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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사회주의자들

윤재설 외 4인 지음 | 펜타그램
세계의 사회주의자들

윤재설 외 4인 지음

펜타그램 / 2009년 5월 / 346쪽 / 13,000원

알버트 아인슈타인- 죽은 아인슈타인과 산 황우석의 교훈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천재 과학자로만 알려져 있는 그는 사회주의를 지지했으며 매카시즘(1950년대 초반 미국에서 일어난 과도한 반공산주의 열풍) 이전부터 미국 정보 당국의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인슈타인은 병역 거부, 핵무기 개발 중지를 주장한 전투적 평화주의자로, 자본주의 체제의 위험성을 경고한 실천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신념을 공공연히 밝혔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치적 발언 가운데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 태도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1 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아인슈타인은 그가 스스로 규정했듯이 '호전적 평화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39년 당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에 맞서 원자폭탄을 제조해야 한다는 편지에 서명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나치에 대한 증오심이 컸던 그는 히틀러 정권이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후 이를 "내 생전에 저지른 한 가지 실수"라며 죽는 날까지 후회했다. 1955년 4월 11일 "인류라는 생물의 씨앗을 근절시켜 버릴 사태를 불러일으킬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중단돼야 한다"고 호소하며 생을 마감했다.



헬렌 켈러- 못 듣고 못 보고 말 못한 이가 발견한 좋은 세상



1880년 미국 앨러배머 주 터스컴비아에서 건강하게 태어난 헬렌은 19개월이 되던 1882년 심한 열병을 앓게 된다. 그리고 그 열병으로 인해 시력과 청력을 잃게 되었다. 헬렌은 촉각과 후각으로 세상을 느끼고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게 된다. 시각 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턴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를 졸업한 헬렌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헬렌은 여성의 권리, 특히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펼쳤다. 그후로 1920년에 미국은 여성 참정권을 인정했다.



헬렌은 1909년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던 당시 19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의 유진 V. 뎁스 후보는 1백만 표 가까이 득표했고 1천 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 유진 V. 뎁스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헬렌은 "사회당이 점점 정치적 늪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탈당했다. 헬렌의 이후 활동은 사형제도, 아동 노동, 인종 차별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장애를 극복한 여인으로만 알려진 헬렌은 여성운동가로, 평화주의자로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았다.



버트란드 러셀- 노동당 당원증을 찢어버린 이유



러셀은 지적인 탐구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중에도 정치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되었다. 1907년 러셀은 '여성 참정권을 위한 남성 동맹'에 가담했고 윔블던 보궐 선거에서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낙선했다. 이 당시만 해도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러셀은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부터 사회주의와 평화를 향한 사회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러셀은 '점진적인 사회개혁'을 표방한 사회주의 조직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고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징병 거부 협회를 만들어 징병제 도입 반대운동을 벌였다. 또한 영국의 반전운동 단체인 민주 통제 연맹을 결성해 국가의 대외정책을 의회의 통제 하에 둘 것을 주장했다. 1916년 의회에서 병역법이 통과되자 징병 거부 협회는 국민들을 상대로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했고 러셀은 이 활동을 이유로 캠브리지대학 강사직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협회의 기관지 《트리뷰널》에 편집장으로 있던 1918년 미군의 파업 파괴 행위를 비난하는 글을 써 교도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14년 노동당에 가입해 베트남에 대한 1965년 미국의 정책을 지지한 해럴드 윌슨 노동당 정부에 항의하는 뜻에서 당원증을 찢어버릴 때까지 50여 년 동안 당원으로 활동했다. 폭력을 배척한 평화주의자 러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중앙집권적 사회 경제체제에 반대했다. 그의 사회주의 사상은 협동적 소유, 탈중심화, 자치를 지향하는 동업조합 사회주의에 가까웠다. 러셀은 1970년 사망하기 전까지 철학자였고 사회정치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혁명 운동가였다.



장 폴 사르트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된다



지식인으로서, 작가로서 사회참여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의 사상은 이미 전쟁 중 그의 저항운동에서 그 단초를 실천적으로 보여줬다. '사회주의와 자유'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서클을 해산하고 집필에 전념했다. 1950년대 사르트르는 프랑스 공산당을 자유의 신장과 사회의 변화를 위한 활동을 벌이는 당으로 보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1968년 혁명 당시 학생들의 투쟁을 모험주의로 치부했던 프랑스 공산당을 비판하고 학생들의 편에 섰다.



그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을 시도했다. 실존주의자로서 '자유'를 중시한 사르트르에게 있어 자유는 혁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었다. 그는 1968년 혁명 이후 사망할 때까지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등 신좌파 학생들의 운동에 동참했다. 그는 "민중을 지키는 민중 계급의 옹호자로 남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실천적 좌파 지식인이었다.



조지 버나드 쇼- 모두에게 차별 없이 평등한 분배를



아일랜드 태생의 버나드 쇼는 20세에 런던으로 옮겨와 대학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영박물관에서 책을 읽거나 런던 사회 중류 계급 지식인들의 논쟁을 접하며 스스로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쇼는 사회민주 연맹 같은 사회주의 그룹에 속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884년 가입한 페이비언 협회는 의회를 통한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회주의 조직으로 나중에 영국 노동당 건설의 주체가 된다.



1914년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쇼의 인생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는 철저한 반전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젊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에 반대하는 선동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 같은 반전 평화 운동은 1920년 무대에 올려진 『상심의 집』에서 극화되기도 했다. 쇼는 <여성을 위한 사회주의 안내> 등 사회주의의 이념을 쉽게 설명하는 팜플렛과 정치 선동문을 작성하는 한편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저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이브 몽탕- 정치 활동과 예술을 결합한 프랑스의 거인



이브 몽탕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영화배우였지만 그의 생애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노동자 계급의 편에서 좌파 정치 활동을 벌여온 것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자, 정치 영화의 배우로 활동했던 그는 정치 활동과 예술을 결합시킨 프랑스 최고의 좌파 예술가였다. 그는 열한 살에 학업을 중단하고 빵 공장에 다녀야 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는 누나 리디아의 미용사 일을 도우며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했던 유년시절, 프랑스로 건너와서도 공산당 활동에 열성이던 아버지와 공산당에서 전업 활동가로 일하던 형 길리아노의 영향으로 이브는 약자의 편에 서 있는 좌파가 정당하다는 인식을 점점 굳혀갔다.



제철소에서 노동을 하던 1938년 열일곱 살 때 우연히 마르세유의 한 밤무대에서 공연 전 분위기를 잡는 가수역할을 하면서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원래 이름인 이보 리비라는 이름대신 예명으로 이브 몽탕이라고 지었다. 점점 인기를 얻게 된 그는 2차 대전으로 인해 나치의 강제 노역에 동원되어야 했다. 1944년 2월 수용소를 탈출해 파리로 간 이브는 파리에서 가수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1945년 8월 전설적인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만나게 되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도움으로 영화에도 발을 들여놓았다.



그는 1950년 원자 폭탄에 반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으로 가입했다. 또한 19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운동에 동참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868년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체코를 침공한 것에 반발해 그는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그러나 그가 좌파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 코스타 가브라스의 〈Z〉와 〈계엄령〉에 출연해 군사 독재와 미국의 제3세계 정치 개입을 비판하고 피노체트 독재 시절 칠레의 민주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샹송을 부르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조지 오웰- 사회주의의 목표는 인간적 형제애



『동물농장』, 『1984년』으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에스파냐 내란에 참가하고 난 후 쓴 『카탈루냐 찬가』 등의 짧은 에세이 그리고 좌파 언론 《트리뷴》에서의 활동들을 보면 그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941년 평등한 사회를 염원하는 내용의 소책자 『사자와 일각수』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그는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가 사회주의에 대한 충분한 정의가 아니"라며 "소득의 평등, 정치적 민주주의, 모든 세습 특권의 폐절"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사회주의적 지향이 분명해진 계기는 에스파냐 내란에 참가했을 때의 경험이었다. 선거를 통한 좌파 공화정에 의해 에스파냐 사회는 크게 달라졌다. 계급의 차별이 철폐된 평등한 도시를 목격한 오웰은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1년 그는 BBC에 입사하면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2년 뒤에는 BBC를 나와 1937년에 창간된 좌파 언론 《트리뷴》의 문학 담당 편집자로 일하면서 『동물농장』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풍자한 우화소설인 이 작품은 1945년에 출판되었는데 당시 소련이 영국과 군사 동맹 관계를 맺고 있어 출판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오웰은 명문 이튼 스쿨을 졸업한 후 미얀마 경찰관으로 복무하다 조국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착취를 목격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 사직하고 유럽으로 돌아왔다. 이후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에서 부랑자 생활을 체험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빈민가에서의 체험과 에스파냐 내란에 참가하면서 느꼈던 희망과 좌절을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와 전체주의에 대한 명백한 반대로 연결시키며 작품 활동을 벌이다 1950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 『1984년』은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암울한 미래에 대한 경고로 해석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회화는 장식품이나 심심풀이가 아니다



1881년 에스파냐 말라가에서 태어난 화가로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며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피카소는 평소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왔다. 피카소는 조국 에스파냐에서 위협받고 있는 민중의 자유를 옹호하며 〈프랑코의 꿈과 거짓말〉 등을 통해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작품을 펼쳤다. 1937년에 프랑코파를 지원하는 나치 독일의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공격한 것을 소재로 폭탄에 놀라 부릅뜬 눈동자와 전쟁의 공포, 민중의 분노와 슬픔을 표현한 벽화 〈게르니카〉를 출품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투사들과 교유하던 피카소는 독일군이 물러간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다. 1944년 8월 해방을 위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파리 중심부에 살고 있던 피카소는 목숨을 걸고 파시즘과 맞서 싸웠던 파리의 사회주의자들과 물리학자 폴 랑주뱅, 시인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등을 비롯한 당대의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다. 이미 예순 셋의 나이가 된 그가 공산당에 입당한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생각했지만 1973년 숨을 거두기까지 30년 동안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행사에 참가하는 한편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으며 열성적인 당원으로 활동했다.



마틴 루터 킹- 인종 경제적 평등 꿈꾼 민주적 사회주의자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흑인 해방을 바라는 수십만 군중 앞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유명한 연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1968년 미국에서 반전 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암살당한 킹 목사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흑인 민권 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는 믿기지 않지만 "보다 개선된 부의 분배가 필요하고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 주 애틀란타 시에서 에버니저 침례교회 소속의 목사 마틴 루터 킹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인 1920년대 말은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이었고 빵을 구하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을 보았던 그는 나중에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했다. 킹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유색 인종을 위한 전국협회 애틀란타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인종 차별에 맞서 투쟁했다.



1944년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한 후 킹은 인종 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헨리 데이빗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으며 비폭력 저항주의를 처음으로 접한 킹은 4학년 때 아버지가 담임 목사로 있는 에버니저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회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신학 공부를 위해 펜실베니아 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서 사회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1951년 보스턴 대학 신학과에 입학한 킹은 성악가 코레타 스콧을 만나 1953년 결혼하게 된다. 킹은 1954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에서 첫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목회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 신도 전원에게 선거권 등록과 NAACP 회원 가입을 권유하는 한편 교회 내에 '정치 사회 활동 위원회'를 조직했다.



1955년 12월 1일 로사 파크스 부인은 버스에서 백인 전용 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흑백 분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킹 목사는 미국 인권 운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킹 목사는 앨라배마 주 셀머 시에서 투표권 쟁취를 위한 행진 시위 직후 2백 명의 시위자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후 그는 베트남전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반전 운동에도 앞장섰다.



1968년 4월 4일 테네시 주 멤피스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고 킹 목사는 사망했다. 암살 직전까지 흑인 민권 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운동과 반전 운동에도 힘을 기울이던 킹 목사는 흑인들의 경제적 참상을 고발하고 정치 권력과 경제력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킹 목사는 자신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인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인종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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