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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김병종 지음 | 문학동네
오늘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김병종 지음

문학동네 / 2009년 12월 / 231쪽 / 13,500원



1장 당신이 그리신 아름다운 세상



가난마저 화사하게 빛나게 하던 그 물빛




물의 여행을 했다. 지나고 보니 많은 여행이 물의 여행이었다. 이상스럽게도 풍경은 지워져도 물은 그 빛과 색이 망막의 잔상으로 남아 오래도록 반짝이곤 했다. 그중에서도 청록색 보석가루를 뿌린 듯한 카리브 해의 기억은 아직도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 물은 유연하고 부드럽다. 무엇보다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는 정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갈증을 축이고 생명을 자라게 한다.

창조의 경이 중에서도 물은 으뜸이다. 생명의 원소인 물은 바람과 공기와 섞이며 빛을 발한다. 하늘과 맞닿아 녹아내리며 청록의 빛을 발하는 카리브 해는,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신까지 씻기는 느낌이 든다. 마른 등을 보이며 그 바다에 풍덩 뛰어드는 아이들. 그리고 석양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 그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물빛은 가난과 남루마저도 푸새한 옥양목처럼 화사하게 빛나 보이게 한다.

쿠바나 멕시코에서 자주 보게 되는 풍경 중의 하나는 낡은 아파트들과 그 베란다에 널어놓은 형형색색의 빨래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가난한 살림의 나부끼는 빨래들마저도 카리브 해의 물빛을 배경으로 하면 점점이 박힌 꽃들처럼 화사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페인트가 벗겨져나간 낡은 아파트들도 바다색과 섞이는 석양빛을 받아 파스텔 톤으로 물들어 마냥 아름답게만 보인다. 가난한 삶에 맑은 햇빛과 고운 물빛은 축복이다. 물빛이 고우면 마음도 그러할 것 같고 물이 풍성하면 인정도 넉넉할 것만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란다. 내 어릴 적 그 넘치는 강이며 계곡의 물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봄이면 사처에서 들려오던 눈 녹아 흐르는 그 정겹던 물소리는 어디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메말라가는 도시사막 속에 사는 조갈증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물의 여행을 꿈꾼다.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 무릎 꿇다



내가 아는 과학자 한 사람은 유학 가서 강력한 크리스천이 되어 왔다. 독실하다는 표현 정도로는 부족할 만큼 확신에 찬 기독교인이 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그의 신앙은 좀 특이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의 신앙은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나 전도를 통해서, 아니면 불치병이 낫는 것과 같은 기적적 신유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실험과 탐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유학을 가서 그는 참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학위 취득 후 유수의 연구기관에 직장을 얻게 되었다. 밤낮으로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의 연구 분야인 생명의 최소 단위를 추적해 들어가다가 그만 손을 들었다 한다. 생명 현상에 대해 누군가가 처음부터 아주 정교하게, 그리고 계획적으로 고안하고 관장했다는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치며 부르르 전율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가 있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 누군가를 그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귀국한 후에도 실험실 생활을 계속했는데 연구가 깊어질수록 그분의 창조사역 근처로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고백했다.

성실한 실험과 연구로 마침내 깊은 신앙에 도달한 그 과학자와는 다르지만, 나 역시 카리브 해의 고요한 바다 앞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평소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예배자인 나도 그 신비한 바다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풀어 누군가가 일시에 열두 가지 느낌으로 빚어놓은 듯한 청옥색 바다 앞에서 나도 성서의 인물들처럼 다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하고 속으로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 신비한 색깔의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해지는 그 느낌은 화가입네 하고 돌아다녀본 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으리라. 어느 해의 그 황홀한 물빛을 대면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던 "주님, 당신이십니까?" 하는 물음이 내 못난 화폭 위에 펼쳐지는 순간만은 예배드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창조주의 그 신비한 색채와 형태 들을 옮길 때면 내 친구 과학자처럼 나 역시 간혹 그분의 창조사역 언저리로 들어서는 느낌 같은 것을 받는 때가 있는 것이다. 어느 이지적인 과학자가 차가운 이성적 질문과 성실한 실험의 결과로 발견한 그분의 세계를 나는 색채로 접근하는 것이다. 커튼을 걷고 바라보듯 잠깐 본 카리브 해의 물빛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다. 아우가 보다 성실한 예배자이길 바라며 학생시절 이후 변함없이 만년필을 꾹꾹 눌러 노심초사 편지를 보내오는 나의 가형께 오늘은 이런 답장을 드려보고 싶다.

"색채는 나만의 기도이고 붓질 또한 나만의 찬송입니다."



2장 내가 그린 당신의 얼굴



예수께서 이곳에 다시 오신다면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가복음 15장 33-34절).

사랑에는 아픔이 있다. 눈물이 있다. 달콤함과 짜릿함보다 아픔과 눈물이 먼저다. 아픔과 눈물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랑의 깊이도 더해진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 크고 깊은 사랑이다. 온 인류를 껴안고도 남을 만큼 크고 깊은 사랑이다. 그런 면에서 그이는 사랑의 야심가였다. 나사렛의 목수는 사랑의 목수이기도 했다. 그가 지닌 사랑은 레바논의 백양목보다도 단단했다.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강렬하고 위험한 사랑이다. 그래서 그 아픔과 눈물 또한 크고 깊었다. 그 사랑의 중량 때문에 천공에 피투성이로 양팔을 벌리고 죽음의 절대 고독과 마주해야만 했다.

<바보 예수>, 이 작품은 80년대의 산물이다. 사랑과 아픔의 노래이다. 돌멩이와 최루탄이 난무하는 대학가의 적대공간 속에서 태어난 그림이다. 석양에 물든 캠퍼스를 내려오던 어느 날 최루연기 가득한 허공에 불현듯 솟아오른 그림이 바로 이 작품 <바보 예수>였다. 번쩍! 하고 떠오른 그 예수의 얼굴에 붙잡혀 나는 그 후 십여 년 세월을 그리고 또 그렸다. 산발한 혹은 피투성이가 된 그이의 얼굴을. 외롭고 때로 쓸쓸한 그이의 얼굴을.

이천 년 전 바람 불던 유대 광야를 휘적휘적 걸어갔던 예수께서 이곳에 다시 오신다면, 그리하여 묵묵히 땅에 다시 쓰신다면 뭐라 쓰실까 하는 생각과 함께 떠오른 그림이다. 나는 그때 사랑, 용서, 희생 같은 언어, 저 바보 같은 단어들을 들고 선 그이를 생각했다.

하지만 신의 아들이자 그 자신 신이었던 그분을 '바보'라고 칭하면서 적지 않은 시비도 뒤따르게 되었다. 내 나름대로는 어린아이가 "울 엄마 바보야" 하고 울먹이는 것과 같은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담은 반어적 표현이었지만 말이다. 큰 사랑 때문에 스스로 고통의 불길 속으로 걸어갔던 그분. '바보 정신'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알려주신 분. 오늘, 사랑 없는 이 도시의 사막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나도 '바보 예수'의 그 위대한 사랑의 불길 속에 활활 타오르고 싶다.

3장 당신과 함께이기에 나 평강 누리리라



그날 그분이 내 고통의 침상으로 다가오셨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누가복음 23장 29~30절).

1989년 11월 23일 새벽. 나는 신림동 비좁은 작업실 옆 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서울대병원으로 실려 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연탄은 서민들의 겨울을 데우는 가장 중요한 연료였다. 연탄가스로 사망한 사람들의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그 일이 나의 현실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 새벽 이후 연거푸 험한 수술이 이어졌다. 전신마취를 하지 않고 국소마취만으로 큰 수술을 받았기에 곧 마취가 풀리면서 나는 칼날이 살갗을 찢는 고통을 맛봐야 했다. 끔찍한 고통으로 눈물 흘리던 그날 밤 그분의 얼굴이 내 침상 가까이에서 일렁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검게 탄 피범벅 된 얼굴이었다.

그때 생살을 찢기며 쾅쾅 양손과 양발에 못질을 당하던 골고다의 그이를 생각했다. 비로소 그분의 고통이 가슴을 덮쳐왔다. 그리고 그분의 피 묻은 옷자락 한 끝에 내가 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얼핏 나는 그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본 것도 같았다. 그분이 나와 가장 가까이 계시던 순간이었다.

불빛에 잠깐 일렁이다 사라진 그분의 옆얼굴. 그날 이후 그분의 옆얼굴을 그렸다. 그려도 그려도 채워지지 않는 그 옆모습. 안타깝게 금방 사라져버린, 그러나 판화처럼 선명하게 내 마음에 찍힌 그 옆모습. 수많은 말을 하지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말이 된 그 옆모습을.

죄의 밤을 깨우며 닭이 울었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마가복음 14장 72절).

성경 속의 닭 우는 사건. 이 지점에 이르러 나는 참담함을 느끼면서도 위로를 받는다. 부끄러우면서 안도한다. 베드로에게 닭 우는 사건은 많아야 세 번이었다. 그러나 내 생에 닭은 수천 번, 수만 번은 울었을 것이고 그때마다 나는 죄의 편에 섬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분을 부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이를 도대체 모른다고. 전에 본 적도 없었노라고 말이다. 어느 신학자가 말했단다.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밖에는 없다고. 스스로 죽든지, 예수를 죽이든지. 나는 기꺼이 스스로 죽지 못하고 언제나 예수를 죽이는 편에 섰구나. 오오- 닭 우는 시간이여. 그 통곡의 시간이여. 어쩌랴, 죄의 밤은 밝아오고 이제 내 가슴 찢을 일만 남았구나. 또 다시 다가오는구나. 저 닭 우는 시간. 내가 방성대곡할 시간이.

닭이 우는 시간은 눈물의 시간. 그 어두운 밤 마당의 모닥불 불빛 속에 언뜻언뜻 검은 죄악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 닭이 우는 시간은 내가 울어야 하는 시간. 모든 죄인이 함께 목 놓아 울어야 하는 시간. 어둠 속에서 조용히 흐느껴 울어야 하는 시간.

처음 유럽 여행할 때 성당을 비롯한 오래된 건물마다 그 지붕 위에 으레 철제 닭이 장식된 것을 보고 의아해했었다. 유럽뿐 아니라 남미의 칠레나 페루 같은 나라에서도 어김없이 지붕 위에 닭 조각상이 얹혀 있곤 했다. 그냥 재미있는 장식이려니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바로 성경에 나오는 그 베드로와 닭 사건의 표상이었다. 인간의 모순과 허약함, 이율배반을 알려주는 상징인 셈이었다. 지붕 위의 닭을 올려다볼 때마다 곧은 목과 교만한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왜소함과 작은 믿음을 자각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닭은 십자가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표상이다.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릴 때 자신의 허약함을, 죄성을, 탐욕을, 거짓됨을 깨달으라는 표상이다. 이제는 닭이 울지 않는 시대다. 닭이 울 겨를도 없이 밤은 불야성을 이룬다. 죄가 깊어가도 소리쳐 깨울 그 무엇이 없다. 닭이 우는 시대는 그래도 행복했다. 지금은 닭마저 울지 않는 어둡고 깜깜한 한밤중의 시대. 어디를 가야 죄의 밤을 깨우는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나누고 나누다가 가장 나중 지닌 것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마가복음 15장 25-26절).

바야흐로 육으로 넘쳐나는 시대이다. 먹고 마시며 삶을 즐기기에 여한이 없는 시대이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육의 시대이다. 당장 텔레비전만 틀어도 온갖 먹거리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것도 먹고 저것도 맛보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식 권하는 시대이다. 마음껏 먹었으면 이젠 체중을 줄이라고 권한다. 오늘날 다이어트는 굴뚝 없는 산업이다. 체중만 줄일 것이 아니라 슬쩍 칼을 대어 얼굴도 손보라고 한다. 성형 또한 거대한 산업이다. 어딘지 못 미더운 창조주의 첫 솜씨 위에 다시 칼을 대어 또다른 솜씨를 보태보라고 한다. 영혼의 문제일랑 나중에 챙기라고 권한다. 지금은 육체를 가꾸고 육체를 섬겨야 할 시간이라고 권하고 또 권한다. 교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친교를 앞세운 음식 나눔의 시간은 길고 집요하다. 먹는 것을 통제하지 못해 생기는 비만과 이로 인한 질병이 사회적 두통거리가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전화의 잿더미를 뒤지던 허기와 가난의 추억은 이제 눈앞에 가물가물하다.

지난해 네팔 등지의 빈민가를 돌아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싶었는데 돌아오니 다시 산해진미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적잖이 먹거리 때문에 고통받았던 듯하다. 굳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들 것도 없다. 일용할 먹거리 문제는 제자들에게 늘 당장의 고민사항이었던 듯하다. 오죽하면 먹거리가 없어 근심에 빠진 것을 보신 주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배곯음으로 우리를 배불리길 원하셨다. 더불어 사람이 육신의 배를 불리는 빵만으로 살 수는 없는 것이라는 도전을 던져주셨다. 육신의 빵보다 더 절실한 것은 영의 양식인 '말씀'이라는 것을 일깨워주셨다. 육신의 먹을 것이 부족한 척박한 땅에서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하라는 권유는 생소했다. 가난한 그분은 나누어주고 나누어주다가 가장 나중 지닌 것, 살과 피까지 나누어주고 떠나셨다. 자발적 가난과 족한 궁핍으로 우리를 풍요케 하길 원하셨다.

내가 감히 고개 들어 예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는 원인은 백만 가지도 넘지만 그중에는 음식을 탐하며 살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십자가상 예수의 피 터진 살과 산발한 머리를 그릴 때면 새삼 먹기를 탐하는 내 육신의 삶이 부끄럽고 부끄럽다.

가시에 찔려서야 향기를 터뜨리는 샤론의 꽃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이로구나(아가서 2장 1절).



바람 부는 샤론의 광야에 핀 꽃 한 송이.

황무한 그곳,

질병과 고통과 근심의 그 땅에 핀 꽃 한 송이 샤론의 꽃.

가시에 찔려서야 그 향기를 터뜨리는 신비한 꽃 샤론의 꽃.

이 세상은 샤론의 광야,

물고 물어뜯는 짐승들의 세상,

그립다.

샤론의 꽃.

스스로 찔리어

향기를 내는

그 꽃.



4장 당신이 빚으신 사랑의 선물



항상 기뻐하라 항상 나와 함께 있자꾸나




환희는 기쁨의 극치이다. 절정이다. 활짝 핀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는 삶의 한 순간이다. 얼마 전 아기가 나오는 텔레비전 광고 하나를 보고 실소한 적이 있다. 일상에 먹는 시간 얼마, 일하는 시간 얼마, 잠자는 시간 얼마, 그리고 웃는 시간 고작 얼마…… 하는 광고였다. 정말이지 기쁨에 환히 웃는 시간이 인생엔 그토록 보잘것없는 양일뿐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께선 항상 기뻐하라 하셨는데 항상은커녕 하루 중의 십 분의 일도 기쁨의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인생들은 허위허위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너희가 도대체 기쁨이라고는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사실, '끝없는 탐욕과 갈망의 덫에 갇힌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내가 다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은 '형제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이 아닌가 싶다. 기뻐할 수 없는 회색빛 인생들을 향해 던지신 주님의 기쁨의 명령은 그래서 곱씹을수록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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