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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이승원 지음 | 휴머니스트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이승원 지음

휴머니스트 / 2009년 12월 / 339쪽 / 16,000원



0. 조선의 오디세우스들, 신세계로 행군하다



'멋진'신세계로 : 조선인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여행한 나라와 도시는 모두 '신세계'였다. 구대륙 중국은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쳐 지나가는 지역에 불과했다. 베이징은 구제국의 구도심을 상징했다. 대신 상하이와 난징, 그리고 만주는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신세계로 떠올랐다. 식민지시기로 들어서면서 일본은 외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일본제국의 식민지 경영을 함축하는 표현처럼 '내지'의 확장으로서의 신세계에 가까웠다. 신세계 중에는 '따라잡고 싶은 곳'도 있었고, 반면교사를 상징하는 나라도 있었으며, 새로운 개척지도 존재했다.

조선인들이 해외여행을 떠났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격변기였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열이 비등하던 시기였고, 세계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시기였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자본주의의 아성과 사회주의 왕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광기에 찬 나치즘과 파시즘이 횡행했던 나라와 그 이데올로기에 희생양으로 전락한 나라도 여행했다. 조선인들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이다. 첫 번째는 조선 일본 상하이(홍콩) 동남아시아 이집트(중동) 유럽 러시아 만주 조선이다. 두 번째는 조선 일본 미국 캐나다 유럽 이집트(중동) 동남아시아 상하이(홍콩) 일본 조선이다. 세 번째는 조선 만주 러시아(시베리아 횡단열차) 유럽 이집트(중동) 동남아시아 상하이(홍콩) 일본 조선이다. '우리는 과연 그들(타자)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몸과 의식 속에 깊숙하게 각인되어 있는 '근대=서구화=문명=선(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제 때로는 갈등하고, 긴장하며, 경악하고, 절망해야만 했던 조선인들의 해외여행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1. 일본,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조선 지식인, 모던 걸에게 손목을 잡히다 : 1884년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김옥균, 서광범,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으로 망명했고, 발등을 찍힌 고종은 분개하여 '체포조'를 꾸려 일본으로 보냈다. 이때 박대양(朴戴陽)은 정사(正使) 서상우(徐相雨)의 종사관이라는 임무를 띠고 동행하게 된다. 전통적인 유학자였던 박대양에게 일본은 야만스러운 오랑캐에 불과했다. 일본에 도착한 박대양은 어리둥절했다. 당시 일본은 서구의 근대화를 따라잡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구적 근대화를 모방한 일본의 현실이 그에게는 모두 기기음교(奇技淫巧)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복장이나 행동거지는 더더욱 마뜩찮았다. 이런 일본을 향해 박대양은 거침없이 "마귀의 세계(魔界)"라고 비난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1885년 2월 22일, 박대양 일행에게 한 통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일본의 육군경(陸軍卿) 오야마 이와오(大山巖)로부터 온 로쿠메이칸(鹿鳴官) 연회 초대장이었다. 화려한 연회장에 도착한 박대양은 아연실색했다. 초대장을 들고 온 내외국인들은 모두 서구식 복장을 착용했다. 도포와 갓을 쓴 박대양 일행의 복장만 유독 눈에 뜨이게 튀었다. 더군다나 박대양에게 서구의 음악은 그동안 자신이 신봉했던 성리학적 예악관(禮樂觀)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었고,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부둥켜안고'춤을 추고 있었다. 왈츠였다. 난생 처음 보는 왈츠 앞에서 기함하고 있는 박대양을 육군경 오야마 이와오의 부인이 급습했다. 평생 "창부나 주모의 손"도 잡아본 적이 없는 그의 손을 오야마 이와오의 부인이 덥석 잡은 것이다. 육군경 부인인 오야마 스테마츠(大山捨松)는 일본 최초의 여자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모던 걸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박대양에게 서양식 에티켓인 '악수'를 청하였던 것인데, 박대양은 그런 행동에 기겁하고 말았다. 박대양은 로쿠메이칸의 연회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음악과 춤, 악수(에티켓) 등으로 충만한 연회에서 그는 엄청난 혼란을 경험했다. 특히 오야마 스테마츠의 행동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신'의 권능을 위협하는 문명 : 개화파 조선인들에게 일본은 적극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나라였다. 그들은 일본 그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 서구 세계를, 새롭게 재편된 세계의 질서를 경험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서구의 근대화를 직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나라였다.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서구적 근대화를 이룬 일본은 오랑캐의 나라 일본이 아닌 '동양'속의 '서양'이었다. 조선시찰단의 일원으로 1881년 일본을 방문한 이헌영, 임오군란의 뒷수습을 위해 전권대신 수신사의 직을 받고 일본에 갔던 박영효 등도 서구화된 일본의 풍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개화란 "남의 국가를 화되게 함이 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던 골수 수구파 박대양마 저 일본의 서구화 일부에 대해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 증기선, 전신, 공원, 박물관, 학교, 공장, 활동사진, 무도회 등 조선의 사신들이 일본에서 견문한 것들은 대부분 서구 문명의 산물들이었다. 특히 증기기관을 비롯한 기계공업은 그동안 조선의 유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치체계를 흔들어놓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이헌영은 전기와 전신의 원리를 살펴보면서 "그 기계의 묘함은 형언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박대양은 "어리둥절하여 마치 요술쟁이의 거짓말 같다. 그러나 종전의 경험으로 보면 한 점의 착오도 없었다. 서양 기법이 사람을 현혹하게 만듦이 대개 이와 같은 것"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사신들이 보았던 서양의 기계문명은 신이 계시한 질서나 자연 그대로의 질서가 아니었다. 인위적인 기계가 자연의 속성을 대체하고 있었다. 전신, 전기, 전화, 증기기관 등을 견문한 사신들은 한결같이 '형언할 수 없다'는 말로 일관한다. 그들은 서구의 근대적 문물에 대해서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던 까닭이다. 사신들이 서구의 문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수사학은 그저 천지자연과 공자, 그리고 조화의 수단 등 비서구적 수사학일 뿐이었다.

2. 만주, 광활한 벌판에서 '제국'을 꿈꾸다



만주를 향한 시선들 : 일본 유학생 이정임과 영국 유학생 김영창은 최찬식의 신소설 『추월색(秋月色)』의 두 주인공이다. 이 둘의 애틋한 사랑도 사랑이지만, 이들이 결혼을 하고 떠난 신혼여행의 장소가 이채롭다. 이들은 '만주의 펑텐'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외국물을 먹은 두 사람은 하필이면 왜 '만주'로 신혼여행을 떠났던 것일까. 만주라는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본 만주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대승을 거뒀던 기념비적 장소였다. 신혼여행이라기보다는 전승기념비를 답사하는 듯한 이정임과 김영창의 여행. 일본이 만주에 건설한 철도와 시가지를 보며 흐뭇해하는 이정임과 김영창의 모습은 어느 순간이 되면 수많은 조선인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더 이상 세상의 중심〔中華〕이 아니었다. 조선에는 탈중국화 바람이 일었다. 중국은 구제국의 표상에 불과했다. 중화질서의 붕괴와 함께 조선에서 중국의 위상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베이징 대신 상하이와 만주가 조선인의 시선에 들어오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은 다시 부상했다. 상하이와 만주는 중국의 영토이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그 지역을 지배하는 것은 중국이 아니었다. 상하이와 만주는 조국을 잃어버린 자들, 고향으로부터 쫓겨나야만 했던 수많은 디아스포라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암중모색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3. 상하이, 자본주의 근대의 미추선악(美醜善惡)을 보다



기형적인 메트로폴리스 : 상하이의 하부구조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산업과 경제가 수치적으로 발달했지만, 다른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듯이 그 이면에서 문화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퇴폐와 향락이 동시에 펼쳐진다. 식민지 조선인들의 발길이 머문 곳은 대부분 만국공원을 중심으로 한 외국 조계지역과 상하이 최대의 번화가인 난징로(南京路)였다. 난징로는 "도쿄의 긴자(銀座)"보다 더 번화한 곳이었으며, 그대로를 "근대 첨단적 남녀들이"활개를 치며 걸어 다녔다. 상하이에 대한 조선인들의 인상은 양극단으로 갈렸다. 조선인들이 상하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중국의 기형적인 국제도시. 둘째, 퇴폐와 향락의 도시. 셋째, 신흥 중국의 모태 도시. 이러한 시선은 서로 충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대성의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맥락 위의 시선이다. 상하이는 기형적인 국제도시답게 겉으로는 화려한 외양을 뽐내지만, 그 이면에는 "거지 거지 거지의 떼"가 우글거리며 "아편에 중독된 반신불수"의 사람들이 나뒹굴기도 하고, "강도 깽, 협잡배가 횡행"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상하이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일대 파노라마가 연출되는 모든 사회악이 가장 심각하게 연출"되는 "동양의 파리"이자 동양의 "시카고라 함에 부합할 만큼 향락, 범죄는 극단에서 극단으로"흐르는 도시였다.

초고층 빌딩이 높이 솟을수록 그와 비례해서 빈부의 격차도 늘어났다. 상하이의 퇴폐와 향락은 기형적으로 형성된 국제도시의 특징이기도 했다. 퇴폐와 향락의 생산을 유도한 것은 외국 자본이었고, 이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도 자본의 논리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상품화였다. 특히 상하이 경제 발전의 이익은 중국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하이에 진출한 외국인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었다.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향락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착취의 결과였다. 이러한 상하이의 현실 역시 식민지 조선인의 시선에 붙잡힌다. 나혜석이 그렇게 높이 샀던 프랑스의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상하이만은 비켜가는 것 같았다. 프랑스 조계지의 프랑스인들은 "자유, 평등, 박애만을 높이 부르면서 남을 착취한 돈으로 잘들 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국제도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형적 국제도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 조선인들은 관심을 기울인다. 상하이는 중국의 모든 부가 집중된 곳이자 사상적으로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암투를 벌이는 장소였으며, 식민과 독립이 상징적으로 대결하는 장소였다.

4. 러시아, 상상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대륙?



아메리카 문명을 끌어올까, 러시아 문명을 끌어올까 : 잡지 《삼천리》에서 실시했던 설문조사의 제목은 "우리는 아메리카(亞米利加) 문명을 끌어올까, 러시아(露西亞) 문명을 끌어올까?"였다. 홍양명(洪陽明), 박인덕(朴仁德), 박희도(朴熙道), 주요섭(朱耀燮), 안재좌(安在左), 김경재 등 여섯 명의 지식인들이 설문에 대답했다. 홍양명은 철학이 없는 미국 문명보다는 철학이 있는 러시아 문명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다. 박인덕의 경우는 다만 미국과 러시아는 정반대의 나라임을 설명하는 데 그쳤다. 박인덕에 따르면 개인주의 대 집단주의, 재산사유 대 재산국유, 종교 공인 대 종교 폐지, 가정제도 존중 대 가정제도 무관심 등 미국과 러시아는 철저하게 대립각을 형성하는 나라였다. 박희도는 미국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문학적, 예술적으로 계통이 있는 러시아를 본받아야 된다고 말했다. 주요섭의 경우에는 정치적 이상과 사회생활은 미국을, 교육과 문예와 경제제도는 러시아를 본받아야 하지만 현재 조선 사회의 상황으로 보면 그래도 러시아를 본받는 쪽이 더 좋다는 생각이었다. 안재좌는 미국은 '아메리카니즘'을 상징하는 나라이며, 미국의 문화는 갈 데까지 간 자본주의 말기의 썩어문드러진 문화라고 비난했고, 러시아의 문화는 일보 전진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라고 생각했다. 김경재는 선택하지 못했다.

이들의 답변 속에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당시 러시아를 바라보는 조선인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문명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아이콘으로 러시아가 발견되었다. 러시아는 문화와 예술, 그리고 경제체제 면에서 한동안 식민지 조선인들이 문명의 상징으로 생각했던 미국보다 우월하다는 인식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삼천리》에서 굳이 '아메리카냐 러시아냐'라는 설문조사를 한 것을 우연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누구보다 당대의 세계정세에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었던 지식인 그룹 사이에서 러시아가 새로운 이상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잿빛 모스크바 : 우랄 산맥을 중심으로 한편으로 시베리아가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스크바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상상하는 러시아는 시베리아의 광활한 벌판, 북극의 겨울, 백야, 댄스, 예술(음악), 혁명, 레닌, 공산주의(사회주의) 등 대륙의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빛깔을 지녔다. 나혜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스탈린 독재체제였다. 스탈린은 반대파를 숙청하면서 권력을 장악해갔고, 그 공포는 소비에트 러시아 인민에게 빠르게 확산되었다. 1928년에는 경제발전을 위한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행되었는데, 스탈린의 무리한 경제발전 계획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1933년 대기근이 일어났으며, 공업생산 성장률은 급속하게 하락하였고, 노동자의 평균 소득은 20~40%나 감소하였다. 모스크바는 잿빛으로 가득했으며, 산듯하고 명랑한 빛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사람들은 노동복에 헌 모자를 쓰고 다녔으며,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화려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알지 못할 굳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었지만 붉은 기운은 변하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거리는 붉은 글씨로 넘쳐났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권력을 잡았지만, 사람들은 말끝마다 "레닌이 이렇게 말했다고 첨부"를 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레닌의 말은 곧 '성서'와 같았다. 레닌의 죽음은 소비에트 러시아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었지만, 일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레닌의 죽음은 잡지 《개벽》을 통해 고매한 인격을 갖춘 성인이자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개벽》이 전한 레닌의 모습은 어쩌면《개벽》이 바라는 '혁명가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혜석도 레닌의 무덤을 방문하고, 방부 처리된 그의 모습을 본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혜석은 레닌의 삶과 사상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5. 동남아시아, 원시림에 대동아의 깃발을 꽂다



남방, 원시적 매혹의 공간 : 식민지 시대에 접어들면서 필리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남방은 새롭게 발견되어야만 하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싱가포르는 해상 교통의 중심지이자 동남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상업 시장으로 각광받았으며, 인도네시아 지역은 극동의 지중해로 부각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남방과 북방이 존재했다. 북방은 만주지역이었고, 남방은 동남아시아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구분은 일본의 식민지 개척열의 산물이었다. 동남아시아 지역이 근대 초기의 인식처럼 단순히 미개한 야만 세계의 표상에 멈추지 않고 개척과 탐험의 공간으로 새롭게 발견된 것은 1930년대 후반이다.

필리핀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필리핀의 독립문제는 끊임없이 식민지 조선인들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안창호의 경우 조선인들을 필리핀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웠었다. 필리핀 이민국에서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규정하고, '일본인의 이주를 허락한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안창호는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을 '중국인'명의로 필리핀에 이주시키려고 했다. 필리핀의 입장에서도 안창호의 입장에서도 조선과 조선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필리핀 이주 계획이 어그러지자 안창호는 미국의 식민지 통치 상황을 시찰하였다. 안창호는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바뀐 필리핀을 시찰하면서 미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아무런 거부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이 필리핀 '원주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최고의 교육 혜택을 주며, 고용 창출을 하고 있는 점에서 호의를 보냈다. 여러 지식인들이 바라본 남방은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때로는 반추하고 때로는 상대화할 수 있는 지역으로 부상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그렇다면 남양의 어떤 점이 식민지 조선인들의 관심을 붙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에게 남방은 어느덧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서서히 현실의 세계로 편입되고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2등 국민이라는 현실은 만주와 더불어 남방에 대한 관심을 부추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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