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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관한 작은 신화

스벤 오르톨리, 니콜라스 비트코브스키 지음 | 에코리브르
과학에 관한 작은 신화

스벤 오르톨리, 니콜라스 비트코브스키 지음

에코리브르 / 2009년 10월 / 224쪽 / 12,000원



신의 저수조


각 문화는 고유한 과학신화를 갖고 있다. 예컨대 영국의 알렉산더 플레밍처럼 미국에서는 에디슨이, 그리고 비서방 국가들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연구가들이 제 위치를 찾게 되었는가. 또 각 시대마다 나름의 특별한 신화들이 있었다. 비록 베르나르 팔리시의 이름이 역사서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잃어버린 고리와 영구운동이 오늘날엔 버림을 받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상당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비효과와 빅뱅 등도 신화의 무대에 새로이 주목받으며 등장했다.

그런데 신화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존재 자체가, 곧 그 유용성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탈신화화 시도는 불필요한 평가들로 귀결되고, 모르는 사이 집단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 더 나아가 비식자층의 맹신과 반계몽주의로까지 변질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화는 예컨대 몰이해나 사고의 흐름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외감, 필요한 수학적 무기를 갖지 못해 위대한 이론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는 데 따른 원통함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공통된 견해다. 그리고 꽤나 일상적인 이 사소한 절망은 이미지나 구체적 언어 행위, 이를테면 사과나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말의 도용으로 표출되곤 한다. 그런데 죄의식을 유발하는 이런 과정은 과학신화의 탄생과 구축 시에 더욱 조심스러운 또 다른 과정을 불러온다.

우리는 지식이란 흔히 발명이 보통의 사물이나 개념에 대한 일종의 색다른 시선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며 언젠가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새로운 이론이 발표되면 그 자세한 내용은 이해하지 못한 채, 부차적이랄 수 있는 이론의 맥락에 대한 파악만으로 그 이론을 성물처럼 여기고 작은 박물관에 고이 소장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그것은 더 이상 알 필요가 없는 이론이 된다. 그럼으로써 부적처럼 앞으로 닥쳐올 형이상학적 고뇌에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동시에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통과 (뉴턴의) 사과, 여러 수학 공식들을 이미 밝혀진 진리의 매체로 간주하는데, 그것은 고대 왕들이 고귀한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 무덤 속에 함께 묻도록 했던 부장품과도 같다. 이를 통해 일반대중은 위대한 인물이나 새로운 개념을 신성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은 자연에 대한 객관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조사 과정에 있지 않으며, 또 위대한 발견은 대단한 과학적 기계 장치가 아닌 매우 평범한 한 수단을 통해 자연과의 '호의적인' 대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일상 언어보다 복잡성의 표현에 더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는 우리 같은 한 개인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확실성의 표현으로서 과학신화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컨대 아인슈타인 이론 같은 새로운 발견이 간단히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 유일한 해결책이라면 "아인슈타인은 형편없는 학생이었다!"는 식으로 그 인물의 '인간적' 면모를 강조함으로써 그의 요술 같은 공식을 신화화하는 것이다. 이런 일상의 신성화는 어쩌면 지혜의 열쇠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신화 그 자체는 과학과 (과학을 이해하는) 보통 사람들, 불가해한 것과 일상적인 것, 요술처럼 신기한 것과 범상한 것을 이어주는 연결 부호 구실을 한다. 신화라는 이 연결 부호는 본질적으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해묵은 이중성을 통해 그 존재를 알릴 수 있다. 예컨대, 신화 속의 과학자는 반드시 이중적이고 정신분열적이며, 최고일 수도 최악일 수도 있어야 한다. 신화도 열기관처럼 온열원(좋은 것)과 냉열원(나쁜 것)이라는 두 가지 원료를 바탕으로 완성된 경우에만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또 아이디어상품 판매점에서나 볼 수 있는 기구로 날개판 네 개가 달린 작은 회전장치인 크룩스 복사계는 과학신화의 기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 비밀은 각 날개의 양면이 검정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 기구에 광선이 내리쬐는 동안은 어떤 것으로도 그 빛을 차단할 수 없다. 역사상 가장 뿌리 깊은 과학신화들을 한차례 조명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여기에서의 보잘것없는 탈신화화 시도는 오로지 이 기구의 회전을 가속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 설령 그 신화를 단편적으로나마 조금씩 입증해나가는 것이 그 목적이라 해도 - 그 신화에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얘기다.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통

애벌레마냥 완전히 벌거벗은 채 쇠물닭처럼 목욕통 속에 몸을 담갔던 아르키메데스는 갑자기 "유레카"를 외치며 시라쿠사의 대로로 황급히 달려 나갔다. 오늘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난 그 위대한 인물이 마침 액체 속에 가라앉은 모든 물체에는 이동한 유체의 무게와 같은 상향 수직력이 작용한다는, 유명한 유체정역학의 원리를 발견한 참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87년 시라쿠사에서 태어나서 기원전 212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사이의 삶은 대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5세기경 철학자 프로클로스가 이르기를, 어느 날 아르키메데스가 우쭐대며 헤이론 왕에게 대뜸 "지렛목을 하나 정해주면 당장이라도 지구를 들어 보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는 마침 아르키메데스가 제작감독을 맡은,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인 돛대가 세 개 달린 선박 시라쿠시아 호의 진수를 앞둔 시점이었다. 라틴어 주석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항구에서 진정한 '쇼'를 펼쳐 보이게 된다고 한다. 놀라워하는 관중들 앞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직접 도르래 장치를 가동하여, 뱃전까지 화물을 가득 싣고 선원까지 모두 승선한 배를 마른 모래톱으로 끌어올렸던 것이다. 힘은 극한치 이하에서는 효율적으로 발휘되지 못한다는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절대단언에 대한 눈부신 반증이 아닐 수 없었다. 첫 번째 이야기, 첫 번째 교훈, 겉보기와 달리 아르키메데스는 미치광이가 아닐뿐더러 과학 덕분에 세상을 지배하게 되며, 이후 그의 사상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가 좀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듯하지만 매우 유능한 한 학자의 실루엣을 더듬어갈수록, 그 실루엣은 매우 중요한 핵심개념에 접근하고 있다. "과학, 그것은 대단한 것이면서도 단순한 것이다"라고 주문을 외우자.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지 즉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유럽기술프로그램이나 과학전문월간지에 등장하는 '유레카'의 의미다. 아울러 우리를 멀고 먼 시대의 아르키메데스가 한층 가깝게 만드는 것은 천재성이 아니라 연결 부호처럼 서로를 이어주는 공통성이다. 새벽을 여는 힘찬 닭의 울음과도 같이, 누구든 퍼즐을 맞추거나 자동차의 고장 원인을 알아냈을 때 저마다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해 수천 마디의 작은 "유레카"가 터져 나올 수 있으며, 마치 성체(聖體)의 존재를 알려주는 적색등처럼 여기에서 과학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피카소도 말했지만 흔히들 과학을 일컫는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나는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 우연히 발견할 뿐"이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 두 번째 교훈, "유레카?" "Bon sang mais c'est bien sur(젠장, 이거였어!)"라는 관용어의 오리지널 비전이랄 수 있는 '유레카'는 그 간결하고 꾸밈없는 표현 속에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과학적 발견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무려 23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린다. 반면에 아르키메데스는 두려움과 감탄이 뒤섞인 일종의 경외심을 자아내는데, 이는 그가 남긴 유산의 범위가 워낙 방대할뿐더러 우리에게 다소 염려스러운 학자의 이미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기원전 214년경 그리스의 마지막 독립 열강이었던 시칠리아는 마르켈루스 로마 집정관의 군대에 공략당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가공할 만한 무기들과 태양광선을 모아 갤리선의 돛과 선체에 불을 지르는 그 유명한 화경(火鏡) 덕분에 로마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했을 화경은 제외하더라도, 아르키메데스가 시라쿠사를 위해 무기 발명가로서 재능을 십분 발휘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원전 212년, 일부 반란군이 배신을 하면서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고 시라쿠사에 대한 포위 공격도 끝이 났다. 플로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시라쿠사 함락 당시 뒤뜰 모래밭에서 도형을 그리며 연구에 몰두하던 아르키메데스는 들이닥친 로마 군인에게 자신의 그림을 짓밟지 말라고 경고했다가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상은 전설일 뿐이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시라쿠사의 운명만큼이나 군비 경쟁에도 무관심했음을 보여준다. 아르키메데스의 종말에 관한 이설들을 종합해보면 그가 단 하나, 자신의 생각에만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야기, 세 번째 교훈, 진리탐구에 전생을 바친 과학자는 도덕적 고찰에 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른바 선악의 피안에서 중립을 지킬 뿐이었다. 말하자면, 과학적 진리는 필연적으로 인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도덕을 담고 있지 않으며 자연은 윤리학의 법칙을 무시한다"는 미국국립과학원 회원 피터 듀스버그의 우려 섞인 이 말은 분명 순수한 열정에서 우러난 것이었겠지만 그 전면에는 과학자의 수호자적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신화적 이미지가 음화를 갖고 있듯이 그 이면에도 인간의 선(善)에 사로잡힌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이 아르키메데스에게 영감을 주었든 아니면 아르키메데스로 인해 과학이 오히려 해방돼 맹위를 떨치게 되었든 과학이야말로 위력적인 것이라는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첫 번째이자 오랜 과학 영웅으로 유클리드나 피타고라스가 아닌 아르키메데스를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뉴턴의 사과

위대한 물리학자 뉴턴의 전기를 쓴 작가들 모두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견을 같이한다. 바로 뉴턴이 1726년 눈을 감기 전날에야 떨어지는 사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점 말이다. 나중에 『아이작 뉴턴의 일생에 관한 회고록』을 쓰게 되는 스투켈리는 1726년 4월 15일에 있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때 우린 저녁 식사 후 정원의 사과나무 아래에서 느긋하게 차 한 잔을 마시던 중이었다. 여러 화제를 입에 올리던 뉴턴은 마침 중력의 개념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 정말 그와 비슷한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노라고 내게 말했다. 실제로 정원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중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차갑고 거만한 성격이었던 뉴턴은 다소 저속한 표현이긴 하지만 "무능한 이류 수학자들이 치근대지 않도록 하려고" 일부러 자신이 쓴 대부분의 텍스트를 방정식으로 잔뜩 채움으로써 남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다. 정작 수학을 안다고 자부하던 스투켈리도 뉴턴이 평소 자신과 난해한 학문적 사상을 주고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어조로, 응축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대담성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 일화에 얽힌 이야기를 처음 전해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감지했을 것이다. 속내를 털어놓을 만큼 지근한 사이면서도 과학에 관해 무지한 그 누군가만이 뉴턴에게 사과 이야기를 어렵게 '끌어낼' 수 있었으리라. 이처럼 모든 가능성으로 미루어보건대, 그것은 뉴턴과 전혀 친밀하지 않았던 그의 가족 가운데, 그나마 그가 처음으로 가깝게 지냈던 유일한 여성, 바로 그의 조카딸 캐서린 콘듀이트일 것이다. 다음과 같이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사과 이야기의 배경에는 한 여인이 있었고, 그녀가 그 이야기를 지어낸 장본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좋은 게 있다. 삼촌이 눈을 감을 때 캐서린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유언집행인의 역할까지 도맡아, 유품 중에서도 뉴턴이 생애의 초년을 보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떠난 후 곁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트렁크 하나를 보관하게 된다.

그 트렁크의 내용물을 조사하는 일은 한 주교에게 위임되었는데, 신속한 조사는 주교를 당혹케 했다. 그리하여 (원문의 표현처럼)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그는 트렁크 뚜껑을 거칠게 닫아버리는 것이다. 이후 그 트렁크는 1936년 캐서린의 후손인 라이밍턴 경이 경매에 부칠 때까지 집안의 가보로 남아 있게 된다. 이때 영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존 케인스는 이런 '후손으로서 예의 상실'에 격분하며 트렁크의 내용물 대부분을 사들였다. 무려 수천 쪽에 달하는 연금술과 신학 관련 문서들을 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중력이 화금석보다 훨씬 더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공통된 이론적 범주에 포함되는 자연계의 다른 힘과 달리 중력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물리학자들의 숙면을 방해하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케인스는 이렇게 자문해본다.) 과연 뉴턴을 마술사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와 그 우주가 담고 있는 것을 향한 그의 시선 때문이리라. 뉴턴에게 수수께끼나 미스터리는, 자신의 순수 사상을 신이 비교도회(秘敎徒會)에게 현자의 보물을 찾을 수 있도록 세상에 배치해둔 신비한 지표들에 적용함으로써 해독 가능한 것이었다. 사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것도 없이 뉴턴의 비밀을 간직한 것은 바로 그의 트렁크이고, 또 트렁크의 존재와 뉴턴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조카딸 덕분이다. 어쨌든 고마워요, 캐서린.

E = mc2

과학적 상상계의 양 극단에는 한 외침(유레카)과 한 공식 E=mc2이 존재한다. 전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외침 너머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육체의 힘, 후자는 정신의 힘을 상징한다. 아르키메데스가 자연법칙들을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면, 아인슈타인은 순수한 영혼이며 바로 그것이 그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뇌를 의학계에 기증하는 한편, 시신도 화장 후 매우 가까운 지인들만 지켜보는 가운데 사방에 뿌려졌다. 존 돌턴의 망막(색맹자의 망막)을 분석하다가 그의 망막에 녹색을 감지하는 시세포가 없음을 발견했던 것처럼, 위대한 아인슈타인의 뉴런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어쩌면 비정상적인 신경세포 결손이나 증식이 발견되기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스캐너와 전자현미경의 크나큰 도움을 받고 있는 이런 조마조마하면서도 시시한 연구는 사실상 아인슈타인도 한때 그 희생양이 되기도 했던 오랜 의혹과 조사의 극명한 형태 중 하나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복수심으로 가득 찬 프랑스의 몇몇 반유대주의자들은 그가 독일계 유대인임을 교묘히 강조했다. 그러자 냉소적인 관찰자들은 스노비즘이란 표현을 썼고, 시기심 많은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을 단순한 지적 정립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실험을 통한 숱한 검증 결과들이 상대성이론을 확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다못해 최근에도 사교계에선 아인슈타인이 미치광이었다고 수군댄다. 그래야 모든 것이 설명되고 세상 사람들은 안심할 것이다. 평소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사교계를 멀리하고 벽난로 옆에서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우던 이 용감한 아인슈타인에게 왜 그토록 따가운 증오의 시선들이 쏟아졌던 걸까? 그가 자명한 이치에 감히 의문을 제기했을뿐더러, 유전자와 함께 대대손손 전승되어왔고 지극히 신성한 이성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민간 지혜에 대한 굳은 확신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한편 롤랑 바르트는 『신화론』에서 E=mc2을 신화로 만든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멋들어지게 설명하고 있다. 신화가 감히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그 의미가 아주 충만한 경우, 신화는 그 의미를 뒤집어엎고 통째로 앗아가게 된다. 수학적 언어가 바로 그런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수학적 언어는 변형되지 않는 언어로서 해석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따라서 불필요한 의미는 전혀 끼어들지 못한다. 정확히 말해 신화가 수학적 언어를 모두 날려버리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적 언어는 E=mc2과 같은 수학 공식의 형태를 띠게 되고, 이 변치 않는 의미를 수학성의 순수한 기표로 만들게 된다. 알다시피, 신화가 여기에서 앗아가는 것은 바로 저항성이고 순수성이다. 그럼에도 이 공식은 그리 즉각적인 반응은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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