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이한우 지음 | 21세기북스
왜 조선은 정도전을 버렸는가
이한우 지음
21세기북스 / 2009년 6월 / 340쪽 / 13,000원
조선 500년을 돌아보다2001년부터 2007년까지 7년에 걸쳐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왕조실록 번역판을 완독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며 묻는 것이 바로 '조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필자는 늘 이렇게 답한다. '거기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기에는 우리와 거의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라고. 물론 조선시대 사람들과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이 같을 수는 없다. 그들의 역사적 조건과 경험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적 조건 및 경험과 판이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군주제 국가였고, 지금은 민주정 국가이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고 지금은 신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조선은 자유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라였으나 지금은 자유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이다. 무엇보다 조선은 중국의 변방에 붙어 어렵사리 그 존재를 이어온 힘없고 가난한 국가였고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부유한 나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조선 500년에 걸쳐 형성된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자유 민주국가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 조선은 식민지라는 과도기를 거쳤다.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정확히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했을 때, 많은 한국 국민들에게 조선은 혐오와 배척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의 식민 생활을 가져와 백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준 만악의 원흉, 혹은 뿌리로 간주됐다. 36년 식민지 체험은 피식민자들에게는 깊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남긴 것이다. 자기 역사에 대한 비하는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건설이 가속화될수록 점차 제도화되고 관습화되었다. 조선의 재발견은 대한민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는 90년대 중반까지 무려 50년 가까이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재발견은 곧 식민지의 정신적 외상에서 자유로운 젊은 학자들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마침 그 무렵 조선왕조실록 번역이 완성되고 정보화 작업도 추진되었으며, 실록은 조선의 역사 500년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었다. 2000년대 들어 실록을 통한 새로운 역사 보기가 붐을 이루게 된 데는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흐름에는 필자도 속해있다. 필자의 경우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먼저 국왕의 교육과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더불어 조선 국왕과 재상들의 정치 형태를 면밀하게 추적하는 데 관심을 쏟아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의 정치 형태와 현재의 정치 형태는 상당히 유사했다. 상하 관계, 최고 권력자를 둘러싼 암투, 기득권층과 신진 세력의 반복되는 충돌 등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도 우리와 거의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 있었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관(通觀)하는 체험을 하게 되면서 막상 직접 역사 자료들을 보니, 예전에 책이나 학자들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들과 다른 사실들도 많았다. 그보다도 당연히 알려져야 할 것들 중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채 내팽개쳐져 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팠다. 알려져야 할 것들이 묻혀 있으면 우리 역사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조선시대의 역사 자체가 빈곤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우리 후손들의 역사 의식이 빈곤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 자기화의 결핍에 대한 반성이었다.
자기 나라의 역사를 보는 것은 곧 자신을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조선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배우고 배워서 안 될 것은 배우지 않는 지혜는 온전히 우리 몫이다. 조선인들이 오늘날의 한국인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지 않고 '역사의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의식이란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자세를 말한다. 물론 세종대왕이라는 위대한 국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조선이 고려 500년 역사를 총 정리하는 작업을 완성한 것인 1451년(문종 원년)이다. 조선이 탄생한 지 정확히 60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한민국 탄생 60년이 넘도록 조선 500년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한민국 60년 역사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역사를 둘러싼 지식인 사회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두 번째로 실록을 통관하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은, 왕권(王權)이 강할 때는 나라도 강했고, 신권(臣權)이 강할 때는 나라가 쇠약해지고 내우외환에 시달렸다는 점이다. 신하들이 득세하면 결국 붕당이 생기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진다. 이것은 필자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실록 자체가 가르쳐 주는 엄정한 교훈이다. 조선 전기에는 비교적 왕권이 강했고,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왕권이 약화된다. 아마도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 살다 보니 강한 왕권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 있지만, 조선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런 거부감이 개입돼서는 안 될 것이다. 즉, 민주주의와 강한 리더십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존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문제 의식은 이 책 전반에 깔려 있다.
조선은 군주의 나라이다 - 흥미로운 일화와 사건으로 왕들의 삶을 재구성하다
국왕은 하나같이 지존(至尊)이요, 최고의 권력자였다. 또한 그들은 모두 별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싫건 좋건 한 국왕의 시대는 그 국왕의 성격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조선의 어느 특정 시대를 알고자 하면 먼저 그 당시 국왕의 성격부터 파악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말은 곧 조선의 국왕을 모르고서는 조선의 기본 골격을 알 수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 군주국가 조선의 이야기를 하면서 군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 잔 술의 정치, 애주가 세조의 주석 정치: 세조는 쿠데타를 통해 즉위하지만 않았다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질이 참 많은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친형제뿐 아니라 임금 자리에 있던 조카(단종)까지 죽였기 때문에 적어도 사필(史筆)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평가는 일단 유보해 둔 채 인간 세조를 들여다보면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스케일이 컸고 문무를 거의 완벽하게 겸비한 호걸의 전형이었다. '세조' 하면 반드시 떠올려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는 대단한 애주가였다. 스스로도 호음지벽(好飮之癖)이 있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애주나 호주(好酒)보다는 호주(豪酒)하는 데 있었다. 너무 많이 마셨다. 횟수도 너무 잦았고 한 번 마시는 양도 너무 많았다. 그런데 사실 세조에게 술자리는 단순한 유흥이 아닌 통치 행위였다. 세조 8년 12월, 세조가 술자리에서 세자에게 했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내가 술을 마시고자 하면 너와 여러 장상(將相)들하고만 마셨다. 결코 궁첩(宮妾)들과 마시지 않은 것은 네가 본 바이다."
세조 시대를 '주석정치(酒席政治)의 시대'라고 명명한 사람은 최승희 전 서울대 교수(국사학)이다. 최 교수는 세조가 이처럼 지나치게 자주 종친, 공신, 재상, 대신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어야 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조로서는 왕위의 명분과 정통성에 흠이 있으므로 불안하였다. 따라서 종친, 공신, 재추(宰樞, 의정부와 중추부의 고위 관리)들을 친왕 세력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친화책의 일환으로 술자리를 자주 베풀고 함께 취하였다.' 더불어 과음 상태에서 실수하는 신하들을 걸러 낼 수 있었기에 세조는 더욱 술자리를 중시하였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이렇게 풀이했다. '세조는 이처럼 종친, 재추, 승지 등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면서 그들과 친화하는 기회로 이용할 수 있었고, 그의 왕위와 왕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효과도 함께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분명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호색(好色)은 아니었다. 실제로 세조는 정희왕후 윤씨 외에 근빈 박씨라는 딱 한 명의 후궁만 두었다. 호주(好酒)형 호걸이었던 셈이다.
너희가 선조를 아느냐! 선조에 대한 오해를 풀다: 우리에게 선조는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임금으로만 남아 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조 시대에 인재가 가장 번성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선조 특유의 위임 통치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은 전혀 모른다. 교과서에서조차 추호의 의심도 없이 가르치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실록으로 추적해 보았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선조가 율곡의 건의를 받아들여 10만 군사를 양병했다면 임진왜란 때 그처럼 무력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선조는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율곡의 건의를 제대로 수용도 못한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임금이라는 부수적 결론도 도출된다. 과연 10만 양병설은 율곡이 제창했으며 선조는 무능하기만 했던 임금일까?
선조 15년(1582년)은 관리로서 율곡 이이의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선조는 누구보다 이이를 총애하고 있었다. 당시 선조는 이이에게 병판을 맡기면서 이렇게 당부한다. "지금 조선의 병력이 고려만 못한데다가 100여 년 동안 태평을 누린 까닭으로 국방이 소홀해져서 남몰래 이러한 점을 몹시 걱정해 왔으나 적합한 인물을 얻지 못했는데, 경이 항상 개혁을 하여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니 국방의 일을 맡아 폐단을 없애고 양병(養兵)의 구상을 만들면 나라에 다행한 일이겠노라." 그러나 이이는 자신은 병사(兵事)에 문외한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이에 선조는 "국방 강화의 핵심은 양민을 확대하고 국고를 튼튼히 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니 호조판서를 지낸 그대가 적격"이라며 이이의 병판 임명을 강행했다.
선조의 명을 받은 이이는 2개월여가 지난 선조 16년(1583년), 소위 '10만 양병설'이 포함된 6개조의 개혁안을 선조에게 올린다. 그의 양병론(養兵論)은 양민론(養民論)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민력(民力)이 고갈되면 제갈량이 있다 해도 외적을 막아낼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그는 서얼 허통(庶孼 許通, 서자와 그 자손의 관직 진출 제한을 푸는 것)과 양민 확충을 통해 민력을 키운 다음 그것을 기반으로 10만 정도의 병력을 양성하면 국방이 튼튼해질 것이라는 안을 제시했다. 이때 선조나 이이가 우려했던 외적의 침입은 일본이 아니라 북방 오랑캐였다. 그런데도 마치 이이가 임진왜란을 예견이나 한 듯이 10만 양병설을 주창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왜곡이다.
하지만 이이의 양병론은 홍문관(문과 급제자의 최고 엘리트 코스.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에 의해 무력화되고 만다. 당시 홍문관에는 류성룡이 부제학으로 있었다. 홍문관은 사헌부와 사간원(오늘날 검찰과 언론기관)이 국헌(國憲)을 문란케 하는 병판 이이의 주장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이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이가 양민을 확충하는 방안으로 제시한, 노비들을 일정기간 평안도와 함경도에 살게 한 다음 양민으로 승격시켜 주자는 제안은 조선의 국체인 신분제를 흔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류성룡은 '평화로운 때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란(禍亂)의 단서를 여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자칫 단순논리로 치부될 수도 있다. 이이는 옳았고 류성룡은 틀렸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아니다. 실은 둘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라는 국가의 목표를 놓고 볼 때 이이는 강병을 우선시하는 주장이고 류성룡은 부국을 우선시하는 주장이다. 만일 상황이 위급하다면 이이의 주장이, 그렇지 않을 경우는 류성룡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일본이 침략함으로써 이이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게 되지만, 실은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보다는 평화의 시기가 훨씬 길기 때문에 류성룡의 주장 또한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칼날 위 군주의 길을 가다 - 벨 것인가, 베일 것인가? 왕들의 정치 생존법을 밝히다
조선의 정치사는 왕과 신하 사이의 파워 게임의 역사였다. 조선은 절대군주제였음에도 왕들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그리고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조선 왕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혹은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아는 것은 조선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압록강을 넘으며 익힌 왕들의 국제 감각: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 옛날 역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국제 감각은 필수적이었다. 국제 감각과 관련해 눈길이 가는 대목은 월경(越境)체험, 즉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다. 여기서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정확한 영토 감각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왕 27명 중 조선 반도 밖으로 한 번이라도 나가 본 임금은 태조, 태종, 세조, 효종, 현종이다. 물론 이들의 월경은 모두 임금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조선의 임금은 원칙적으로 국내에서조차 먼 거리 여행이 금지돼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이미 고려 때 장수로 명성을 날리며 여러 차례 압록강을 건너 요동 정벌에 나선 바 있고, 태종이나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묘하게도 조선 전기에 월경 체험이 있었던 이들 3인 모두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그런데 조선 500년 동안 명이나 청의 황제를 대면했던 임금은 딱 두 명뿐이다. 태종과 인조다. 중국 황제와의 대면이 왕들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앞서 소개했듯이 태종 이방원의 경우는 1394년 11월(태조 3년), 조선에서 올린 외교문서에 불경스러운 표현이 들어 있다는 명 태조 주원장의 트집을 무마하기 위해 지금의 남경인 명나라 금릉에 가야 했다. 금릉으로 가는 도중 북경에서 얼마 후 제3대 황제가 될 연나라 왕, 영락제를 만났다. 두 잠룡(潛龍, 아직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인물)의 만남이었다.
인조의 경우는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 태종과 굴욕적 대면을 했다.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병자호란 때 청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은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그는 그곳에서 청나라와 조선의 중재역할을 했다)인데, 왕들의 국제 감각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때 소현세자가 귀국해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부질없지만은 않다. 당시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을 오가며 청나라로 급격하게 밀려들던 서구 문물의 실상을 상세하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 감각을 가진 세자와 청나라와의 은밀한 결탁 가능성에 대한 인조와 조정 중신들의 의구심 때문이었는지, 소현세자는 불행하게도 의문사했다. 죽은 소현세자 뒤를 이은 것은 아우인 봉림대군(인조의 둘째 아들, 효종)이었다. 그도 청나라에서 8년 간의 인질생활을 한 바 있었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북벌을 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북벌의 결실은 전혀 얻어 내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가설이라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능동적 월경(越境)은 강력한 권력 의지와 연결되어 왕권 장악을 불러올 수 있지만, 인질과 같은 수동적 월경은 복수심만을 불태우는 극단의 명분론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고.
왕권과 신권, 실록에서 격돌하다!: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 조선 개국의 영웅이자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국왕 이성계가 7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1409년 8월 28일, 태종은 총애가 깊었던 춘추관 영사(領事) 하륜을 불러 『태조실록』 편찬을 명한다. 하명을 받은 하륜은 즉시 실무 사관들에게 "임신년부터 경진년까지의 사초(史草, 사관이 기록하여 둔 역사 기록의 초고)를 모두 거두어들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말단 실무직인 기사관들이 찾아와 따지듯이 물었다. "예전의 역사서를 보건대 모두 3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조(前朝, 고려) 때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조실록』을 어찌 오늘날에 편수할 수 있습니까?" 이유 있는 항의였다. 하륜은 정반대로 "옛날 역사서는 바로 다음 임금 때 이뤄졌소"라며 묵살했다. 이에 기사관들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반박한다. "태조의 구신(舊臣)이 태조의 실록을 찬수(撰修)하면 후세의 의논이 어떻게 여기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