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이 숨긴 비밀
송옌 지음 | 애플북스
보물이 숨긴 비밀
송옌 지음
애플북스 / 2009년 10월 / 311쪽 / 13,000원
1부 황실귀족의 보물
세티 1세의 보물을 찾아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국왕 1978년 10월, 독일의 한 텔레비전 방송국 촬영팀이 세티 1세의 무덤을 참관했다. 당시 안내자였던 한 이집트인은 묘실을 꼼꼼하게 살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세티 1세의 보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보물은 투탕카멘의 보물보다 많을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10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약 7,000점이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것인데, 세티 1세의 보물이 정말 그것보다 더 많다는 말인가?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전 세계가 놀랄 특종이었다.
금고를 탐낸 자의 기교 세티 1세는 이집트 신왕국 시기 제19왕조의 제2대 파라오로 27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즉위 후 리비아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동서를 토벌하여 나라를 안정시켰고 자신이 통치하던 시기를 '부흥의 시대'라 불렀다. 그 이름에 걸맞게 진상품을 바치려는 행렬이 끊임없이 이집트로 들어왔고 덕분에 세티 1세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부유한 국왕이 되었다. 민간에서는 이러한 세티 1세의 보물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중 그의 금고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막대한 재물의 안전을 걱정하던 세티 1세는 솜씨 좋은 기술자를 수소문하여 견고한 벽과 철문이 달린 튼튼한 보물창고를 만들게 했다. 기술자는 왕의 뜻대로 견고하고 아름다운 보물창고를 지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보물에 마음이 흔들린 기술자는 보물창고 벽에 몰래 비밀 장치를 만들었다. 벽돌을 움직이면 벽이 열리는 장치를 고안해 설치한 것이다. 이 장치가 숨겨진 벽돌만 알면 언제든지 왕의 보물창고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상상못한 세티 1세는 보물창고가 완성되자 안심하고 금은보화를 창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문을 단단히 잠근 다음 열쇠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비밀 장치를 만든 기술자는 생전에 국왕의 보물창고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다가 죽기 전에 보물창고로 들어가는 비밀통로를 두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비밀을 알게 된 형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보물창고로 달려갔다. 깊은 밤을 틈타 보물창고에 접근해 아버지가 알려준 지점을 더듬어보니 과연 움직이는 벽돌이 있었다. 순조롭게 보물창고를 열고 들어가보니 그들의 눈앞에는 산처럼 쌓인 금은보화가 펼쳐져 있었다. 형제는 욕심껏 보물을 챙겨 보물창고를 빠져나온 다음 벽돌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원래 세티 1세는 보물창고에 수시로 들어와 각양각색의 진귀한 보물을 감상하곤 했다. 그는 이 세상에 자신만 한 부자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제가 다녀간 후, 예전과 다름없이 보물창고에 들른 세티 1세가 상자 몇 개를 열어보다가 금괴가 많이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보물창고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지만 사람이 들어온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형제는 여러 번 이곳을 드나들었고 상자 속의 금괴는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쯤 되자 세티 1세도 보물창고에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다. 누군가 열쇠를 복사하여 몰래 이곳에 침입해 보물을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티 1세는 침입자를 잡기 위해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갈 수 없는 튼튼한 덫을 설치하고 덫의 열쇠는 자신이 갖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형제는 또 다시 보물창고에 침입했다. 신나게 자루에 보물을 담던 형이 상자 사이로 발을 내딛는 순간 덫에 걸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형은 다리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몸부림칠수록 덫은 더 조여왔다. 동생이 형을 구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단단한 덫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형은 동생에게 "나는 틀렸다. 우리의 정체가 탄로 나면 나는 물론 너와 어머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어서 내 목을 베고 옷을 벗겨 전부 가지고 나가라. 그렇게 하면 내가 누군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무사히 빠져나가면 다시는 오지 말거라"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형을 죽일 수 없어 망설였지만 형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형의 말대로 했다. 그리고 금괴와 형의 옷가지를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보물창고에 들어간 세티 1세는 머리가 없는 남자의 시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보물창고를 꼼꼼히 수색했지만 도둑이 들어온 통로는 도통 발견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세티 1세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시체를 내다 걸도록 했다. 포상금까지 걸고 시체가 누구인지 알아내려고 했지만 단 한 명도 시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화가 난 세티 1세는 길 옆 공터에 교수대를 설치하고 시체를 거꾸로 매단 다음 병사 여섯 명에게 밤낮으로 지키면서 지나는 사람들 중에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체포해 궁으로 압송하라고 명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도둑의 어머니는 비통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둘째 아들에게 형의 시체를 훔쳐오라고 애원하며 이틀 안에 가지고 오지 못하면 자신이 직접 아들을 고발하겠다고 했다.
둘째 아들은 고민 끝에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그는 수면제를 섞은 술을 가죽 자루에 담아 나귀에 싣고 해가 질 때를 기다렸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길을 재촉하는 행인으로 가장해 교수대 앞을 지나가면서 일부러 술자루를 떨어뜨렸다. 우왕좌왕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는 소리에 시체를 지키던 병사들이 뛰어와 도와주었다. 그는 감사의 표시라면서 병사들에게 술을 대접했고 술을 마신 병사들은 금세 모두 곯아떨어졌다. 그는 즉시 교수대에서 형의 시체를 내린 다음 술 자루 하나를 대신 걸어 놓았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상상이 더해지고 미화된 부분도 있겠지만, 세티 1세에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재산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대형 토목공사를 진행했고 기념물 건설에도 힘썼다. 특히 자신을 위해 인적이 드문 '왕가의 계곡'에 외부로는 노출되지 않으나 내부는 매우 화려한 왕릉을 축조했다. 세티 1세 사후에 그의 보물은 시신과 함께 이 왕릉에 묻혔다.
2부 전쟁이 남긴 보물 스토리
실종된 나폴레옹의 보물
연기처럼 사라진 마차 25대 1812년 5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이끄는 50만 대군이 러시아 정벌에 나섰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4일, 그들은 모스크바를 점령했다. 그러나 당시 모스크바의 20만 시민 대부분은 러시아군을 따라 철수해 시내는 텅 빈 유령 도시 같았다. 나폴레옹 군대는 도시 곳곳에 불을 질렀고 불길은 장장 6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후 굶주림과 엄동설한이 프랑스군을 덮쳐왔다. 전선이 너무 길어진 탓에 군수물자 운송부대는 자주 습격을 받았고 물자 조달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 군대는 식량과 탄약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리아 1세가 평화회담을 받아들이지 않아 나폴레옹 군대는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남서 방향으로 천천히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군과 농민 유격대의 공격에 시달리며 후퇴하던 중 모스크바에서 약탈한 전리품을 실은 마차 25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약탈한 전리품이 역사의 수수께끼가 된 순간이었다.
호수 아래 잠든 보물 보크모로프라는 러시아 학자는 역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의 생애를 다룬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생애』라는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11월 1일, 황제는 어렵게 퇴각했다.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스몰렌스크 길에 올랐다. 러시아 군대에게 차단당할 위험이 있어 빠르게 후퇴해야 했다. 위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약탈한 고대 대포, 이반 4세의 대십자가, 크렘린 궁의 진귀한 물품, 성당 장식품 및 회화 조각 등을 더 이상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에게 빼앗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이것들을 싸무라보 호에 빠뜨렸다.'
1831년에서 1832년 사이에 완성된 이 책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원정에 나선 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 발간된 것이었다. 보크모로프는 이 이야기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기나 회상록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폴레옹과 동시대의 인물이 전리품에 대해 언급한 자료가 없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나폴레옹은 퇴각하면서 두 명의 측근과 썰매를 타고 서쪽으로 질주했다. 그중 한 명인 아론 드 그랑거는 훗날 회상록에 '11월 1일, 나폴레옹이 비야지마에서 퇴각했다. 11월 2일, 싸무라보에 도착했고 3일째 되는 날 슬라브코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폭설을 만났다'라고 적었다. 그랑거와 회상록에서 언급한 나폴레옹이 전리품을 버렸다는 지점과 날짜는 책 내용과 일치했다.
보크모로프는 러시아인, 영국인, 프랑스인이 기록한 자료들도 모두 찾아보았다. 그들도 모두 1812년 11월 2일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하면서 약탈한 전리품을 싸무라보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프랑스 병사들이 이런 정보를 러시아인들에게 흘렸을 리는 없었다. 현지 주민이 프랑스 황제의 비밀을 알았다고 해도 전쟁 중에 황량한 작은 마을에서 호수 바닥의 보물을 인양해 올릴 만한 장비는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크모로프는 전리품이 호수에 던져진 것이 사실이라면 보물은 아직도 호수 바닥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이며 그 호수는 또 어디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보물 호수를 찾아서 레닌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 동안 관련 자료를 연구한 보크모로프는 관련된 지도를 거의 다 살펴보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야지마와 싸무라보 일대에는 호수가 없었다. 그는 소련 과학원 연구소에 편지까지 보내 물어보았다. 그리고 연구소에서 '비야지마 남서쪽 29킬로미터 지점에 '싸무라보카'라는 소택지(늪과 연못으로 둘러싸인 습한 땅)가 있는데, 이 소택지가 싸무라보 호수라 불리기도 합니다'라는 답신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호수가 소택지로 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곳을 탐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까? 이에 관해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나중에 그는 다시 관련 기관에 문의 편지를 보냈지만 대부분 알려줄 내용이 없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스몰렌스크 지방정부 내정관리국 기록 보존실에서만 아래와 같은 간략한 자료를 보내왔다.
'1835년, 스몰렌스크 지방정부가 이 호수를 조사했다. 그들은 먼저 호수 깊이를 측정했다. 수심 약 5미터 지점에서 암석 같은 퇴적물을 발견하여 망치로 두드려보니 금속 소리가 났다.' 지방장관은 이 사실을 국무대신에게 보고했고 국무대신은 다시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4,000루블을 주어 방죽을 쌓고 물을 빼 호수를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방죽이 완성되고 물도 빠진 호수 속에는 암석밖에 없었고 결국 탐사는 중단되었다. 이후 이곳을 탐사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나섰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전리품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정말 이 소택지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보물 역시 그저 사람들의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일까?
3부 사라진 고성에 얽힌 비밀
잉카 제국 최후의 도시를 찾아서
사상 최고의 몸값 1532년 11월 16일, 스페인의 모험가 피사로의 부대가 잉카 황제 아타왈파의 군대를 격파했다. 피사로는 잉카의 황제를 감옥에 가두고 잉카 군영에서 약 8만 페소에 달하는 황금을 약탈했다. 피사로의 잔악한 행위에 겁을 먹은 아타왈파는 자신을 풀어주면 자신을 감금했던 감옥에 자기 팔 높이만큼 황금을 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타왈파의 제안에 피사로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아타왈파는 피사로가 적다고 생각하는 줄 알고 감옥 벽 꼭대기까지 황금을 쌓아주겠노라 약속을 했다. 피사로는 붉은 선으로 아타왈파가 가리킨 지점을 표시했다. 지금도 아타왈파가 갇혀 있었던 감옥에는 보물을 채우기로 약속한 붉은 선이 남아있다.
3개월 뒤 아타왈파는 약속을 지켰다. 그는 잉카의 각 지역에서 가장 좋은 황금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여 황금으로 감옥을 가득 채웠다. 그 짧은 3개월 동안 수만 파운드의 황금을 모을 수 있었다니 잉카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황금이 있었던 것일까? 몸값을 지불한 그는 이후 정말 풀려났을까?
황금의 재앙이 몰려오다 잉카인은 라틴 아메리카의 토착민으로서 11세기에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잉카 제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태양신과 달의 신을 숭배했으며, 황금을 찬란한 태양이라고 여겨 신묘나 궁전은 물론 평소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에도 황금을 많이 사용했다. 잉카인은 11세기부터 대대로 황금을 소장하기 시작해 잉카의 황금을 전부 합치면 당시 세계 다른 지역의 금을 모두 합한 것과 맞먹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바로 이 때문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잉카인에게 재앙이 닥쳐왔다. 황금에 눈이 먼 보물 사냥꾼들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이다.
1531년, 스페인의 모험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용맹한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최신식 대포, 화승총, 날카로운 검 등을 앞세워 파나마를 떠나 페루로 향했다. 그는 포로로 잡혀온 인디언들에게 남쪽(라틴 아메리카)에 황금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에 피사로는 잉카 제국 정복에 대한 야심을 더욱 굳혔다. 당시 잉카 제국은 내분에 휩싸인 상태였다. 야심만만한 아타왈파가 '형제의 난'을 일으켜 국왕의 자리를 빼앗았던 것이다. 이러한 내분이 피사로에게는 오히려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잉카 제국의 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지만 내분으로 인해 외부의 위협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아타왈파는 외부 침략에 대응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잉카 귀족에게 선물까지 들려보내 피사로를 카하마르카로 맞이하게 했다.
1532년 11월 15일, 피사로는 아타왈파 황제에게 다음 날 카하마르카 중앙광장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아타왈파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무장 없이 평화적으로 만나자는 뜻을 전했다. 잉카인들이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피사로는 대담하고 비열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기병을 광장 주위에 매복시키고 잉카 황제를 붙잡을 올가미를 설치했다.
16일 오후, 아타왈파는 잉카인 3~4만 명을 이끌고 광장에 도착했다. 그는 왼손에 금으로 만든 달걀 몇 개를 들고 오른손에는 보석이 박힌 금구슬로 된 화려한 왕의 지팡이만 들고 나타났다. 유유자적하게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에서 앞으로 다가올 대재난에 대한 긴장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피사로의 신호에 기병들이 아타왈파를 향해 돌진했고 잉카 황제의 사병들이 손쓸 겨를도 없이 아타왈파는 피사로의 인질이 되었다. 이후, 아타왈파는 거대한 양의 황금을 바치며 목숨만은 부지하고자 했지만, 그의 몸값을 챙긴 피사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타왈파를 처형했다. 잉카인들은 그제야 침략자의 진면목을 알아채고 황금을 숨기기 시작했다. 피사로는 아타왈파에게 받은 황금을 운반하기 쉬운 금괴로 녹였다.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까지 마수를 뻗쳤다.
함락된 쿠스코 성의 미스터리 쿠스코 성은 인디언의 도시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피사로는 이러한 쿠스코 성에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여 미친 듯이 노략질을 해댔다. 그들은 쿠스코의 신전을 부수고 왕궁 내에 있는 황금 그릇, 황금상, 귀중품 등을 수탈했다. 왕릉 속에 있는 황금과 보석, 미라도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피사로의 형제인 페드로 피사로가 그들이 쿠스코에 들어갔던 장면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수많은 금은 세공품에 깜짝 놀랐다. 비록 가장 좋은 것들은 인디언들이 숨겼겠지만 잉카 왕조의 시조를 금으로 만든 조각상도 발견했고 금으로 만든 각종 예술품과 진귀한 그릇들도 발견했다. 이것들은 모두 쿠스코 성 외곽에 있는 동굴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정보를 준 인디언이 사라졌다. 어쨌든 잉카인들이 다른 사람이 다시는 찾을 수 없도록 보물을 숨겨놓은 것은 확실했다. 이들 인디언은 보물을 잘 숨긴 다음 목을 매달아 죽거나 벼랑으로 몸을 던졌다." 쿠스코 성의 함락은 잉카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로써 잉카 제국은 사라졌고 거기에는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몇 가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