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교수대 위의 까치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 276쪽 / 15,000원
프롤로그_ 푼크툼으로서의 예술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수준이 있는 듯하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emotional)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perceptual)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intellectual)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영성의(spiritual) 울림을 얻기도 한다. 사람마다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수용은 그저 작품이 던지는 물음에 답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감상은 작품을 통해 누구도 던지지 않았던 새로운 물음들을 생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는 능력, 의제를 처음으로 '설정'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스스로 읽는다는 것은, 작품을 보며 스스로 물음을 제기하고 스스로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연쇄가 끊어질 때, 작품은 더 이상 살아 있기를 멈춘다. 작품의 독해는 그저 남이 이미 읽은 궤적으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늘 새로운 물음, 새로운 해석으로 작품을 살아 있게 만들어야 한다. 수용미학에서 강조하듯이, 작품은 작가와 독자의 공동 창작의 산물이다. 창조적이어야 할 것은 작가만이 아니다. 독자 역시 창조적이어야 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년)는 사진의 의미에 두 개의 층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하나는 '스투디움(studium)'으로,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일반적' 해석의 틀에 따라 읽어내는 의미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하곤 한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그런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을 전복하면서 보는 이의 가슴과 머리를 찌르는 효과이다. 오직 보는 이 혼자만이 느끼는 이 절대적으로 '개별적'인 효과를 바르트는 '푼크툼(punctum)'이라 부른다. 나에게 와서 꽂히는 듯한 그 촉각적 효과를 다른 이들은 못 느낄 수도 있다. 푼크툼은 사밀한 체험, 때로는 절대적으로 사밀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그저 무시해도 좋을 한 개인의 주관적 감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사밀한 체험이라도, 그것이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의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느 정도 전달 가능성이 있다. 이는 '스투디움' 위주의 해석에서 '푼크툼'의 계기를 결합시킬 필요성을 지시한다. 이를 위해서는 작품과 관객의 관계가 고독하고 개별적이어야 한다. 물론 스투디움도 작품의 이해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작품과 관객 사이에 스투디움만 끼워 넣을 경우, 이 표준적 해석의 필터가 외려 작품에 대한 생산적 독해를 가로막을 수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작품에 대해 자신만의 고독하고 개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작품에 대한 표준적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줄 때, 관객은 남이 찾아놓은 의미를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
주의 얼굴에 침을 뱉은 자콰트로첸토의 초현실주의? 피렌체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대개 산마르코 수도원을 들르게 된다. 수도원의 벽을 장식하는 그 많은 프레스코화 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조롱당하는 그리스도>였다. 화면 정면으로 보이는 하얀 옷의 인물은 앉아 있는 자세나 머리 뒤의 후광(nimbus)으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일 것이다. 화면 왼쪽에 앉아 있는 여인은 한눈에 봐도 성모 마리아이다. 그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는 누굴까? 찾아보니 프라 안젤리코가 속해 있던 승단의 창시자인 성 도미니쿠스(1170~1221년)라고 한다. 이 세 인물이 르네상스 특유의 삼각형 구도속에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색의 사각형의 배경 안쪽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기괴하지 않은가? 예수의 왼쪽으로 한 사내의 머리가 허공에 떠 있다. 그는 왼손으로 모자를 들어 올리면서 볼을 한껏 부풀려 예수를 향해 힘껏 침을 뱉는다. 그 반대편으로는 막대기를 쥔 손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손은 막대기로 예수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예수의 좌우로 대각선을 이루며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등과 손바닥이 떠 있다. 주인을 잃은 이 손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년)의 작품을 떠올리게 된다. 마그리트는 이른바 초현실주의자이다.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적 장면을 해체시켜 그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로써 평범한(ordinary) 것 속에 감추어진 비범한(extraordinary) 것을 보게 해준다. 하지만 프라 안젤리코는 15세기의 화가가 아닌가? 콰트로첸토(=1400년대)의 화가가 20세기 초현실주의자와 같은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리라.
중세인의 상상력 프레스코화에서 프라 안젤리코는 잘린 신체 부위만으로 사건 전체를 암시한다. 이런 묘사는 르네상스가 아니라 실은 고딕의 전통에 속한다. 하지만 프라 안젤리코는 트레첸토(=1300년대)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기로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시대착오라 할 수 있다. 안젤리코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일설에 따르면, 이런 식의 압축적 표현은 되도록 잔혹한 장면의 묘사를 피하면서 그림에 내러티브 구조를 도입하는 장치라고 한다. 중세 말에는 이런 표현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오늘날 파일을 압축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압축 프로그램은 남아도는 정보를 생략해버린다. 압축 파일을 푸는 중세인의 비결은 풍부한 상상력이었다. 그들의 상상력은 우리 것보다 왕성해서 '못'만 봐도 머릿속으로 예수의 손에 못이 박히는 동영상을 돌릴 수 있었다. 중세인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을, 오늘날 우리는 스크린 위에 고해상의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이를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나, 그 발전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성스러운 상처 이보다 한 세기 정도 앞서 장 부시코(Jean Boucicaut, 1366~1421년)의 성무일과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 수난의 도구>라는 그림을 보자. 여기에는 만신창이가 된 예수의 몸이 보이지 않는다. 끔찍한 수난의 모든 장면이 오직 거기에 사용된 도구들을 통해 암시만 되어 있다. 그보다 반세기 앞선 본 드 뤽상부르(Bonne de Luxembourg, 1315~1349년)의 성무일과서 삽화에서는 수난의 도구들이 거의 사라지고, 달랑 상처만 남았다. 중세의 성녀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을 그의 옆구리 상처에 키스를 하는 것으로 상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저 상처는 묘하게 입술을 닮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의 상처에 키스를 하는 성녀들은 자연스레 예수의 입에 키스를 하게 된다. 그럼 남자들은? 그리스도의 상처는 공교롭게도 동시에 여성의 성기를 닮았다. 실제로 저 성스런 상처는 때로 자궁에 비유됐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름지기 그곳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 신학적 페티시즘이라고 할까? 이 그림은 잔혹하기는커녕 외려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수난의 잔혹한 묘사는 화면에서 사라진다. 반면 르네상스로 내려올수록 수난의 잔혹함은 점점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점점 더 눈에 보이는 현세를 중시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슬러가며 수난의 장면을 신체 부위로 암시만 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수난의 장면을 관객들 눈앞에 펼치기보다는 그들의 명상 속에서 전개시키려 했던 것이다. 산 마르코에서 이루어지는 희롱은 명상을 하는 마리아와 성 도미니쿠스의 머릿속 영상에 가깝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을 담은 저 푸른색 바탕은 오늘날 CG 합성을 위한 촬영에 사용되는 블루 스크린을 닮지 않았는가? 묵상 속에서 펼쳐지는 가상에는 굳이 현장의 생생함이 필요하지 않다. 과도하게 잔혹한 묘사는 쓰라리면서도 달콤한 명상을 방해할 것이다. 묵상에는 외려 생각의 단초만 제시하는 영상의 파편들이 더 적합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앞에 앉아 명상에 빠진 성 도미니쿠스는 저 그림 앞에 설 관객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수난을 묵상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것은 예수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몸 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너희가 어떤 일로 나를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는 회화를 가리켜 '말 없는 시'라 불렀다. 하지만 화가의 표현 수단은 시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는 회화처럼' 쓰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엑프라시스(ekphrasis)'이지, 언어라는 수단으로 그림처럼 생생한 묘사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회화는 문학이 아니다. 회화의 매력은 종종 보편적 개념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피안에서 발산되곤 한다. 이 작품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 역시 이제까지 말로 설명한 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아주 조그만 디테일이었다. 예수의 얼굴을 가린 천 뒤로 보이는 예수의 눈매, 프라 안젤리코는 하얀 천의 뒤로 예수의 눈매를 그냥 묻어버리지 않는다. 눈을 감싼 하얀 천 위로 그는 슬쩍 예수의 눈매가 드러나게 만들었다. 수건에 새겨진 윤곽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두 눈은 지그시 감겨 있다. 예수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그시 감은 그 그윽한 눈매는, 그가 언젠가 자신을 핍박하려던 사람들에게 이른 것처럼,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교수대 위의 까치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년)의 <교수대 위의 까치>. 널리 알려진 그의 많은 걸작을 제쳐두고 이 작품에 눈이 꽂힌다. 고즈넉한 전원 풍경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섬뜩한 교수대. 그 가로대 위에 까치가 한 마리 앉아 있다. 우리에게 길조로 여겨지는 이 새가 네덜란드에서는 까마귀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교수대 위에 앉은 한 마리의 까치가 히치콕의 영화처럼 화면 전체에 불길한 느낌을 더해준다.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교수대 아래로 세 명의 농민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일까? 그들의 뒤에는 어디서 왔는지 농민들의 행렬이 서 있고, 그들의 앞에는 두 사내가 조금 떨어져 선 채로 이 광경을 지켜본다. 한 사내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뭘 보라는 손짓일까? 이 작품에 대한 최초의 해석은 아주 오래전에 나왔다. 네덜란드의 화가 카렐 반 만데르(Karel van Mander, 1548~1606년)는 자신과 같은 시대를 산 네덜란드 화가들의 삶을 기록한 저서를 남겼다. 만데르의 <화가열전(Schilder-boek)>(1604년)에는 당연히 브뤼헐에 관한 장(章)도 포함되어 있다.
교수대의 블랙 유머 만데르는 이 작품을 네덜란드의 속담과 연관시켜 해석한다. 네덜란드의 속담에 '까치처럼 수다를 떤다'는 말이 있다. 그림 속의 까치가 바로 그렇게 헤픈 입으로 가십을 퍼뜨리고 다니는 이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후 많은 저자가 만데르를 따라 이 작품과 연관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속담들을 제시했다. 그중 하나가 '교수대 아래서 추는 춤'이라는 것이다. 이 속담은 이 작품 속에 춤추는 농민 셋의 형상으로 구현되어 있다. '교수대로 향하는 즐거운 길'이라는 속담도 있다. 춤추는 농민 셋의 뒤로 보이는 행렬을 보라.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교수대에 똥을 눈다'는 속담이다. 실제로 화면 왼쪽 아래 귀퉁이를 보라. 엉덩이를 까고 쪼그리고 앉아 대변을 보는 사람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만데르의 도덕주의적 해석 속에서 교수대 위에 앉은 까치는 '함부로 남의 험담을 퍼뜨리고 다니지 말라', 또는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고 경솔한 언행을 하지 말라'는 도덕적 경구의 알레고리가 된다. 결국 교수대에 앉은 까치의 그림은 입이 가벼운 자들에게 브뤼헐이 보내는 고약한 블랙 유머라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양심의 가책과 두려움 만데르의 언급에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만데르가 지적하듯이, 브뤼헐은 작품을 통해 '너무나 날카롭고 신랄한' 언행을 일삼아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브뤼헐이 아내에게 남긴 그 그림은 자신의 경솔한 언행을 반성하는 참회록, 또는 그런 언행을 일삼던 자신에 대한 자기 풍자로 봐야 할 것이다. 브뤼헐이 위협을 느낄 만한 사정이 있었다. 1566년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의 전횡에 반대하는 칼뱅주의 신교도들이 가톨릭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커다란 봉기를 일으킨다. 네덜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즉각 보복에 나서, 네덜란드의 민병대들을 진압한 후, 악명 높은 '공안평의회'라는 기구를 설치한다.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곧바로 저 교수대에 목이 걸릴 수 있는 상황. 그런 시기에 '날카롭고 신랄한' 그림들을 남겨두자니 당연히 두렵지 않았겠는가? 만데르의 추측이 옳다면,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는 극단적인 반동의 시대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된 브뤼헐이 이 작품으로 자신의 일생의 작업을 다분히 회의적으로 결산하고 있는 셈이다.
죽음을 비웃는 민중의 축제 하지만 그런 해석은 브뤼헐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그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브뤼헐은 스페인의 지배에 반감을 갖고 있었고, 또 그것을 기꺼이 작품으로 표현하려 했다. 교수대의 으스스함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춤은 흥겨워 보인다. 여기서 이 그림을 저항의 표현으로 보는 해석이 성립한다. 즉 그림 속의 교수대는 스페인의 지배를 의미하고, 그 아래서 춤을 추거나 거기에 대변을 보는 것은 스페인의 권력에 보내는 네덜란드 민중의 조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교수대 아래서 춤을 추거나 교수대에 똥을 눈다는 속담은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더 이상 권력의 무서움을 모르는 철없음이 아니라, 죽음과 권력을 조롱하는 민중의 용기를 상징하게 된다.
최초의 사회주의 리얼리스트? 어느 독일 주간지의 기사에 따르면, 브뤼헐은 실은 민중의 영웅이 되는 데 필요한 자질들, 가령 '당파성과 낙관주의, 휴머니즘적 진보의 신념'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주의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인간의 노력은 대개 좌절과 실패로 끝난다. 그렇다면 그는 민중을 사랑했을까? 대중을 바라보는 브뤼헐의 시선은 때로 고대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보여준 인간 혐오에 가까울 정도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은 '대중의 역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브뤼헐은 민중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민중의 어떤 부분은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나, 그들의 다른 부분에는 차가운 냉소를 보낸다. 그가 즐겨 농민들 틈에 섞인 것은 현실을 이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생생한 모델이 필요했고, 그래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의 제재를 찾는 예술적 활동에 가까웠지, 민중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자는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적 실천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뒤집어진 세상 교수대 위에 앉은 까치는 무시무시한 존재다. 그의 재잘거림이 얼마나 많은 네덜란드의 시민을 교수대로 보냈던가?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고 이단으로 몰려서 처형당하는 상황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하지만 농민들은 그 무시무시한 교수대 아래서 즐겁게 춤을 추고 거기에 대변을 보며 그 부조리의 일부가 된다. 입을 잘못 놀려 교수대에 달리는 것도 그들이요, 그런 동료를 몰래 고발하는 것도 그들이 아닌가. 풍자하는 브뤼헐도 그 부조리에서 예외는 아니다. 저 교수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이다. 마지막으로 저 교수대의 모습에 주목해보자.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브뤼헐은 투시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교수대를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형태로 그려놓았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이른바 '불가능한 형태(impossible figure)'가 미술사에 등장한 최초의 예이다. 에셔보다 수백 년이 앞서는 셈이다. 설마 이 북구의 거장이 투시법의 실수를 저질렀겠는가? 이게 실수가 아니라면, 해석의 가능성은 단 하나만 남는다. 교수대는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 자체가 부조리한 형상인 셈이다. 하지만 세상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 세상 역시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부조리한 교수대야말로 브뤼헐이 바라본 세계 자체의 모습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