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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신정일 지음 | 창해
영산강

신정일 지음

창해 / 2009년 11월 / 360쪽 / 17,000원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 용흥사 계곡에서 광산구 송대동까지



영산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운명애는 내 본성의 핵심 일주일 사이 호남평야는 절반이 넘게 추수가 끝나가고 있었다. 정읍 휴게소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정읍 갈재를 넘는다. 갈재를 넘기 전부터 동진강 유역이라면 터널을 지나면서부터 영산강 유역에 접어들게 된다. 입암산에서부터 방장산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능선을 넘어 남도 사람들이 전주로, 서울로 올라갔을 것이고, 우암 다산 추사도 그리고 수많은 유배객들도 이 고개를 넘어 오고 갔으리라. 장성호를 지나 병풍산 자락에 있는 용흥사에 도착했다. 용흥사는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몽성산에 있는 사찰로 백양사의 말사이다. 정확하게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설에는 600년 백제 침류왕 때 마라난타가 창건했으며, 원래의 이름은 용구사였다고 한다.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단맛 다 본 사람이 떠나는 것 절 뒤편 용흥사 계곡으로 접어든다. 물은 쉴 새 없이 흐른다. 나는 개울가에 앉아 푸른 이끼로 덮인 돌들 사이로 흐르는 물에 노란 단풍잎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물소리를 듣는다. 시작한다는 것, 그리고 끝낸다는 것. 나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시작하고 끝맺을 수 있을 것인가. 안도현 시인의 구절처럼 나 역시 인생의 쓴맛 단맛을 어느만큼 보았고, 그래서 이렇게 수도 없이 떠나고 돌아오는 게 아닐까?

영산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에서 발원하여 장성군 광주광역시 나주 함평 무안 영암군 등지를 흘러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 138km의 강이며 세 개의 직할하천과 다섯 개의 지방하천, 그리고 151개의 준용하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병풍산에서 발원하여 장성호로 유입된 뒤 장성읍을 지나 황룡강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 강은 황룡면을 지난 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리를 지나 송내동에서 극락강과 몸을 합한다. 영산포는 고려시대부터 조창이 설치되어 물자 수송의 중심지였다. 전라도 남부의 쌀은 이곳을 통해 영산강의 수운을 이용하여 다른 지방으로 수송되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영산포에 소기선이 왕래하였으나, 육상 교통의 발달과 하상의 변동으로 지금은 운행되지 않는다. 영산강의 옛 이름은 금천 금강 금강진이었으며, 신안군 영산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나주 근처의 포구를 개척한 영산포의 이름을 따라 영산강이라고 했다. 이 강 유역에는 구릉지가 많고 평야는 비교적 좁다. 주요 평야는 극락강 황룡강 지석천이 합류하는 지역 일대에 분포한다.

북하천과 용두천이 서로 몸을 합하고

백양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장성호에 유입하여 황룡강을 경유, 영산강의 상류가 된다. 백양사 근처부터 백화봉 서쪽 사면까지 비자나무 순림과 굴거리 나무가 있다. 내장산, 입암산과 함께 1971년에 내장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백양산은 그 남부에 속한다. 이 백양산 자락에 백양사가 있다. 백양사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우뚝 솟은 입암 백양의 산들이 벌써 빨갛게 물들어가고, 강은 여울져 흐른다. 이곳 용두리에서 두 개의 하천이 황룡강으로 유입된다. 그 하나가 백학봉 자락의 백양사를 지난 북하천은 쥐골, 가인골, 선마실골을 지나고 약수면 소재지를 거쳐 용두들에서 합류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물길은 북하면 월성리 남쪽의 용구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대악리, 단전리를 지나 용두리 용두산 밑에서 황룡강에 흘러드는 용두천이다. 이곳 황룡강에 건설된 장성댐은 높이 36m, 제방 길이 603m이다. 총 저수량은 8,970t이며 1개군 4개 읍면 열일곱 개 마을에 걸쳐 있다. 짙푸른 장성호의 물은 나주 문평 다시 함평 월야 해보 광산 삼도 임곡 등 수많은 지역의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생음악을 연주한다는 '이뭣고'라는 음식점에서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다. '이 뭣고?' 그래, 모든 것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의문점, 즉 물음표가 없었다면 모든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진전해 왔겠는가.

입암산에 입암산성이 있다 장성호 끝자락에서 올라간 남창골 깊숙한 곳에 입암산이 있는데,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를 가르는 그 산의 정상에 입암산성이 있다. 전라남 북도를 잇는 국도와 철도, 그리고 호남고속도로가 이 산 서쪽 방장산 사이의 골짜기 갈재를 통과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고 서해안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입암산성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지금은 억새와 잡목만 우거진 분지 같은 이 입암산성에 예전에는 갱정유도(일심교)를 믿는 사람들이 살았다. 쪽을 지거나 상투를 틀고 사서삼경 같은 고전을 읽으며 살던 그들은 1975년 용인 민속촌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되돌아왔다가 결국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강은 소리를 잃고 장성댐 아래에서부터 강은 소리를 잃어버린다. 영산강을 따라 걸으며 강물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려던 나의 바람은 이렇게 무참히 꺾이고 만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가 노래했던 시냇물 소리도, 징검다리도 보이지 않는 이 강물은 이제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떠밀려온 쓰레기들의 아우성으로, 물결의 일렁임으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품어내는 향기로, 가슴 답답한 침묵으로만 말하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정든 전주를 떠나온 것을 깨닫는다. 문득 느껴지는 이 미묘한 감정은 아랑곳없이 바람은 더 세게 불고 물결은 더욱 크게 일렁인다.

드넓은 억새밭 따라 강물은 흐르고 - 담양 용소에서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까지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개 장성군에 전해오는 시조에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전라북도 정읍 사람들이 남도로 오고자 할 때 넘어야 했고, 남도 사람들이 서울로 갈 때 꼭 넘을 수밖에 없었던 갈재는 나라 안에서도 제법 험한 고개, 즉 노령으로도 불렸으며 이 고개 아래에 지금은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호남 터널이 있고, 아래 왼쪽의 능선을 보면 윗부분이 마치 사람의 눈썹과 콧마루처럼 파인 바위가 보이는데, 이를 미인바위, 또는 갈애의 전설이 얽혀 있어 갈애바위로 불린다. 전설 중 하나는 어느 지관이 이 바위 때문에 이 지방에 미인이 많지만 풍기가 문란하다면서 정으로 바위의 눈을 파버리는 바람에 지금도 이곳은 미인뿐만 아니라 애꾸도 많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풍수지리의 눈으로 볼 때는 이러한 장성의 지형이 용 두 마리가 고을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라고도 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둘째가 장흥'이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선비 정신의 맥을 잇는 서원들 이곳 장성에는 선비정신을 잇는 여섯 군데의 서원이 남아있다. 그중 하서 김인후를 모시는 황룡면 필암리의 필암서원과 망암 변이중을 모신 장성읍 장안리의 봉암서원은 장성사람들에게 선비 정신의 맥을 이어주고 있다. 장성군은 조선 초기 왕자의 난을 피해 지금의 황룡면 맥호리에 숨어 살았던 울산 김씨(김인후 1510~1560)가 살던 곳이다. 김인후는 '청산도 절로 절로 / 산 절로절로 수 절로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절로 /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는 시조를 지은 사람으로, 태극도설이라는 독자적인 학설을 주장한 빼어난 성리학자였다. 그는 성균관의 대성전에 모셔져 있는 '해동 18현 중의 오직 한 사람뿐인 전라도 사람'으로서, 장성 사람들의 긍지를 갖게 해준 인물이다.

멀리 송정리가 보이다 황룡강이 휘돌아가는 곳에 송정리가 보인다. 이곳 광산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인데, 일명 노지奴只라고도 한다. 신라가 백제에서 빼앗아 그대로 도독을 두었다. 경덕왕 16년에 무주武州로 고치고, 진성왕 6년에 견훤이 습격하여 의거하고 후백제라 칭하다가, 이윽고 전주로 도읍을 옮겼다. 궁예가 고려 태조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으니, 태조 19년에 이르러 신검神劍을 쳐서 멸망시키고 광주光州라 고쳤다 - 이곳 송정리가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시대부터 대전과 목포를 잇는 철도인 호남선과 이곳과 삼랑진을 잇는 철도인 경전선이 갈라지는 곳으로서, 또는 광주시의 들목으로서 철도 교통에 있어 큰 몫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 소리를 마음으로 듣다

다시 영산강 둑길에 선다. 본래 광주 소지면 지역으로, 선암역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선암리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도회지가 되었지만, 예스럽고 정취어린 이름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강변 남쪽에는 배낫드리(선암진) 나루터가 있었고, 선암역 관터 옆에 있는 밭에는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던 당산나무가 있었다. 구장터 시무논 옆에는 말뚝논이라는 논배미가 있었는데, 이는 땅이 매우 비옥하여 이 논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말뚝 박은 것처럼 틀림없이 이득을 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송호영당은 사암 박순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한편 소촌리는 〈떠나가는 배〉에서 다음과 같이 식민지시대의 고뇌를 읊었던 시인 박용철의 고향이기도 하다. -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



광주의 진산, 무등산 강 건너 멀리 무등산이 보인다.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북구와 화순군 이서면 및 담양군 남면과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길래야 매길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 다른 의미로는 무등은 불교와 인연이 있는 말로서 『반야심경』에서 부처가 절대 평등의 깨달음, 곧 '무등등'을 말한 대목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절대 평등의 무등이란 평등이란 말을 쓸모없게 하는 완전한 평등을 뜻한다. 무등산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그저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큰 골짜기들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무등산의 계곡으로는 증심사 계곡, 동조골, 큰골, 용추계곡, 곰적골, 원효계곡, 석곡계곡 등이 있으며, 계곡마다 폭포와 암반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무등산 정상은 '정상 3대'라 불리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개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왕봉에서는 무등산의 최고봉답게 전라북도 순창뿐만 아니라 광주 담양 영암 나주 등 호남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며, 맑은 날에는 지리산까지 조망된다. 또 비로봉이라고도 불리는 지왕봉 꼭대기의 뜀바위는 임진왜란 때 김덕룡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뜀바위를 건너뛰곤 했다는 바위가 있고, 마지막으로 반야봉이라고도 불리는 인왕봉은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낮다. 이렇듯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무등산은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이 끊일 날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극락강이 황룡강과 몸을 합하다 - 화순 쌍봉사에서 나주시 금천면 원곡리까지



모든 강의 아침은 안개로 시작한다

극락강의 발원지, 용소 극락강은 담양군 용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영산강 삼백오십 리, 138km의 발원지가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한국의 산하』를 지은 이형석 선생은 '황룡강을 발원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립지리원으로부터 지형도실측에 따른 자료 제시와 함께 담양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의 용흥사 골짜기인 쪽재골이 발원지라는 회신을 받았기 때문에 쪽재골을 영산강의 발원지로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영산강 삼백오십 리》를 지은 광주의 김경수 씨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담양군 용면 용연리 치재산 동남쪽을 발원지로 삼아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중 어느 곳이 영산강의 발원지인가에 대해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4대강을 답사한 선례에 따라 유로가 가장 긴 황룡강을 본류로 보기 때문에 황룡강을 본류, 극락강을 지류로 보고 용추산 일대의 답사에 나선 것이다.

담양댐에 갇혀 있는 강물 가뭄 뒤끝이라서 그런지 영산강 시원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는 용소에서는 그리 많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용소에서 흐르는 물길을 따라서 담양댐에 이른다. 담양댐은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 대성리에 있는, 극락강의 본류를 가로지르는 댐으로서, 영산강유역종합개발 1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1973년 9월 사이에 농업진흥공사가 건설했다. 담양호를 내려다보는 산이 담양의 진산, 추월산이다. 추월산은 용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사이에 도계를 이루고 있으며, 전라남도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밀재와 백암산 사이에 서서 주위에 불갑산 방장산 금성산을 거느리고 있다. 기암괴석과 깎아지른 절벽이 많고 사계절에 걸친 산 모습의 변화가 뚜렷한 이 산은 각종 약초가 많아 예로부터 명산으로 불렸으며, 진귀종인 추월산 난초가 자생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또 상봉 추월봉 아래에는 고려 때 보조국사가 창건했다는 보리암이 있으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담양호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담양호 건너편에 있는 금성산은 금성면과 전라북도 순창군 사이의 도계를 이루는 산으로, 이곳에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금성산성이 있다. 높이는 2~7m이며 전라남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사적 제353호로 변경되었다. 이 성은 1409년에 개축하였고,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0년에 부사 최동립이 개수하면서 내성을 구축했다. 외성 2km, 내성 700m에 달하는 석성인데, 건물들은 층계 형식으로 불타 없어졌으며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의 터가 남아 있다.

그림자 쉬는 정자에 앉아 그대를 그리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담양 소쇄원은 조선 중종 때 사람인 양산보의 별서 정원(뜰 같은 곳에 지은 집과 정원)으로, 1983년에 사적 제304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40호로 변경되었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공덕장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며, 양산보는 이러한 이름을 가진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지신의 호를 소쇄옹이라 했다. 소쇄원의 평면적인 모습은 계류를 중심을 하는 사다리꼴 형태이며, 흙으로 새메움을 한 기와지붕의 직선적인 흙돌담이 외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계곡의 굴곡진 경사면들을 계단상으로 처리한 노단식 정원의 일종이지만, 구성면에서는 비대칭적인 산수원림이다. 양산보는 소쇄원을 매우 아껴서'절대로 남에게 팔지 말 것이며, 하나도 상함이 없게 할 것이며, 어리석은 후손에게는 물려주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초막을 짓고 살았던 송강 정철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은 율곡이 죽은 해인 1584년, 정철이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짓고 살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 전까지 4년 동안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정철은 가사문학에 있어서 뛰어난 업적을 남겨 그의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은 오늘날까지도 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송강 정철만큼 파란곡절의 생을 살다간 사람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해야 했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조금의 용서함도 없었으며' 화를 산같이 입더라도 앞장서 싸우기를 불사했다. 그러한 정철의 성격상 정치가로서의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를 읊은 송강 정철의 진면목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숨어 살 계획 이미 정해져

세모에는 장차 내 떠나가리라.

항상 원하는 물고기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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