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뉴욕에서 홍대까지 카페탐험가

정지연, 장성환 지음 | 북노마드
뉴욕에서 홍대까지 카페탐험가

정지연, 장성환 지음

북노마드 / 2009년 11월 / 284쪽 / 13,800원



Episode1 커피공화국 뉴욕에서의 한때



뉴요커와 카페


뉴욕 거리를 돌아다니기에 11월은 썩 좋은 때가 아니다. 오후 4시면 날은 어둑해지고 바람은 쌀쌀해진다. 이럴 때 밝은 호박색으로 빛나는 카페 안 풍경은 가난한 여행자를 유혹한다. 온기로 김이 서린 유리창 밖으로 언뜻 언뜻 들려오는 적당히 시끄러운 소음과 쌉싸름한 커피향은 도시풍 여행자에게 고향을 생각나도록 만든다.

카페는 집과 사무실을 대신해 가난한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던 해방구인 것이다. 커피 한 잔 값으로 내 집에선 꿈도 꾸지 못하는 멋진 1950년대 풍 덴마크 빈티지 의자에 앉아 일을 하거나 룸메이트 신경 쓰여 크게 듣지 못하는 음악을 듣는 것. 작은 돈으로 누리는 이 쾌적함은 인간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호사의 하나라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깡통차 표' 커피의 온기

6호선 라인을 타고 33가 역에 내린다. 좁고 가파른 지하철 계단을 오르면 왼쪽으로 메트라이프 빌딩이 보인다. 뉴욕 미드타운의 상징적인 이 건물을 두고, 올드 뉴요커들은 고집스레 '펜암 빌딩'이라고 부른단다. 여전히 차는 쌩쌩 달리고 있지만 눈치와 발 빠르기로는 세계 1등인 뉴요커들은 벌써부터 길 건널 채비를 한다. 그들을 따라 나도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바로 앞에 세단 한 대가 스쳐지나가도 놀라지도 않는다. 곧 보행자등에 불이 켜진다는 것쯤 알아도 '내 갈 길 가련다'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실용주의 뉴요커들. 재빠르게 길을 건너 핍스 애비뉴를 지나 식스 애비뉴, 일명 아메리카 오브 애비뉴를 향해 들어선다.

어제와 같은 자리에 은색 깡통차가 서 있다. 흔히 '벤더'라 부르는 이런 깡통차는 맨해튼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출근길 사람들에게만 커피와 머핀, 크루아상, 베이글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파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곳에서 파는 커피는 단돈 75센트. 장담컨대 맨해튼에서 가장 싼 커피다. 1달러를 주고도 1쿼터의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으니 가난한 이들의 주머니 사정을 헤아려주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미국에서 쿼터처럼 유용한 동전은 없다. 쿼터 4개면 1달러. 세탁소 기계부터 각종 자판기까지 쿼터 없인 못 사는 곳이 미국이다). 사실 뉴요커들은 대부분 그 돈을 팁으로 주지만, 빠듯한 주머니 탓에 깍쟁이 노릇을 해야 하는 난 안면몰수하고 거스름돈을 챙겼다.

"뭐 마실래?" "스몰 커피에 우유 넣어서. 아, 설탕은 빼주세요." "정말?" 벙글벙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가득 띠운 채 아저씨가 묻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아저씨의 성성한 흰 눈썹은 안소니 퀸을 닮았다. "정말 노 슈거야, 아가씨? 그럼 맛이 없는데…" 낙담한 아저씨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이쯤 되면 졌다. "그럼 조금만 넣어주세요. 진짜 조금!" 수북하게 담은 두 숟갈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이 양반을 잘 아는 난 언제라도 "그만!"이라고 외칠 준비를 하며 주의 깊게 아저씨의 손놀림을 쳐다본다. "엇, 됐어요. 됐어!" 스푼으로 훌훌 저어주며 아저씨는 윙크를 던진다. 그리곤 조심스레 갈색봉투에 냅킨과 함께 종이컵을 담아주며 인사를 건넨다. "즐거운 하루 보내, 레이디!" "아저씨도요." 이건 어학원을 향하는 오전 9시 즈음, 아저씨와 내가 치르는 일종의 의식이다. 나는 버릇대로 "노 슈거"라 주문하고 아저씨는 언제나 설탕을 권한다. 사실,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어 먹는다. 그러나 그렇게 먹었다간 너무 달아서 이에 코팅을 하는 기분이니 별 도리 없다.

깡통차에서 산 커피 한 잔과 휴식시간에 먹는 사과 한 알이 이곳에서 내 아침 메뉴였다. 그래서 아저씨의 깡통차를 만나지 못하는 날엔 어학원 근처의 한국인 아줌마가 주인인 델리에서 커피를 사서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안쏘니 퀸 눈썹 아저씨가 큼지막한 참깨 베이글을 봉투 속에 쏙 집어넣는다. "가져가서 먹어." 괜찮다는데도 그는 기어코 내 손에 빵이 담긴 봉투를 쥐어주었다. 그럼 잔돈이라도 받으라니까 "노, 노!"라며 손을 내젓는다. 매번 커피만 사먹는 내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아저씨가 고마워서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베이글을 봉투에서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베이글 한 입. 부드럽고 단 커피 한 모금. 맛있다. 오물오물 씹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차갑게 식은 아저씨의 참깨 베이글이 '지구상에서 가장 맛있는 베이글'이라는 H&M 베이글보다도 맛있다. 내가 먹고 있는 건 단순한 빵이 아니라, 인간에게 베푸는 호의였으니까. 부드럽게 씹혀 살이 되고 피가 되는 호의. 깃털 하나만큼 사소하지만 아니, 사소해서 더 소중한 따뜻함을 만날 때마다 내가 사람이라는 게 고맙고 감사했다. 다른 존재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따뜻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소중했다. 이런 사소한 기억들이 있어 타국에서도 그런대로 "괜찮아, 다 괜찮아" 하며 보낼 수 있었다.

블리커 스트리트에서 꼭 가봐야 할 곳들



블리커 스트리트 레코드 뉴욕 최대 규모의 레코드 가게. 1층과 지하 2개 층에 CD, 레코드, 카세트테이프 양이 엄청나다. 장르별로 잘 정리된 CD가 진열되어 있는 밝고 쾌적한 1층도 좋지만, 이 집의 보물창고는 지하다. 오래되었지만 상태 좋은 레코드판들이 가득하기 때문. 록 스타처럼 보이게 해줄 오리지널 티셔츠와 포스터도 함께 판매한다. 저녁에 가면 이 집의 뚱땡이 고양이 '비치(그 bitch 맞다!)'를 만날 수 있다. 239 Bleecker St.[bet. Carmine St. & Leroy St.] (212) 255-7899

조스 피자 뉴욕 슬라이스 피자의 본좌. 신선한 모차렐라가 듬뿍 올라간 나폴리탄 스타일로, 머시룸이나 살라미 같은 토핑 없이 먹는 게 더 맛있다. 영화 <스파이더맨>과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와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명소다. 영화배우 벤 애플렉의 단골 피자집. 막 구워져 나와 뜨겁고 바삭바삭한 도우를 한 입에 베어 먹는 맛이 끝내준다. 작고 허름하지만 그래서 더 '맛집'스럽다. 치즈 슬라이스 피자 단돈 2달러 25센트. 7 Carmine St.[bet. Avenue Of The Americas & Bleecker St.] (212) 255-3946

매그놀리아 베이커리 이 작은 컵케이크 가게에는 늘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줄이 선다. 컵케이크와 커피를 사서 인근 공원에 앉아 먹는 게 뉴요커 방식. '목련표' 컵케이크는 기절할 만큼 많은 설탕과 버터를 넣어 만들어지지만, 한번 그 맛에 빠지면 다이어트 걱정쯤 가뿐하게 무시하게 된다. 내가 추천하는 컵케이크는 레드벨벳. 줄 서는 게 싫은 사람이라면 어퍼웨스트점을 방문하면, 편하게 앉아서 먹을 수 있다. 401 Bleecker St.[bet. 11th St. & Perry St.] (212) 462-2572

카페 안젤리크 관광하다가 피곤한 발걸음을 쉬기에 좋은 소호 지역의 카페. 맛있는 방과 케이크로 특히 유명하다. 벽돌과 거울을 이용한 인테리어는 마치 유럽의 도시에 와 있는 향수를 자아낸다. 선데이 브런치 메뉴인 신선한 과일이 곁들여 나오는 프렌치 토스트나 말린 토마토와 페스토 샌드위치도 훌륭하지만, 3달러밖에 안 하는 타르트와 케이크는 최고다. 이곳의 카페오레는 파리 본토의 맛이라는 칭찬이 자자하다. 68 Bleecker St.[bet. Broadway & Crosby St.] (212) 475-3500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북카페

오후 2시의 <하우징 웍스 유즈드 북스토어 카페>. 매주 목요일은 투터 에리카를 만나는 날이다. 에리카는 브루클린의 워싱턴하이츠에서 소호의 귀퉁이에 있는 이 헌책방 카페까지 나를 만나러 온다. 요리책과 음식 관련 코너로 가서 『미스터 라테』를 꺼내 자리에 앉는다. 《뉴욕 타임스》의 음식평론가 아만다 헤서의 자전적 경험담을 담은 이 소설은 음식 평론가 여성이 먹어서 몸에 해만 되지 않으면 뭐든 오케이라는 '미맹'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를 요리의 다채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이야기다. 앤서니 보뎅(레스토랑 주방 뒤의 숨겨진 이야기를 담아낸 『키친 컨피덴셜』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뉴욕의 유명 요리사. 푸드 쇼 '노 레저베이션'의 호스트이기도 하다)에 반해버린 데다가, 음식에 얽힌 이야기라면 언제든 반색하는 아마추어 푸디인 내겐 안성맞춤의 읽을거리가 아닐 수 없다.

"많이 기다렸니?"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 에리카는 육중한 몸을 작은 의자에 구겨 넣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 근황을 물어보는 그녀의 눈이 춤추듯 반짝거린다. 46세의 독신인 에리카는 영어를 가르치는 개인교사다. 난 그녀를 한 인터넷 카페의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되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써서 모 신문사 문학상을 수상한 젊은 소설가가 '영어교사가 필요한 분, 연락바람'이라며 친절하게 그녀의 연락처를 올려둔 덕분이었다. 에리카는 부산의 한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친 경험까지 있으니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유니언 스퀘어와 로어 맨해튼에 각각 있는 <스트랜드 북스토어>는 중고 서점의 대명사. 이곳에는 오래된 책은 물론 신간, 악보와 아트북과 패션 일러스트북까지 없는 게 없다. 심지어 건물 바깥을 따라 죽 놓인 책 수레에는 1달러짜리 책들이 수두룩하다. 비록 닳고 해졌지만 읽는 데는 문제없다. 나는 그곳에서 추레한 노인들이 안경을 고쳐 써가며 책을 고르느라 열중하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며칠씩이나 씻지 않은 것인지 냄새를 풍기는 그들이 꼬깃꼬깃한 돈으로 산 책을 안고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헌책방은 이 도시의 가난한 영혼들을 구원하는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엔 헌책방이 꽤 많다. <머서 스트리트 북스>, <이스트빌리지 북스 앤드 레코드>, 브로드웨이의 <웨스트 사이더 희귀본 중고책 서점> 등이 있다. 여러 헌책방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하우징 웍스 유즈드 북스토어 카페>다. 이곳의 판매대금은 전부 에이즈 환자를 위해 쓰인다. 취지도 아름답지만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건 이 서점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아름다움 때문이다.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붉은 마호가니 나무로 된 곡선미 넘치는 2층 계단을 중심으로, 모양도 제각각인 의자들이 놓여 있다. <스트랜드 북스토어>에 비해 이곳의 넘쳐나는 의자는 이 서점이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웅변한다. 사람들은 다리를 혹사시킬 필요 없이 내키는대로 의자에 앉아 독서에 열중할 수 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높은 천장 아래로 드리워진 낡은 녹색등은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축복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예쁜 스카이 블루로 칠해진 벽면과 멋스럽게 놓인 빈티지 시계. 더 마음에 드는 건 내부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와 수프를 판다는 점이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책을 봐도 누구하나 눈치를 주지 않고 한참을 책만 뒤적이다가 사지 않고 나가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다. 심지어 출출한 때 가벼운 요기도 할 수 있으니 가난한 여행자나 독서광에게는 이보다 훌륭한 장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에리카가 스타벅스가 아닌 이곳을 나와의 약속 장소로 잡은 이유였을 것이다.

에리카와 나는 겨우 8주밖에 같이 하지 못했다. 내 입장에서 일주일에 50달러는 큰돈이었다. 이 돈이면 버거를 10번, 세일 중인 예쁜 자라의 티셔츠는 네 벌이나 살 수 있었다. 마음을 굳혔지만 선한 에리카의 눈을 보면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망설이다가 2주를 보낸 후에야 그녀에게 더 이상 수업을 받긴 어렵겠다는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드렸다.

에리카와 만날 약속은 없었지만 그 이후에도 난 습관처럼 이곳에 들렀다. 주머니는 가벼워도 시간만은 넘쳐나던 그때, 이곳은 나의 휴식처였기 때문이다. 목이 마를 땐 아이스커피 한 잔을 주문해서 홀짝이며 구석에 앉아 아만다 헤서의 『미스터 라테』나 앤서니 보뎅의 『요리사의 여행』 따위를 감칠나게 읽었고 소호 근처에서 아이쇼핑을 즐기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이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뉴욕에서 1년을 머무는 동안 이곳은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곳의 낡은 책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사랑스런 뉴욕의 북 카페들



맥널리 잭슨 카페와 북스토어 놀리타 지역의 독립 서점 <맥널리 잭슨> 안의 작은 카페. 햇빛이 환하게 드는 길가에 있는 작은 카페로 커피가 맛있다. 바로 옆에 잡지 코너가 있는데 잡지뿐만 아니라 서점 안의 책을 가져와 읽어도 된다. 대형 서점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하고 예술적인 독립 출판물들이 환상적으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공간이다. 신예 작가들의 낭독회나 문화행사가 자주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호 지역에 면해 있어 쇼핑하다 지친 다리를 쉬기에도 안성맞춤. Rivington 52Prince St.[bet. Lafayette St. & Mulberry St.] (212) 274-1160

카페 자이야 돈가스 샌드위치부터 연어구이 정식, 오니기리 등 일본식 카페 고항(밥)을 뉴욕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미드타운에 위치한 일본 서점 기노쿠니야 2층에 오픈한 카페로 맛있는 커피와 녹차, 일본식 케이크를 즐길 수 있다. 일본의 맛이 그리운 일본인 가족이나 혼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온 젊은이들이 많다. 미국인들의 발걸음도 잦은 편. '미드타운의 오아시스' 브라이언트 파크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1073 6th Ave 기노쿠니야 서점 내 2층

북스 오브 원더 녹색 문으로 된 서점 옆에 분홍색 컵케이크 카페가 붙어 있다. 클래식한 뉴욕 스타일 아동 서점으로 방대한 양의 동화책과 그림책을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책을 읽거나 바닥에 앉아 책을 보는 게 일상이다. 구석에는 <슈렉>의 작가 윌리엄 스타이그를 포함해 다양한 그림책의 원화가 전시되어 있다. 뭐니뭐니해도 이 서점의 명물은 컵케이크 카페. 이곳의 앙증맞은 컵케이크는 먹는 게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18 W 18th St. [bet. 5th Ave & Avenue Of The Americas] (212) 989-3270

뉴욕에서의 1년

뭐라고 답해야 할까? "뉴욕에 있는 동안 너 뭐 했니?"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특별히 무얼 한 게 없으니 대답하는 쪽도 머쓱하다. 그렇다고 "그냥 살았어"라고 덤덤히 말하기엔 해프닝이 많았던 것도 같다. 뉴욕에 있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갤러리와 뮤지엄을 돌아다녔던 것. 미술학도는커녕 취미삼아 그림 한 번 배워본 일 없는 나였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배고픈 줄도 몰랐다. 굶주린 아이가 엄마 젖을 빨아대듯 화가들의 이름과 화풍을 갈급해하며 내 것으로 흡수했다. 아트 앤드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레코드판에서 피어나던 나비의 군무를 통해 밥 딜런의 음악을 듣는 아름다운 착란을 겪기도 했고 모마에서는 황금빛 들판에 등을 보이고 앉은 소녀를 먹먹하게 바라보는 경험도 했다. 또한 굳세게 살아야지 하는 듯한 노동자 아내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며 매료되기도 했다.

그림과 미술이 내 눈을 풍요롭게 해주었다면, 음식은 내 혀를 풍요롭게 해줬다. 낯선 타지를 떠도는 동안에도 하루 세 끼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난 아껴먹을 땐 아껴먹더라도 예산이 허락하는 한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과 펍을 가보려고 노력했다. 한 지역의 음식이라는 건 문화와 역사를 담고 있다. '인종의 용광로' 뉴욕의 요리 문화는 세계화된 뉴욕의 현주소였다. 아프리카 요리부터 말레이시아 요리에 이르기까지 맛있는 요리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또 자기 스타일대로 변형하는 뉴요커 특유의 다문화주의가 한 그릇 음식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또 틈나는 대로 영화와 책을 보았다. 주로 넷플릭스를 이용해서 <킹스 오브 뉴욕>이나 <맨해튼>, <체이싱 에이미> 등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인디영화들을 차근차근 챙겨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걷고 또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다리는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웠지만 끙끙 소리를 내면서도 거리로 나갔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으면서 거리의 인상을, 간판을, 도로 표지판을, 아스팔트가 아닌 코블 스톤과 하이힐이 빚어내는 마찰음을, 흑인 뮤지션의 리듬을, 공사장의 소음을, 브루클린 피어의 강 내음을, 증기가 올라오는 맨홀을, 옐로 캡의 속도를 호흡하고 흡수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