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수난사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어머니 수난사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 345쪽 / 13,000원
아들을 낳아야만 대접받는 사회 _ 조선시대 · 개화기어머니가 거느린 '자궁 가족' 조선왕조 500년 유지의 비결로 거론되는 것은 유교적 가족주의다. 그리고 유교적 가족주의를 유지하고 키운 것 중의 하나는 '모성의 제도화'다. '모성의 제도화'가 이루어진 건 조선시대부터였다. 삼국시대의 남녀관계는 비교적 평등했으며, 모계 사회적 요소도 강했다. 이런 가족제도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지만, 고려말에 도입된 주자학이 가부장적 남존여비 사상을 불러들였다. 이는 조선의 남녀관계를 규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핵심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는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여자는 남자 없이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했다. 결혼 전에 아버지, 결혼 후엔 남편, 남편 사망 후나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존하고 사는 걸 미덕으로 삼는 체제하에서 어머니는 그 체제에 순응, 아니 '과잉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경직성을 가장 잘 웅변해주는 과부 재가(再嫁) 금지는 그러한 삼종지도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의 재가 삼가는 흔한 일이었지만, 성종(9대 왕, 1457~1494. 재위 1469~1494) 때에 어머니는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 수절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이는 서얼(庶孼) 차대와 더불어 조선 특유의 발명품이었다. 유교문화를 중국에서 들여왔다지만 중국에도 없는 걸 만들어놓고,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이라 할 실학자들조차 그걸 자랑으로 생각했다. 예컨대, 이수광(1563~1628)은 수절을 '중화의 풍속이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미속(美俗)'으로 손꼽았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 가족은 '정치제도의 일부'였기에, 가부장제와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과부의 재가가 허용된 건 1894년 갑오개혁 때였지만, 그건 명목상의 조치였을 뿐 10여 년이 지나서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럼 조선시대의 어머니들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평생 비참하게만 살았는가?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숨이 막혀서야 어떻게 살 수 있었겠는가. 조선의 유교 체제는 여성 권력과 관련하여 '숨통'을 터줌으로써 체제 유지에 더욱 기여케 하는 이중 구조를 갖고 있었다. 1908년 민적법이 제정되기까지 여자의 이름은 없었고 족보에서도 딸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권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조선시대에 어머니의 권력은 아들을 '큰 사람'으로 만들 때에 획득될 수 있었다(꼭 출세하지 않더라도 어머니는 아들이 장성할수록 집안의 어른으로서 효도를 받고 며느리를 지배하며 응분의 권위를 누렸다). 이와 관련 윤택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들의 어머니 역할은 여성이 남성의 부계 가족에 편입되면서 가장 낮은 지위를 획득하고, 사회적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그 결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성취 중심의 도구적 모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M. 울프는 중국 여성의 삶에 성취적이고 획득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궁 가족(uterine famil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 조한혜정은 "남편 집에 편입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젊은 여성은 점차 자신이 낳은 '핏줄'을 이 집안에 더해감으로써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해간다. … 울프는 여성을 철저히 배제시킨 것으로 보이는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자궁 가족과 공식적 가족의 목표가 '다행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성에게는 일정 기간 어려움을 이겨나가기만 하면 자신의 권력의 기반인 '자궁 가족'을 이룰 수 있으며 그를 통하여 응분의 보상을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의 차원이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을 통해서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어머니들! 이 비밀 아닌 비밀을 알면 한국사회의 많은 고질적 문제들이 규명되고 해명된다. 그런 비극을 낳았던 사회적 조건들은 크게 달라졌지만, 관습은 조건을 뛰어넘는 관성을 갖고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법이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 _ 일제강점기열녀효부(烈女孝婦)에서 현모양처(賢母良妻)로 현모양처 사상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일제의 정책으로 본격 추진되었다. 일제가 공포한 '조선호적령'으로 인해 만들어진 호주제는 현모양처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시대 호주는 집안의 어른이라는 상징적 존재였으나 '조선호적령' 하의 호주는 가족에 대하여 거의 무제한적인 권리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여성의 지위는 현저히 약화되었고 남성에 대한 종속성이 강화되었다. 현모양처는 바로 그런 가부장제 체제하에서 여성의 나아갈 길을 규정한 사상이었다.
홍양희는 일제가 조선 여성에 대한 현모양처 교육을 강조하면서 두 가지 목표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보았다. 첫 번째 목적은 조선 여성을 일제 식민지 국민으로 통합하는 데 있었으며, 두 번째 목적은 서구의 자유주의·사회주의 사상 침투를 차단하기 위한 '대항 이데올로기'로 사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회적으로 요구된 전형적인 여성상은 현모양처가 아니라 열녀효부(烈女孝婦)였다. 일제는 '효' 중심의 유교적 가족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법제화된 가족의 창출, 즉 호주가족을 제도화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가 현모양처의 여성관이었다는 게 홍양희의 주장이다. 현모양처로서의 어머니에게는 '종족'뿐만 아니라, '근대국민'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사회적 국가적 의무가 부과되었으며, 그래서 자녀양육은 물론 교육자로서의 어머니 역할이 중시되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조선과 일본에서의 현모양처 사상에 대한 비교 연구」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쓴 가와모토 아야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현모양처 사상은 교육을 통해 여성의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어느 정도 가능케 하고 국가나 사회의 목적 수행을 위해 여성을 이용하면서도, 여성이 주체성을 가지고 체제를 뒤흔들 만큼의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여, 최종적으로는 여성을 사적 영역, 즉 가정으로 제한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현모양처 사상은 전시와 일본의 대외침략을 수행하는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현모양처론은 '내선일체'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 전부터 여성해방론과 충돌했다. 1914년 나혜석(1896~1948. 1913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이었다)은 "'현모양처'란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한 것"으로 비판했다. 나혜석이 『동명』(1923. 1)에 쓴「모(母)된 감상기」에선 모성애란 모든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교육되는 관념이며 자식을 기르는 동안 가지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현모양처론은 사회주의 여성해방론과도 충돌했다. 김은희는 『삼천리』(1932. 2)에 쓴 「무산부인 운동론」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노동계급의 여성들을 향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현모양처가 되라고 하는 것은 현실과 괴리된 공상이자 기만이라고 비판했다.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모양처는 그것이 마치 전통적인 유교적 가족주의인 양 오해되면서 여성의 미덕으로 칭송받게 된다.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_ 1945~1959년"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 고난의 역사는 어머니를 강하게 만들었다. 한국 어머니 역사에 있어서 6·25 전쟁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6·25 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적 영역을 완전히 불신하고 피붙이의 중요성을 더 실감하게 하여 '자궁 가족'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동시에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어머니의 가치를 체험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강요한 지옥과 같은 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이 전쟁에서 사망자, 부상자, 실종자를 포함한 인명 손실은 3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이나 되었으며,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은 난민이 되었다) 어머니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건 생명의 근원과 연관된 것이 되었다. 억울한 죽음, 수많은 한(恨)이 생성되는 현장에서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또는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외치는 절규의 이름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때론 신비화, 아니 신격화된 존재이기도 했으며 꼭 그래야만 했다. 전쟁의 참상을 누구에게 고발할 것이며 그 참상의 한복판에서 선 두려움을 누구에게 하소연할 것인가? 어머니는 신(神)을 대신해야 했다.
전쟁 중 이렇듯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어머니와 견주어 볼 수 있는 또 하나 여성의 모습은 전후의 미망인들이다. 전후 '군경전사자 혹은 행방불명자의 부인, 민간인 폭사자 혹은 납북자의 부인, 전쟁 후유증으로 사망한 자의 부인' 등이 모두 '전쟁 미망인(未亡人)'으로 불렸다. '미망인'이라는 말은 그 이전부터 사용돼 온 것이지만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아니한 아내'라는 남존여비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런 뜻이 시사하듯이 '미망인'들은 가혹한 고통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생활전선으로 내몰리면서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망인은 50년대 후반 첩이 증가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성적(性的) 이유 때문이었다(과부의 재가 허용은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지만 50년대까지도 이른바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미망인의 타락 가능성만을 염려하는 사회적 담론도 무성하게 일었다. 《서울신문》(1958. 2. 10)은 주택까지 침투하여 번창하고 있는 사창가 윤락여성의 8.2%가 전쟁 미망인이라는 조사 결과를 보도하였다. 이처럼 '사회는 이들 전쟁 미망인의 성적 타락과 방종'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며 경계하고 있었다.
전후 사회가 '전쟁 미망인의 타락을 막아라'고 외쳐대는 선전선동으로 얻고자 했던 건 결국 '강한 어머니'의 탄생이었다. 조한혜정이 지적했듯이,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공격성은 어머니의 역할과 관련되어 나타날 때는 허용되고 또 장려되었으며, 그때 어머니는 여성이라기보다 중성으로 간주되었던 것 같다." 조한혜정은 이문열의 『영웅시대』를 예로 들면서 "남성의 부재는 항상 '일시적'이라고 간주되었고 남성은 상징적 권위로서 가족 구성원의 머릿속에 항상 군림해왔다. 실제로 남성의 권위는 어머니인 여성에 의하여 끊임없이 상기시켰거나 변조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자녀교육에 있어서 아버지의 권위는 어머니에 의해 자주 이용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무슨 낯으로 아버지를 뵙겠느냐?'라든가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집안이다'라는 식의 표현을 통해 집안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지주로서 아버지는 실제적 역할과는 무관하게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즉 남성 부재의 시기를 통해 남자는 더욱 존귀한 존재로 부상되었으며, 남성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직접적인 우월감이 확보되는 부계 혈통 중심의 남성 우월주의는 전혀 약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랬다. '집안의 뼈대'를 돌보고 키우는 건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마지못해 한 일이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긍지를 갖고 한 일이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_ 1960년대
어머니의 '치맛바람' 1960년대에 경제발전이 이루어지고 가족계획이 전투적으로 추진되면서 경제적 상황과 더불어 가족 구성이 달라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어머니의 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조한혜정은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공업 자본주의화 과정을 거치면서 핵가족화는 보편화되고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는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여성은 일터에서 경제 생산에 참여하는 남성 가장을 위하여 가정에 남아 가사노동을 하고 정서적 위안을 주는 아내로, 그리고 '출세할' 자녀를 기르고 교육시키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다.
어머니가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일로매진하게 된 변화상은 1960년대 후반부터 결혼식이 '허례허식의 대명사'가 되어간 것과 궤를 같이 했다. 1969년 3월 7일 '가정의례준칙'이 선포된 것도 바로 그런 변화상을 말해주었다. 결혼식이 '허례허식의 대명사'가 되어간 것과 발을 맞춰 과외공부도 극성을 부렸다. 결혼이나 입시나 모두 집안의 영광과 대외적 과시를 위한 일이라는 점에선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맹렬히 투쟁했는데, 돈을 많이 쓰고 로비도 불사하는 투쟁을 가리켜 '치맛바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치맛바람'은 당시 극성을 부리던 '계(契)바람'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호현찬에 따르면 "남편들의 경제활동에 불만을 느낀 주부들 간에 계라는 사적(私的) 적금 방식이 대유행이었다. 이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힘으로 돈을 만지게 되고 경제권을 갖게 되는 데, 당시에는 이를 '치맛바람'이라고 불렀다. 여성이 경제권을 확보한다는 것은 그만큼 여성의 지위나 발언권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치맛바람은 학교까지 번져 교육계를 혼탁하게 할 만큼 사회문제를 야기했다. 치맛바람, 마침내 여인들의 천하가 되는 시초였다. 이 무렵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코미디, 멜로드라마가 많이 나타났다. 마침내 조선시대 500년 동안 억눌려 왔던 여인들이 자유를 향해 해방되는 세상의 풍속도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각기 양상은 달랐지만, 어머니가 벌이는 전쟁의 치열함엔 빈부격차가 없었다. 1960년대와 7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던 최대의 '인간 승리'는 단연 대학입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영기가 지적했듯이 "대학입시가 끝나면 식당 파출부하면서 자식을 교육시킨 홀어머니의 불어터진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던 '수석입학자'의 모습이 매스컴을 장식했고, 그 감동의 장면은 '성공신화'가 되어 수천만 서민들로 하여금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들었던 것"이다.
모두 다 화려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은 될 수 없었지만 한 집안의 입장에서 보자면 농촌에서 자식을 서울 명문대에 입학시키는 것도 '인간 승리'였다. 물론 그 승리의 과실을 따기까진 겪어야 할 고통이 만만치 않았다. 60년대를 다룬 많은 소설들이 이 점을 비켜가지 않았다. 김윤식과 정호웅은 『한국소설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된 60년대 이래 가장 큰 사회적 변동은 도시로의 인구집중이다. 이를 따라 시골 출신의 머리 좋은 청년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근대화를 주도하는 서구의 합리주의를 교육받고 받아들였다. 그 같은 근대화는 그런데 그들이 떠나온 농촌의 희생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니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었던 것. 여기서 고향에 대한 그들의 죄의식이 싹트는 것은 당연하다. 그 같은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고향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근대화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분열 상태에 운명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향에 대한 죄의식'을 다루는 소설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러나 그건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고 현실은 정반대였다. 고향에 대한 죄의식은 문학 작품에서만 표현될 뿐, 실제로는 우월의식을 만끽하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인간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는 서울이었다. 서울로 몰려드는 줄이 길게 늘어서고 있었다. 이후 농어촌의 자식들은 '우골탑'을 거쳐 서울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서울 중심의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농어촌은 설과 추석에서 자신의 성공적인 변신을 보고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한국인들은 그런 변화를 '사회 발전'으로 자축하게 된다.
그런데 왜 어머니의 교육열만 '치맛바람'이라고 매도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1971년 문교부 소관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공화당 의원 모윤숙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녀는 "치맛바람의 추궁에 앞서 그 원인을 따져야 한다"며 "한국에는 어린애들을 낳을 줄 아는 아버지는 있지만 키울 줄 아는 아버지는 없다. 만약 있다면 나중에 전람회라도 열어 한번 보자"고 했다. 또 그녀는 "부인에게 월사금이나 던져주면 아버지의 일이 끝나는 줄 알고 … 자기 자식의 생일도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의 무관심을 비판하면서 "학교교육에 치맛바람이 아니라 바짓바람이 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어디 자녀교육에서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모든 궂은일은 어머니가 떠맡게 하는 구조를 온존시키거나 강화하면서 그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적 문제의 책임은 어머니들에게만 돌리는 수법은 이후 내내 지속되는 어머니 수난의 역사의 핵심을 구성하게 된다.