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10 :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한국 근대사 산책 10 : 창씨개명에서 8·15해방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 382쪽 / 14,000원
창씨개명과 신문폐간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일본은 본격적인 전시체제에 들어갔다. 1939년 10월 조선에는 '국민징용령'이 내려졌다. 이어 일제는 1939년 11월 10일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법령화했으며, 12월에는 '창씨개명령'을 공포했다. 조선 이름을 버리고 새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라는 강제조치였다. 총독부 기관지들은 창씨개명 홍보를 한답시고 조선인들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겠다는 자세로 나섰다. 『경성일보』(1940. 1. 31) 사설은 '창씨개명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나날이 늘고 있다. 신질서의 실현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편견을 가지고 이 운동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당국에 의해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이자들은 민족주의와 정치적 동기로(조선독립, 즉 반일주의)인해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있다'고 했다.
일제는 엄청난 홍보 공세를 퍼부은 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이익을 주었다. 자녀의 입학과 진학을 막는 건 물론이고 총독부 관계기관에선 직원 채용시 자격을 박탈했다. 식량과 물자 보급대상에서 제외했는가 하면, 멀쩡하게 일하는 사람을 파면하기도 했고, 비국민 또는 불령선인으로 몰아 사찰과 미행을 하고, 노무징용 우선 대상자로 분류했다. 또 학교에서는 창씨하지 않은 국민학생의 머리에 먹으로 X자를 해서 돌려보냈는가 하면, 제멋대로 창씨를 해서 불러놓고는 학생이 대답하지 않자 구타하는 사례도 있었다. 법정기간 동안 창씨한 호수는 322만 693호로 전체(400만 8925호)의 80.3퍼센트로 나타났다. 그러나 '새로운 씨를 제출하지 않을 때에는 호주의 성을 씨로 한다'는 조항에 따라 원래의 성을 씨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100퍼센트 창씨가 됐다. 창씨개명을 계기로 기존 신분제에 대한 동요도 일어났다. 최명희의 『혼불』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양반 양반 허지 마시겨. 대대손손 영화 누린 양반이면 멋 헌다냐. 인자는 너나없이 창씨 다 해부리고, 왜놈들 시상이 된 지가 벌써 몇 십 년인디. 무신 다 떨어진 양반이여? 천치가 다 개명허는 판에." 창씨개명이 정신의 통제라면 몸뻬는 몸의 통제라 할 수 있겠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국민복령'을 공포하고 국민복의 기본 만듦새를 제정했다. 복장의 표준화는 '국민들의 사상이 황도정신으로 모아지고 생활습관을 정례화하여 총력 체제를 구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배경에서 여성의 복장으로 표준복과 몸뻬가 등장했다. 직장 여성들에게는 표준복, 가정의 여성들에게는 몸뻬를 입게 했던 것이다.
일제는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폐간함으로써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앎마저 통제하겠다고 나섰다. 일제강점기 내내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겠는가마는 1940년대의 문을 연 첫 해는 그런 통제의 광기로 인해 더욱 어두워졌다. 이제 남은 유일한 국문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뿐이었다. 일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에 따른 불만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두 신문에서 일하던 기자들의 상당수를 『매일신보』에 입사시켰다. 최준은 『매일신보』에 대해 "동보(同報)에 종사하던 기자들의 개인적 사상 여하는 별문제이겠으나 지상(紙上)에 나타나는 논조와 색채는 완전히 일제 침략주의 앞잡이였음은 놀랄 필요조차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시국(時局)의 강박(强拍)과 무기력한 신문인들의 피동적인 안이한 처세행위는 지상(紙上)에 그 무엇을 가져왔던가 생각할 때에 일종의 오한(惡寒)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고 했다. 당시에는 일본어 신문을 구독하는 독자들도 많았는데(『아사히 신문』은 1945년 3월 기준으로 '조선판' 신문을 12만 부 이상 판매했고, 경성지국에 기자만 20여 명이나 파견했다.) 그럴만한 배경이 있었다. 일제는 국민학교에서조차 일어를 쓰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하거나 변소소제를 시켰으며, 무의식중에라도 조선말을 쓰면 점수를 깎는 악독한 수법을 썼다. 그런 일련의 강압적인 일어보급운동으로 1938년엔 전 인구의 12.38퍼센트이던 일어 해독자가 1943년에는 22.15퍼센트로 급증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만약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의 1938년에서 멈추었더라면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그랬다면 히틀러가 비스마르크 이래 독일 최고의 지도자로 추앙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가정이다. 멈춰야할 지점에서 멈추지 못하는 것이 바로 히틀러의 특성이었으며, 이는 일제의 군부지도자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독일 파시즘과 일본 파시즘은 상호작용했다.
연전연승하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1941. 6. 22), 일본군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수도를 장악했으며(1941. 7), 이어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동인도제도를 정복하고자 했다. 미국은 암호를 입수하여 해독하고 이에 대해 일본에 엄중히 경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7월 25일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8월 2일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일본 정부가 미국과 협상하려는 자세를 취하자, 일본 내의 강경파가 들고 일어났다. 10월 도쿄의 호전파는 온건파 수상을 축출하고 군부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樹, 1884~1948)를 내세웠다. 전쟁의 길로 일로매진하겠다는 발악이었다. 절망감으로 이성을 잃은 일제는 도박심리에 빠져 들었고, 이는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나타났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7시 55분,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3일 후(12. 11) 일본의 유럽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소련 침공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고민하던 히틀러도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그야말로 '미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전선과 유럽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으며, 이듬해 1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중국·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대동아공영권(大同亞共榮圈)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크게 강화되었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단어가 처음 공식선상에 등장한 것은 1940년 8월 1일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의 발언을 통해서였다. 그는 "황도(皇道)의 대정신에 따라 먼저 일본(한국 포함)·만주·중국을 그 일환으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을 통해 "공정한 세계평화의 수립에 공헌"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속셈은 당시 독일의 전승으로 유럽에 '신질서'가 건설되면서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에 힘의 공백지대가 생기자 자원확보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도취되기에 충분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개전 2개월여 후인 1942년 2월 16일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으로 일제 환상극은 최고조를 이루었다. 일제는 이 전쟁을 '서양 대 동양' '백인종 대 황인종'의 대결로 몰아갔다. 이 대결구도는 일부 조선인들로부터도 호응을 얻었다. 많은 조선 지식인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노래했다. 이와 관련, 훗날 친일 논란에 대해 박노자는 "우리는 아시아 각 민족의 자립논리를 아시아 인종의 생존 논리에 복속시킨 일제의 어용 이데올로기가 조선의 지성인들을 매료시켰다는 점을 당시 상황에 맞춰 이해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싱가포르 점령 후 일본은 오만해졌을 뿐 아니라 더욱 잔인해졌다. 그러나 잔인하다고 해서 늘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1942년 6월 5일부터 2박 3일간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했다. 미국 전생사가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은 미드웨이 해전을 "해전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항공모함 전투"이자 "서구의 세계 제패에 기여한 9개의 전투"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 해군이 일본군의 암호화된 통신문을 해독한 것이었으며, 그 주역은 슬리퍼와 실내복 차림으로 근무한 해군중령 조셉 로치포트였다. 핸슨은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로치포트와 그의 집단이 누린 개인주의(아울러 미국 군대 내에서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그들의 능력과 자유)는 표현의 자유과 창의성을 강조해온 서구의 오랜 전통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또한 법치, 시장자본주의, 개인적 자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 그와 달리 일본은 …… 철석같은 복종심에만 의존했다. …… 중앙집권적이고 통치이념이 집중화되면 잘 훈련되고 사기가 높은 대규모 군대를 육성할 수 있지만, 이는 수많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집단적 지혜에 의존하는 국민군의 역공 앞에는 취약점을 드러냈다." 핸슨의 주장엔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이 농후하긴 하지만, 일본군이 자율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로봇 같은 전쟁기계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도 1944년 6월 미국 정부로부터 연구를 위촉받아 1946년에 출간한 『국화와 칼: 일본 문화의 패턴』에서 일본인의 무서운 복종심에 주목했다. 가미카제는 일본의 무서운 복종심을 엿볼 수 있는 특공대다. 엽기성의 극치라할 가미카제(神風)가 처음 등장한 건 1944년 10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필리핀 동부 연안의 레이트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였다. 가미카제는 일본군 조종사가 폭탄을 만재한 전투기를 타고 미군의 전함에 부딪침으로써 공격을 수행하는, 일종의 '너 죽고 나 죽자'는 수법이었다. 처음에 미군은 이 수법에 크게 당했거니와 전율을 느꼈다. 패전까지 300여 차례에 걸친 출격으로 죽은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해군 2516명, 육군 1329명이었다.
일본인들의 이런 기이한 복종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알렉스 커(Alex Kerr)는 무엇이건 극단으로 치달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극단주의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외국의 분석가들은 관료주의와 대기업에 복종하도록 훈련된 국민이 일본 산업의 근원이라 우러러 보아왔다"며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제동장치가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단 정책이라는 엔진에 시동이 걸리면, 멈출 수 없는 탱크처럼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멈추는 능력이 없는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일으킨 원흉"이라고 했다. 일본의 극단주의엔 명암(明暗)이 있다. 그건 일본을 동양에서 가장 앞서간 나라로 만들게 한 동력인 동시에 동양, 특히 조선의 민중에게 가장 몹쓸 짓을 하고 '인간 말종'의 작태를 저지르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일본에겐 자신의 극단주의를 통제할 제어력이 없다. 한국이 잘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을 잘 타일러 옳은 길로 가게 하려면 어느 정도의 힘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한국인들이 아직도 내부 갈등과 분열에 가장 큰 에너지를 쏟고 있는 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징병, 징용, 성노예태평양전쟁에 돌입한 지 5개월 만인 1942년 5월 8일 일본 각의는 "조선 동포에 대해 징병제를 시행하고 쇼와(昭和) 19년(1944년)부터 징집할 수 있도록 준비를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1943년 3월 1일에 '징병제'가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친일인사들은 징병제가 식민지인의 자격을 격상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김활란(1899~1970)은 <매일신보>(1943. 8. 7)에 쓴 글에서 " …… 나라를 위하여 불덩이같이 끓는 피와 몸을 통틀어 바쳐 성은(聖恩)에 보답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렸으며 반도 남아의 의기를 보일 기회는 드디어 왔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이며 수천 년 역사 이래 모처럼 보는 거룩한 감격 …… " 이라고 주장했다(김활란은 해방 직전 심한 눈병으로 고생하고 있던 자신을 문병차 찾아온 조카에게 '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닌 죗값'이라 술회했다고 한다).
강만길은 "징병제 실시 이전인 1943년까지, 이른바 학도지원병을 합쳐 약 23만 6000명의 조선 청년이 지원병으로 동원되었고, 징병 제도가 실시된 후 약 20만 명의 조선 청년이 일본의 육해군 현역병으로 징집되어 침략전쟁의 마지막 희생물이 되었다"고 했다. 학생은 본래 징병에서 제외대상이었다. 이들이 항일운동세력으로 전환할까봐 염려한 일제는 곧 뒤이어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 소위 학병제 실시를 공포했다. 이충우는 학병제의 목적을 "조선의 엘리트를 소비재로 내보내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사진, 징병으로 끌려나온 소년병들)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들도 늘어났다. 강제병합 전년도인 1909년 790명이었던 재일 조선인은 1938년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 후 '조선 노무자 내지이주에 관한 건'(1942. 2)이 조선총독부에 하달되고 강제연행이 시행되면서 1944년에는 193만 7000명, 1945년에는 210만 명까지 늘어났다. 징용과 관련하여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하나를 살펴보자. 2006년 10월 25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남태평양 마셜제도의 밀리 환초(環礁, 산호초 섬이 띠 모양으로 연결된 곳)내 첼퐁섬에서 강제동원한 조선인 군속 170여 명을 반란죄로 집단학살한 사실이 61년 만에 일본 정부문서를 통해 확인됐다고 밝혔다. 당시 밀리 환초로 끌려갔다 천우신조로 살아 돌아온 이인신(당시 83세)이 1995년 집필한 수기를 토대로 당시 일제의 만행과 조선인 집단학살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945년 2월 초 첼퐁섬에 있던 조선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일본인을 따라간 동포 한 명이 증발하듯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첼퐁섬엔 일본인 148명과 조선인 군속 184명이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감독관의 눈을 피해 몇 명씩 조를 짜 실종된 조선인을 찾아 나섰지만, 몇날 며칠이 지나도 그 조선인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 어느날 조선인 몇 명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첼퐁섬 인근 무인도를 갔다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광경을 목격했다. 실종된 조선인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허벅지살이 포를 뜬 것처럼 도려내져 있었다. 이들이 더욱 경악한 것은 며칠 전 일본인들이 선심을 쓰듯 건넨 고래고기 때문이었다 …….' 이인신은 인터뷰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인간성을 잃을 수 있는지 몸으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끝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며 몸서리쳤다.
일제는 전쟁 막바지인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대근무령도 발표하였다. 정신대(挺身隊)는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25세 미만의 여자를 여자정신대로 조직하고 1년간 근로 동원하는 것을 의무로 정한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성노동인력을 차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일제는 여자정신대중 일부를 종군 위안부로 만들었다. 군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략 20만 명으로 전체 일본군 위안부의 80~90퍼센트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 위안부들은 '군수품 1호'로 분류되어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 등지의 일본군 주둔지역으로 '수송'돼 일본군의 조직적인 관리하에 운영되는 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전쟁당시 일본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치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 오면 애들을 내팽개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 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 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사진, 연합군에 의해 구출된 위안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