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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영향력

보던 북스 편집부 지음 | 토기장이
아버지의 영향력

보던 북스 편집부 엮음

토기장이 / 2009년 4월 / 276쪽 / 11,000원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종교계의 리더들을 키운 아버지



삶으로 신실한 모범을 보여준 아버지

마틴 루터 킹 시니어ㆍMartin Luther King Sr., 1897-1984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아버지. 에벤에셀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 나타냄으로써 성도들과 가족에게 가르쳤다. 그가 아들의 마음에 심어 놓은 꿈은 너무나 강력하여 미국의 역사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 *

마틴 루터 킹 시니어 목사는 진리를 말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루는 아버지 킹 목사를 어느 백인 교통경찰관이 세웠는데, 그 경찰관은 그를 조롱하기 위해 '아이'라고 불렀다. 그때 킹 목사는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아들을 가르키며, "얘가 아이이고, 나는 어른"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어느 날 이 부자가 신발 가게에 갔는데, 종업원이 가게 뒤쪽에 있는 창고에서 신발을 사라고 말했다. 아버지 킹 목사는 그 말을 따르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차라리 우리가 신발을 사지 않으면 않았지, 절대로 창고에 갈 마음은 없소."

아들 킹은 아버지의 이러한 강직한 성품을 보며 자랐고, 이것들은 그의 성품과 사역의 일부가 되었다. 크로저신학교를 다닐 때, 그는 『희망의 약속 :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글과 연설들』에서 "제가 아버지에 대해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그의 진실된 기독교적 성품입니다. 아버지는 도덕적, 윤리적 원칙들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정직한 분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행동들에 대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아버지의 동기와 행동은 정직하다고 생각했었지요"라고 밝히고 있다.

남부 조지아의 소작농의 아들로 자란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어린 시절 마이크라고 불렀는데, 술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건장했다. 그가 혹시 아버지와 싸우다 불상사를 당할까봐 염려했던 어머니는 그를 애틀랜타로 보냈다. 그는 이 큰 도시의 근교에 있는 작은 두 교회에서 설교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스무 살이었다. 얼마 뒤에 에벤에셀침례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면서 담임목사의 딸인 알베르타 윌리엄과 결혼했다. 1929년 1월 15일, 알베르타는 '마이크 주니어'를 낳았다. 그가 5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킹 목사는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 루터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어린 자신의 아들이 훗날 흑인 해방과 미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의 시작과도 같았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 킹을 중류층의 안전하고 편안한 지역에 있는 집에서 엄격하고 권위적인 환경 속에서 양육했다. 애틀랜타에는 인종차별과 함께 흑인 상류층도 많았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이 피아노 개인 교습과 오페라와 레슬링 경기와 같은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아들 킹은 아버지의 특별한 보살핌 아래 좋은 성품들을 빠르게 배워나갔다. 인종차별에 대해 저항한 로사 파크가 견디어야 했던 수모처럼, 킹과 그의 흑인 고등학교 친구들은 50킬로미터가 넘는 통학길 동안 백인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서 가야만 했다. 이러한 모욕을 겪으며 킹은 "나는 모든 백인을 증오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킹은 뛰어난 학업성취로 15살의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대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애틀랜타의 흑인 상류층의 자녀들을 위한 일종의 신사교육학교였다. 그는 아버지의 목회 사역을 잇고 싶지 않아 의학을 전공하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회학을 택했다. 킹은 대학에서 백인들과 함께 여러 활동을 하면서 백인에 대한 마음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후에 그는 부모님이 자신에게 백인을 증오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으로서 이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이것은 나중에 백인들의 억압에 대한 비폭력 저항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변호사 대신 점차 목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그의 유일한 형제와 삼촌, 할아버지와 고조 할아버지 모두 목회자였다. 그는 펜실베니아주에 있는 크로저신학교에 입학하여 1951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목회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굳혔다. 그는 아버지와 신학적인 견해차가 있었지만, 아버지 킹 목사가 보인 모범을 따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확고했다. 결국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그를 하나님의 일로 이끌었다. 그는 앨라배마주 맥간메리의 텍스터가침례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는 한편, 조직신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당시 흑인들에게도 동등한 권리와 보호를 요구하는 인권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 운동에서 그는 지도적인 역할인 대변인 활동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미 전역에 있는 흑인들을 훌륭히 대변하는 자유의 목소리가 되었다. 1957년 그와 115명의 흑인 목회자들이 남부기독교지도력회의를 결성했다. 그는 반대 시위와 연좌농성, 거리 시위와 연설을 하며 자유와 평등의 목소리를 높였다. 1963년 그는 코레타 스코트와 결혼했고 두 명의 자녀를 낳아 그중 한 명은 마틴 루터 킹 3세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인종과 신앙에 상관없이 손을 맞잡고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자유가 울려 퍼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모든 어린이들을 위한 자신의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1968년 4월 3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멤피스의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했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자신의 꿈을 나누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기 원합니다."

다음 날 그는 암살범의 총에 저격당했다. 더 이상 그의 생생한 목소리는 듣지 못 하게 되었지만, 그의 말과 용기 있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메아리치고 있다. 마친 루터 킹 시니어 목사는 에벤에셀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세 자녀에게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기독교적 사랑으로 맞서는 법을 몸소 보여 주었다. 아버지 킹 목사는 아들을 위해 철학적, 그리고 신앙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아들 킹 목사는 이것을 바탕으로 인종 간 불평등에 저항하는, 매우 힘들지만 비폭력적인 운동을 이끌었고 결국 승리했다. 아버지 킹 목사는 미국을 도전하고 변화시킨 아들 킹 목사를 자신의 삶으로 신실하게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고 이끌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학문과 기술로 세계를 변화시킨 학자들의 아버지



잠재력을 개발하고 실현하도록 가르친 아버지

헤르만 아이슈타인ㆍHermann Einstein, 1847-1902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아버지. 전기공학 기술자인 헤르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아들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탐구와 발견에 관심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 * *

과학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마음을 늘 설레이게 했다. 그가 5살이었을 때, 아버지 헤르만은 그에게 나침반을 주었다. 이 단순한 도구는 왜 바늘이 늘 북쪽을 가르키는지 알지 못하는 어린 알버트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알버트는 무엇인가 신비한 보이지 않는 힘이 나침반 바늘이 늘 제자리에 있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과학과 수학을 사랑한 그의 아버지의 재능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위템버그의 독일어권에 사는 유대인 헤르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교육을 받았고 공부를 마친 뒤에 그는 울름이라는 오래된 성당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여 침대 매트릭스에 넣을 깃털을 팔며, 전기화학 계통의 기업을 세웠다.

1876년, 29살의 나이에 헤르만은 부유한 곡물 중개상의 딸이었던 18살 폴린 코흐와 결혼했다. 1879년 3월, 이 부부는 첫 아기를 낳았고, 이 아들에게 알버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가족들은 알버트가 태어났을 때 머리가 너무 크고 모가 나서 기형이라고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알버트는 3살이 되도록 거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알버트의 말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 정확히 말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하고자 하는 모든 말을 미리 연습했다고 한다. 알버트는 성장하면서도 과묵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헤르만은 알버트가 아이들에게서 볼 수 없는 집중력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알버트가 좋아하는 놀이 중 하나는 카드로 집을 쌓아올리는 것인데, 때때로 14층까지 쌓아 올리곤 했다.

하지만 이 놀이 말고도 헤르만은 자신의 아들의 잠재력을 믿고 아들을 지나치리만큼 독립적으로 키웠다. 알버트가 4살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 헤르만은 알버트가 뮈니크의 거리를 마음대로 다녀도 그대로 놔두었다. 알버트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는 단순 암기식 과목을 아주 싫어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자신이 다니는 루이폴드 김나지움에서 수학을 아주 잘 했다. 사업을 위해 헤르만은 집을 팔고 가족과 함께 이태리로 이사갔다. 하지만 아들 알버트는 김나지움에서 계속 교육받도록 했다. 알버트는 이것이 좋지 않았지만, 아들의 잠재력을 개발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믿은 아버지는 완강했다. 이사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버트는 건강을 이유로 선생님들을 설득한 뒤에 이태리에 사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헤르만은 아들의 건강 문제로 실망했지만, 이태리의 예술의 중심지를 다니며 스스로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알버트가 이 예술학습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헤르만은 아들이 전기공학 기술과 관련된 가족의 사업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버트는 그것보다는 철학교사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장래에 무엇을 하든 그에게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헤르만은 그에게 취리히대학에 응시하라고 권했다. 17살이었던 알버트는 입학 최소 연령보다 한 살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그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래서 알버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입학 시험을 다시 치르기 위해 어느 작은 스위스 학교에서 일년 동안 공부했다. 두 번째 입학시험에서 그는 역사와 기하학과 물리학에서 만점을 받으며 입학하여 취리히에서 공부할 준비를 갖추었다.1896년 봄, 밀레바 마릭이란 여성이 취리히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의예과 학생이었으나 한 학기가 지난 뒤에 알버트와 같은 수학과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알버트는 수많은 시간을 이 아름다운 세르비아의 여인과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사랑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대학을 다닐 때, 알버트는 대부분의 교수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건방진 학생으로 주변에 알려져 졸업 후에 교직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1902년 스위스 특허 사무소에 조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알버트는 발명가의 특허, 특히 전기장과 관련된 장치들의 가치를 결정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자유시간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생각하고 발전할 수 있었다. 1909년까지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고, 대학교수직을 제안받기 시작했다.

1903년 알버트와 밀레바는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사랑과 지식의 결합이었다. 알버트는 자신의 아내를 "나와 동등하고 나만큼이나 강하고 독립적인 존재"라고 불렀다. 그녀는 또한 그가 연구할 수 있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허락했다. 사실 그녀는 알버트가 1905년에 쓴 분자 운동과 구성을 자세히 설명하는 박사 논문의 소리 없는 동역자였다는 말도 있다. 같은 해 알버트는 가족과 떨어져 있으며 현대 물리학의 기초를 만드는 데 기여한 네 개의 논문을 썼다. 놀랍게도, 그는 매우 제한적인 자료와 토론할 수 있는 동료 학자도 거의 없이 이 논문들을 완성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 중 세 개는 노벨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신체의 관성은 신체의 에너지 내용에 의존적인가?」라는 제목을 가진 그의 네 번째 논문은 물질과 에너지 사이의 등가를 나타내주는 유명한 등식을 보여주었다. 물질의 일정한 양의 에너지 등가는 빛의 속도로 곱해진 물질이다. 이 등식은 과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아인슈타인에게 천재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베른의 한 도시에 무보수 교수로, 프러시안 과학원의회원, 수많은 중요한 논문의 저자,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로 일을 했지만 1921년이 되어서야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연구는 '상대성 이론'이지만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은 '광전자 효과에 대한 연구'였다. 상대성 이론은 여전히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노벨상 심사위원회에서는 보다 덜 논쟁이 되고 있는 이론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더 쉽게 수용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헤르만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전자석 이론을 사랑했다. 자신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일구지는 못 했지만, 아들 알버트가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물리학자가 되고 이 시대의 위대한 정신이 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스포츠계의 영향력 있는 리더로 키운 아버지



자녀의 밝은 미래를 예견해준 아버지

제임스 R.조던ㆍJames R. Jordan, 1936-1993

마이클 조던의 아버지. 제임스 R. 조던은 자신의 아들이자 지금까지의 농구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NBA 스타인 마이클 조던의 가능성을 예견함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 *

마이클 조던은 1982년도 전미 대학농구대회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그는 이 경기가 자신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알았지만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미처 몰랐다. 그때 마이클은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1학년 선수였고 농구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패트릭 어윙이 뛰는 조지타운대학교와 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마이클과 팀 동료들이 버스를 타고 경기장으로 가는 중에 마이클은 잠시 잠이 들었고, 이때 자신이 결승골을 넣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마이클은 아주 편안히 차 안에 앉아 자신이 경기에서 영웅이 되는 것을 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결승골을 넣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를 바라보는 동료 선수들과 코치의 표정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마이클은 결승골을 넣을 때 가 실력 있는 조지타운대학과의 경기인지 아니면 다른 때에 다른 대학과의 경기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조지타운대학을 이긴 뒤에 마이클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 말했다. 마이클의 아버지 제임스는 잠시 생각한 후에 아들에게 앞으로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마이클은 아버지가 단순히 자기를 격려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마이클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마이클은 농구계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할 때 아버지의 이 말을 기억했다. 농구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가장 위대한 운동선수라는 찬사를 받은 마이클 조던의 인생은 정말로 변했다. 『농구 사랑을 위하여 : 나의 이야기』라는 자신의 책에서 마이클은 이렇게 적었다. "농구선수인 나를 생각하고, 내 출신을 생각하고,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생각하고, 지금까지 성취한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그 시합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농구만이 아닌 내 모든 인생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내가 미처 보지 못 했던 것을 예견하셨다. 처음에 나는 아버지가 나의 성공을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동기를 불어 넣어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어느 누구도, 나를 포함해서 시카고불스팀도, 내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몰랐던 것들을 보셨다고 믿는다. 나는 이것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선물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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