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신성일, 지승호 지음 | 알마
배우 신성일, 시대를 위로하다
신성일, 지승호 지음
알마 / 2009년 5월 / 344쪽 / 12,000원
절박했으므로 홀로 서다
고통과 시련의 청소년기를 건너지승호(이하 지) 어린 시절 얘기부터 좀 해주십시오.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신성일(이하 신) 대구시 중구 인교동 253번지에서 태어났어요. 대구 인교동이라는 데가 서울의 가회동이나 화동, 재동, 계동, 원남동, 원서동 같은 한옥마을입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친정으로 가시게 되어 나는 외가에서 자랐어요. 지금은 어릴 때 기억도 다 없어지고… 해방 직전, 그러니까 1944년에 수창국민학교(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왜정 때 입학한 거죠.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으니까, 2학년 1학기까지 일본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 그 시절엔 어머님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기가 더 힘이 드셨을 텐데요.
신 어머니가 대구의 명문 경북여고 2회 졸업생이고, 당시에 도청에 다니셨어요. 공무원 생활을 하며 박봉으로 우리를 공부시켰어요. 어렵게 공부를 시키신 거죠. 어머니 성함이 연 자 주 자 쓰시는 '김연주'인데, 아주 똑똑하셨어요. 경북도청 초대 부녀계장을 하셨거든요. 어머니는 그 시절 여성으로서 최고의 인텔리겐치아라고 할 수 있어요. 시장부터 대구에 있는 유지들과 교류도 많았고요.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남자 어른은 없었지만 어머니와 교류가 있는 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 길이 올바른 길이다, 저 길은 가지 말아야 한다' 하는 관념을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교육받은 것 같아요.
지 고등학교 이후의 진로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신 1학년 때 보니까 우리 선배들은 모두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했어요. 경북고등학교가 경기고등학교 다음으로 서울대학교 합격률이 좋았어요. 그런 모습을 보니까 아무래도 대학은 서울대학교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서울대학교 외에는 들어갈 생각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와서 나는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경북도청 계장으로 계시면서 사회 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산통(算筒)' 계모임도 하셨어요.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은행의 문턱은 굉장히 높고, 요즘 같은 제2금융, 제3금융, 새마을금고, 사금고 이런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돈을 회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산통, 계모임이었습니다. 아마 대구에서 산통을 제일 크게, 엄청나게 크게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당시 지방 일간지 가운데 유력지였던 《영남일보》사회면에 '과부 산통 계주, 야반도주'라는 머리기사와 함께 어머니 이름이 나온 거예요.
지 아, 산통이 깨진 거군요.
신 깨졌죠. 어머니가 달아나버렸어요. 그다음 날인가 아주 불량한 사람들 서너 명이 집에 들어와서 자는 나를 발로 차며 깨웁디다. 얼굴을 맞고 코피가 터졌는데, 그 꼴로 집에서 도청까지 멱살을 잡혀서 끌려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말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엄마 찾아내라'고 때리는 겁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거죠. 그러고 나서 우리 집에서 쫓겨났어요. 이모네 얹혀살면서 공부를 하게 되었죠. 그러니 공부가 되겠습니까. 지 입시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신 떨어졌죠. 그럭저럭 1년이 지나고, 심심하니까 공부도 안 한 채로 또 서울대학교 문리대 입학시험을 쳐봤어요. 당연히 또 떨어졌죠. 떨어지고 난 다음에 '이제 대학은 진짜 내 형편에 안 된다'고 생각했죠.
뉴 스타 넘버원, 신성일로 다시 태어나다신상옥 감독과 신필림, 영화 인생의 시작
지 앞을 알 수 없는 답답한 때였겠네요.
신 그렇죠. 그날도 '무언가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을 품고 충무로를 걸어가는데, 손시향이라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 〈검은 장갑〉을 부른 친구를 만났어요. 손시향(본명: 손용호)은 학교 동기였는데, 굉장히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인사를 했죠.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이 친구가 "오랜만이야" 하고 어깨를 툭 치고 그냥 지나가버리더군요. 굉장히 섭섭했죠. 가수 됐다고 으스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초라한 삼수생이었으니까 낙오자 아닙니까.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너는 노래 잘 불러서 가수가 되어 출세했구나. 그래, 나는 노래는 못하니까 다른 걸로 성공하겠다' 마음속으로 그랬죠.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꾼, 내 감정을 움직인 큰 사건이 됐습니다.
지 상대방에게는 사소한 일이지만 본인에게는 큰 충격이나 영향을 받는 일들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하시게 됐군요. 신 맞아요. 잘생겼다는 소리는 학교 다닐 때부터 들었으니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OK, 손용호 너는 노래를 잘해, 나는 너보다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으니, 운동해서 몸도 좋으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충무로 1가를 걷고 또 걸었어요. 중부경찰서 앞 골목까지 갔는데 '한국배우전문학원'이라는 간판이 내 눈에 쏙 들어왔어요. 그 길로 학원에 들어갔습니다. 1957년 4월이었죠.
지 김기영, 이진순, 양광남, 김수용, 유현목 등 여러 거장들에게 배우셨다고요.
신 1957년 4월에 입학했습니다. 1957년에는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없었어요. 1958년 중앙대학교에 제일 먼저 생겼을 겁니다. 충무로가 한국의 할리우드였던 시절이죠. 중부경찰서 앞에서 충무로 3가에서부터 4가까지 단성사 쪽이 영화의 거리였죠. 한국배우전문학원에서는 당시 유명한 감독들이 거의 모두 나와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요. 영화 쪽의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감독. 연극 쪽의 이진순 선생, 박진 선생, 또 양광남 강사. 그때 양광남 강사는 갓 미국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들어왔는데, 연극학 석사 학위를 받아 왔어요. 그런데 이분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본 스타니슬랍스키의 『배우수업』, 『언 액터 프리페어스』라는 책자를 장판지 같은 누런 종이에, 손수 인쇄소에 가서 인쇄까지 해서 강의 교재로 썼습니다. 아직까지 그 책을 가지고 있어요. 보물같이 간직하고 있죠. 이분 강의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8월인가 《조선일보》에 신필림에서 신인 배우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 그때 우리 영화계에는 큰 회사가 두 군데 있었어요.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여사가 중심이 된 신필림과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 씨가 중심이 된 선민영화사, 그 두 회사가 우리 영화계의 양대 축이었어요. 광고를 보니 원서를 접수하라는데, 그게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겁니다.
지 예명은 입사하고 받으셨나요?
신 다음 날 신필림에 가서 전속 계약서를 썼어요. 한 달에 5만 환씩 받고 5년 계약을 했지. 내가 1960년에 데뷔했는데 신필림 식구가 되면서부터 매일 신필림 촬영 현장에 나갔습니다. 촬영 현장 견학하는 게 내겐 큰 공부였어요. 말하자면 실전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때 이름도 지어주더라고. 아이디어 '뉴 스타 넘버원'을 풀면, '새로울 신' '스타-별 성' '넘버원-한 일'이죠. 성은 신 감독 성을 따라 '申'을 써서, 신성일(申星一)이 된 겁니다.
지 신필림 작품이기도 한 '신성일'의 데뷔작은 〈로맨스 빠빠〉가 아닌가요?
신 그렇죠. 그러던 차에 〈로맨스 빠빠〉를 하게 됐어요.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해서 영화를 많이 만들었어요. 〈동심초〉라든지 〈청실홍실〉〈현해탄은 알고 있다〉등이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들인데, 그것이 하나의 유행이었어요. 〈로맨스 빠빠〉라는 작품도 라디오 드라마였어요. 많은 식구를 거느린 월급쟁이 아버지가 실업자가 되자 온 가족이 아버지를 위로해주는 홈드라마였죠. 여기에 그 당시 최고의 배우들이 다 출연했어요. 김승호, 주증녀 씨가 아버지 어머니 역을 맡았고, 최은희 여사가 큰누나, 김진규 씨가 그 남편, 다들 톱클레스들이었죠. 또 이빈화 씨. 이빈화 씨 애인에 김석훈 씨, 남궁원 씨, 도금봉, 엄앵란, 주선태, 김희갑이 나오고, 내가 막내아들 역을 했어요. 〈로맨스 빠빠〉가 1960년에 개봉했는데, 내가 국민들한테, 영화 팬들한테 첫선을 보인 날이기도 해요. 이 영화는 명보극장에서 1960년 1월 1일 개봉이 됐어요. 영화배우로 탄생한 날이지요. 1962년에 신필림을 그만두게 되는데, 그때까지 〈상록수〉에 조연으로 잠깐 나온 다음에는 내 작품이 하나도 없어요.
지 회사가 성공했어도, 신인 배우 신성일에게는 작품이 많이 돌아오지 않았네요.
신 작품을 많이 하지 못했어도 이때가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신필림이 엄청난 영화사로 성장하니 신필림 온 식구들이 바쁜 거예요. 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들이 신 감독을 만나 인터뷰하고 평을 써야 하는데 기자들이 감독 만날 틈이 없었죠. 게다가 한운사, 조남사 씨, 각색하는 이상흔 씨, 외부의 김희창 씨 같은 대단한 작가들마저 신 감독과 한번 통화하려면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가 '내가 전화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신상옥 감독 책상머리에 책상을 갖다놓고 전화를 서너 달 이상 받았습니다. 중앙지 최고의 영화 담당 기자, 문화부 기자, 작가, 외부 감독, 신 감독의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데, 그 사람들 목소리를 다 알아듣고 분간했어요.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나의 신필림 시대에 그 이상의 얘기는 없어요.
지 준비 기간을 알차게 보내셨군요. 그럼 배우로서 '기회'라고 할 만한 것은 언제 찾아왔나요?신 1962년,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옵니다.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는 호현찬 씨와 인연을 맺게 되는데, 인연이 깊어졌어요. 그분이 영화 담당 기자 모임의 리더였어요. 그 뒤에는 기획도 하시고 제작도 하셨죠. 내가 추천하시다시피 해서 영화진흥공사 사장도 하셨고요. 그때 라디오 방송에서 굉장히 히트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한운사 선생 원작의 〈아낌없이 주련다〉였어요. 라디오 드라마 〈아낌없이 주련다〉가 장안에 큰 화제가 되자 극동흥업이라는, 한국배우전문학원 바로 옆에 있던 영화사가 제작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획자가 바로 호현찬 씨입니다. 연출은 신상옥 감독과 쌍벽을 이루던 유현목 감독이 맡게 됐어요.
무비스타의 거침없는 질주 거장 감독들과의 만남, 이만희, 하길종, 김기덕, 유현목, 김수용, 정진우
지 어느 인터뷰에서 〈아낌없이 주련다〉가 사실상의 데뷔작이라는 말씀도 하셨잖아요.
신 데뷔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그때 기자들이 신성일의 재탄생이라고 했습니다. 이민자 씨와 연하의 신성일이 작품에서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어요. 딱 맞아떨어진 거죠. 1962년에 개봉한 영화로서는 최고의 화제작이었어요. 내용을 잠깐 설명하면, 주인공 하지송은 피난 내려온 대학생이고, 이 여사는 전쟁미망인입니다. 아들 역을 안성기, 이 여사의 여동생 역을 엄앵란이 맡았죠. 하지송이 그 레스토랑의 지배인으로 들어가요. 이 여사와 하지송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얘기입니다. 사흘 동안 밤을 새워가면서 찍었어요. 전체 작품의 1/4쯤이 레스토랑 신일 겁니다. 엄청난 분량을 촬영했죠. 촬영한 다음에는, 랏슈(러시) 필름으로 기술시사회를 합니다. 녹음도 안 된 상태인 데다가 컷도 안 된 상태의 필름을 그대로 틀어보는 거죠. 극동흥업 차태진 사장이 "오늘 '랏슈' 보는데, 성일아, 거기 안 갈래?" 하기에 "안 가겠습니다"했죠. 말은 안 했지만 겁이 났던 거죠. 러시 필름 시사가 겁이 나요. 왜냐하면 사운드도 없지, 대사도 없지, 배우의 결점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러시 필름입니다. 러시 필름 시사는 배우들한테 연락도 하지 않아요. 감독이 보고는 잘못된 것을 체크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갔다가 나올 동안, 나는 그동안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돌아왔는데 나는 신인 배우니까 거들떠보기나 하나요. 보지도 않지. 그런데 차 사장이 맨 마지막에 오더니 올라오라고 해요. 사장실에 올라갔더니 등을 두들겨주면서, "성일아, 잘했어. 정말정말 잘했어. 잘했어" 하면서 5만 환을 또 주는 겁니다. 5만 환 받아가지고는 을지로 3가에서 가회동 하숙집까지 혼자 걸어갔어요. 완전히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얼마나 흥분하고 들떠 있었는지 몰라요. 지금 생각해보면 꿈같은 얘기죠. 그 뒤에 부산 송도랑 다대포에서 촬영을 했는데, 정말 잘 찍었습니다. 그게 히트해서 내가 살아난 겁니다. 그다음부터는 거침없었어요. 김기덕 감독이 극동흥업의 작품을 거의 다 하다시피 했어요. 그다음이 〈가정교사〉였는데, 원작이 이시자카 요지로라는 일본 대중소설 작가의 소설〈가정교사〉였어요. 여배우로는 엄앵란이 결정되어있더라고. 그러고 〈가정교사〉, 〈김약국의 딸들〉하고, 이것저것 하다가〈맨발의 청춘〉을 해서 크게 히트하고, 그다음에〈떠날 때는 말없이〉등 작품이 마구 쏟아져 나왔지. 〈동백아가씨〉는 그 뒤고, 〈말띠 여대생〉 등 재밌는 작품이 많았어요.
지 〈가정교사〉다음에 어떤 작품을 하셨나요?
신 〈가정교사〉다음에 한양영화사 기획부에서 나하고 엄앵란을 불러다가 〈맨발의 청춘〉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원작은 일본 작품입니다. 한데 엄앵란과 나는 〈맨발의 청춘〉 같은 작품은 한양영화사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앵란과 의논해서 극동흥업에 그 정보를 줬지. 그랬더니 거기서도 급하게 일본에 요청해서 시나리오를 구했죠. 시나리오도 쓰고 각색도 잘하는 서윤성 씨한테 각색을 맡겨서 18일 만에 찍어서 극장에 갖다 붙인 게 〈맨발의 청춘〉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현장에 거의 없었어요. 고영남 감독, 나, 엄앵란 셋이 현장을 만들다시피 했지요. 그렇게 18일 만에 찍어서 아카데미극장에 붙인 겁니다.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 회고록을 보면 처음 아카데미극장을 시작할 때, 부채가 1억 원 있었는데 그 뒤에 〈맨발의 청춘〉이 대히트를 해서 극장 부채를 갚았다고 나와요.
지 출세작 〈맨발의 청춘〉(1964년)은 스타 시스템의 출발점이라는 평을 듣는데요.
신 그렇죠. 스타 시스템이 시작됐죠. 그런 기미는 〈청춘교실〉에서 이미 보였다고 할 수 있어요. 〈청춘교실〉에 엄앵란, 신성일, 최지희, 남미리, 방성자 등 젊은 배우들이 많이 등장했어요. 그러고 난 다음 결정적으로 〈맨발의 청춘〉의 두 주인공이 완전히 작품을 끌고 갔어요. 그러니까 스타 시스템의 정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죠. 그 후로 두 사람이 출연한 작품이 엄청나게 제작되었고, 히트도 합니다. 영화는 스타가 있어야 해요. 스타가 없으면 그 작품이 지루해요. 알랭 들롱이 출연하는 작품을 보면 멋지잖아요. 프랑스의 장 폴 벨몽도, 장 가방 등이 무비스타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비스타가 작품의 주인공이 됨으로써 빛나는 게 있어요. 내가 출연한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작품들이 많죠. 그래서 영화 평론하는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질지도 몰라요. 그래도 나는 무비스타란 말이 좋아요.
'만만한 호스티스'와 함께 추락한 한국 영화통제와 검열의 시대를 살다
지 1960대, 1970년대, 1980년대를 관통해서 영화 작업을 하셨는데요. 시대적 특성이 다른 부분이 있습니까? 신 1970년대에는 영화 제작 편수 자체도 줄었고, 내가 출연한 작품 수도 대폭 줄었습니다. 1976년에는 134편이 제작되었는데, 내 출연작은 7편뿐이에요. 1970년대의 침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잘못된 정부 정책과 검열에 있었다고 봐요. 1970년대 들어와 우리 영화계 전체가 사양길에 접어들자 왕성하게 활동해온 나는 당시 정부의 정책에 대해 굉장히 불만을 갖게 됐어요. 영화인들 사이에 영화 악법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영화법을 바꿔서 자유롭게 누구나 제작할 수 있게 하자는 '영화법 개정'이나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 영화인에게는 없었어요.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앞세워 '의무 제작'을 시켰습니다. 또 수입쿼터 제도는 이권이 엄청나게 개입된 정부 관리 제도였어요. 정부는 연간 외화 수입 한도를 40편으로 제한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르고 골랐기 때문에 외국 작품은 정말 우수한 작품만 들어왔어요. 그런 판에 한국 영화는 계속 엄격한 검열을 당하는 겁니다. 시나리오 검열, 제작 전 사전 검열, 개봉 전 검열까지 삼중으로 검열을 당했으니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어요. 게다가 검열을 부르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어요. 그렇게 영화를 못 찍게 하는 세상이었으니 영화를 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교수도 안 돼, 의사도 안 돼, 변호사도 안 돼, 버스 차장도 안 돼… 그러다 찾아낸 게, 항의할 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안 하는 직업군을 다루게 된 겁니다. 그게 호스티스였던 거죠. 그래서 호스티스 영화가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