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군사학
장지리, 야오샤오화 지음 | 예문
발칙한 군사학
장지리, 야오샤오화 지음
예문 / 2009년 12월 / 229쪽 / 12,000원
PART 01 군대ㆍ군사
사막의 여우, 롬멜의 전술많은 군사자료를 살펴보면, 독일 사령관 롬멜은 탁월한 전술가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쓴 『보병 공격』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나라 군대의 필독서였다.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영국군을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유명세를 탔다. 대담무쌍한 기습공격을 감행한 그는 아군과 적군 모두로부터 '사막의 여우'로 불렸으며 굉장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가 결코 뛰어난 전략가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롬멜은 튀니스에서 몽고메리에게 타격을 입었다. 그렇다면 롬멜을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뛰어났던 육군 장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군사평론가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육군 장군을 선발한 적이 있다. 그들은 롬멜, 구데리안, 주코프, 패튼, 폰 만슈타인의 순으로 선택했다. 규모와 전체 국면의 중요성으로 봤을 때 북아프리카 전투는 동부전선의 독일과 러시아전쟁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롬멜의 우수성이 격하되었고 영향 면에서도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에게 밀렸다. 호사가들은 이렇게 비유했다. 즉, 세계적인 축구선수라면 마땅히 유에파 컵과 월드컵에서 우승한 팀에 가서 뛰어야 한다. 작은 팀에서 아무리 이름을 날리더라도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이런 논리에 의해 2차 세계대전 중 누가 최고의 육군 장군이었는가를 따진다면 결론은 주코프밖에 없다. 광고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핵심적인 곳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의 또 다른 근거는 롬멜이 비록 원수였지만 군단 급이 아닌 사단 급만 지휘했기 때문에 격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운수와 공급이 곤란하여 북아프리카는 전략적으로는 매우 중요했으나 독일의 주요 전장이 아니었다. 따라서 롬멜을 폰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거대한 군사를 이끌고 대규모 전쟁을 치뤘던 장군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전술에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전략상으로는 다소 떨어지고 전공에 있어서도 다른 장군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장군을 꼽으라면 주코프나 패튼을 들게 된다. 주코프는 번번이 힘든 전투에 배치되어 소방대장이란 별명이 붙었고, 패튼은 치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다. 롬멜의 능력도 뛰어났지만 인기에 있어서는 동부 전선의 만슈타인보다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롬멜은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몽고메리에게 튀니스를 내줌으로써 큰 비난을 받았다. 이제 롬멜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은 그 전투를 살펴보자.
1941년 2월 12일, 롬멜은 히틀러로부터 북아프리카에서 곤경에 처한 이탈리아 군대를 도우라는 지시를 받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로 날아갔다. 그는 줄곧 이같이 독립적인 전장을 갈망해왔다. 전장의 리더로서 북아프리카는 작전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탁 트인 사막은 장애물이 없는 천연 방어선이었다. 그리고 정치적 음모나 유격대, 저항 조직, 난민 등의 여러 문제도 없었다. 모든 군수 물자는 외부에서 운반되어 왔다. 지휘관은 움직이는 전장에서 자신만의 전투를 계획할 수 있었다.
롬멜은 제공권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도의 기동성을 가진 탱크를 이용해 적은 병력으로 기습작전을 벌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 기동전술을 이용하여 바라니카 지역을 점령한 전투가 가장 유명했다. 이어 토브룩 요새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영국군의 반격을 물리쳤다. 1942년 5월, 롬멜은 비르하케임 전투에서 탱크를 앞세워 영국군을 이집트 국경 쪽으로 몰아냄으로써 귀중한 승리를 얻었다. 이처럼 롬멜은 탁월한 전과를 세워 2계급 특진되었으며, 독일에서 가장 젊은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롬멜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사사건건 롬멜의 작전을 저지하는 군 수뇌부와 '제한적인 공격'만 내세우는 히틀러였다. 나치의 수뇌부들은 근본적으로 구석에 있는 북아프리카 전장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히틀러가 후에 롬멜의 찬란한 전공을 격려하고 크게 지원할 것을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그 잘난 월급뿐이었다. 그는 탱크와 장갑차, 식량과 연료, 제공권을 충분히 지원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장에서의 손실을 보완할 수 없었다. '초인'의 의지는 갈수록 꺾여갔다.
한편 1942년 8월, 몽고메리는 카이로에 오면서 미국의 최신예 탱크인 중형 '샤만'과 폭격기 및 대구경 유탄 발사기 등을 갖고 왔다. 처칠을 대표로 영국은 몽고메리를 적극 지원했다. 처칠은 몽고메리를 위해 미국의 원조까지 얻어냈다. 반면에 롬멜은 이탈리아 군대의 나약함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내기 일쑤였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이 헤비급과 핀급 선수 간의 권투 시합으로서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라고 농담했다.
이처럼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롬멜은 1942년 8월 31일, 알람 엘 할파 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번번이 저지당했다. 탱크에 하루치 연료밖에 남지 않게 되자 롬멜은 할 수 없이 철수 명령을 내렸다. 롬멜은 북아프리카 군단을 인솔하여 3,200km에 달하는 길을 계속되는 몽고메리의 추격을 기적적으로 뿌리치고 마침내 튀니스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었다. 이듬해 5월 13일, 온몸에 병이 든 롬멜이 독일로 돌아가 두 달간 요양을 했다. 그 사이 독일의 북아프리카군단은 튀니스에서 연합군에게 전멸했다. 북아프리카 사막에서의 패배는 롬멜의 의지와 자신감을 꺾어놓았다.
1943년 말, 히틀러가 다시 서부전선 B집단군 사령관에 임명했을 때 롬멜은 이미 '비관주의자'로 변해 있었다. 무섭게 돌진하던 초인의 의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서양요새'로 불린 프랑스 해안 방어공사를 담당하고 있을 때 롬멜은 허위 정보를 오판하여 아이젠하워에게 속아 넘어갔다. 1944년 6월 6일 새벽, 연합군 함대가 노르망디에 상륙했을 때 롬멜은 아내의 생일 준비를 하고 있다가 소식을 접하고 너무 놀라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44년 10월 14일, 롬멜은 히틀러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 롬멜에게는 반역죄로 군사법정의 재판을 받고 피아노 줄에 매달려 죽든가, 자신의 비밀을 숨기고 음독자살하여 국장으로 체면을 세우든가 하는 2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 롬멜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롬멜의 군사적 장단점에 대해 영국의 원수 카포는 자신이 주편한 『현대세계 명장군』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롬멜이 전장에서 거둔 성공의 대부분은 전략이 아닌 전술에 의한 것이었다. 그가 독일의 군사 전략에 끼친 공헌은 그다지 크지 않다. 독일군 역사에서 이름을 떨친 위대한 장군들은 프로이센과 독일의 주요 전략을 이끈 핵심세력이었다. 롬멜도 같은 반열에 올랐지만 그의 성취는 오로지 전술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다른 위대한 인물들과 비교할 때 롬멜은 중심에 서지 못한다." 한편, 영국 군사이론가인 B.H. 리더하트는 롬멜의 작전문서를 『롬멜문서』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그 가운데 '사막 전쟁법칙' 등의 문서는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PART 02 전쟁ㆍ죽음
체 게바라는 왜 쿠바를 떠났는가 체 게바라는 현대 남아메리카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였다. 지금의 체 게바라란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은 코스타리카의 수도 산 호세의 한 찻집에서 알게 된 쿠바인들이었다고 한다. 'e'모음에 강세를 둔 '체'란 음절은 원래 아르헨티나에서 말을 시작할 때나 강조할 때 쓰는 일종의 감탄사였다. 실제로 에르네스토도 말미에 '체'라는 말을 자주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체 게바라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그는 1960년대에 볼리비아 유대를 이끌고 정부군에 치열하게 대항했다. 이때 그의 이름이 남미 대륙과 전세계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본명보다 더 유명해졌다. 게바라의 일생은 격정과 불굴의 연속이었다. 시종 신비감이 넘치고 비범한 생애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1959년에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게바라는 쿠바인의 영웅이 되었고, 쿠바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새로운 쿠바의 건설에 앞장섰다. 이후 쿠바 토지 개혁위원회 공업부 주임과 국립은행장 및 공업부장관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쿠바 정부를 대표하여 여러 차례 세계 각국을 방문하며 각종 국제회의에 참가했다.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 미국의 외교정책을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세계 개발도상국가들로부터 많은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1965년 4월, 게바라가 갑자기 쿠바 정계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의 실종에 대해 이견이 분분했다. 도대체 게바라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죽은 것일까, 아니면 잠적하여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 또는 카스트로와 갈등을 빚어 감옥에 갇히거나 비밀 장소에 연금된 것일까? 몇 달 뒤에 사실이 밝혀졌다. 게바라는 아프리카 콩고와 자이레 국경 부근의 밀림에서 내전에 참전하고 있던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와 무장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이유로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쿠바를 떠나 위험한 무장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학자들은 그의 아프리카 행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를 하면서 다양한 견해를 내놓았다.
체 게바라는 쿠바의 경제 건설과 사상 개조에 대해 다른 지도자들과 심각한 차이를 보였다. 일부 지도자들은 지나친 집중을 피하고 국영기업에게도 일정한 자주권을 주며 노동자에게 물질적 이익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체 게바라는 엄격한 중앙집권 노선을 강력히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도덕적 역량으로 물질의 유혹을 이기고 사회주의 신인류를 구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카스트로는 시종 이런 논쟁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부득이하게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을 때 정신적인 고양과 물질적 자극을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떠난 뒤, 카스트로는 사탕수수노동자대회에 참석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탕수수를 채취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는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그것이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유심주의적이다." 일부 학자들은 생각이 많이 달랐던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점차 고립되어가고 있음을 깨닫고 떠나기로 결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체 게바라는 쿠바 정부에서 공업부 장관을 맡았으나 그가 주도한 공업 개혁은 실패했다. 당시 32살이었던 그가 세운 일련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쿠바의 공업은 그로부터 독립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또한 인근의 미국이 봉쇄조치를 취하자 원자재와 에너지가 극도로 부족했다. 아울러 체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은 관리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물질적 자극을 주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쿠바의 공업은 발전하지 못하고 시종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체 게바라는 분노와 실망감에 젖어 들었다.
게바라는 종전의 이상을 더욱 공고히 하여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가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임종에 앞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저는 무장투쟁만이 각 민족이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모험가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유형의 모험가입니다.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모험가입니다. 아마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런 결말을 볼 수는 없지만 대세는 피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여기서 당신을 마지막으로 안아드릴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그의 주장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혹자는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기 전에 카스트로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 때문에 언쟁을 했는지, 이 사건이 게바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지금까지 건재한 카스트로는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로 갔다. 그러나 언어 및 기타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1966년 가을, 다시 남미로 돌아와 볼리비아 동남부에 있는 산타크루스 지역에서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신출귀몰했다. 1967년 10월 8일, 그가 이끄는 게릴라 부대는 볼리비아 육군에서 특별히 파견한 정부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그는 부상을 입고 사로잡힌 뒤 총살당했다. 39세의 게바라는 죽음에 앞서 어머니에게 눈물의 편지를 남겼다.
총살된 뒤에도 게바라의 시신은 행방이 묘연했다. 1995년에 와서야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의 고고학자와 인류학자 및 프랑스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발굴팀을 구성하여 지정된 장소에 150여 곳을 파보았지만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2년 뒤에 마침내 황량한 초원에서 영웅의 유골을 찾아낼 수 있었다.
PART 03 스파이ㆍ기밀
마타 하리의 비극적 인생 오랜 기간 동안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파이로 여겨져 온 마타 하리. 그녀는 누구인가? 마타 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활약했던 유명한 여자 스파이로서 1917년 파리에서 처형됨으로써 42년간의 간첩 활동을 마감했다. 그녀의 이름은 아름다운 외모로 남자들을 유혹하여 군사 기밀을 캐내는 여간첩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그녀에 관한 소문은 음모와 섹스로 가득 차 있다. 마타 하리의 고향인 네덜란드 북부의 레바르덴에서는 얼마 전 그녀를 위해 박물관을 지으려다가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레바르덴 주민들이 나체 무용수이자 스파이였던 그녀를 치욕으로 느끼고 그녀를 위한 박물관 건립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타 하리 기금위원회 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주민들을 설득했다. 기금위원회의 한 인사는 어찌되었든 마타 하리가 역사적 인물로서 당시 제도권에 도전한 여권주의자이자 독립적 여성이었다고 평가했다. 기금위원회의 박물관 건립은 레바르덴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상상치 못했던 관광객들이 몰려와 막대한 수입을 얻게 되었다. 레바르덴의 작은 거리 끝에 자리 잡은 마타 하리 박물관은 마타 하리의 연애편지, 화려한 무대 의상, 빛나는 보석과 장신구, 다양한 모습의 나체 사진, 체포 뒤에 남긴 자술서 등 많은 진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타 하리가 정말 천성적으로 음탕하고 기만술에 능했을까? 그녀의 비극적 인생은 많은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1903년, 무용수인 마타 하리가 파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인도의 힌두교 의식 때 행해지던 춤을 보다 관능적이고 외설적으로 바꾸어 오락 천국이던 유럽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동양 춤을 추는 무용수에 대한 각종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녀가 인도 남부 마라바르에서 살아 있는 부처와 사찰의 무녀 사이에서 태어났고, 출생 뒤 어머니가 죽자 몇몇 사제들 손에서 컸으며,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제사에 쓰이는 춤을 배웠다는 등 여러 소문이 이어졌다. '마타 하리'는 '태양'을 뜻하는 말레이어이다. 그녀는 동양적 색채가 농후하고 춤 또한 관능적이고 외설적이어서 파리에서 금세 유명해졌다. 아울러 남자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여 빠르게 파리 사교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용모와 영리한 머리로 인해 많은 남자들이 그녀의 치마폭에서 놀아났다.
사실 마타 하리는 살아 있는 부처와 사찰 무용수 사이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마르가레타 G. 제레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 북부의 레바르덴에서 태어났다. 레바르덴은 소를 키우고 치즈를 만드는 등 소박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모자 상점의 주인이었다. 그녀는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교계의 꽃으로 성장하기 전 15살 때까지 레바르덴에서 낭만적인 유년시절을 보냈다. 15살에 기숙형 사범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빼어난 미모 때문에 어디서나 눈에 띄었고, 교장에게 성 폭행을 당한 뒤에는 다른 교사들의 장난감이 되고 말았다. 마르가레타는 치욕적인 생활을 견딜 수 없어 곤경에서 벗어나겠다는 심정으로 네덜란드 황실의 동인도 군대 소속 루돌프 리오트 대위와 결혼했다. 하지만 리오트 대위가 술과 도박, 여자에 빠진 난봉꾼이란 사실을 모른 채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1902년 8월, 그녀는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하면서 8년간의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마감했고 그 이듬해 혼자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 정착하면서 마타 하리는 모험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