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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왕을 꾸짖다

신두환 지음 | 달과소
선비, 왕을 꾸짖다

신두환 지음

달과소 / 2009년 9월 / 484쪽 / 19,500원



화왕계 - 설총(薛聰)


신문왕이 연회를 즐기던 중 설총에게 기이한 이야기가 있으면 하나 들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설총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화왕(花王, 모란)이 처음 전래하였을 때 그 자태가 온갖 꽃을 능가하니, 아름답고 고운 꽃들이 앞 다투어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사뿐사뿐 걸어와서 아뢰기를, 저는 눈처럼 흰 모래 물가를 밟고, 봄비에 목욕하여 대를 씻고, 맑은 바람을 쏘여 노니는 장미라 하옵니다. 대왕의 아름다운 덕망을 듣고 저 향내 풍기는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오니 대왕께서는 저를 허용하시겠사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자 베옷에 지팡이를 짚은 한 사내가 절름거리며 걸어와 아뢰기를, "저는 서울 한 길가에 살고 있는 백두옹(白頭翁, 할미꽃)이라 하옵니다. 대왕께서는 비록 기름진 쌀과 고기로써 창자를 채우고 아름다운 차와 술로써 정신을 맑게 한다 하오나, 좋은 약으로써 기운을 돋고, 영사(靈砂)로써 독을 제거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옛말에 '비록 실과 삼의 아름다움이 있더라도, 갈이나 사초도 버리지 말라' 하였습니다. 무릇 모든 군자는 결핍될 때를 대비해야 함이니, 대왕께서는 저를 택하실 뜻이 있으신지요" 하였답니다. 그러자 화왕은, "저 사내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아름다운 아가씨를 놓치게 되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사내가 말하기를, "저는 대왕을 총명하고도 의리를 아시는 분인 줄 알고 왔더니 이제 보니 글렀습니다. 대개 임금 된 분들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고 곧고 올바른 자를 싫어하지 않는 이가 드물었으니 어이하겠습니까" 하였답니다. 그러자 화왕은 곧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 사과하였답니다.

설총은 왕에게 통치자의 바른 마음가짐을 이야기하기 위해 꽃을 의인화하여 지은 <화왕계>를 들려주었다. 그는 화왕과 장미 그리고 백두옹을 왕과 간신, 그리고 충신에 빗대어 이야기했다. 그중 백두옹은 바른 소리로 임금의 기운을 돕고 독을 제거해 주는 충직한 신하로, 설총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백두옹을 빌어 왕에게 '바른 도리로써 정치를 해야 함을 주장하고, 부귀에 안주하는 무리들을 가까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즉, 어진 임금 밑에는 어진 신하가, 폭군 밑에는 간신들이 모인다는 교훈을 전달한 것이다. 신문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글로 써 임금 된 자의 교훈으로 삼도록 명하고 설총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황제시여 제발 고려에서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오지 마십시오 - 이곡(李穀)

원나라 간섭기인 1274년(원종 15년) 원나라는 그들의 만자군(蠻子軍)의 혼인을 위하여 고려에 매빙사(媒聘使)와 납폐물(비단)을 보내고, 남편 없는 여자 140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민간의 독녀(獨女), 역적의 처, 파계승의 딸을 찾아 요구한 수를 채워 보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민간의 어린 소녀들을 강제로 뽑아서 몽고로 보내는 관례가 생겨났으니, 이른바 공녀제도였다. 이렇게 해마다 원나라에서 딸을 빼앗아 가니 고려 백성의 고통은 날로 커져만 갔다. 이를 보다 못한 이곡(李穀, 1298~1351)이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옛날 성왕(聖王)들은 천하를 다스릴 적에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였습니다. 같은 문자와 같은 제도를 쓰면서도, 그 풍토에 적합한 것과 그 민족이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먼 변방 지역의 풍속은 각각 다른 점이 있어 그들의 풍속을 중국과 똑같이 바꿀 경우에는 인정상으로도 따르기 어렵고 그 실정으로도 행할 수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잘 다스린다는 것은 비록 요순(堯舜)이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물며 고려는 본래 바다 멀리에서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서 지탱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태종도 두 번이나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국조(國祖) 원나라가 처음 떨쳐 일어났을 적에 고려는 맨 먼저 원나라 황실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세조황제께서는 공주를 내려 보내는 한편, 조서를 내려 '고려의 의관과 제도를 바꿔 그들 조상의 풍도를 떨어뜨리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고려 안에는 원의 환관과 같은 자들이 번성하면서 본국에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곡은 공녀제도가 전통적 통치관에 어긋남을 설명하고, 원의 사신들이 원 왕조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사신을 보내는 것은 황상이 은혜를 선포하는 동시에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그 대책을 강구하기 위함인데, 고려에 사신으로 온 자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황제의 어명을 사칭하여 어린 소녀들을 빼앗아 오고 있으니 어찌 국조(國祖)의 누가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또한 딸이 부모를 봉양하는 고려의 풍속을 옛날 진나라의 데릴사위제와 비유하면서 딸을 종신토록 보지 못하는 부모의 심정을 설명했다. 아울러 공녀제도로 인해 조혼이 성해지고 심지어 자살까지 발생하고 있는 고려 백성들의 고통을 낱낱이 열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가에 아무 이익이 없고 먼 지방 사람들에게 원망만 사는 일로 그 폐단이 결코 적지 않다면 그 일을 더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었다.

논리 정연한 이 상소문에 감동을 받은 원나라 황제는 1337년(충숙왕 6년) 마침내 고려판 정신대로 불리는 공녀(貢女)제도를 폐지시켰으니 역사에 영향을 끼친 공로 면에서 이곡의 상소는 큰 가치를 지녔다 할 것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제자이자 목은 이색의 아버지로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벼슬을 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따라서 중국의 많은 학사들과 교유하였는데, 원나라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에서도 그의 깊은 학식이 배경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문(諺文) 창제의 부당함을 아뢰옵니다 - 최만리(崔萬理)

중국은 오래 전부터 이민족 국가에 대하여 중국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도록 하는 동문 정책을 펴오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일제가 강제로 우리에게 일본문자를 쓰고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과 같은 논리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소사대로서 중국을 섬겨오던 터라 독자적인 글을 창제하는 것은 자주 국가를 주장하는 것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마찰을 초래할 수 있는 큰일이었다. 그것을 우려하여 최만리 등의 신하들이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우리 조선은 이제 막 글이 통하고 법도가 중국과 같이 되어가는 마당에 언문을 새로 창제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글자의 모양은 옛날의 전서체를 모방하였더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결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하니, 만일 이와 같은 사실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예부터 중국은 그 땅이 넓어 전국의 기후와 풍토는 비록 달랐으나 그 지역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적이 없사옵니다.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같은 나라들이 각기 그 나라의 글자를 지녔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따로 더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이 따로 글자를 만든다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신기롭고 향기로운 영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으로 만든 말똥구리의 당랑환(螳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결함이 아니오리까." 이렇게 언문 창제의 부당함을 주장한 최만리는 언문은 학문에 방해되고 정치에 무익하다며 반대의사를 강력히 주장했다.이 상소문은 여러 학사의 합작으로 보이며, 조목에 따라서는 한글창제의 불필요성, 한글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사대주의적 성향이 짙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국시를 유교, 즉 성리학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언문이 전용되면 좋은 경전의 글이나 성현의 문장이 사라짐으로써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또한 당시에는 은나라 기자가 건국한 '기자조선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문자를 갖는 것은 중화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후진국 오랑캐로 여겼다. 이러한 당시의 정서로 인해 세종의 언문 문자정책은 '일반 백성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라는 뜻'을 분명히 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으로 하였고, 관공서나 외교문자 등에선 조선이 망할 때까지 끝내 사용되지 않았다. 위대한 우리의 글이 창제의 뜻에 비하여 그 서문이 상당히 절제되고 위축되어 만방에 떳떳하게 공표되지 못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고려한다면 최만리 등을 무조건 민족주의에 반하는 인물로만 비판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당시의 지배층이 일반적으로 사대주의적 경향을 지녔다는 점과 따라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다는 우국지정, 그리고 조선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구현하려 했던 충직한 뜻도 함께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북방 경비에 대한 열 가지 방책(備邊十策) - 눌재 양성지(梁誠之)

1450년 1월(세종 32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국방에 대한 방책을 올렸다. 그는 '지금 나라가 평안하다 하여 국가의 계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난리를 면키 어렵다'면서 사졸 선발, 특공대조직, 군량 비축, 기계이용, 병기준비, 성곽정비, 병사 차출을 위한 호패법시행, 자치제도, 군역의 의무화 등 10가지 방책을 제시했다. 각 방책에는 그의 국방의식이 집약적으로 담겨져 있었으며, 전 국토를 모눈종이 위에 올려놓고 보듯 그 묘사가 세세하고 완벽했다. 그는 특히 성곽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일찍이 중국에서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고 방어를 잘 하므로 쳐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면서 전국의 성곽을 총망라하며 국방의 요새로서 삼아야 할 곳을 지적했다. 그리고 고려시대 강조와 강감찬 등이 20만의 병사로 거란과 홍건적 등을 평정할 수 있었음에 비유하여 현재 10만의 사병수를 대폭 증원해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사병이 부족한 현상은 호구(戶口)의 법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군적에 빠진 장정이 많고, 병역을 도피한 양인(良人)들이 많으므로 감사와 수령이 사사로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도록 법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군량을 저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고 현장(賢將)을 택해 상벌을 밝게 하여 통솔하게 해야 한다는 등 빈틈없는 방책을 제시했다.

양성지는 국방의 기초로 민심을 중요시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영토를 기반으로 한 만리지국의 광활한 국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국경을 요동지방의 심양까지 확대해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방에 관련된 상소를 약 150여건이나 올렸다. 거기에는 모두 탁월하고 치밀한 견해와 국토를 바라보는 우국의 진정이 담겨있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비로소 국방의 대비책으로 형안이라고 알려졌지만, 양성지는 그보다 훨씬 앞서 삼십만 양병설로 국토방위의 장구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상소문에 가장 관심이 많았던 정조대왕도 눌재 양성지를 상소문의 대가로 높이 평했다.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이황

이황은 28세(152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된 후 곧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구실삼아 관직을 사퇴하고 향토인 낙동강 상류 토계에 머물면서 독서에 전념하였다. 이후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여 자신의 아호로 삼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는데, 이후에도 관직을 사퇴하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회에 이르렀다. 하지만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사의 직위를 받아들였는데 이제 갓 즉위한 어린 선조가 여러 차례 초빙하니 이를 거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황은 이때 조정에 나아가면서 '왕이 갖춰야 할 여섯 가지 덕목'에 관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선조에게 올렸다.

이황은 왕이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으로 인(仁)과 효(孝)를 다하는 일을 들었다. 그는 '나무가 썩으면 벌레가 생기고 효도는 처자 때문에 시들게 된다'는 옛말을 들어 종묘를 받들고 대비를 모시는 마음이 태만해서는 안 될 것임을 당부했다. 둘째는 참언(讒言)을 막아 양궁(兩宮)을 친근하게 하는 일이라 하였다. 여기서 양궁은 명종 비 인순왕후 심씨와 인종 비 인성왕후 박씨를 지칭한다. 선조가 어린 나이에 등극하자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인성왕후와의 갈등은 이후의 정가를 소용돌이치게 했다. 이황은 이것을 걱정하여 결국 임금이 스스로 잘 다스린다면 아무런 걱정도 없다면서 간언과 아첨에 휘둘리지 말 것을 경고했다. 셋째는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 하였다. 적극 학문을 배우고 덕행을 이룩하는 것이 바로 다스림의 대본(大本)이며, 이러한 대법을 가지고 대본을 세우게 되면 천하에 바른 정치가 저절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도술(道術)을 밝혀서 인심을 바로잡는 일로, 바른 학문의 도를 활용하여 임금이 몸소 행하고 인륜의 올바른 가르침을 백성에게 실천하게 하는 것이 근본이라 하였다. 다섯째는 정사를 배와 가슴에 맡기고 귀와 눈을 열어야 함을 알리고 있다. 즉 나라에 있어서 임금은 머리이며, 대신은 배이자 가슴이고, 대간은 바로 귀이자 눈이니, 임금은 신하의 말을 신임하고 대간의 말을 경청하여 인재를 등용하라 경고했다. 여섯째는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하여 하늘의 총애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일 임금의 도를 다하지 않으면 하늘이 먼저 재해를 내리어 이를 견책할 것이니 천심을 받드는 일을 심사숙고하여 몸소 실천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황의 상소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가르침이었다. 특히 두 번째 조목에서 그는 양궁을 친밀하게 해야 함을 당부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같은 시기에 상소를 올린 조식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두 대비마마를 거론하면서 조식은 과격한 선비형의 상소를 올린 데 비해 이황은 온유돈후한 학자풍의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러한 이황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고 그 내용을 도표로 그려서 병풍을 만들고 항상 다스림의 표본으로 삼도록 하였다.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을묘년에 사직하는 상소문) - 조식(曺植)

남명(南冥) 조식은 청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명종이 단종현감을 제수했을 때는 사직의사와 더불어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 문정왕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을 담은 사직상소를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또한 선조 2년(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과격한 언사를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던 이황은 이러한 조식의 상소문을 향해 "상소문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너무 과격하여 공손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평하기를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았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소개하는 상소문은 명종이 단성현감을 제수했을 때 올린 사직상소로 조식의 칼날 같은 성정이 잘 드러나 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쓰는 것과 같은데, 집을 짓는 것은 목수가 하는 것이지 나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제가 걱정하는 바이옵니다. 그 사람을 알지 못하면서 등용하여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된다면 어찌 죄가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첫 번째 까닭입니다. 두 번째는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백 년 동안 벌레가 그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가 있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조정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궁궐 안의 신하는 자기세력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외로운 아드님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민심을 어떻게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지위가 정승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손을 쓰지 못할 형국에 초개와 같은 재주를 가진 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직을 청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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