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STORY
허성호 지음 | 한국방송출판
B.K.Story
허성호 지음
한국방송출판 / 2008년 12월 / 416쪽 / 13,000원
B.K.Story
제1장 봉길, 세상에 빛을 보다탄생 윤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 마을에서 아버지 윤황 공(公)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여사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우의(禹儀)였으며 봉길(奉吉)은 별명이었습니다. 봉길의 아버지 윤황 공은 글공부는 배우지 못하고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살아온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남과 시비하거나 욕심 부리는 것 없이 그저 군자처럼 지내는 선량한 농민이었습니다. 어머니 김원상 여사는 시집오기 전 친정에서 『천자문(千字文)』, 『계몽편(啓蒙篇)』, 『동몽선습(童蒙先習)』 등 초급 한학(漢學)은 물론 중급 과정인 『소학(小學)』까지 배웠으며 한글도 충분히 공부하여 당시 농촌 아낙네로서는 상당한 학식과 교양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다 산 곱고 물 맑은 고장에서 어른들의 어여쁨을 듬뿍 받으며 태어난 봉길. 그러나 그 무렵, 나라의 사정은 임종을 코앞에 두고 있는 중병환자처럼 위태로웠습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싸고 있던 주변 강대국들은 너도나도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습니다. 처음엔 미국과 유럽의 강대국들이 자신들과 통상(通商)을 하자는 이유로 계속해서 조선을 넘보았고, 급기야 서구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이웃나라 일본의 압력에 굴복한 조선은 '강화도조약'(1876)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을 비롯한 여러 강대국들은 앞 다투어 조선의 자원을 캐내어 갔고,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습니다. 중국(청나라)은 자신들이 조선의 형님 나라였음을 주장하며 간섭을 더욱 강화하려 하였고, 몹시 추운 나라인 러시아는 조선으로부터 겨울에도 얼지 않은 항구를 얻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갈 계획이었으며, 일본은 조선을 삼켜 북쪽 대륙으로 진출할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미 중국에게 승리를 거두어 내정간섭을 하고 있던 영국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조선 정부의 허락도 없이 남해 '거문도(巨文島)'에 군대를 주둔시킨 이른바 '거문도 사건'(1885)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나라 안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신식문물을 갑자기 받아들이게 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특히 구식군대가 신식군대와 차별대우를 하는데 반발하여 일으킨 '임오군란'(1882)을 시작으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됐습니다. 고종 임금과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그밖에 문무 대신 등 위정자들의 의견은 삼삼오오 분열되었습니다. 서구 문물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지를 놓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로, 아니면 어느 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하는지를 놓고 친러파, 친일파, 친청파 등으로 나뉘어 세력다툼을 벌였으며 급기야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급진개화파가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갑신정변'(1884)이 일어났습니다.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이기지 못한 농민들이 분노하여 '동학농민운동'(1894)을 일으켰고, 이때 청나라와 일본은 서로 조선 땅의 자기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청일전쟁'(1894)을 벌였습니다. 졸지에 강대국들의 전장(戰場)이 되어버린 한반도는 더욱 황폐해졌습니다. 얼마 후 경복궁에서는 명성황후가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군 및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사건(1896)이 벌어졌으며, 이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 임금이 왕궁을 버리고 1년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1896)이 이어졌습니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1904)에서 잇달아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지배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결국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고, 5년 후인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완전히 나라를 빼앗기게 되어 36년간의 고통스런 식민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문무 대신들이 속출하였고,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안 그래도 헐벗고 굶주리던 백성들의 피해는 점점 커졌습니다. 1907년 8월부터 불과 2년 사이에 1만 7천여 명이 전사하였고, 같은 해 8월부터 연말까지 4개월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진 민가(民家)가 4천여 호에 달했습니다. 한편 봉길이 두 살 되던 해인 1909년 10월 26일에는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초대 조선통감이자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으로 쏘아 죽인 의거가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일제가 나라를 빼앗아 우리 민족을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던 시절, 그러나 우리 민족도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치던 시절, 봉길은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 태어났습니다.
제2장 골목대장 봉길초등학생 봉길과 3·1운동 봉길은 고집 세고 불같은 성격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또래들에 비해 기운도 세고 유독 활달한 성격으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였습니다. 봉길의 승부근성은 실로 대단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살가지(살쾡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살쾡이가 상대의 목을 물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놓지 않는 맹수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린 봉길의 승부욕이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봉길이 11살이 되던 해인 1918년 봄에는 마을에서 2km 정도 떨어진 덕산공립보통학교(현재의 덕산초등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일제가 '조선교육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식민지 교육을 강요하던 때였습니다.
시간은 흘러 해가 바뀌었고 1919년 1월 22일, 난데없이 고종 황제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황제께서 마지막으로 드신 식혜에 일제가 독약을 탔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지면서, 백성들은 큰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간 꾹 참고 지내던 조선 사람들의 울분이 크게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3·1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예산에서도 장터를 가득 메운 마을 주민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맨주먹으로 일본 헌병에 대항해보았지만 무자비한 총칼 앞에 무참히 쓰러져 갔습니다.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의협심이 강했던 어린이 봉길은 장터 한편에 서서 이 모든 광경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았습니다. 이때부터 봉길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하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우리 조선 사람끼리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왜놈 하수인 되라고 시키는 학교엔 다신 안 나가겠습니다." 봉길의 진심과 고집을 잘 알고 계셨던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봉길은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오치서숙과 매곡 선생 학교를 그만둔 뒤에도 배움을 향한 봉길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라, 그 무렵 창간된 《조선일보》, 《동아일보》, 잡지 《개벽》 등을 사 읽으며 신학문을 스스로 익혔습니다. 이러한 신문·잡지는 민족의식을 깨우고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목바리에서 수덕사 방향으로 5리(약2km) 정도 떨어진 '까마귀고개'에 '오치서숙(烏峙書塾)'이라는 서당이 있었습니다. 훈장님은 매곡(梅谷) 성주록(成主錄)이라는 선비였는데, 학식도 학식이거니와 꼿꼿하고 의롭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분이었습니다. 서산 출신인 그는 출중한 한학실력뿐만 아니라, 말을 잘 타고 성격이 호방하여 문무의 조화를 이룬 인물로, 서당 학생들에게 때로는 말 타는 기술까지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봉길의 교육에 지극정성이었던 어머니는 매곡 선생의 명성을 듣고 식민지 교육 대신 훌륭한 인품을 갖춘 매곡선생께 올바른 가르침을 받으라고 권유하였습니다.
매곡 선생은 흔쾌히 봉길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봉길은 <대학>을 시작으로 유교 경전의 기본이자 핵심인 '사서삼경'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옛 유교 경전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매곡 선생은 틈나는 대로 제자들에게 여러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애국정신과 현실감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매곡 선생의 조상이자 조선시대 사육신 중의 하나인 충신 성삼문(成三問) 이야기,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접혀 쓰시마섬(對馬島)에서 세상을 떠난 최익현(崔益鉉) 이야기, 신기에 가까운 병법으로 왜구를 격파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이야기, 을사늑약의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 이야기 등을 들을 때마다 오치서숙의 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무럭무럭 애국심을 키워갔습니다.
결혼 오치서숙에 다니던 청년 봉길에게는 오래 전부터 혼담이 오가던 신붓감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웃 삽교면 신리 뒷내마을에 사는 성주 배씨 성선(裵聖先) 공의 장녀 용순(裵用順). 1922년 3월 22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때 봉길의 나이는 열다섯, 신부의 나이는 그보다 한살 위였습니다. 용순은 참하고 어진 아내였습니다. 결혼은 봉길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혼인으로 인연을 맺게 된 장인어른 배성선 공으로부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실한 동학교도이자 실학자였던 장인어른의 사상과 철학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년 봉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매헌 윤봉길 갑자기 매곡 선생이 봉길을 불렀습니다. "그간 정이 깊게 들어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네만 이야기를 꼭 해야겠네 …. 이제 자네에게 더 이상 가르칠게 없네. 이제 여기를 떠나게. 자네의 학식은 이곳의 수준을 이미 뛰어넘었어. … 자네 같은 사람은 더욱 큰물에서 헤엄쳐야 하네. 너무 슬퍼 말게. 이 아쉬움을 달래고 자네와의 인연을 소중히 하고자 작별의 선물을 준비했네. 자, 받아보게나." 매곡 선생은 곁에 놓인 붓을 들어 하얀 종이에 큼직하게 '매헌(梅軒)'이라는 두 글자를 썼습니다. "자, 자네의 아호를 지었네. 나의 '매곡(梅谷)'에서 '매' 자를 따고 성삼문 공의 '매죽헌(梅竹軒)'에서 '헌' 자를 따서 '매헌'이라네.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뼈 속까지 스며들어 봉길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습니다. "매화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싹을 틔우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워 은은한 향기로 우리에게 봄이 왔음을 제일 먼저 알려 준다네. 자네도 모진 고난을 이기고 우리에게 봄을 알려주는 매화 같은 사람이 되게나." 매곡 선생은 봉길의 인생을 통틀어 학문으로나 인격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큰 스승이었습니다. 한문학만 가르친 여느 고루한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봉길로 하여금 보다 의롭고 뜨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품도록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후 책과의 계속된 만남 속에서 그는 어느덧 한문학과 신학문에 고루 능한 조선의 지식청년이 되어있었습니다.
제3장 농민의 희망, 봉길마을의 교과서『농민독본』 봉길은 오치서숙 동접들과 마을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봉길네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1927년이 밝아와 어느덧 20세가 된 봉길,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는 틈틈이 야학에 쓸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훌륭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 봉길은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 그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바로 『농민독본(農民讀本)』. '조선농민사'에서 발행한 『조선농민』이란 책을 참고하여 봉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이 책은 농촌운동을 통해 나라를 되찾자는 내용은 물론, 우리 농민이 더욱 행복하고 부강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흙을 사랑하고 농민을 아끼며 시대를 앞서나간 봉길의 선각자적 사상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봉길로부터 야학지도를 받은 마을 사람들은 이 『농민독본』을 수십 년이 지나도록 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독립정신이 조선을 살리는 원동력인 것과 같이, 농민의 공동정신이 또한 조선을 살리는 긴요한 요소입니다. 독불장군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힘으로 아무렇게나 하여 이기기 어려운 일을,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로 낡고 물들고 더럽고 못생긴 것을 무찔러 버리고 새롭고 순수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안 될 조선에 있어서, 또 더욱 남달리 가진 힘이 빈약한 조선의 농민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경우와 이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일치 공동의 필요를 절실히 느낍니다.(『농민독본』 3권 '농민의 앞길', 제6과 '농민과 공동정신'편 중에서)
뜻밖의 손님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이 봉길을 찾아왔습니다. 봉길이 명함을 받아보니 '<시조사> 기자 이흑룡'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 … 사실 저는 <시조사>를 연락처로 삼으며 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만주에 있는 어느 독립단체에서 국내 연락책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팎을 연결하여 뜻있는 분들을 모으고 있는데, 이번엔 멀리서나마 윤선생에 대한 명성을 듣고 뜻을 함께 나누고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참으로 반갑습니다." 처음부터 봉길을 믿을 수 없었던 이흑룡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대화를 나누던 중, 봉길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뜻이 통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흑룡은 아는 것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나라 밖의 독립운동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봉길에게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특히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위기에 처한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또한 국제 정세에 대한 보도도 알려주었습니다. 봉길은 이흑룡을 보내고 난 후, 가슴이 터질 듯한 흥분을 느끼며 며칠 동안 잠도 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오로지 마을 걱정, 나라 걱정으로 살아온 지난날들…. 피 끓는 청년 봉길의 흥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이흑룡이 또 봉길을 찾아왔습니다. 이날도 이흑룡은 봉길에게 그동안 있었던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상에 대하여 상세히 이야기했습니다.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65세의 노인 강우규(姜宇奎)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인 김상옥(金相玉) 의사, 일제가 조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기 위해 만든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羅錫疇) 의사,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다 발각되어 붙잡힌 박열(朴烈) 열사 등의 이야기를 듣자 봉길의 가슴은 폭발할 듯 요동쳤습니다. 이흑룡은 말을 이었습니다. "해외에서 활약하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게 더 이상의 평화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미친개에 물리고 있으면서 미친개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善言)'에 따라, 미친개들에게 몽둥이를 내리쳐 쫓아버리기로 혁명의 방향을 고쳐 잡았습니다." 이흑룡이 다녀간 뒤, 봉길은 도무지 말로는 통하지 않는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방법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고민에 사로 잡혀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친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니 …. 그렇다면 이를 위해 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난 한낱 농촌의 청년이 아니던가….'
얼마 후, 봉길은 이제껏 해온 여러 가지 농촌 부흥운동(야학·독서모임인 각곡독서회·농촌 부흥운동 조직인 목계농민회(沐溪農民會)·운동모임인 수암체육회)을 모두 모은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농촌 부흥운동과 함께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그 단체의 이름은 바로 월진회(月進會). '날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마다 전진한다'는 뜻으로서, 낮에는 일하고 달이 뜬 밤에는 함께 모여 공부하는 목바리 사람들의 생활이 잘 드러난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해가 지면 달이 뜸으로써 다시 세상을 밝힐 수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어, 비록 지금은 나라를 빼앗겨 어둠속에서 살고 있지만 청년들의 노력으로 세상을 다시 빛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었습니다. 몇 년 전 야학으로 시작했던 농촌 부흥운동이 드디어 '월진회'라는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농민운동 조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이때가 1929년 4월 23일. 월진회의 눈부신 활약에 목바리 사람들은 강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