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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의 역사

조셉 커민스 지음 | 말글빛냄
라이벌의 역사

조셉 커민스 지음

말·글 빛냄 / 2009년 5월 / 494쪽 / 24,500원



존 F. 케네디 vs 리처드 M. 닉슨


미국이 기억하는 케네디와 닉슨은 성장환경부터 정반대의 인물들이었다. 존 F. 케네디는 1917년 매사추세츠 부룩클린에서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자 아버지 덕분에 상류층 학교에 다녔으며, 하버드대학 재학시절에는 나치 독일의 위험성에 관한 졸업논문『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를 써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은 그의 아버지가 30,000부의 판매부수를 올려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초계정 PT-109의 선장으로 남태평양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함정이 일본 구축함과 충돌해 침몰하는 사고를 겪었고, 이때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출했다는 공적으로 해군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그가 훌륭한 지휘관이었다면 이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함정을 침몰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케네디가 가진 자였다면 닉슨은 이 가진 자로부터 소외받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다. 1913년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다행히 공부를 잘해서 하버드대학 장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하숙비를 조달할 길이 없어 하버드에 다니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고향에서 가까운 휘티어대학에 다녔는데 과대표 등의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부유층 자제들로 구성된 사교클럽에 가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거절당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가진 자로부터의 소외감을 느꼈다. 이후 다시 듀크대학에 입학한 그는 장학생으로 졸업했으며, 졸업 후에는 잠시 법률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해군 보급 장교로서 남태평양에서 근무한 그는 실전 경험은 하지 못했으나 대신 카드게임으로 10,000달러를 모았고 이 돈은 훗날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케네디와 닉슨은 정치계의 사다리를 올라타게 되면서 운명적인 라이벌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전쟁 직후 미국은 인플레가 만연하고 정부에까지 침투하는 공산주의 확산에 두려움이 컸다. 수완 좋은 정치가라면 그런 두려움을 이용할 수 있는 시대였다. 닉슨과 케네디는 1946년 하원의원 선거에 뛰어들면서 모두 상대 후보자를 공산주의와 결부시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때의 선거운동에서 닉슨은 전쟁 중 카드로 딴 1만 달러를 요긴하게 썼으며, 케네디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얻게 된 막대한 돈을 뿌렸다. 아무튼 1946년 33세의 닉슨과 29세의 케네디는 나란히 하원에 들어갔는데, 두 사람 중 더 빨리 정치적 입지를 굳혀나간 쪽은 닉슨이었다. 닉슨은 한 국무부 관리의 소련간첩행위를 조사하는 청문회에 참석하면서 끊임없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이 영향으로 그는 1950년 캘리포니아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2년 후에는 39세의 나이에 아이젠하워의 부통령 후보로 선택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케네디가 닉슨보다 훨씬 더 TV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케네디는 '가장 잘생긴 하원의원 상'을 받았다. 그리고 1952년 매사추세츠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닉슨과 케네디는 우연히도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사무실을 배정받았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우정을 유지했으나 1956년 대선이 다가오면서 둘의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민주당 후보의 부통령이 되고자 했던 케네디는 상대편인 아이젠하워-닉슨 팀을 공격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닉슨 팀이 다시 한 번 승리했고 케네디와 닉슨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지내는 일은 힘들어졌다. 더욱이 두 사람은 1960년 대선을 겨냥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타임>의 표지를 장식하고, PT-109 탈출기를 다룬 텔레비전 시리즈를 방영하고, <용감한 사람들>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한편 닉슨은 '새로운 닉슨'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아이젠하워를 존경했지만 8년 집권이 지루했기에 변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케네디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뉴 프론티어'를 슬로건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1960년 9월, 두 사람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그리고 '최초'의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맞붙게 되었다.

토론회는 네 번 예정되어 있었으며 그중 가장 중요한 첫 번째 토론이 시카고에서 시작되었다. 이 토론회에서 케네디는 화장을 거절했는데, 하루 전날 호텔에서 실컷 일광욕을 즐겼기 때문이었다. 햇볕에 잘 그을린 그는 마치 어린 아도니스(비너스에게 사랑을 받았던 그리스의 미소년)처럼 보였다. 닉슨도 화장을 거절했는데, 그는 오랜 지방유세와 사고로 인한 무릎통증으로 얼굴이 창백했다. 게다가 언제나 무성한 턱수염은 얼굴을 더 그늘져 보이게 했다. 당시 라디오를 청취한 사람들은 닉슨이 대단히 훌륭한 정치관을 피력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서는 잘생기고 자신에 찬 케네디와 창백하고 어두운 얼굴의 닉슨이 대조될 뿐이었다. 텔레비전 토론회 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케네디가 앞섰고, 1960년 11월 모든 투표가 집계되었을 때 케네디는 119,450표 차이로 승리했다. 이 차이는 0.1% 미만의 근소한 차이었는데, 사실 닉슨이 승리를 케네디에게 도둑맞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케네디의 부통령 후보였던 린든 존슨의 고향 텍사스에서는 죽은 자가 투표를 했고 부정 투표권자 등록이 만연했다. 그리고 일리노이에서는 닉슨이 102개 군 중에서 93개 군에서 승리를 차지했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쿡 군에서는 패배했다. 케네디가 쿡의 정치 지도자 리처드 데일리를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선거 후 케네디 진영은 닉슨이 재투표를 요구할 것으로 여기고 은밀히 만날 것을 제안했는데 케네디를 만난 닉슨은 선거 결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한 신문기자가 투표결과의 의혹에 대해 기사를 쓰자 국가적 단합을 위해 기사를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1961년 1월 케네디는 닉슨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했다. 케네디의 승리는 이후 쿠바사태를 승리로 이끌어 세계 역사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곧 저격당하고 만다. 그리고 1968년 닉슨은 압도적인 표를 얻어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1972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을 때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불명예스런 퇴진을 하게 된다. 이때 민주당 도청사건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닉슨은 CIA요원들로 하여금 민주당의 오래된 파일을 훔치도록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케네디가 죽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닉슨의 복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해리 S. 트루먼 vs 더글라스 맥아더

트루먼과 맥아더는 직업에 있어서나 지위에 있어서 부딪힐 일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년시절까지는 더욱 그랬다. 맥아더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트루먼은 중산층 농가에서 태어나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두 사람은 특유의 잠재된 역량을 발휘하게 됨으로써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트루먼보다 네 살 위였던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루스벨트의 무관이 되었다. 그리고 탁월한 대담성과 지략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7개의 은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전후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이때 루스벨트 정부와 논쟁을 벌여 잠시 은퇴했으나 다시 루스벨트의 부름을 받고 극동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진주만 폭격이 일어나자 다시 군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트루먼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대위로 근무했으며 엄격하고 훌륭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캔자스 정치 지도자와 손을 잡으면서 재판관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미주리 주 상원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을 강력히 지지함으로써 상원의원에 재선되었고 1944년 루스벨트의 2기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임명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사망하면서 트루먼은 세계 최강의 통치권을 승계하게 되었다. 트루먼이 상원의원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불과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방위산업은 더 이상 경제를 견인하지 못했고 인플레와 심각한 주택 부족 및 임금파업이 미국을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소련은 원자폭탄을 비축하려고 했고 베를린을 봉쇄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했다. 트루먼은 베를린에 보급품을 공수함으로써 이 상황을 해결했는데, 이것은 그의 뛰어난 외교정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플레와 싸우느라 지친 미국인들은 트루먼을 자신들에게 필요한 지도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1948년 선거가 있던 해, 국내 문제에 대한 트루먼의 업적은 너무나 암울해서 '모든 것이 트루먼의 잘못이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 시기 맥아더는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입헌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일본국민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의 집무실이 있는 다이이찌 빌딩 밖에서는 이 위대한 존재를 만나기 위해 수백 명의 일본인들이 날마다 줄을 섰고, 그러는 동안 장군의 홍보 장교들은 맥아더의 업적에 대한 보도 자료들을 쏟아내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느라 바빴다. 트루먼은 이러한 맥아더의 인기에 조바심이 났다. 게다가 맥아더가 주일미군 삭감을 요청함으로써 자신의 징병제도 추진을 방해하자 고국을 한 번 방문해달라고 전문을 발송했다. 이것은 사실상 군통수권자로부터의 명령이었는데 맥아더는 그것을 거절했다. 트루먼은 다음해 다시 요청서를 발송했으나 맥아더는 또 거절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이 발발하면서 트루먼과 맥아더는 전례 없는 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총사령관 맥아더는 70세의 고령이었지만 뛰어난 전술을 발휘했다.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측면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수륙양면의 인천 공격을 성공시키고 한 달여 만에 평양까지 진격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훌륭해서 트루먼조차도 그의 후광을 입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는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태평양의 웨이크 섬으로 맥아더를 만나러 갔는데 맥아더의 태도는 냉랭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리는 대통령에게 인사 대신 단순히 악수만 청했다. 이 어색한 웨이크 회합이 있은 지 10일 후, 압록강 제방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을 10만 명의 중공군이 밤에만 공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맥아더는 다리 폭파에 대한 허가를 워싱턴에 요청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중국을 자극할 것을 염려하여 제한적인 군사행동만을 허가했다. 이에 화가 난 맥아더는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공군에게 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전면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연합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해 중공군을 38선까지 밀어냈으나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 이 전쟁을 끝내야만 했다. 트루먼은 협상을 모색했는데, 맥아더는 이것을 항복이나 마찬가지라며 격분했고, 중공군에 공개서한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다. 트루먼은 독단적으로 보낸 이 메시지에 매우 화가 났다. 더욱이 맥아더는 자신이 "중공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워싱턴 정부가 자신의 손발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트루먼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런데 더 심한 일은 맥아더가 한국전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바보 같은 짓'이라면서 트루먼의 대외정책을 비판한 것이다.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가진다는 것은 미국 헌법의 신조이고,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 맥아더를 해임할 이유는 충분해졌다. 그런데 한 보좌관이 '만일 맥아더가 해임결정을 눈치 챈다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트루먼은 "그 망할 놈이 나에게 사표를 내게 해서는 안 되지." 라고 말하고 보도 자료를 새벽 1시에 배포하여 기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로써 사령관직에서 물러난 맥아더는 14년 만에 처음으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공화당은 이러한 맥아더의 인기를 이용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맥아더는 국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그는 수백만 명의 유권자 앞에서 트루먼 정부를 비난했다. 요란한 박수 소리로 몇 번이나 중단된 그의 연설은 군가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갈 뿐이다'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끝이 났다. 의회 내에서 수많은 청중들이 훌쩍거렸고, 한 상원의원은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연설을 들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얼마 후 한국전쟁에 관한 청문회에서 다른 장군들이 트루먼의 입장을 해명하고, 대통령에 대한 맥아더의 행동을 비판함으로써 그는 더 이상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1952년 맥아더는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공화당이 아이젠하워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면서 빠르게 무대 옆으로 비켜났다. 결국 트루먼도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사실상 그와 맥아더 모두 패배자가 된 셈이었다. 이후 맥아더와 트루먼은 각자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장수했다. 트루먼은 의회가 25,000달러의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근근이 살다가 1972년 88세로 사망했다. 한편 맥아더는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에 대한 봉사의 대가로 퀘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50만 달러로 호화롭게 살다가 1964년 84세로 사망했다. 죽기 2년 전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한바 있는데, 이때 그는 '군인은 정치적 문제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강조했다. 이때의 연설은 TV로 생중계되었는데 트루먼도 보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후 군인은 정치인에게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다.

장개석 vs 모택동

장개석과 모택동은 19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청 왕조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바로 그 격동기에 태어났다. 250여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청 왕조는 부패해 있었고, 영토는 일본 · 영국 · 프랑스 등의 외세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새로운 중산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 사회적 개혁에 대한 변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여기저기서 움트고 있는 혁명의 기운에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오직 자신들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다는 다소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졌다. 따라서 두 사람은 결코 서로 양립할 수 없었으며, 그로 인해 중국 전역에서 치러진 백병전(1934년~1949년)은 수많은 중국 인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장개석은 평소 귀족출신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동부 해안의 저장성에서 소금 장사를 하던 비교적 부유한 상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7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어려운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14세에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마을 소녀와 결혼했으나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몹시 천대했다. 이후 16세가 되자 마을을 떠나 서양인이 세운 학교에 다녔으며, 이때 『혁명 입문』이라는 책에 영향을 받고 군사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자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귀족출신임을 내세운 장개석과 달리 모택동은 가난한 어린 시절을 과장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후난성에서 꽤 큰 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그 역시 15세에 어머니의 주선으로 이웃 마을의 처녀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내가 2년 만에 병으로 죽자 충격을 받고 바깥세상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정구냥이 쓴『풍요의 시대에 던지는 경고』라는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었으며, 농민 학교를 거쳐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장개석과 모택동 두 사람 모두에게 혁명의 첫맛을 보여주고 충돌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11년 손문의 급진적인 정치 봉기였다. 당시 중국은 6살 난 황제 부의(溥儀) 대신에 섭정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망명 중인 손문은 비밀리에 청 군대와 황실 등에 혁명조직을 구축하였고 1911년 2월 광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해 10월경에는 우한에서 대규모 군사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모택동도 참여하려고 했으나 고무 덧신을 찾느라 지체되고 말았다(우한은 비가 많은 곳임). 장개석은 모택동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었다. 그는 청 군대를 패배시키는데 일조했고 손문의 측근 자문이 되어 원세개(袁世凱)를 축출했다. 하지만 국민당의 세력은 아직 약했다. 곧 전국의 군벌, 지방권력, 암흑조직 등이 세력을 펼치면서 혈투를 벌이는 내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모택동은 북경대학에서 책에만 파묻혀 지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읽고 러시아의 볼셰비키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학생그룹에 가입했다. 이 무렵 그는 스승의 딸인 양개혜와 결혼을 하고 잠시 서점을 운영했지만 곧 소련국제공산당에 가입하게 되고 전국 주요 도시들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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