인 야망!

머나먼 저 너머를 내다보는 초월인 야망!"



이렇게 비상과 불길과 초월은 야망의 3대 속성이다. 젊음은 한 손에 사랑, 다른 한 손에 야망을 떠받들고 나아가는 행군이다. 누군가를 알뜰하게 사랑하기에 야망은 더욱더 소스라친다. 무엇인가에 야망을 걸기에 사랑은 한층 뜨거워진다. 그렇게 젊음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앞에서 보았듯이 야망이나 포부라는 말은 희망, 소망과는 무엇인가 좀 다른 기색을 갖추고 있다. 희망을 지니고 소망을 품되, 그것을 막중한 짐 대하듯이 하라고 포부란 낱말은 일러주고 있다. 희망이 곧 부담이고 부하負荷일 때, 그때 비로소 포부가 마련된다. 포부는 한자로 抱負라고 쓴다. '껴안을 포抱'와 '등에 짐을 질 부負' 그 둘이 합쳐져 포부가 되었다. 문자 그대로 품고 지고 하는 것이 포부이다. 그래서 포부에는 책무라는 또 다른 관념이 따라붙게 된다. 책임 있게 스스로 처리하고 해결하는 임무가 책무일진데, 그건 무겁고 힘겨운 것이다. 포부에 따르기 마련인 책무는 누가 요구하거나 시킨 것이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나서서, 알아서 도맡은 것이다.

"반드시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것만은 내가 스스로 치러내야 한다!"



거의 이런 외통수의 다짐이 책무이기에, 포부는 희망이되 무거운 희망이다. 희망을 짐 지듯이 지고 메야 비로소 포부가 된다. 이를 악물고 견뎌내야 한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면서까지 애써야 한다. 이를 갈며 양팔을 걷어붙이고 희망과 맞겨루는 것이 바로 포부이다.

집념이란 초지일관初志一貫하는 마음이다. 애초에 결심한 뜻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어떤 훼방과 장애가 있어도 그것들 탓에 초지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집념이다. 무섭게 지켜내는 의지의 힘, 그게 집념이다. 질기고 굳건하고 끈기 있는 마음의 다짐, 바로 그것이다. 고역인 포부는 그래서 집념이 되기도 한다. 포부는 집념을 타고는 희망을 향해서 돌진한다. 젊음은 바로 그 포부이다. 그래서 젊음은 집념으로 알이 여문다. 가을 날 과실의 과핵이 영글듯이!

고통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고통은 쓰디쓴 풀이다. 그것은 청춘의 보약이다

하나
젊음은 고통의 계절이다. 때로 사랑하기에 고통에 저리고, 때로 희망을 내다보기에 고통에 시달린다. 젊다는 것, 그것은 고통이 어느 연령층보다도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 그것은 젊음의 남다른 표정이다.

"삶의 갖가지 길. 그건 문득 뛰어올라가서는

우리들을 고통 많은 땅의 저 멀리로 끌어 올린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悲歌』에서 이처럼 노래하고 있다. 우리 각자의 인생행로 그 자체가 고통을 위한 길라잡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고통을 평생에 걸쳐서 시의 주제로 삼은 릴케의 생각이다. 릴케는 삶의 길이 우리를 고통에 들어서게 하되, 그냥이 아니고 고통이 덧쌓인 곳, 그 높은 곳에 끌어 올린다고 했다. 고통은 인생의 앞길이되, 드높은 곳을 지향하는 앞길이란 것이 릴케의 생각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이 말은 젊은 인생들에게 기성세대가 던져주는 격려의 말이다. 그런데 릴케는 굳이 "저 높은 곳, 고통을 향하여!"라고, 그가 아니면 쉽게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인생의 앞길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고통의 苦는 '쓸 고'이면서 '괴로울 고'이다. 그건 워낙 령岺과 같은 뜻의 글자였다. 령은 도꼬마리로 쓰디쓴 풀이다. 쑥이 그렇듯이 쓴 풀은 대개가 약이다. 그래서 감언甘言은 독이고, 고언苦言은 약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고통에서 한사코 내빼려고 한다. 고통을 저주하고는 쾌락의 함정에 빠지려 기를 쓴다. 고통에서의 탈주! 그건 가능하다고 해도 순간적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이 탈주하면 할수록 고통은 거꾸로 더한층 아프게 달라붙기 마련이다. 이것을 '고통의 역작용' 아니면'고통의 반작용'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고통은 인생의 필수품이다. 삶을 산다는 것은 고통과의 맞겨룸이다. 불제자나 기독교의 성인만이 고행하는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고행하는 것으로 삶을 지탱해 나간다. 그것이 인생의 철칙이다.

살면서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고통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오래도록 품어온 꿈이, 희망이 꺾일 때 고통스럽다. 좌절과 절망만큼 뼈저리게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좌절은 굽힘이다. 꺾임이다. 좌절挫折의 좌挫는 '꺾을 좌' 또는 '꺾일 좌'라고 읽는데, 절折도 나뭇가지를 꺾는다는 뜻인 '절지折枝'에서 그렇듯이 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삶을 사노라면 세월의 된바람, 시국의 거센 바람, 세태의 폭풍에 휘말려서 삶의 의지 또는 희망이 부러지게 마련이다. 아니, 남이나 바깥을 탓할 수만은 없다. 자신의 실수로, 오랫동안 품었던 뜻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이래저래 우리는 좌절을 겪기 마련이고, 삶의 필수 과정 같은 것이 좌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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