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김준기 지음 | 시그마북스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
김준기 지음
시그마북스 / 2009년 7월 / 320쪽 / 13,800원
트라우마란 무엇인가_ 비극의 정점에서 멈춘 기억, 트라우마
현실을 옥죄는 반복되는 악몽,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 밀양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험난합니다.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신뢰일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믿고, 주변 사람들을 믿고, 사회적 질서와 신의 섭리 등을 믿으면서 우리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도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안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나라는 존재감을 긍정적으로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사람을 어느 한순간에 잃게 된다면 어떨까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이렇게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 체계와 의미 체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삶을 압도적으로 무너뜨리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한차례 트라우마를 받고 밀양으로 오게 됩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신애는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오게 됩니다. 상식적으로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의 고향으로, 그것도 서울에서 지방으로 낙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불륜과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밀양으로 갑니다. 그녀의 행동은 일종의 회피로도 풀이될 수 있습니다. 주위로부터 오는 자극을 무조건적으로 피하기 위해 어린 아들 준과 함께 낯선 땅 밀양으로 왔기 때문이지요. 긍정적으로 보면 나름대로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새로운 환경은 그녀에게 안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그녀가 낯선 곳에서 위험한 상황을 맞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땅을 보러 다니면서 서울서 내려온 돈 많은 과부라는 인상을 주변에 준 것이지요. 결국 아들이 유괴되어 처참하게 죽음을 맞습니다. 아들을 화장하는 곳에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신애의 모습은 아마도 사건의 충격으로 인한 극도의 현실 부정, 해리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트라우마의 커다란 충격은 자신이 신애라는 사실, 준의 엄마라는 현실조차 잊게 만든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심정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부흥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가슴을 쥐어짜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신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교회 생활에 빠져듭니다. 그녀의 상처받은 영혼은 절대자이고 창조자인 그분의 품안에서 위안과 보살핌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을 주위에 간증하면서 조금씩 삶의 생기를 찾게된 신애는 자신의 아이를 유괴해 죽인 범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합니다. 직접 만나서 그를 용서하겠다는 것이지요. 주변에서는 너무 이른 것 같다고 말렸지만 그래도 그녀는 빨리 범인을 용서하고 과거의 상처를 털어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괴범을 찾아가자 그는 이미 하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면서 두 다리 뻗고 잘 자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오히려 신애를 위로합니다. '하나님이 가해자를 먼저 용서하고 편안을 주시다니!' 신애는 충격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신에게 또다시 버림을 받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신은 피해자인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한 셈이니까요. 절망하고 분노한 신애는 그 이후 하나님을 부정하고 도전하는 행위를 합니다. 부흥회에 가서 목사가 설교하는 도중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방을 향해 밖에서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자신의 손목을 깊게 도려냅니다. 그녀의 자해는 세상 그리고 신과 단절하려는 격렬한 몸짓이었던 셈이죠. 결국 그녀는 정신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됩니다.
영화를 끝까지 보면 이청준의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에 충실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는 우리네 삶이 결국은 벌레 같은 인생 아니겠느냐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영화를 통해서 한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되는 과정을 기대한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상처받은 영혼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경우도 세상에는 참 많을 텐데 꼭 이렇게까지 우리 삶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철저히 확인시켜주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녀의 마음의 상처가 다시 구원될까요? 어떻게 그녀는 다시 이 세상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게 될까요? 그래도 아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신이 우리를 보살펴주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믿을 수 있게 될까요? 만약 다시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고민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트라우마의 본질에 대해 알고 트라우마 치유에 충분한 시간과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트라우마로 가득한 우리의 삶이 벌레만큼 보잘것없다는 부정적인 인식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요?
트라우마의 원인_ 인간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무관심과 방치는 성장기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 :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아주 사소한 일이 어린아이에게는 마음의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와의 갈등, 성적 고민, 외모에 대한 열등감, 학교생활 부적응 등이 그렇지요. 대부분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인데, 물론 학교에서 이런 상처를 받는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다 나중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주는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대개 아이의 가정이 일차로 바람막이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와 쉴 수 있고 의존할 수 있는 가정, 푹 안겨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부모가 있다면 학교나 친구로부터 받는 상처가 좀처럼 심각한 트라우마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경험하게 되는 부모의 죽음이나 이혼, 가정폭력, 성폭력 같은 충격적인 사건들은 말할 것도 없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깁니다. 하지만 이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나 경험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성장에 꼭 필요한 절대 양분과 같은 중요한 경험들이 성장기에 박탈되었다면 이러한 결핍도 성격 형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1996년도 선댄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영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는 학교에서의 왕따와 부모의 편애, 형제와의 갈등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사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이야기를 희극적이면서도 매우 사실적으로 연출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돈은 인형의 집을 꿈꾸며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 사춘기 소녀였지만 학교에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철저히 왕따를 당하고 있습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고 작은 키에 통통한 체구를 지닌 그녀는 거의 모든 동급생으로부터 "못생겼다", "바보다", "레즈비언이다"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선생님들조차 그녀에게 별 관심이 없습니다. 돈이 무슨 잘못을 하면 그녀의 사정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무조건 반성문을 쓰게 하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윽박지릅니다. 그 아이에게 학교는 마치 트라우마의 온상과도 같은 곳이지요.
그럼 집에서는 어떨까요? 집에서도 돈은 기댈 언덕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받은 상처를 나눌 가족이 있어야 하는데 돈에게는 집에서도 아무도 없었던 것이지요. 집에서 그녀는 공부를 잘하는 오빠와 발레를 잘하는 예쁜 여동생 사이에 끼어 사랑과 관심을 그다지 받지 못하는 '미운 오리 새끼'입니다. 엄마는 고자질하는 여동생의 말만 듣고 돈에게는 벌만 주며 공개적으로 차별대우를 합니다. 돈의 성격은 꾸밈이 없고 솔직하며 섬세하여 상처를 쉽게 받는 편인데 돈의 부모는 그런 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학교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돈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 학교는 안전한 집에서 떨어져 있는 낯선 장소입니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를 미지의 세계인 것입니다. 잘 적응하는 몇몇 우수한 아이들을 빼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학교 다닐 적에 자신감 혹은 자존심을 잃게 만드는 작은 사건들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경험들이 모두 다 스몰 트라우마로 남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집과 가족은 외부 세상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온 아이들에게 안전함과 편안함을 제공해야 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또 학교에 보내주는 것과 같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양육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이의 내면세계에 대해 헤아려주고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는 역할도 담당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모의 무관심과 방임은 아이의 정신적인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을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의 돈의 상처를 치료하려면 그녀의 부모들의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이의 신체적 발육과 성장에 반드시 필수 영양소가 필요한 것처럼 아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발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밀러링(아이의 내면세계에 대해 부모가 마치 거울처럼 반영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고, 죄, 질병, 예기치 못한 트라우마의 희생자들 : 21그램
트라우마는 인간에게 치명적이고 무거운 경험입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스럽고 두려운 경험이기에 이러한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나면 우리 인간은 누구라도 부정적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갖는 부정적인 생각은 주요하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난 뭔가 잘못했다', '나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와 같은 책임감과 연관된 부정적 생각입니다. 그다음은 '난 모든 것을 잃었다', '난 위험에 처했다'와 같은 안전에 관련된 부정적 생각들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난 힘이 없어 무기력하다'와 같은 조절감과 연관된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모두가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불안 상태라 할 것입니다.
영화 <21그램>은 어린 시절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은 세 명의 희생자들이 복잡한 인연을 통해 트라우마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왜곡시키는가를 보여줍니다. <21그램>은 잘 알려진 대로 사람이 죽을 때 달라지는 몸무게의 변화를 뜻합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수분이 빠진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일부는 그것이 바로 인간만이 가진 영혼의 무게라고 주장합니다. 영화가 너무 진지하고,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기 때문에 일반 관객이 이해하기 조금 어렵기는 합니다만 배우들의 명연기와 연출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폴 리버스 교수(숀 펜 분)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심장병 환자입니다. 아내와의 사이가 원만치 않은 그는 영화 도입부에서 인공 수정을 통해 아이를 가지려는 아내(샬렛 갱스부르 분)와 갈등을 빚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갈등이 트라우마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언제 심장이 멈출지 모르는 심장병 자체가 트라우마였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아 목숨이 연장되어 기뻐하는 것도 잠시,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몰라도 그는 다시 심장병이 재발하여 재수술을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를 상태에 빠집니다. 이쯤 되면 삶에 대한 조절감, 선택감을 완전히 상실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무기력감과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한때 마약 중독에 빠졌다가 결혼해 아이 둘과 남편을 두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던 여주인공 크리스티나 펙(나오미 와츠 분)은 교통사고로 한순간 남편과 두 딸을 잃게 됩니다. 그녀는 딸과 남편이 죽은 거리에 가보거나 남편과의 마지막 통화를 반복적으로 들으며 오열합니다.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딸아이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가해자를 죽이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큰딸과 남편은 현장에서 즉사했지만 막내딸은 가해자가 도망만 가지 않았어도 살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에 대한 분노감은 그녀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게 만듭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잭 조던(베네치오 델 토로 분)은 15살 때부터 교도소를 들락거리던 건달이었습니다. 그러다 기독교에 귀의해 개과천선하려고 노력하지만,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며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을 극단적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었죠. 그러다가 한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게 됩니다. 몸에 문신이 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어 기분이 울적해 술을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크리스티나의 가족을 치어 죽인 것이지요. 그리고 얼떨결에 뺑소니를 칩니다. 그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자수를 합니다. 결국 가석방되어 나오지만 그래도 그는 다시 가족을 버리고 집을 떠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좀더 벌을 주기 위해 험한 노동을 자청합니다. 트라우마 이후 그를 사로잡은 부정적인 생각은 '난 뭔가 잘못했다', '나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난 벌을 받아야 한다' 등과 같이 죄책감과 연관된 것들이었습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어떻게든 사회에 적응해보고자 하는 노력의 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트라우마의 희생자들이 지나치게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생각에 매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친구나 가족들은 "제발 지난 일이니 다 잊어버려라",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않니?" 등의 충고와 조언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섣부른 충고와 조언은 트라우마의 피해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트라우마의 아픔을 경험할 것입니다. 단순히 세월이 흘러간다고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을 뇌종양으로 잃은 어느 부부는 아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나서 눈물을 흘립니다. 아들이 좋아했던 축구화, 아들이 즐겨 마셨던 음료수를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고 합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정서적 고통이 남아 있는 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서적 고통을 이해받고 나눌 수 있는 가까운 사람과의 연결 고리일 것입니다. 죽은 아들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아들이 죽기 전에는 부부 싸움도 잦고 그리 원만하지 못했는데 아들이 죽고 나서 이 부부 사이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아들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절실했으니까요. 이러한 치유적 관계를 통해 안전감과 연결감을 확인하는 것이 상실의 고통을 완화시켜가고 '내 삶에서 돌이키기 힘든 무언가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부정적인 믿음의 상처는 서서히 옅어져갈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와 언제든지 상처를 공유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을 때 트라우마로 인해 생겨난 부정적 믿음이 주는 영향력이 줄어들 것입니다.
트라우마의 치료_ 사건의 재구성, 정면 도전을 통해 치유의 첫발을 내딛다
긍정적인 경험과 긍정적 사고의 힘 : 포레스트 검프
트라우마를 치료할 때 그 사람에게 삶의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자신만의 안전지대를 떠올릴 수 있는지, 비록 작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순수하게 사랑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는지, 중요한 시기에 마음을 이해해주고 자기편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있었는지, 즐겁게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 있는지, 하다못해 상상으로라도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는지 등의 긍정적인 요소들은 모두 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