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웨인 다이어 지음 | 나무생각
서양이 동양에게 삶을 묻다
웨인 다이어 지음
나무생각 / 2010년 2월 / 565쪽 / 25,000원
신비로운 삶
말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이름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름 없는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욕심이 없으면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욕심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 신비로움은 모든 이해로 향한 문이다.
『도덕경』의 첫 번째 장에서 노자는 우리에게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한다. 도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역이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의 내면에 존재한다. 서구적인 사고로 볼 때 이 말은 명백히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생각은 음양사상이나 여성성과 남성성, 그리고 사물의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묘사하는 동양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이런 반대되는 개념들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보고자 할 때 우리는 형태를 가진 외부 세계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노자는 그 신비로움을 보려고 애쓰지 않아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서양인인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도의 신비로움을 알거나 보고자 한다면 다양한 징후를 통해 그 흔적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이 도 자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 신비로운 도는 '원함이 없는 땅'으로부터 만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마치 '원함'이 '내버려둠'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원한다는 것은 잘 받아들이기 위해 내면의 세계를 준비하는 셈이다. '원함'이 흔적을 본 사람들의 것이라면, '내버려둠'은 신비로움 그 자체를 본 사람들의 것이다.
노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이런 모순의 사례가 얼마든지 있음을 알게 된다. 달콤한 토마토와 수선화를 가꾸면서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전부다. 이번에는 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자. 예를 들면, 잠에 드는 것과 잠자기를 원하는 것,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기를 원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살펴보라. '원하지 않음의 땅'에서 우리가 하는 것은 믿고, 허락하고, 결국은 내버려두는 것뿐이다. '원함'은 '원하지 않음'의 시작이고 토양이며, 또한 '내버려둠'의 처음이자 근본이다. 그것들은 같기도 하고 또한 다르기도 하다.
원하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 사이의 어디쯤에 자신이 서 있는지 느껴라. 피아노를 잘 치려고 연습하고, 자동차를 운전하려고 노력하거나 또는 자전거를 타려고 애쓰는 것은 실제로 피아노를 치고, 자동차를 몰고,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하다. 일단 어떠한 활동을 원하고 배우게 되면, 일부러 애쓰지 않고 내버려두는 시기가 찾아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이 노력함과 내버려둠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서야 비로소 힘들이지 않는 후자의 느낌을 알게 된다. 이런 연습은 보이지 않는 신비로움과 보이는 만물에 대한 위대한 깨달음으로 인도될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만물은, 범주가 나뉘고 분류되고 과학적으로 규정된 지구상의 모든 물체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달하고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전문 기술과 최첨단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눈이나 위장과 같은 신체 기관은 물론이고 쌀이나 밀과 같은 곡식 한 알조차도 창조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규정된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도의 신비로움 속에서 나온다. 우리 또한 피부와 뼈 그리고 체액이 전부가 아니라, 말하는 혀와 듣는 귀 그리고 분명한 것과 신비로운 것을 보고 경험하는, 눈에 보이지 않게 생기를 불어넣는 영원한 도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이 이름 없는 신비로움을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도를 터득하는 궁극적인 방법이다.
내버려둔다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해 보자. 강도를 만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순간에도 그 신비로움을 믿어야 한다는 뜻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말라는 걸까? 이것 역시 아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내버려둠'은 항상 신비로움 속에 머물며, 아무런 방해 없이 당신을 통해 그 신비로움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한다. 신비로움이 펼쳐지도록 내버려둠과 동시에 형태 안에 머무는 모순을 허락하는 것이다. 도를 행하라. 신비로움 속에 사는 자신만의 길을 찾아라. "신비로움은 모든 이해로 향하는 문이다."
신비로움을 즐겨라. 항상 모든 것을 애써 해결하려 들지 말고 세상이 그냥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라. 모든 것은 신이 주신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라. 당신의 친구와 자녀, 부모님, 상사 또는 다른 누구라도 너무 깊이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도는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신을 매순간 인식하라. 예리한 관찰자가 되라. 비판은 적게 하고 많이 들어라. 신비로움의 매력과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불확실성에 대해 마음을 활짝 여는 시간을 가져라. 우리는 우리가 규정하고 분류하고 외우는 것이 아닌, 보고 느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 지금, 도를 행하라
오늘 하루 중 당신이 다른 사람이나 상황과 관련해서 겪고 있는 힘겹고 화나는 일에 주목하라. 원함과 내버려둠의 사이에서 당신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를 통해 도를 행하겠다고 결심하라. 그 성가신 일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동시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모순을 허락하라. 아무런 편견 없이 마음을 열고, 당신 안에 있는 그 신비로움과 친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확장하라. 규정하고, 설명하고, 방어하지 마라. 그것은 혼자서 알아내야 하는 미묘한 느낌일 것이다. 신비로운 삶을 경험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다.
모순된 조화를 따르는 삶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아는 것은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만들어낸다.
어려움은 쉬움 속에서 태어난다.
긴 것은 짧은 것으로 인해 정해지고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 인해 결정된다.
앞과 뒤는 서로 함께한다.
그래서 성인은 드러나는 이원성과 모순된 조화에 마음을 열고 산다.
성인은 노력하지 않음으로 행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
기르되 소유하지 않고
일하되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겨루지만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은 끝나면 잊힌다.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유이다.
『도덕경』의 2장은 모순된 조화에 대해 탐구해 보는 장이다. 서로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결국 반대라는 개념은 세상에서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수선화는 데이지가 더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수리나 쥐는 우리가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다. 나무나 꽃 그리고 동물들은 추함이나 아름다움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영원한 도의 조화 속에서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성인은 이원성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어떤 견해를 만들지 않고 그 근원을 폭넓게 다룬다. 비판하지 않고 완전한 하나됨 속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노자가 안내하는 삶의 길이다. 눈에 보이는 이원성을 그대로 수용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도의 완성인 것이다. 삶과 죽음은 결국 같은 것이다. 선과 악은 한 곳에서 나온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면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일단 이분법과 반대적인 것을 넘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들은 마치 썰물과 밀물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흐른다.
하나 된 삶을 살라.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도, 반드시 유용한 것도 아니다.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깃들인 도를 보고, 그렇게 관찰한 것들과 화해하라. 반드시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혹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 착한 짐승이 되어 자유롭게 움직여라. 예를 들면, 한 마리의 수달이 되어서 '수달다운' 삶을 사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아름답거나 못생기지도 않았으며,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은, 그저 한 마리의 수달일 뿐이다. 어떤 것도 판단하지 않고 그
저 자유롭게, 평화롭게 그리고 재미있게 물속을 헤엄치고 뭍에 오르는 한 마리의 수달이다. 육체를 벗어나야 할 순간이 오면 하나됨의 순수한 신비 속으로 당신만의 공간을 찾아 떠나라.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일은 끝나면 잊힌다.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유이다"라는 말을 통해 뜻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서, 꼭 죽어야만 영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서 육체를 지니고도 얼마든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숨어있던 이원성과 판단의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들을 그저 완전한 통합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두라. 도를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어낼 때조차도 항상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전체의 한 조각일 뿐이다. 나머지 조각은 바로 '노력하지 않음'이다. 이제부터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녹여서 버무려라. 이것이 바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노력하지 않는 행함'이다. 이것은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동작을 취하고, 위치를 생각하며, 음악을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풀어주는 것이며, 상대를 따라 쉽게 움직이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는 것이다. 서로 반대라고 말하는 것들을 비판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조화롭게 하나로 묶어 춤을 추라. 당신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은 채 경쟁할 수 있다. 상반되는 개념을 없애면 모순적이게도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고 결국 더 이상 한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규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 지금 도를 행하라
오늘, 자신을 변명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러지 않는 쪽을 택하는 것으로 도를 행하라. 그 속에서 마음가짐을 바꾸고 그 기회를 온몸으로 느끼며 오해의 본질을 깨달으라. 설명하고 변명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쉽게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지금 그대로의 상황과 어우러져서 그저 존재하라. 옳고 그름이라는 이원성에 빠져들지 마라. 모순된 통합, 즉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는 하나됨 속에 머물기로 결정한 자신의 선택을 축하하라. 현명함을 기꺼이 실천하는 당신의 마음과 그럴 수 있도록 해준 그 기회에 대해서도 감사하라.
외형 너머의 삶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 세 가지는 나누어 정의할 수 없는데,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로서 존재한다.
위라고 해서 더 밝지 않고 아래라고 해서 더 어둡지 않다.
그것은 계속 이어지고, 이름 지을 수 없으며
결국 없음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맞이하면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면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만물이 항상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알면
도와 조화를 이룬 삶을 살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으며 결코 변하지도 않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보라. 이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원'이라는 것이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영원의 본질은 당신과 주변의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지만 움켜쥐려고 하면 언제나 교묘히 빠져나간다. 이 원칙은 모든 존재들을 지배해 왔으며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또한 모든 존재들은 결국 이 원칙이 전개된 결과이다.
노자는 하나됨을 경험하기 위해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무형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눈이 아닌 것으로 보고, 귀가 아닌 것으로 듣고, 만지지 않고 잡으라고 한다. 형태가 없는 이러한 영역들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도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형태 안(in-form)에 갇혀서 살면 정보(in-form-ation)를 쌓는 데 집중하게 된다. 노자는 정보가 아니라 영감 속에 자신을 빠뜨리라고 말한다. 이전부터 항상 존재해 온 그 창조적 자극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지혜로운 결론을 내린다. "만물이 항상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알면 도와 조화를 이룬 삶을 살 수 있다.
노자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고 말한 것과 같은 세상을 상상해 보라. 항상 존재해 온,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근원은 당신에게 평화와 조화로움을 선사한다. 그러므로 이 무한한 하나됨을 인식하고 그것을 깨달음 안에 담아두라. 모든 일들에 '왜'라는 질문을 멈출 때 비로소 '도는 그저 도'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이 껍데기뿐인 세상의 모습에 연연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무한한 본성을 끌어안을 수 있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삶이 끝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성을 사랑할 수 있다. 이 영원성이 펼쳐진 결과가 바로 당신과 당신의 육체 그리고 모든 생명인 것이다.
모든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 영원한 원칙을 끊임없이 자각하라.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신을 느낌으로써 당신은 좀더 신과 닮아갈 것이고, 그 연결고리를 녹슬지 않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균형을 가져다주고 에고가 사라진 진정한 본성과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 무엇을 보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라. 내 눈을 통해 보는 것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 봄이 오면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꽁꽁 얼어붙었던 나뭇가지에서 꽃망울을 피워내는 불가사의한 힘에 대해 생각해 보라. 저 모기와 같은 작은 생명의 창조 뒤에, 그리고 모든 생각의 너머에 있는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그리고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들리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은 질문을 하라. 그러한 소리들은 조용한 세상에서 나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지막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듣는 힘을 키워라.
이 영원한 원칙을 받아들일 때 경외와 감사가 자라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다는 점이다. 당신의 마음은 덧없는 세상을 따라가던 길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고, 당신은 만물 안에서 영원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 노자는 도 안에서 당신의 삶이 변화할 거라고 말한다.
* 지금, 도를 행하라
나무 한 그루, 저 하늘에 빛나는 별, 산, 구름 또는 자연 속의 다른 무언가를 볼 때마다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들을 기록해 보자. 그렇게 존재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원칙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육체에도 똑같이 적용해 보라. 당신의 폐를 늘어나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고, 손톱을 자라게 하는 바로 그 원칙이다. 오늘 하루, 이 원칙 속에서 10분만 살아보라. 그리고 당신 존재의 근원과 연결된 느낌이 어떤 것인지 기록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