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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모토 료마 평전

마쓰우라 레이 지음 | 더숲
사카모토 료마 평전

마쓰우라 레이 지음

더숲 / 2009년 11월 / 325쪽 / 14,900원



제1장 제1차 탈번까지



료마의 가족


사카모토 료마는 덴포(天保) 6년(1835), 도사 번(藩) 고치(高知)의 향사(하급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사카모토 가는 본래 대상(大商) 집안으로 번에서 주는 봉록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번에 큰 금액을 기부할 정도로 부유했다. 이러한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와 3대 당주가 된 사람이 바로 료마의 아버지 하치헤이 나오타리였다. 그는 사카모토 가문의 외동딸 고(幸)와 혼인하여 2남 3녀를 두었으며, 그 중 차남이 료마였다. 그러나 료마가 열두 살 되던 해 아내 고가 병사하여 곧 새 아내를 맞아들였다. 료마의 새어머니 이요는 소문난 미인으로, 억척스러운 반면 도리에 밝고 자애로웠다. 그녀는 나기카타(長刀)의 명수였는데, 료마는 이러한 새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료마는 열네 살 때부터 검술 도장에 다니기 시작해 열아홉 살에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사 목록」이라는 무술 면허를 하사받았다. 이는 검술에 유도 기술을 합친 무예인데, 주로 칼을 쓰는 법이 실려 있어 검술 면허라고 할 수 있었다. 료마는 이 면허목록을 받자 더욱 심도 있게 검술을 연마하기 위해 에도로 갔다. 그런데 료마가 에도에 도착한 바로 그해(1853년 6월), 에도 만에 페리 함대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듬해 페리 함대가 다시 오자 에도막부는 미국에 개항을 허용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이 기화점이 되어 일본은 1858년 굴욕적인 미 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가와다 쇼료를 만나다

안세이 원년(1854), 페리함대가 두 번째 출몰한 그해 료마는 본국인 도사 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구리 류 야와라 병법 12개조와 25개조」를 하사받는데, 한 해 전에 받은 것은 면허 초전(初傳)이었고 이번에는 면허 중전이었다. 그 해 도사 번은 지진이 발생해 여러 면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료마는 번의 유명한 유학자이자 화가인 가와다 쇼로를 찾아가서 시국을 논하고 고견을 청했다. 이에 쇼로는 료마에게 해상 운송을 통해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조언했는데, 이때부터 료마는 무역과 해군 기능을 갖춘 해운회사 창설을 꿈꾸게 된다. 다음해 안세이 2년(1855)부터 료마는 포술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가와다 쇼로와 약속한 항해 훈련에 대한 구상은 포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해 12월 아버지 하치헤이가 향년 59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다음해 봄, 료마는 형 곤페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다시 에도로 돌아간다. 이때 료마의 나이 22세였다.

도사 근왕당 결성

에도로 돌아온 료마는 지바 사다키치 도장에서 수련하여 장도(長刀) 면허증을 받게 된다. 그런데 다음 해, 안세이 6년(1858) 막부가 마침내 미 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만다. 이는 서구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인 불평등 조약으로, 다이로(大老, 쇼군 휘하 막부 최고 관리자)인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허락도 없이 조인한 것이었다. 나오스케는 쇼군의 후계자를 정하는 중대 사안마저도 단독으로 결정해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14대 쇼군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막부에 불만을 품어오던 개혁세력들이 존왕양이(尊王攘夷, 천왕을 중심으로 뭉쳐 외세에 대항하자는 주장)를 내세우며 나섰다. 이에 나오스케는 2년에 걸쳐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는데 이때 처형된 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안세이 다이고쿠 사건). 이러한 정국의 변화를 모두 목격한 료마는 본국인 도사 번으로 돌아와 도사 근왕당에 가입한다. 근왕당은 '왕정복고를 추구하며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자 결성된 무사조직'으로 서구 오랑캐를 배척하는 양이(洋夷)를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도사 번의 전 영주 야마우치 요도를 추종했는데, 요도는 쇼군 계승 문제와 통상조약 문제 등에서 이이 나오스케와 격렬히 대립하다가 막부로부터 근신처벌을 받았다. 이로 인해 도사 번의 다이묘 자리는 선대 영주의 동생 도요노리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제1차 탈번

에도 말기 이미 허약해진 막부는 개혁세력과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여러 번들 중에서도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제도 개혁과 막강한 상업 자본을 바탕으로 막부에 도전하는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사쓰마와 조슈 번은 막부 정권의 혼란을 틈타 치열한 정권 쟁탈전을 벌인다. 비교적 온건파인 사쓰마 번은 막부와 정면대결보다는 연합을 택해 조슈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그런데 그런 와중인 분큐 2년(1863) 시마즈 히사미쓰(사쓰마 번의 다이묘)가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한다. 시마즈 히사미쓰는 교토에서 천황의 칙사 오하라 시게도미를 앞세우고 다시 에도에 입성하여 막부에 인사이동을 단행시킨다. 이리하여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막부의 3요직 중 하나인 쇼군후견직에 취임하고 개혁파인 마쓰다이라 슌가쿠 역시 3요직중 하나인 정사총재직에 취임하게 된다. 이어서 슌가쿠의 두뇌라 할 수 있는 요코이 쇼난이 참근교대제(각 영지의 제후들을 통제하기 위해 2년에 한 번 에도에 출사하게 하고 그 처자식을 볼모로 잡아두는 제도)를 허울뿐인 제도로 전락시키는 개혁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서일본의 여러 번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료마의 제1차 탈번도 그 격랑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료마는 근왕당의 간부로 활동했지만 그들의 과격함을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근왕당은 도사 번의 개혁 정치가 요시다 도요를 암살하겠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료마는 이렇듯 과격한 활동에서 벗어나 나름대로의 존왕양이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탈번은 주군을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료마는 한동안 오사카의 사쓰마 번저에 은신해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9월부터 에도에서 은밀하게 활동을 시작하는데, 한 달 후 도사 번의 새 영주 도요노리가 막부에 양이정책을 독촉하기 위해 천황의 칙사들을 옹호하며 에도로 오게 된다. 당시 열일곱 살이 된 도요노리는 존왕양이 과격파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이때 조슈 번에서도 존왕양이파의 거두들이 에도에 올라와 양이를 요구했다. 그러자 막부는 칙사들에게 조약 상대국을 모두 내쫓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막부는 우선 이들을 돌려보내고 이듬해 일제히 상경하여 양이론의 진원지인 천황의 교토 조정을 어떻게 하든 구슬려보려는 심산이었다.

제2장 가쓰 린타로의 객으로 들어가다



가쓰 가이슈(린타로)의 일기


분큐 2년(1862) 탈번한 그 해 겨울, 료마는 가쓰 가이슈를 찾아간다. 개국론의 옹호자로 알려진 그가 서구 함대를 구입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가쓰 가이슈는 분큐 원년(1860) 미 일 통상조약의 비준서를 교환하기 위해 일본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했던 막부의 해군 관료였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후 해군에서 방출되었다가 분큐 2년(1862) 7월 '쇼군해로 상경'을 제안하여 정치적인 복권을 이룬다. 분큐 2년은 앞서 설명했던 시마즈 히사미쓰가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상경했던 해다. 이후 천황의 칙사가 두 번째로 에도에 와서 막부에 양이를 독촉했다. 이러한 일들로 쇼군과 중신들이 부득불 교토로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가쓰 린타로가 배를 이용하여 교토로 가자고 건백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당시에 고관대작이 배로 이동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가쓰 린타로는 서양의 고속 증기선으로 이동하여 시간과 경비를 줄이고, 이러한 모습을 각 번에 보여줌으로써 반양이정책에 대한 막부의 정치적 효율성을 알리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가쓰는 군함 부교 나미(막부 해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직책)에 오르게 된다.

료마가 가쓰 린타로를 찾은 시기는 막부 고관의 첫 번째 해로 상경이 이행된 직후였다. 가쓰 린타로는 로주(쇼군 직속으로 국가 정사를 돌보는 직책) 오가사와라 나가미치를 수행한 후 돌아와 배의 선체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런 때에 료마를 비롯한 몇몇 낭인(무사)들이 가이슈를 찾은 것이다. 료마는 여차하면 가이슈를 암살할 생각이었으나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려면 먼저 그에 맞설 수 있는 근대화와 해군력을 갖춰야 한다"는 가이슈의 훈계에 감화되어 그 자리에서 그의 제자가 된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쓴 가쓰 린타로의 일기를 보면 "분큐 3년(1863) 새해 첫날, 료마, 조지로, 주타로 등의 몇몇 낭인이 문하로 들어왔다"고 적고 있으며, 이중 료마에게만 '료마 군'이라고 '군'을 붙였다. 그만큼 특별하게 여겼다는 뜻이리라. 료마는 가쓰의 문하에서 보다 큰 시각을 갖게 되는데, 그는 작은 번국이 아니라 일본국으로서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양이론도 개화로 바뀌게 된다.

료마의 해군 구상과 제2차 탈번

분큐 3년(1863) 2월 25일, 료마는 가쓰 가이슈의 도움으로 야마우치 요도로부터 탈번 죄를 사면받게 된다. 당시 요도는 도사 번의 다이묘(영주)로 복권되어 있었다. 사면으로 자유로워진 료마는 가이슈의 부관이 되어 고베 해군훈련소 설립에 힘쓰고, 각 번의 중신들을 만나는 등, 보다 큰 정치적 활동을 펼치게 된다. 양이론자였던 그가 이렇게 막부의 해군이 되어 활동하자 도막파(막부 타도파)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낭인들 사이에 그의 명망이 높아졌고 각 번의 고관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특히 그의 활동이 역사 속에서 두드러지게 된 것은 분큐 3년(1863) 4월 에도에서 막부 고관 슌가쿠와 만나면서부터이다. 당시 각 번에서는 존왕양이에 대한 주장이 거셌고, 이를 의식한 막부는 교토 조정에 양이론 철회를 주장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쿠이 번의 영주이자 막부의 고관인 슌가쿠가 막부에 양이론 철회를 주장하자고 역설했다. 더불어 교토조정에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막부정권을 조정에 반납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슌가쿠는 고립되어 후쿠이로 물러나게 되는데, 이러한 슌가쿠를 료마가 자주 찾게 된 것이다.

료마가 슌가쿠를 자주 방문한 것은 그가 막부 개혁론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쓰의 해군조련소 설립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가쓰 가이슈(린타로)는 오래전부터 고베에 해군조련소 즉, 해군사관 양성 기관이자 해군 직영 군수공장을 설립하고자 했다. 또한 그와는 별도로 고베에 사설학교를 세우고자 했는데, 그것은 완전히 사비로 운영해야 했기에 자금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료마가 각 번의 각료들을 만나게 되었고, 분큐 3년(1863) 중반, 막부 관료 무라다 우지히사로부터 1천 냥의 자금을 지원받게 된다. 이는 가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러한 거금을 내놓도록 협상을 성공시킨 것은 료마였다. 사실 료마는 고베 해군조련소를 에도 막부와는 별도의 해군으로 창설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 구상을 조정에 건의하려고 했으나 곧 '8월 18일 정변' 이른바 '교토정변'이 일어나 실패하고 만다. 이 정변은 사쓰마 번, 아이즈 번 등의 공무합체(公武合體, 조정과 막부의 제휴에 의해 정국안정을 꾀하려는)파가 존왕양이파를 교토의 정치 무대에서 축출시킨 정변이었다. 이로 인해 료마가 도움을 청하려 했던 관료들이 모두 축출되고 말았는데, 후쿠이 번에서도 요코이 쇼난 등의 개혁파들이 줄줄이 처벌을 받았다. 한편 도사 번에서도 근왕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료마 등에게도 귀국 명령이 내려진다. 이에 가쓰 가이슈는 도사 번에 탄원서를 올려 귀국 명령을 취소해달라고 부탁 하지만 이 탄원서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료마는 다시 탈번하는 신세가 된다.

료마, 가쓰의 일기에서 사라지다

분큐 4년(1864) 5월 고베 해군조련소가 우여곡절 끝에 발족되고 가쓰 가이슈(린타로)는 해군의 최고 지휘자인 군함 부교로 승진하여 스스로 아와모리(安房守)라고 호칭을 바꾸었다.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도 '린타로'에서 '아와모리'로 바꾸고 '가쓰 아와'를 즐겨 쓰게 되었다. 가쓰 아와가 막 군함 부교의 자리에 올랐을 무렵, 교토에서는 사쓰마 주도 하에 참여회의(교토 조정이 임명한 다이묘들로 구성된 회의)가 진행되었다. 회의는 모처럼 천황과 교토 조정이 양이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쇼군 히토쓰바시 요시노부가 교토에 올라오면서 회의는 해체되고, 국시(國是)는 요코하마 쇄항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회의가 끝나자 가쓰 아와는 쇼군을 모시고 연합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에도로 회항했다. 연합함대는 각 번국의 함선들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 사쓰마 번의 세일러선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막부에 협력했던 사쓰마 번의 생각이 달라진 것이었다. 한편 이때 료마는 에도로 회항하는 배에 승선하지 않았는데, 그는 홋카이도 개발 무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겐지 원년(1864) 6월, 이케다야 사건(막부를 옹호하는 무사 집단이 반막부 세력을 탄압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존왕양이의 과격파인 조슈 번의 부대가 곧 교토에 입성했고 막부 군대와의 전투로 인해 큰 불이 났다(금문의 변). 이에 막부의 해군조련소에서는 가쓰 아와가 새로 도착한 간고쿠마루호를 출격시키고자 했고 여기에 탑승할 열두 명의 승무원을 임명했다. 그런데 그중에 사카모토 료마는 들어있지 않았다. 아마도 가쓰 아와는 료마가 고베 해군의 틀에 가두어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 무렵 료마는 홋카이도 개발 무역 준비에 고무되어 있었다. 이 무렵에 쓴 가쓰 아와의 일기를 보면, "1864년 8월 23일, 료마가 교토에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을 끝으로 그의 일기에서 료마에 대한 기록은 사라진다. 이후 단 한 번, "료마군, 사쓰마 조슈를 주유하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적어놓았을 뿐이다. 아무튼 가쓰는 교토로 출항 명령을 내렸고, 조슈 군은 막부와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만다.

제3장 삿초 밀약을 주선하다



가고시마에서 북상하는 료마


교토에서 막부에 패한 조슈는 괴멸상태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막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2차 정벌로 조슈 번을 초토화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해협을 장악하고 있는 조슈 번에 대해 응징을 요구하는 서구 국가들의 압력도 반영되었다. 아무튼 이에 대한 대책을 위해 분큐 4년(1864) 9월 11일, 가쓰 아와를 비롯한 막부관료들과 사쓰마를 비롯한 각 번의 중신들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이때 각 번의 중신들은 한결같이 막부에 협력할 뜻을 제시하며 쇼군이 총독이 되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가쓰 아와는 "이제 사쓰마나 에쓰젠, 히고 등 강대한 번에서 기본 방침을 정해나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가쓰는 무능한 막부에 질려있었으며, 막부 정권이 각 번국들과의 연합정치를 해나가기를 바랐다. 가쓰 아와는 회합이 이루어진 날 전후로 로주 아베 마사토를 자주 만났는데, 아베는 '양이불가론'을 교토 조정에 뚜렷하게 말한 인물이었다. 가쓰는 아베에게 이제 '막부가 번과 연합하여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아베는 막부 정책에 대해서는 불만이었지만 막부 독재를 관철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가쓰가 매우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결국 이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가쓰는 에도로 소환되고 군함 부교직에서 파면당한다. 가쓰는 이후 다시 재임용되지만 해군조련소는 이때 폐지되는 운명에 처하고, 료마가 이를 정리하여 가메야마 샤추(龜山社中)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가메야마 샤추는 군수품 보급 등의 해상무역과 운송, 그리고 군사력을 갖춘 무역회사로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할 수 있었다.

사쓰마와 조슈 밀약을 맺다

게이오 원년(1865) 5월 1일 료마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조후번의 공경들을 차례로 알현하고 사쓰마와 조슈의 제휴를 설득했다. 당시 막부는 제2차 조슈 정벌을 계획하고 있고, 각 번에서는 이를 지지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도막의 선봉인 조슈 번이 이대로 막부에 의해 무너지면 일본은 다시 막부시대로 돌아갈 판이었다.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던 료마는 우선 막부의 1차 정벌에 협력했던 사쓰마 번의 중신들을 만났다. 사쓰마 번은 가쓰 아와와의 회동 이후 생각이 많이 달라졌으나 그렇다고 조슈 번을 지지하지도 않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료마의 설득으로 사쓰마와 조슈 번의 회동이 약속되었다.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의 가쓰라 고고로가 시모노세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나카오카 신타로가 사이고를 데리러 갔는데 사이고는 시모노세키 항에서 나카오카 신타로만 내려주고 자신은 곧장 오사카의 사쓰마 번저로 직행해버렸다. 가쓰라 고고로는 당연히 펄쩍 뛰었고, 료마도 당장은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교토에 가서 사이고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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