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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웃음

이재오 지음 | 생각의나무
함박웃음

이재오 지음

생각의나무 / 2009년 8월 / 364쪽 / 14,000원



1장. 0.75평 독방에서의 명상



사랑하는 나의 적들


요즘 들어 연구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문득 지난날이 떠오를 때가 있다.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혹 잘못한 일은 없는지 그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을 모르는 체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하는 걱정이 새삼스레 들곤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에 대한 연민은 점점 줄고,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늘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내 자신이 민주화운동 시절 겪은 고통이 남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다섯 번이나 감옥에 들락거리는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많이 참아내야 했다. 감옥 안의 폐쇄적인 생활이 가져다주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무엇보다도 투옥 때마다 가해지는 고문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고, 시대를 원망했다.

1979년 8월 6일, 오원춘 납치 사건으로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발칵 뒤집혔다. 가톨릭 신자이나 선량한 농민이었던 오원춘을 경찰이 불법 연행하고 폭행한 사건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들고 일어나자 유신정권은 이를 기회로 가톨릭교회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일 안동교구청이 있는 성당에서 오원춘 사건 진상보고대회가 있었다. 나는 당시 국제 엠네스티 한국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근무했는데, 한국의 인권탄압에 대해서 보고해 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받고 안동으로 내려갔다.

강연이 끝난 후엔 가톨릭농민회원들과 신부, 수녀, 신자들이 안동시청까지 야간 횃불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틀 후 나는 강제 연행되었다. 나는 내가 한 말 중에서 무엇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는지 따졌지만 형사들은 위에서 시키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아무렇게나 조서를 꾸며 나를 구속했다. 세 번째 투옥이었다. 서대문구치소 1사 상21방에서 나는 재판받을 날을 기다렸다. 시간과의 고단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구치소 독방에 앉아 있으면 원인 모를 불안을 떨치기 어려운데, 이는 불가항력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폐쇄된 공간 자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저녁이 다 되어서 교도관이 출정을 나간다며 갑자기 감방 문을 열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보안 과장실에 가보니 두 명의 낯선 젊은이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차에 태우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수갑을 차고 끌려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그들은 악명 높았던 이근안 팀이었다. 나는 그 유명한 이근안 팀에게 이미 73년과 77년 두 번이나 살인적인 고문을 당한 바 있었기 때문에 겁부터 벌컥 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막상 고문이 시작되자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물었다. '살아서 죽느니, 차라리 죽어서 사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끌려왔는지도 모른 채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로부터 무차별로 얻어맞았다. 얼굴이 붓고, 코피가 나고, 눈에 멍이 들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온몸을 두들겨 맞고 또 맞았다. 무자비한 고문 후에 내게 딱 한 번의 질문이 주어졌고, 다시 대답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면 다시금 고문이 이어졌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사람을 사람이지 않게 만들었다. 나는 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그들은 최고의 고문 전문가답게 침착했고, 나는 짐승처럼 버둥거리다 실신하기를 반복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면 나는 질문이 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네, 네, 대답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흐느꼈다. 고문이 고통스러워서도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이를 깨물며 후회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얻은 후에야 나는 감방으로 돌려보내졌다. 어쨌든 나는 고문으로 조작된 혐의 때문에 15년을 구형받았고 5년을 복역하다 1983년 8ㆍ15 특사로 출옥했다.

그때 그 재판에서 "이런 사람은 장기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15년을 구형했던 검사가 박철언 씨였다. 나는 그와 15대 국회의원 생활을 같이했는데, 국회 로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멈칫거리는 그에게 다가가 "제가 이재오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약간 당황하면서 나에게 "재야에 오래 있어서 국회의원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시대는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그가 원망스럽거나 밉지는 않았다. 그도 나도 시대가 낳은 희생양들이니 누굴 탓하겠는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던 이근안 팀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니던 은평구 한 교회에서 이근안 팀원이었던 한 형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고, 나 역시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참으로 난감했다. 곧 마음을 다스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형사님 아니십니까. 제가 이재오입니다. 교회 선배로서 좋은 인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그의 모습은 환하게 바뀌었고, 그 후 그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도와주는 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한편 감옥에 있을 때나 출옥 후에도 나는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이 그들을 용서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를 짐승으로 만든 고문자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인간성을 야수로 만든 분단의 역사, 그 분단을 이용해 냉전논리를 정권유지의 도구로 사용한 독재정권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또 어쩌랴! 지금은 그 정권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과오와 부정은 이미 국민들에게 냉혹한 심판을 받았고 또한 받고 있으니까. 어두운 과거를 밀치고 새로운 역사를 끝없이 창조해내는 위대한 우리 국민의 힘이 있으니까.

가난은 추억이 아니다

나는 해방둥이로 1945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일제 말기의 극심한 수탈로 민족 전체가 너 나 할 것 없이 가난에 허덕이던 때였다. 나는 어린 시절 특별한 꿈이 없었다. 어떻게든 굶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이 꿈이라면 꿈이자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본래의 내 출생지는 강원도 명주군 망상면이나, 그쪽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으로 갔다가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한국으로 돌아왔고, 이후 삼척ㆍ옥계 탄광에서 일했다. 그 뒤 1948년 고향인 경북 영양군 서북면 덕곡리로 돌아왔는데, 내 어린 날의 모든 기억들은 이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마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다. 마을에는 70여 호가 살았는데 아침에 굴뚝에 연기가 나는 집은 서너 집 남짓할 뿐이었다. 동네아이들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으로 달려가 담벼락에 들러붙어 자기에게 밥 한 숟가락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 집 안에서는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고요한 침묵만 되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배고픔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여섯 살이 되고 일곱 살이 되었다. 여섯 살이 되던 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일곱 살이 되던 해에는 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을 하고도 집안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전 아침에 물을 끓여 한 대접 마시는 게 전부였다. 학교에 가면 다행히 우유가루를 배급해주었는데 그걸 받기 위해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유가루를 집에 가지고 와서 쪄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좀 큰 아이들은 소 먹이러 들로 산으로 가고, 우리들은 배를 채우기 위해 소나무껍질을 벗기곤 했다. 겉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도려내면 소나무에서 물이 나왔는데 아이들은 매미처럼 소나무에 매달려 그 물을 빨아먹었다. 껍질은 집에 가져와 물에 불려 떡을 해먹었다. 칡뿌리도 캐고, 산나물도 따서 먹었다. 그것이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그것마저도 구할 수 없었다. 어느 해인가 한겨울에 한 아이가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여 모두 그 아이 주변으로 몰려 앉았다. 잠시 후 그 아이는 아주 가는 흙을 모아오더니 삼베 천에 걸러냈다. 그러자 흙은 밀가루처럼 아주 고운 것만 남게 되었다. 그 아이는 그것을 물에 개어서 말린 다음 주먹 떡이라며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이 미적거리자 자신이 먹어 시범을 보였지만 따라 먹는 아이는 없었다.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흙으로 만든 쿠키를 먹던 그 아이의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앓다가 죽었다. 아이들 말로는 배가 한없이 부풀어올라 터져서 죽었다고 했다. 어른들 말로는 소화가 안 된 흙이 창자를 찔러서 죽었다고 했다.

최근에 진흙을 개어서 쿠키를 만들어 먹는다는 아프리카 어느 마을의 얘기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아주 오래전의 그 기억이 떠올랐다. 가난은 전쟁이 그런 것처럼 결코 낭만이나 추억이 될 수 없다.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고 했다. 지독히 배고파보고 굶주려 본 사람만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장. 기약도 없이 홀로 떠나온 미국



이역에서의 길 찾기

젊은 시절 감옥에 들락거리느라 식구들과 함께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이면 식구들 곁을 떠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다. 그런 내가 기약도 없이 홀로 미국에 왔으니 불안과 외로움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외로움도 잠시, 나는 호텔에서의 첫 밤을 지내자마자 곧장 집을 구하고 학교에 나가 연구와 일을 진행해야만 했다.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존스홉킨스대학으로 향했다. 학장과 인사를 한 후에 나는 학교에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운 좋게 작은 집을 얻었다. 다행히 집주인이 쓰던 가구를 모두 놓고 이사를 가서 나는 몸만 들어가면 되었다. 한편 학교의 배려로 연구실도 하나 얻게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굉장히 큰 지원이었다. 그리고 곧장 자전거를 한 대 구했다. 기사도 없고 면허도 없으니 출퇴근 수단으로는 자전거가 제격이었다.

자전거를 오랫동안 탔다는 한 지인의 도움으로 첫날은 무사히 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길도 익힐 겸 혼자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며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루스벨트 다리를 건너 학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내 눈에는 미국의 동네가 거의 비슷해서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길을 잃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네 시간을 헤매다가 하는 수 없이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리러 와준 지인의 차를 타고 와보니 정작 집까지는 채 5분 거리도 되지 않았다. 당황해서 뻔한 길도 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날 나는 자전거길에 다시 도전했다. 책가방 안에는 책 대신 빨간 비닐끈 한 뭉치가 들어 있었다. 지난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출근을 하며 1킬로미터 간격으로 빨간 끈을 나뭇가지, 다리 난간 같은 곳에 묶기 시작했다. 나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혼자서 학교를 가는 데 다섯 시간이 걸렸다. 둘째 날은 두 시간이 걸렸고, 길이 눈에 들어온 후에는 한 시간 반이 걸렸다. 내 출근 시간은 점점 빨라져서 학교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이 되었다. 연구실 문도 열고 불도 켜고 화장실 문도 열고 그렇게 한 달여를 지냈다. 한편 나는 연구실에 앉아 책을 보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소문이 돌았다. 존스홉킨스대학의 교수들 사이에서도 곧 말이 돌았다. 한국에서 꽤 이름 있는 정치인이 왔다는데,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연구실 방만 축내는구나 생각했는데, 매일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일찍 와서 제일 먼저 하루를 준비한다는 말이었다. 또 일과가 끝나면 술을 마시지도 않고, 골프도 치지 않고, 무조건 집을 향해 돌아가는 것이 그쪽에 와서 지냈던 여느 정치인과는 다르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였는데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산길이어서 날이 지기 전에 기를 쓰고 집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한 달을 보냈는데 한국학과에서 객원교수 자격으로 한 학기 강의를 청해왔다. 선뜻 수락을 해놓고 보니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외국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를 해야 하니 뭔가 체계가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연구실에 박혀서 강의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다 드는 생각이 강의를 시작하기 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부터 한국 사람이 친절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경비원 아저씨하고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나중에는 집으로 부인, 아이들도 불러 저녁을 같이 먹었다. 결실은 학기가 시작되고 금방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사람에게 한국 사람이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인지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미국으로 건너오며 느꼈던 막막함과 착잡함은 바람에 실려 사라져갔고, 다시 모든 것이 잘될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 밖에서 본 우리

미국은 한반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해방 이후의 우리 현대사에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나라며,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여러 분야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임에 분명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런 친밀한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어떤 면에서 이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고유한 이념과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와 실용주의일 것이다. 실용주의를 처음 주장했던 존 듀이는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시행착오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반만년 시행착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반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암흑기를 겪었고, 식민지 시대, 한국전쟁, 군사독재, IMF를 통한 경제적 시련 등 무수한 시행착오가 우리의 역사와 현대사 곳곳에 스며 있다. 그런데 듀이는 지금 이런 시행착오야말로 진리를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행착오도 힘이 될 수 있고 미래를 위한 자산이 될 수 있다는 말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시행착오의 역사를 반성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서부터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과거의 잘못된 부분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것, 손해를 보지 않고 실리를 택하는 것이 바로 한국 실용주의의 시작이다.

이른 아침 창밖에서 우는 새소리만 들어도 지금 한국은 몇 시쯤 됐을까,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난다. 얼마 전 LA를 방문하는 길에는 덜레스 공항에서 대한항공(KAL)의 태극마크만 보고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좀 주책없다 싶다가도 감격스러워 공연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으니, 나도 나이가 한 살 두 살 늙어가는 게 분명한가 보다. 조국이란 이처럼 떨어지기만 해도 그리운 것인데, 일제 36년간 조국을 되찾기 위해 애쓴 독립투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곤 한다. 곰곰 따져보면 건국 60년이 지났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청산해야 할 잘못된 관행과 관습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책임은 그 시대에 정치를 잘못한 집권자들에게 있다. 이제 우리가 먼저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각종 공직에 임명을 받은 분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싶다. 현재의 자리가 본인의 능력과 경험과 실력에 걸맞는지 곰곰이 따져보고, 위세와 허세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부족한 능력이 있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채워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일이며 정부의 기강을 세우는 유일한 길이다. 또 공직자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배려가 있어야만 한다.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이른바 소외당하기 쉬운 사람들에게 항상 손을 내밀 수 있어야 한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따뜻하고 인간적인 배려, 사회경제적 보호가 넘치는 정부가 되어야만 한다.

3장. 나의 가장 큰 재산은 함박웃음



야당 안에서의 또 다른 야당생활

정치인의 선택은 확고한 자기 정체성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중앙정치에 나오고 나서 가장 의아스럽게 생각했던 것 중의 하나가,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해와 득실에 따라 그때그때 소신을 바꾸는 정치인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사 한 정치인의 선택이 당시에는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다면 국민과의 약속은 지켜지는 셈인데, 나도 여러 번 곤혹스러운 정치적 선택 앞에 놓인 적이 있다. 지금 내가 죽은 정치인이 아니고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속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그때마다의 내 정치적 선택이 그릇되거나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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