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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미디어 아트 - 예술의 최전선

진중권 지음

휴머니스트 / 2009년 6월 / 357쪽 / 18,000원



가상현실은 미래를 리허설하는 공간이다




로이 애스콧(Roy Ascort) 영국 배스에서 태어난 로이 애스콧은 순수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1989년에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린 아르스 일렉트로니카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현재는 플래니터리칼리지엄의 소장이자 영국 폴리머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또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 부학장을 역임했고, 빈 응용미술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미니애폴리스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가르쳤으며,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 예술대학의 학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텔레마티크 아트의 선구자인 그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엘렉트라 파리, 네덜란드의 V2, 밀라노 트리엔날레, 브라질의 메르코수르 비엔날레, 유럽 미디어 페스티벌에서 전시회를 가져왔다. 그 밖에도 CEC와 유네스코뿐만 아니라 유럽, 호주, 브라질, 캐나다, 중국, 일본, 한국, 미국의 뉴미디어센터와 축제에 대한 자문을 하고 있다.

예술과 아포리아, 가상현실에서의 트랜스액션

저는 오늘 예술과 아포리아, 가변현실(variable reality)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합니다. 현대에는 가상적인 형태나 문화적인 형태가 많이 생겨나서 우리는 우리의 다중자아들(multiple selves)을 구성하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상과 실재 사이의 이항대립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서구사상의 한 가지 환상은 고립된 정신이 하나의 물질적 신체 속에서 분리된 의식을 구성한다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관념 자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주 이야기되는 통섭과 유사한 테크노에틱(기술을 의미하는 'techno'와 인식을 의미하는 'noesis'를 합성한 신조어) 차원들을 가진 싱크리틱(syncretic, '함께'를 의미하는 'syn'과 '크레타 사람'을 의미하는 'cret'를 합성한 형용사) 예술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논문의 표상으로 '아포리아 크라타이기(aporia crataegi)'라는 학명의 나비를 선택했습니다. 불확실성이나 모순 또는 연속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뜻하는 '아포리아'는 비연속적인 것에서 생겨납니다. (창조적) 정체 상태나 소화불량에서 벗어나는 것, 또는 (지적) 경화증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을 뜻하는 '크라타이기'는 치유적 은유입니다. 1900년대에 의문스럽게 사라진 이 나비가 지금 우리가 구성하고 있는 가변현실 속에서 싱크리티즘적인 사고로 다시 출현하고 있습니다. 고치에서 성체로 변태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나비는 변화와 가변성의 표상이자 죽음 이후의 부활, 정신과 영혼의 상태(그리스어에서 나비는 영혼과 동의어), 그리고 아주 미세한 변화에 대한 민감성(카오스 이론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의 표상이기 때문에 나비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창조적 탐구에 꼭 필요한 요소가 바로 나비 정신(butterfly mind)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싱크리틱 예술의 근본적인 속성, 다시 말하면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민첩하게 시각을 바꾸면서 탐구해야 할 기회와 극복해야 할 장애의 영역을 끊임없이 다시 점검하는 능력입니다.

이제 예술의 테크노에틱 차원을 살펴보기로 하지요. 거기에는 의식의 기술에 대한 고려가 포함됩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협상하는 많은 현실들에 대한 이해에 정보를 제공하는 가운데, 예술을 비(非)물질적, 비(非)인과적, 비(非)결정성의 영역에 놓습니다. '촉촉한 미디어(moist media)'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실리콘이라는 마른(dry) 컴퓨터와 젖은(wet) 식물적 시스템의 결합을 뜻하는데, 저는 그것이 우리 세기의 예술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존재의 모호성이란 이제 우리가 여러 개의 인격을 동시에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디지털 또는 후기생물학적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모습을 취할 수 있습니다. 21세기의 자아는 생성적이고 창발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컨드 라이프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다양한 서사들이 있고,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게임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지요. 이렇게 변형적 인격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미디어아트가 추구하는 목표와도 일치합니다.

20세기에는 '많은 것으로부터 하나(e pluribus unum)', 즉 통일된 자아, 통일된 시간, 통일된 공간이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치는 '하나로부터 많은 것(ex uno plures)'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많은 자아, 많은 현존, 많은 세계, 많은 의식의 수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우연성의 문화입니다. 우리 자신과 환경은 끝없는 변화 속에 있습니다. 그 변화는 예측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고, 확실하지 않으며, 확정적이지 않지요. 예술은 모험과 우연, 놀이의 전략을 발전시킵니다. 우리는 자신을 업데이트하고, 리모델링하고, 재발명하면서 새로운 관계들, 새로운 현실들, 새로운 시공간의 질서를 탐색합니다. 우리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변형하는 개방된 문화입니다. 이제 문화는 더 이상 우리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우리가 문화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바른 셀프 크리에이션(self creation), 즉 스스로 자아를 창조하는 게 예술가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20세기 후반에 디지털 예술은 주로 연결성과 인터랙션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새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 미디어아트의 화두는 테크노에틱스와 싱크리티즘입니다. 싱크리티즘은 서로 반목하던 고대 크레타 섬의 부족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하나가 된 데에서 비롯된 말이지요. 싱크리티즘적인 충동은 친숙하지 않고, 배척을 당하고, 낯선 비선형적인 믿음이나 생각의 구조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차이와 일관성을 동시에 가지려는 것이지요. 싱크리티즘은 역사적으로 같지 않은 것들 속에서 같음을 찾아냄으로써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과 문화적 실천들을 화해시키고, 그것들 사이에 유비관계를 설정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무당굿을 예로 들어볼까요? 제가 보기에 거기서는 굿을 이루는 요소인 소리, 색깔과 춤사위의 기능이 한데 어우러져 정신적 재구성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미디어아트 역시 공공장소에서 행해질 때는 이런 식의 심적 구성(psy reconstructuring)을 일으킬 수 있겠지요. 사회에서든, 커뮤니티에서든, 그 어떤 물리적인 장소에서든 정신적 재구성이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의식을 설명하려 하고, 예술은 의식의 바다를 항해하려 합니다. 오늘날의 싱크리티즘적인 절차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술들(인터랙티브 기술과 디지털 기술, 반응적 기술과 기계적 기술, 향정신적 기술과 화학적 기술), 새로운 통신의 의식들(모바일, 온라인), 그리고 커뮤니티 형태들(사회적 네트워킹, 세컨드 라이프)을 하나로 버무립니다. 예술가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의식의 본성은 무엇인가?'예술가로서 우리는 의식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그 답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기술과 더불어 공(共)진화하라"

진중권 당신의 텍스트는 신조어들로 넘쳐납니다. '텔레노이아', '사이버 셉션', '하이퍼코텍스' 등등. 그것들은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달라진 새로운 세계 체험을 기술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개념에 대해서 각각 간단히 설명해줄 수 있나요? 애스콧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몇 개만 이야기하지요. 그 중 하나는 사이버셉션입니다. 저는 그 말을 어떤 새로운 능력으로 간주합니다. 그저 지각적 능력들이나 인지적 능력들의 혼합이 아니라……. 확장됐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질적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질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물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됐다는 뜻입니다. 엑스레이를 통해서든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든, 또는 그 밖의 어떤 것을 통해서든 말이죠. 저는 여기에 모종의 전체론(holism)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감성과 감각체계 속에 말이죠. 이것은 새로운 정신능력이고, 그 능력에 이름을 붙여야 했기에 그것을 사이버셉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개념이지요.

진중권 그리고 텔레노이아는요?

애스콧 텔레노이아는 유용하게 쓰였다고 생각되는 또 다른 낱말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을 일컫는 거예요. 앨빈 토플러는 20세기를 굴뚝문화, 산업사회를 굴뚝사회라 불렀지요. 우리가 지금 막 떠나고 있는 그 문화는 파라노이아(paranoia), 과도한 프라이버시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나에 대해, 또는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 두려움을 우리는 파라노이아라 부르죠. 그런데 네트워킹의 효과(= 애정)는 제가 '텔레노이아'라 부르는 축복을 가져오게 되죠. 제가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개념은 '촉촉한 미디어'라는 것입니다.

진중권 당신은 '포스트 생물학'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물론 인공신체, 인공정신, 인공생명 등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에 관련하여 당신은 이 세 가지 기술을 다 사용하는 정도까지 통일된 견해를 확장시킬 수 있는 곳은 예술 외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지 설명해줄 수 있나요? 애스콧 제가 말하는 '포스트 생물학적'이라는 것은 정말로 '주어진 것 이후'를 뜻합니다. 계몽주의 또는 지난 세기 이래로 유럽에는 주어진 것에 대한 믿음이 유지되어 왔지요. 우리의 정체성도 주어져 있었고, 신체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주어진 것은 사실상 부분적으로는 지각체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하자면 자연이지요. 확실히 우리는 기술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자신을 발전시켜나간다는 의미의 공진화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제 말은 우리가 생물학을 악용하고 있다거나 우리 자신을 기계로 바꾸어 놓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러 가지 면에서 과도기입니다. 뭔가 세간의 사유로는 파악하기 힘든 시기지요. 우리가 가상공간에서 하는 모든 것을 언젠가 나노 기술을 가지고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것은 명확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과도기라는 것이지요.

가상현실은 언젠가 우리가 실제로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시험해보는 일종의 리허설 공간입니다. 포스트 생물학은 책임과 권능에 관한 생각들의 연계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주어진 것'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가상현실에서 혼합현실로



히로세 미치타카 1954년 일본 가나가와 현에서 태어난 히로세 미치타카는 산업기계공학을 전공했다. 1982년에서 1999년에는 도쿄 대학 공학부의 부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도쿄 대학 정보기술 과학대학원의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교육부 후원으로 진행되고 있는 디지털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책임자와 IRT의 사이버 인터페이스 그룹 프로젝트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일본 총무성에서 지원하는 멀티미디어 버추얼 래버러토리 프로젝트와 스케일러블 VR 콘텐츠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연구 분야는 시스템 엔지니어링, 가상현실, 휴먼 인터페이스, 인터랙티브 컴퓨터그래픽스, 웨어러블 컴퓨터와 이미지 기반 통합 가상환경, 그리고 이미지 기반 가상세계 제너레이션을 들 수 있다. 『가상현실』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가상현실에 초점을 맞춘 시스템 디자인을 연구 중이다.

가상현실 2.0과 디지털 공공예술

'가상현실'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상현실이란 컴퓨터로 합성되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술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가 우리는 다양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상현실을 특징짓는 세 개의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째는 현존(presence)으로, 이는 컴퓨터 세계 속으로 몰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인터랙션(interaction)으로, 가상의 대상들과의 상호작용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다감각 인터페이스로, 이는 그 대상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데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상현실 기술은 이 세 가지 기능을 지원합니다. 가상현실 기술은 그저 현실을 흉내 내는 모의실험에 불과한 게 아닙니다. 오로지 가상현실 기술로만 체험할 수 있는 세계들이 있어야 합니다.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의 세계 같은 경우, 사용자는 가상환경 속에서 공간의 휘어짐, 광속의 통제와 같은 다양한 현상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제는 혼합현실의 기술입니다. 기본적으로 가상현실 기술은 컴퓨터 상자 속의 기술입니다. 가상현실의 본질은 현실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상의 세계는 현실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쯤에 가상현실 기술은 현실세계와 점점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버전의 가상현실을 'VR 2.0이'라고 부릅니다. 토론토 대학의 폴 밀그램(Paul Milgram)교수가 현실과 가상, 가상과 현실 사이의 연속성을 제안했죠. 그 연속성을 현실 증강 증강가상 가상의 네 부분으로 범주화할 수 있습니다. 먼저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에서 출발하겠습니다. 증강현실이란 가상을 실재 위에 중첩시키는 혼합현실 기술입니다. 가령 <스타 워스>와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아바타가 홀로그램으로 현실공간에 나타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렇게 현실공간에 연출되는 아바타를 '현실세계 아바타(Real World Avata)'라고 부릅니다. 현실세계 디스플레이를 이용하면, 우리는 이 아바타가 더 많은 목적으로 사용될 가능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현실세계 비디오 아바타란 한마디로 이미지로 만든 로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소개할 것은 증강가상(Augmented Virtuality)의 기술입니다. 증강가상은 '실재'의 모습을 저장하여 가상으로 옮기는 기술을 말합니다. 현재 저는 '도시의 박물관'이라는 기획에 착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기획의 목표는 현실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낡은 풍경을 가상세계에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박물관은 오직 디지털 기술로만 실현할 수 있지요. 여기에는 3D 기술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낡은 사진과 요즘 사진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늘 시점의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디지털 카메라, GPS 콤팩트 메모리, 다양한 센서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매일 일상의 체험을 기록할 수 있지요. 매일 8시간씩 70년 동안 녹화한다 해도, 필요한 용량은 10테라바이트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 큰 용량이 아닙니다. 그 정도의 파일 서버라면 몇 년 안에 가정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디지털 기술은 미래와 과거를 '지금'으로 만들어줍니다. 컴퓨터가 없으면 우리는 그저 현재만 볼 뿐입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있으면 우리의 시간 감각은 과거와 미래로 확장되지요.

"아바타, 리얼 아바타, 그리고 로봇"

조동원
(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미디어 문화행동 활동가) 가상현실이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세컨드 라이프라든가 하는 형태로 말이죠. 그럼 당신이 하는 증강현실은 앞으로 어떻게 일상으로 들어올까요?히로세 증강현실이 의외로 사회에 들어가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컨드 라이프라든지 가상현실은 컴퓨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다른 세계의 이야기인 셈이죠. 그러나 증강현실이나 혼합현실은 언제나 눈에 보입니다. 우리 자신이 현실의 세계에 살고 있는데다, 그것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부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니까요. 예를 들어 반응적 환경(responsive environment, 관객의 행동에 반응하여 달라지는 환경)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느 부분을 치면 전부 정보가 되어 되돌아옵니다. 현실세계의 체험 안에서 뭔가 가상적인 것이 금방 반응하고 나타나 뒤섞여버리는 거죠. 실생활에서 가상적인 것을 체험하는 장치로서 휴대전화 같은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갖고 있지요. 물리적 세계 안에서 가상적인 것을 체험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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