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푸른숲 / 2009년 7월 / 297쪽 / 12,000원
1장 난 내가 마음에 들어
두 얼굴의 한비야'이제는 멋을 좀 부려야겠다.' 4년 전 아프리카 출장을 다녀오는 비행기 안에서 굳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냐고? 그건 순전히 월드비전 친선 대사인 탤런트 김혜자 선생님 때문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선생님과 서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이분을 '혜자마마'라고 부르는데 누군가 옆에서 끊임없이 돌봐주어야 하는 '마마'이기 때문이다. 국민 엄마라는 이미지는 솔직히 뻥이다. 이분은 하늘에서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천사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순수하지만 지상의 일에는 무척 서툴다. 공항에서 여권과 짐을 챙기는 일은 물론 국제전화까지 걸어드려야 한다. 아침식사로는 과일 주스를 챙겨드리고 오후에는 달콤한 커피 한 잔을 대령해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시차 적응을 못해 졸리면 그 나라 대통령이 기다린다고 해도 일단 한숨 자고 나서 만나야 한다.
그러나 도시를 벗어나 막상 구호 현장에만 가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신하여 거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군말 한마디 없이 참아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아슬아슬한 산길을 열 시간 넘게 요동치며 갈 때도, 몹시 춥고 온갖 벌레들이 나오는 방을 며칠 동안 여덟 명의 직원들과 함께 쓰면서도 힘들다, 춥다, 며칠 세수를 못 해 찝찝하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대신 현지 직원들에게 당신들이 애쓴다, 당신들이 천사다, 라는 얘기만 할 뿐이다. 솔직히 무엄하게도 처음엔 이런 행동이 진심일까 연기일까 의심했다. 그러나 9년을 같이 일하면서 김혜자 선생님은 유명한 배우이기 이전에 세상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혜자마마의 무수리라는 사실이 즐겁기만 하다.
각설하고, 비행기를 서너 번 갈아타고 한국을 떠난 지 40시간 만에 우리 일행은 모두 녹초가 되어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은 푹 쉬고 싶었지만 이미 현지 월드비전 회장과 그가 초대한 정부 고위 관리들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현지 직원들과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새 혜자마마는 벌써 샤워를 한 후 하얀 원피스를 곱게 입고 은은한 장미향을 풍기며 나타났는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앉아 있는 날 보고 좀 놀라신 것 같았다. 순간 아차, 했지만 의전용 치장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는 베란다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혜자마마가 내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시차 때문에 못 주무시는 거죠? 따끈한 우유 한 잔 드릴까요?" "이 밤에 우유는 무슨……. 근데 비야 씨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얘기가 있거든." "말씀하세요. 혜자마마와 나 사이에 기분 나쁘고 말고 할 일이 있겠어요?"
혜자마마는 그 큰 눈을 깜빡이더니 큰 결심을 하신 듯 숨을 크게 한 번 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비야 씨는 외모에 너무 신경을 안 쓰는데 그러면 안 돼요. 자기랑 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가슴 아픈 얘기를 해야 하잖아요? 전하는 얘기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전달하는 사람은 매력적이어야 해요. 도와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매력적이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절대 잊지 말아야 해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날 저녁 땀 냄새 풀풀 나는 조끼를 입고 우리 사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고위 관리를 만난 것은 분명 내 불찰이었다. 그러나 구호팀장은 원피스보다 조끼가, 향수 냄새보다 땀 냄새가 더 어울리는 거 아닌가? 이런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혜자마마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나는 배우니까 현장에서도 카메라 앞에서만은 배우여야 해요. 여기 참혹한 학살의 현장에서도 하얀 원피스를 입을 거예요. 하얀 옷이 비참한 현장과 극적인 대비가 될뿐더러 내 얼굴이 훨씬 예쁘게 나오니까." 뜨끔했다. 역시 마마다운 이야기다.
"비야 씨한테 하얀 원피스를 입으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이제 자기도 두 얼굴이 있어야 해요. 현장에서 도와줄 때의 얼굴과 현장 밖에서 도와달라고 할 때의 얼굴 말이죠. 두 번째 얼굴은 매력적일수록 좋아요. 여성의 매력을 그런 데 쓰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비야 씨는 이미 충분히 여자답고 매력적인데도 의도적으로 그걸 감추는 것 같아요. 나는 그게 늘 안타까워요." 말해놓고는 좀 미안했는지 혜자마마는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알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볼게요."
그날 밤 시차와 늦게 마신 커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 그분의 말씀을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말괄량이, 바람의 딸, 여장부, 여전사……. 이런 별명처럼 나는 멋내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사람이었다. 딱 3년,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원 없이 멋을 부렸던 시기가 있었다. 미국 유학 후에 한국에 돌아와 국제홍보회사에 다닐 때였다. 그러다 세계 일주 길에 오르면서 화려했던 시절도 막을 내렸다. 그 후 사십대의 대부분을 구호 현장에서 지내다 보니 대충 하고 살았다. 현장에서의 내 '공식 복장'은 챙 모자에 주머니 많은 조끼, 짙은 색 바지에 등산화다. 현장에서는 거칠게 보이면 보일수록 전문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혜자마마가 말했던, 겉으로 드러나는 여성스러움까지는 미처 몰랐어도 구호 활동에 남성적인 요소와 여성적인 요소가 골고루 들어 있다는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구호 활동에는 근육과 힘도 필요하지만 가슴으로 해야 하는 일도 분명히 있다. 이라크나 팔레스타인 전쟁터에서, 이란의 지진 현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를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어야 한다는 건 어느 구호 지침서에도 씌어 있지 않았다. 오직 내가 갖고 있는 여성이라는 유전자가 가르쳐주었을 뿐. 또한 초긴장 상태의 현장에서 명령과 독재가 아니라 대화와 합의를 통한 '부드러운 리더십'을 펼 수 있었던 것이나 구호 현장에서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제발 이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할 때도 내가 여자라서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이제야 나는 나의 여성성을 제대로 찾아가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긴급구호라는, 세상에서 제일 거친 일을 통해서 말이다. 더불어 깨닫게 되었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니 여성성을 지닌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그걸 애써 외면하는 건 누구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었음을. 혜자마마의 말이 백번 옳았다. 나는 조금 더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하고 조금 더 매력적인 여자가 되어야 한다. 한 여인으로서도, 구호팀 팀장으로서도. 그날 마마의 따끔한 충고처럼 나는 두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솔직히 첫 번째 얼굴은 익숙하지만 두 번째 얼굴은 낯설고 어색하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볼 것이다. 보석이나 명품 등으로 치장하는 일은 없겠지만 나에게 어울리는 연꽃향 향수를 산다든지, 날씬해지는 미용 체조도 게을리하지 않겠다.
2장 내가 날개를 발견한 순간
우리는 누군가의 기도로 살아간다"다른 사람 목숨을 살리려면 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구호 일을 하기 직전, 어느 외국 구호요원한테 들은 말이다. 얘기인즉, 구호요원, 특히 긴급구호요원은 소방관과 같다는 얘기다. 불이 나면 모두 피신하지만 불구덩이 속에 사람이 있는 한 소방관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것처럼, 긴급구호요원은 위험한 현장에서 사람을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뜨끔했다. 새로 시작하는 일에 힘을 아끼지 않을 결심은 했지만 목숨까지 내놓으라니…….
물론 현장에서는 구호요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일의 성격상 다른 직업군에 비해 더 자주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불 '구경'이 아니라 불 '끄기'에 나선 이상 말이다. 실제로 구호 현장에서 함께 일했던 해외 동료 중에는 오른팔이 절단된 사람도 있고 실명한 사람도 있고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잃은 사람, 총격을 받아 즉사한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아찔했던 순간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2005년 파키스탄, 하루아침에 8만 명이나 목숨을 잃은 대지진 구호 현장에서의 일이다. 월드비전 한국은 재난 발생 48시간 내에 의사 세 명을 포함한 의료팀을 꾸려 가장 피해가 크면서도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산간 지방으로 갔다. 지진으로 무너진 산길을 군인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넘어 목적지에 도착하니 산간 마을들은 하나같이 짓밟힌 모래성처럼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주민 수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말이 실감났다.
'저 정도로 강력한 지진이면 이 산중의 여진도 만만치는 않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순간 발 밑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여진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일행들 앞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이면 팀원들이 당황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천연 놀이동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호호호."그러나 그날 밤 나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영하 15도 땅 밑에서 올라오는 한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이 깊은 산속에 묻히면 어쩌나 해서다. 나야 구호팀장이니 이 일을 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자원봉사를 하러 온 우리 의료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해야 할 텐데…….
"잘랄라아아(지진이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에 텐트 밖으로 튀어 나갔다. 다음 순간, 몸이 휘청할 정도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앞산이 뭉게구름 같은 먼지 속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깊은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 흙더미가 우리 텐트촌을 덮칠 기세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건 여진이 아니라 또 다른 강진이 분명했다. 나는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각자 여권을 꺼내 조끼 주머니에 넣으세요." 철수하자는 말이 아니었다. 여권은 최악의 상황에서 주검을 확인할 때 가장 정확한 신분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 후 여진은 잦아들었고, 이렇게 목숨을 내놓고 일한 덕분에 우리 의료팀은 열흘간 1,550여 명의 귀한 생명을 돌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지뢰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라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고, 이라크에서도 그랬다. 생각해보니 지뢰밭과 전쟁터를 돌아다닌 지난날이 새삼 아찔하기만 하다. 액션영화의 주인공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매번 무사할 수가 있었을까? 그저 운이 좋았다는 걸로만은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이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해준 기도 덕분이다. 나는 기도 중에서 가장 강력한 기도가 남을 위한 기도, 즉 중보기도라고 굳게 믿고 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 그중에는 한국 사람도 있고 외국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내가 구호 현장에 갈 때마다 마음 졸이며 밤낮으로 기도해주는 내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 특히 5백여 명 월드비전 동료들이 있다.
나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기도로서 재난 현장의 위험과 두려움에 함께 맞서 싸워주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 기도 덕분에 현장에서 밤에는 푹 삶은 시금치처럼 완전히 탈진해서 돌아와도 아침이면 다시 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버거워서 외로워서 힘들어서 울고 싶을 때마다 당신들의 기도가 내 몸을 감싸주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담요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그 강력한 기도가 갑옷과 방패가 되어 나를 철통같이 보호해주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맙다고, 뼈에 사무치도록 고맙다고, 그리고 진심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는 어떤 현장도 두렵지 않다. 어려움을 이기는 기도, 두려움을 이기는 기도, 죽음도 이기는 기도를 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2007년 9월, 나는 짐바브웨에 파견되어 130만 명에 대한 긴급구호 식량 지원을 하게 되었다. 숙소에서의 첫날, 새벽 5시에 눈이 떠졌다. 새벽어둠이 가시지 않은 푸르스름한 정원으로 나가보니, 형체만 어렴풋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동트기 직전의 하늘은 장엄하고 경건했다. 아침 기도를 하려고 성호를 긋고는 하느님, 하고 불렀더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 딸아, 나 여기 있단다' 하며 하느님이 바로 곁에 서 계시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오늘도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함께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짐바브웨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신선하고 경건한 짐바브웨의 새벽 기도와 성경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백컨대 내 평생 넉 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두 시간씩 기도하고 묵상하고 성경을 읽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마다 하느님, 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그 즉시 그분과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하느님과 일대일로 면담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하루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읽는 성경 말씀은 꿀처럼 달고 가시처럼 따끔했다. 새벽에 몸은 더 자고 싶다고 아우성인데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에 벌떡 일어난 날도 많았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나 같은 아침 잠꾸러기가.
현장에서는 하루 종일 입에서 단내가 나고 파김치가 되도록 일하지만 매일 아침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 두 시간 동안만은 파견 근무가 아니라 영성 훈련이나 장기 피정을 온 것 같았다. 아침마다 하느님께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도울 수 있을지 지혜를 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한번은 현지 예배 설교 도중 목사님이 매일 시간을 정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보라며, 그런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아, 바로 나잖아? 쑥스러워 손을 들지는 않았지만 약간 우쭐해졌다. 그러나 우쭐함도 잠시, 내 입에서는 이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그 음성이 도대체 언제쯤에나 들린단 거야?'
그 무렵 나는 짐바브웨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어떻게 사십대를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오십대를 준비해야 할지를 놓고 매일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오십대에도 재난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하느님도 원하시는 바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기도가 부족해서 내가 다 정해놓고 하느님 뜻대로 하세요, 하고 나서는 원망을 퍼붓는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그해 첫날부터 '제가 무엇을 하오리까?'라고 기도 제목을 정해놓고 아침마다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지만 음성이 들리지 않아 답답하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매일 두 시간씩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꼬박꼬박 읽는데, 하느님은 왜 속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 않는 걸까?
어느덧 4개월간의 파견 근무가 끝나고 짐바브웨에서의 마지막 주일 예배 시간이 왔다. 평소 같으면 한껏 예배 분위기를 고양해야 할 목사님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조용했다. 성가대에게도 율동은 자제하고 잔잔한 곡만 부르라고 부탁하시면서 "오늘은 기도를 좀 해야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의 이런 진지한 모습은 낯설었지만 요란하게 설교할 때보다 훨씬 카리스마 넘치고 멋있었다. 그러고는 예배 세 시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해, 남아프리카의 가뭄 해갈을 위해, 짐바브웨 위정자들을 위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결혼 생활이나 경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등등 한 제목 당 10분 정도씩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큰 소리 내지 말고 혼자서 속으로 기도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러길 한두 시간쯤 했을까? 목사님이 느닷없이 "다음은 앞으로 10년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깜짝 놀랐다. 바로 지난 1년 동안 매일 아침 간구했던 내 기도 제목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 말이었다. "영어나 쇼나어(짐바브웨 현지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은 속 시원하게 자기 모국어로 기도하십시오." 목사님이 나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내가 유일한 외국인이긴 했지만, 그날은 불도 켜 있지 않은 깜깜한 2층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서 보일 리가 없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가 앞으로 10년간 무슨 일을 하길 바라시는지 알고 싶다며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굵은 눈물방울이 뺨으로 뚝, 떨어졌다. 그 순간 가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면서 어떤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