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생각들
황광우 지음 | 비아북
위대한 생각들
황광우 지음 비아북 / 2009년 8월 / 300쪽 / 14,000원
신은 죽었다. 그 이후의 사회는? : 자유주의 Liberalism중세 유럽은 봉건 영주의 영토를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했다. 봉건 영주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중세 농민들은 일 년 내내 봉건 영주에게 세금과 부역을 바쳤다. 그들은 신분제도나 정치적 억압에 대해서 불평 없이 지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착실히 살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11세기 말부터 약 200년 동안 지속된 십자군 전쟁(crusade, 중세 유럽의 기독교도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다시 찾기 위해 감행한 대원정)은 이 같은 상황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슬람과의 접촉을 통해 중세 유럽인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탐내었다. 또한 대규모 원정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대도시와 항구가 발전했다.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점차 도시로 모여들면서 경제의 중심이 시골에서 도시로 바뀌었다. 한편 지리상의 발견과 그 뒤를 이은 식민지 개척은 이런 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새로 개척한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유럽으로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와 동시에 경제생활에서 화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절대왕정(유럽 역사에서 일반적으로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 왕국은 군주의 소유물이었다)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중상주의(Mercantilism, 절대왕정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한 경제 이론 및 정책)는 이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경제적 변화는 신분 구조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한 나라의 중심을 이루는 지배계급은 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과 성직자였다. 그런데 새로운 경제활동을 담당하는 세력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을 '시민계급' 또는 '부르주아'라고 부른다. 그들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향상된 경제적 지위와 도시인의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 지위가 높아진다 해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된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성직자, 귀족, 그 다음의 '제3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자유조차 얻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계급'은 점점 더 왕권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시민계급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바라게 되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체제를 체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사상을 원했다. 이 같은 시민계급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바로 '자유주의 사상'이다.
개인 없이는 자유도 없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사상을 등장시킨 사상적 토대가 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정신사에서 '개인'을 찾게 해준 역사적 사건인 문예부흥(文藝復興, Renaissance), 종교개혁(宗敎改革, Reformation), 그리고 과학혁명에 의해서였다. 유럽의 중세는 신(神) 중심(Divinism)의 사회였다. 그러나 문예부흥을 통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시선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세에서 현실로, 영혼에서 육체로,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옮길 수 있었다. 종교개혁은 교회와 성직자의 초월적인 권위를 의심하게 했다. 루터다 칼뱅이다 하면서 각 나라에 등장한 새로운 성서 및 교리 해설자들이 인기를 얻었다. 유럽인들은 성직자나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신과 접촉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지구중심설이 지배하던 중세 사회에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등장한 것도 인류 정신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교회에서는 태양중심설의 추종자들을 종교재판에 회부해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과학의 발전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라져가는 태양왕: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된 배경도 살펴보자. 루이 14세는 자타가 공인하는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전제군주이다. 그는 "나는 태양왕이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고 외쳤는데, 그가 그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왕권 강화를 옹호하는 정치사상) 때문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자. 루이 14세는 1661년 가을, 베르사유 궁전의 착공을 명령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건축가, 조각가, 화가, 정원사가 총동원된 대공사는 약 24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기간 동안 공사 현장에서 과로, 사고, 질병으로 죽은 노동자의 시체가 매일 밤 짐차에 가득 실려 나갔다고 한다. 이윽고 완성된 궁전의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은 유럽 어느 나라의 궁전도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곳은 지상의 에덴동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궁정의 유지에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자 공공연히 관직 매매가 이루어졌다. 왕국은 군주의 소유물이었고, 왕은 개인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 조세 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과 귀족들이 극단의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는 동안 프랑스 전체 인구의 95퍼센트는 빈곤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어쩌다 아이가 빵을 들고 길에 나서면 그 빵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유행했다. "프랑스에서는 인구의 10분의 9가 굶어 죽고 나머지 10분의 1은 너무 많이 처먹어서 죽는다."
이렇게 되자 차차 왕권신수설의 외침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처음에는 고개만 들고 겨우 외칠 뿐이었지만 점차 몸을 곧게 세우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의 엉덩이 밑에는 든든한 돈방석이 놓여 있었고, 머릿속에는 계몽주의 정신으로 갈고닦은 반짝이는 이성(理性)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시민계급인 부르주아였다. 왕권신수설을 비판하기 위해 신흥 시민계급들이 들고 나온 무기는 '사회계약설'이었다.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존 로크는 『정부론』에서,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각각 사회계약 이론을 전개했다.
왕권신수설의 핵심은 왕권을 '신이 주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왕권은 절대적인 것이고, 왕은 신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공격의 포인트는 이 부분이었다. 사회계약론의 핵심적인 주장은 왕권을 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의 합리적인 계약에 근거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왕이 국민과의 계약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할 경우에는 왕권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 사회계약설의 요체이다. 사회계약설로 인해 국가와 군주의 권력이 근본적으로 민중에게 있다는 주장이 확립되었고, 왕권신수설은 빛을 잃게 되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이런 배경에서 자유주의 사상은 시민혁명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시민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은 파리 시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되었다.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은 왕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자유주의 사상은 손에 손을 잡고 혁명에 참가한 민중들의 가슴 속 깊이 아로새겨졌다. '자유, 평등, 박애'로 집약되는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은 이후 나폴레옹 군대와 함께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자유주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간이 왕권의 횡포와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의 완전한 주체로 서는 과정에서 탄생한 위대한 정치 이념이다. 그 속에는 인종과 종교,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지녀야 하는 기본 권리가 천명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사상이 비록 서구에서 만들어진 것이어도 우리에게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이다. 또 비록 2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현실적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헌법'으로 보장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사상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자유주의는 이후의 역사를 통해 수정·보완되면서 현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으로 변화하게 되었다.(자유주의는 소수의 부르주아에게만 제한되었다가 국민 모두에게로 확대되는데 다시 말해 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덕이다.)
왜 그들은 나치즘에 열광했는가? : 파시즘 Fascism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다 같이 반대하는 새로운 정치사상과 운동이 탄생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 전쟁 결과에 대한 불만, 경제 불황 등이 그 자양분이었다. 그 사상을 파시즘이라 부른다. 파시즘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반대했고 사회주의사상의 일부와 민족주의를 혼합한 이념이었다. 민족의 위대함,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열렬한 대중 동원을 추구하는 파시즘은 니체, 베르그송, 체임벌린 같은 철학자들로부터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이성과 함께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인 광기와 열정, 생명력에 주목했다.
1,100명의 유태인 명단: 오늘은 정기 신체검사가 있는 날.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건강하게 보이려고 애쓴다. 여자들은 손끝을 찢어 피를 내서 입술과 얼굴에 문지른다. 홍조 띤 건강한 얼굴로 만들기 위해서다. 병들었다는 것은 일할 수 없다는 것이고, 일할 수 없다는 것은 어디론가 실려 가야 한다는 것(죽음)을 의미했다. / 간밤에 온 눈이 녹지 않은 추운 운동장.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은 알몸이다. 수줍음이란 그들에게 사치일 뿐이다. 사람들은 검사관 앞으로 줄을 지어 지나간다. 몇몇이 줄에서 솎아내어진다. 노인과 병든 사람들이다.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옷을 입는다. 살아남은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몇 장면 뽑아본 것이다. 독일의 나치즘이 극성을 부리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쉰들러라는 독일인 기업가가 자기 공장에서 일했던 유태인들을 헌신적으로 구해낸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다. 쉰들러는 실존 인물이었고, '쉰들러 리스트'란 그가 목숨을 구해주려고 작성한 1,100명의 유태인 명단이다. 한 학자는 말했다. "베토벤, 괴테, 칸트를 낳은 독일 민족이 왜 이 같은 히틀러의 광란을 묵인하고 추종했는지, 그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나치즘에 열광한 이유: 독일에서 광적인 파시즘인 나치즘이 등장한 배경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배경이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계속된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는 막대했다. 전사자가 약 1,000만 명, 부상자는 2,000만 명에 이르렀다. 각 나라의 산업 시설은 평균 30~40퍼센트 정도가 파괴되었다. 1929년에는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은 중산층의 꿈을 앗아갔다. 오랫동안 애써 모은 돈은 하루아침에 담배 한 갑도 사지 못할 정도로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들의 분노는 무엇으로도 억제할 수 없었다. 바이마르공화국에 대한 국민들의 적개심은 히틀러의 나치당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실제로도 나치의 경제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물론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은 결국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극심한 불황과 실업에 시달리던 당시 독일인들에게는 긴 가뭄 끝의 단비가 아닐 수 없었다.
독일인들이 나치에 열광한 두 번째 이유로 사회 심리적인 배경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19년 6월 28일에 맺은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가혹한 것이었다. 전쟁을 일으켰던 독일은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본국에서도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30년 동안 물어야할 1,320억 금(金) 마르크라는 배상금은 독일인들에게 큰 경제적 부담일 뿐 아니라 심리적 압박이었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 제231조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었다. '… 연합국과 이에 동조한 정부와 국민들이 입은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이 독일과 그 동맹국에 있음을 확인하고, 독일은 이를 인정한다.' 독일은 이 내용에 어쩔 수 없이 서명했지만 이 같은 조치는 독일인의 민족 감정을 크게 자극했다. 이 모든 상황은 독일인들 사이에 실추된 민족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고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형성시켰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로 인해 독일 국민들은 나치당이 주장하는 침략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반유태주의)에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게다가 히틀러는 외교 분야에서도 대중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성과를 이루었다.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급은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의 교서 덕분에 중단되었고, 무장해제를 명시한 베르사유 조약은 무시되었다. 그리고 잇달아 진행된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전에서 히틀러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물론 이 같은 외교 노선도 결국은 새로운 세계 전쟁으로 가는 위험한 길이었다. 마지막으로 유럽 여러 나라들 가운데 유독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만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데는 정치적 요인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국과 프랑스는 일찍부터 시민혁명을 겪으면서 민주주의 전통을 착실하게 쌓아온 나라들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에선 사회·경제적 불안이 정치적 불안으로 곧바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민주주의 전통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독일의 경우 통일과 근대국가 수립이 시민혁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통치 집단이 위로부터 수행한 것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그들은 사회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고 이를 정부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을 때 쉽게 민주주의에 등을 돌릴 수 있었다.
파시즘, 그후: 제2차 세계대전이 지난 지금도 일부 국가에는 파시즘적 징후가 남아 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과 미국에는 파시즘적 요소를 표방하는 정당과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파시즘적 정당, 곧 극우 정당들은 공통적으로 외국인, 특히 유색인종(황인종, 흑인종)에 대한 차별 정책과 국수주의적 정책을 공공연히 주장한다. 이들이 다시 등장하는 배경은 옛날과 비슷하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기 침체와 이로 인한 실업, 생활수준의 저하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그 모든 원인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외국인들에게 있다면서 그들을 공격한다.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은둔자가 피워낸 눈물의 꽃 : 도가 사상 Taoism장자(기원전 4세기경 전국시대의 사상가. 도가 사상의 중심인물)가 송나라의 몽이라는 곳에 있을 때였다. 초나라 위왕이 천금(千金)의 선물을 지참한 사신을 보내 장자를 재상으로 초빙하고 싶다고 했다. 장자는 빙긋이 웃음을 머금으며 초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 … 빨리 돌아가 주시오. … 당신이 보기에 내가 더러운 시궁창 속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겐 가장 유쾌한 일입니다. 이렇게 즐거운데 무엇 때문에 권력자에게 얽매이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이렇게 시골에서 한평생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노자한비열전 老子韓非列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는 일국의 재상 자리를 거절할 정도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의 '그 무엇'은 천금의 유혹을 견디고 재상의 권력을 뿌리칠 수 있었던 힘이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노자(춘추시대의 사상가, 도가의 시조)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가들은 '자유'를 추구했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 자유, 그 누구나 깨닫기만 하면 도달할 수 있는 자유를 추구했다. 그들의 사상은 한마디로 '절대 자유를 추구한 사상'이다. 또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 도피의 사상', '은둔의 사상'이기도 했다.
똥과 오줌, 그 안에 도(道) 있다: '도(道)'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면 도가 사상의 절반은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의 개념은 알쏭달쏭하기에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노자의 『도덕경 道德經』을 직접 읽어보자.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지어 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無名)은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니 '이(夷)'라고 한다.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니 '희(希)'라고 한다. 손으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라고 한다. 세 가지는 말로 밝힐 수 없다. 그래서 뒤섞어서 '하나'라고 한다. 그것은 위가 더 밝지도 않고, 아래가 더 어둡지도 않다. 긴 끈처럼 꼬여서 이어져 있으니 이름 붙일 수가 없다. 결국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을 꼴 없는 꼴이라 하고, 실체(物) 없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것을 황홀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